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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후보

        明代 法帖의 국내 전래와 수용 양상

        유지복(Yu Ji-bok)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장서각 Vol.0 No.20

        이 논문은 명대 법첩이 조선시대에 전래된 경위와 수용 양상을 파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명대 법첩은 중국은 물론이고 조선시대 서예 발전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王羲之 · 王獻之 父子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二王의 글씨가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지속적인 숭모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각 시기에 따른 명서가의 필적과 서풍의 변화 양상이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명대 법첩이 국내에 들어온 경로에 관해서는 문헌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으나, 대부분 사행을 통해 개인적으로 사들여오거나 사신간의 왕래에 의해 유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명대에 간행된 법첩은 대부분 별 시차 없이 국내에 들어왔으며, 일정 시기에 유행하거나 크게 반향을 일으켰던 국내의 서풍과도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을 통해 당시에 명대 법첩이 국내 서풍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명대 법첩은 초기에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간행 사업을 펼쳐 법첩 간행과 보급이 더욱 촉진되는 바탕을 마련했으며, 이후로는 민간이나 개인에 의해 법첩이 摹刻 · 刊行되기 시작하면서 법첩의 형태도 이에 따라 다양화되었다. 또한 조선의 서예가들은 법첩을 臨書하여 글씨를 익히는 외에 정밀한 臨木을 만들거나 임본을 다시 돌이나 나무에 새겨 글씨를 익히기 위한 학습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법첩 학습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는 이후로 국내 명서가들의 필적만으로 이루어진 법첩이 간행되는 바탕이 되었으며, 이렇게 간행된 국내의 다양한 법첩들은 당시의 학습서로서의 역할은 물론이고 후대의 다양한 서풍이 형성되는 근간이 되었다. This paper has an intention of understanding the background on which Ming period's model calligraphic works albums were introduced into Joseon and the aspects in which they was received. Ming period's model calligraphic works albums have very important meaning in connection with the development of calligraphy in Joseon as well as Chinese dynasties because the albums pertain every aspect of the works of each period's calligraphy masters and the change of calligraphic styles, at the same time, showing the fact that the calligraphic works of Two Wang (Wang Yi Zhi (王羲之) · Wang Xian Zhi (王獻之)), the father and son, had been respected through all periods. As there are not many documentary records about the introduction courses, it is currently impossible to know the detailed context. However, most of albums were purchased through private tours or envoy trips. Ming period's model calligraphic works albums were usually come in without big time difference. They were closely related with Joseon's calligraphic styles that were popular during certain time or created big sensation. Such situations show that Ming period's model calligraphic works albums had influenced significantly on the formation of Joseon's calligraphic styles. In early period, government had pushed forward publication business laying the promotion basis of album publication and diffusion. Thereafter, the types of album became diverse as private individuals copied from and published the albums. Calligraphers of Joseon, besides copying after the albums for training calligraphy, made the copy versions of albums and made out textbooks by engraving the copy versions on stone and wood. Such an aggressive attitude toward album study served as the first step of the album filled with the works of Joseon's own masters. Various albums of domestic masters functioned as textbook as well as played an important role for the appearance of many calligraphic styles in later ages.

      • KCI등재후보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유지복(Yu Ji-bok)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장서각 Vol.0 No.28

        이 글은 서계 박세당(1629~1703)의 필적으로 현재 보물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서계유묵》을 통해 그의 집안의 서풍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박세당은 서예가로서의 명성은 없지만 서화에 대해 상당한 안목을 갖춘 인물이었다. 서계가문이 서화 방면에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아들 박태유·박태보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빼어난 節行과 筆名을 동시에 갖춘 인물로, 서예사적으로는 17세기 후반에 이른바 顔眞卿體를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는 대표적 문인이자 서예가이다. 《서계유묵》은 제자 이정신에게 써준 시문과 간찰이 주요 내용을 이루고, 끝부분에 아들 박태보의 간찰이 몇 점 있다. 이 가운데 박세당의 시문은 모두 양주 수락산에 들어가 은거하던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속세를 벗어난 자연의 삶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있다. 박세당의 글씨는 해서에서는 안진경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행서나 초서에서는 수용의 폭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제한적 경향을 보였다. 17세기 후반의 안진경체 수용 경향과 박태유·박태보의 글씨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즉, ‘충절’과 ‘개혁적 서풍’의 상징성을 띠는 안진경에 대한 역대 문인들의 인식이 17세기 후반에 적극 표출됨으로써, 퇴화의 경향을 보였던 당시의 한호 서풍에 대한 혐오와 이를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조성되었고, 이는 결국 안진경체의 적극적 수용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문인들의 이러한 인식의 바탕과 서예의 질적 전환이 요구되던 시기적 경향이 박태유·박태보 형제의 강직한 성품과 충절, 그리고 탁월한 顔風의 구사에 대한 높은 평가로 이어졌다. This study examined the calligraphic style of a family, through Seogyeyumuk that was written by Seogye (西溪) Bak Sedang (1629~1703) and designated as cultural treasure presently by government. Though not known as calligrapher, he was the owner of expert eye on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It was Bak Taeyu and Bak Taebo, his sons, who made the family receive the spotlight in the field. Famous for good deeds and excellent writings, two sons were the typical literary men and calligraphers of the late 17th Century who were celebrated for leading the so called An Jin Gyeong style (顔眞卿體). Seogye-yumuk consists mainly of the poems and letters Bak Sedang wrote to his pupil Lee Jeongsin. In the last part of it, several letters of Bak Taebo were included. The poems, which are full of the desire for unworldly natural life, were written during the period Bak Sedang retired to Surak Mountain in Yangju. His penmanship accepted An Jin Gyeong by much in the printed writing style but slightly or limitedly in the semicursive and very cursive writing style. The accepting trend of An Jin Gyeong style in the late 17th Century and the penmanship of Bak Taeyu and Bak Taebo could be analyzed as follow: As the recognitions of all time literary men on An Jin Gyeong who was the symbol of ‘loyalty’ and ‘reformative calligraphic ways’ had surfaced aggressively in the late 17th Century, those day’s dislike to and the movement to break from the fading Han Ho style were formed. Such atmosphere resulted in aggressive acceptance of An Jin Gyeong style. The recognition of literary men and the time spirit demanding calligraphy’s qualitative change became the background of high valuation given to the integrity, loyalty and excellent An style penmanship of Bak brothers.

      • KCI등재

        일반논문 : 김인후의 초서와 예술적 성취

        유지복 ( Ji Bok Yu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5 호남문화연구 Vol.0 No.58

        이 논문은 16세기 산림처사였던 河西 金麟厚의 草書를 통해 그의 예술적 지향과성취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 16세기 당시 신진 사림의 등장은 사회·정치적 개혁을 촉발시켰고, 변혁의 흐름은 문화·예술 방면을 자극하였다. 서예에 있어서도 곱고 세련된 외양의 추구에서 벗어나 古法의 원형을 회복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일어났다. 한편, 초서의 경우 己卯名賢이었던 金絿로부터 수용되기 시작한 明代의 개성적 초서풍의 흐름이 김인후에게도 이어졌는데, 김인후에 이르러서는 江蘇省 華亭 출신으로 국내에 큰 영향을 미쳤던 張弼의 적극적 수용으로 나타났다. 김인후의 초서는 16세기 한국서예사에 있어 두 가지 의의가 있다. 첫째는 명대의 개성적 초서풍의 대표격인 장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장필의 과도한 획법을 덜어내어 조선적 초서풍으로 토착화하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三唐詩人이자 서예가로도 명성이 있는 白光勳·白振南 父子의 간결하고 단아한 초서풍의 선구가 된다는 점이다. 이 논문에서는 김인후의 서예작품의 제작배경과 관련하여 2개의 작품 분석에 큰비중을 두었다. 첫 번째 필적은 그의 대표작인 < 草書千字文 >으로, 이 작품이 둘째아들을 위해 쓴 것이라는 기존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첫 손자를 위해 써주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였다. 두 번째는 < 連韻詩帖 >으로, 제작시기를 1549년 봄으로, 초서의 필자는 김인후, 행서의 필자는 鄭士龍으로 추정하였다. 다만, 진위의 근거가 되는 款署가 없으므로 우선 傳稱作으로 比定하는 데 그쳤다. 이를 밝혀줄 후속연구가 필요하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plore the artistic orientation and accomplishments of Haseo Kim In-hu (1510-1560), one of the 16th-century rustic literati of Joseon, through an examination of his cursive style incalligraphy. The appearance of the newly risen literati set off the socio-political reform of the Joseon dynasty, and this change flowed over to stimulate the fields of culture and art. In calligraphy as well, there was a surge toward recovering the original, classical form, free of the pursuit of the refined and the sophisticated. Meanwhile, in the case of cursive style in calligraphy, the current of the distinctive cursive style of Ming dynasty adopted first by Kim Gu, one of the scholars executed during the Purge of 1519, carried over to Kim In-hu. This can be clearly seen in the fact that Kim In-hu actively accepted the calligraphic style of Zhang Bi, who is from Huating,Jiangxu Province, Ming China and exerted great influence in Joseon. The significance of Kim In-hu’s cursive style in 16th-century calligraphic history of Korea is two-fold. First, Kim In-hu actively accepted the cursive style of Zhang Bi, an iconic Ming dynasty calligrapher with a distinctive cursive style on the one hand, but established the foundation for nativizing the cursive style to become more Koreanized on the other hand through the reduction of Zhang’s excessive brush strokes. Second, he was a pioneer of the concise and neat cursive style as represented later by the renowned father-and-son calligraphers Baek Gwang-hun and Baek Jinnam. Baek Gwang-hun is one of the Three Tang-Style Poets of the times. This article focuses on analyzing two of Kim In-hu’s masterpieces in order to understand the background of the production of Kim In-hu’s calligraphic works. The first work analyzed is his representative work, “Thousand-Character Classic in Cursive Style,” which is commonly assumed to have been written for his second son. This article points out the problems in this prevailing view and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this work was written for his first grandson. The second work analyzed is “Collection of Poems with Linked Rhyme,” which this article suggests to have been produced in the spring of 1549 with Kim In-hu writing the cursive style and Jeong Sa-yong the semi-cursive style. This article merely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this work was written by these two writers because of the absence of seals that could have acted as proof of authenticity. A followup study is required to reveal the truth on this matter.

      • KCI등재

        聽蟬 李志定(1588-1650)의 書藝

        柳志福(Yu, Ji-bok) 한국서예학회 2007 서예학연구 Vol.10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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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17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聽蟬 李志定(1588-1650)의 생애와 그의 서풍을 연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지정은 자가 靜吾, 호가 聽蟬이다. 아버지 李尙毅와 어머니 尹晛의 딸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616년 別試文科에 급제하여 義禁府都事를 초임으로 여러 內職을 거쳤으나, 仁祖反正(1623) 이후로 대북세력이 정권에서 축출됨에 따라 주로 외직을 전전하며 安山․永興 등 7곳의 수령을 지냈다. 그는 어려서는 형제들, 그리고 眉叟 許穆(1595-1682)과 함께 蔥山 鄭彦訥(1545-1612)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大東書法≫을 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는 만년에 사위 李烓(1603-1642)의 죄에 연좌되어 1642년(인조 20) 成川府使직에서 파직당한 뒤 知己 李敏求(1589-1670)의 유배지인 충남 牙山에 인접한 鷄頭里라는 곳에 거처하며 이민구와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또한 西湖 가운데 조그만 정자를 짓고 그 편액을 ‘聽蟬’이라 하였으며, 이를 자호로 삼아 翰墨으로 여생을 즐겼다고 한다. 이지정은 17세기 전반에 글씨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서예가이다. 그는 여러 서체 가운데 유독 초서를 좋아했으며, 현전하는 필적도 대부분 초서이다. 그는 明 張弼(1425-1487)을 수용한 孤山 黃耆老(1521-1725이후)의 초서풍을 사숙하여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누구보다도 황기로의 서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황기로의 글씨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극대화시킨 서예가이다. 그의 글씨는 황기로에 비해 필획의 肥瘦의 변화가 두드러지며, 減筆法으로 쓴 간결하고 굳센 필획이 큰 특징을 이룬다. 그의 서풍은 종질인 梅山 李夏鎭(1628-1682), 이하진의 아들 李漵․李瀷 형제, 손녀사위 李命殷(1620-1685) 등에게 이어졌다. 이지정의 글씨는 이들 후손들에 의해 가전되며 새로운 양상을 띠며 변모해갔으며, 李漵에게 서법을 전수받은 南夏行(1697-1781)에 이르러서는 이지정의 서풍뿐만 아니라 전대 초서 명가들의 서풍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지정은 16세기에 형성되었던 황기로의 초서풍을 조선 후기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동시에, 개성적인 필치가 강한 조선 중기의 초서풍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보다 다양하게 전개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서예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지정의 문집이 전하지 않아 그의 생애를 종합적으로 규명하기 어렵고, 필적 역시 적은 수가 남아있어 그의 글씨를 폭넓게 조망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앞으로 더 많은 관련 자료가 발굴되어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길 기대한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 life and calligraphic style of Cheongseon Yi Ji-jeong (李志定, 1588-1650), who was active in the early 17C. Yi Ji-jeong's second name is Jeongo (靜吾) and pen name is Cheongseon (聽蟬). He was born as the fourth son of his father (Yi Sang-eui) and mother (daughter of Yun Hyeon). He passed special state examination in 1616 and has consecutively filled many central government office stating with Uigeumbu Dosa, his first appointment. However, he was expelled from central power along with the northward regime after Injo Revolution then had changed several local posts, including Ansan and Yeongheung, as governor. It is said that he had studied under Jeong Eonnul (1545-1612)'s instruction along with his brothers and Heo Mok (1595-1682) in his childhood. He was known to have written Daedongseobeop, but with no written record for that fact. After he was involved in the crime of son-in-law Yi Gye (1603-1642) and dismissed from the post of Seongcheon district governor in 1642(Injo 20), he had changed close incherchange with his appreciative friend Yi Min-gu (李敏求, 1589-1670) at Gyedu-ri near Asan, Chungnam Province, or his place of exile. Also, he set a small pavilion at the middle of Seoho (西湖) and named it Cheongseon, then enjoyed his remaining years with the same pen name and Calligraphy. Yi Ji-jeong is a prominent calligrapher in the early 17th Century. He showed favoritism for cursive script, as most of his calligraphic specimen are cursive script. He had emulated Hwang Gi-ro (黃耆老, 1521-after 1575)'s cursive script who admired Zhang Bi (1425-1487) of Ming dynasty, establishing his own fame. He had maximized the characteristics of Hwang's calligraphic style after the most earnest study of his works. His calligraphy has more versatile changes in storke width, also has a unique characteristic of concise and strong stroke written by omission stroke. His calligraphic style was handed down to his nephew Yi Ha-jin (1628-1682), his sons Yi Seo․Yi Ik, grandson-in-law Yi Myeong-eun (1620-1685) and so on. His calligraphic style had changed with new aspects, at his descendants' hands. Nam Ha-haeng (1697-1781), who was inherited from Yi Seo, showed at last a combined aspect having not only Yi Ji-jeong's style but also the earlier masters in cursive script. In this respect, Yi Ji-jeong did a bridge role to deliver 16C's Hwang Gi-ro's cursive script to the late Joseon and had a significant effect on that the subjective cursive script of the mid-Joseon could be diversified in the late Joseon. Because his collection of works do not exist currently, his life cannot be examined with comprehensive manner. The number of his calligraphic specimen is unsatisfactory for extensive study. More materials are being expected for further in-depth study.

      • KCI등재

        조선 중기 黃耆老 草書風의 유행

        柳志福(Yu Jibok) 한국미술사학회 2007 美術史學硏究 Vol.- No.253

        이 논고는 黃耆老 草書風의 특징과 후대에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조선 중기의 황기로 초서풍의 전개과정 및 서예사적인 의의를 규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황기로(1521-1575이후)는 16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초서의 명가이다. 그는 14세에 司馬試에 합격하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채 경북 善山의 寶泉灘 언덕에 정자를 짓고 술과 글씨로 평생을 지냈다. 또한 보천탄 언덕을 孤山이라 부르고 정자를 梅鶴亭이라 이름하여 그의 호를 삼았는데, 이는 西湖 孤山에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梅妻鶴子’로 불렸던 북송의 은둔시인 林逋의 처사적 삶을 동경한 데서 온 것이다. 황기로의 초서풍은 唐代에 이른바 ‘狂草’로 불렸던 張旭의 거칠고 호방한 필획과 懷素의 가늘고 유려한 운필을 바탕으로 하면서, 明代에 초서로 이름을 떨쳤던 張弼(1425-1487)의 변형된 획법을 가미하여 독자적인 서풍을 이루었다. 장필을 포함한 명대의 개성적 초서풍은 1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국내에 유입되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국내에 다수의 초서 명가가 속출하였는데, 이 가운데 명대의 개성적 초서풍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가 황기로이다. 황기로의 초서풍은 특히 장필의 초서에서 보인 특징들이 보다 강조된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점획을 과감하게 생략한 減筆法, 획간의 공간을 좁거나 짧게 처리한 속도감 있는 운필, 中錄으로 쓴 맑고 깨끗한 선질은 장필의 초서풍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들이다. 황기로의 초서풍은 16ㆍ17세기에 걸쳐 폭넓게 유행했다. 16세기에 그의 초서풍을 따른 대표적 서예가는 李瑀(1542-1609)이다. 황기로의 사위였던 그는 황기로에게서 매학정을 포함한 모든 유품을 물려받았기에 누구보다 황기로의 글씨를 직접 전수받을 수 있었다. 이밖에 李山海(1538-1609) 역시 황기로의 영향을 받았으며, 吳澐(1540-1617)과 徐益(1542-1587)은 황기로가 주로 활동했던 안동을 포함한 인근 지역에서 그의 서풍을 계승한 대표적 서예가이다. 17세기에 황기로의 초서풍을 수용한 가정 대표적인 예로 여주이씨 星湖家門을 들 수 있다. 이 기운데 李志定(1588-1650)은 성호 가문의 서풍을 개창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그는 역대의 어느 서예가보다 황기로의 초서풍을 가장 핍진하게 구사하였으며, 황기로의 초서에 나타나는 제 특징을 보다 극대화시킨 서예가이다. 이지정의 필법은 종질 李夏鎭(1628-1682)과 그의 아들 李?(1662-1723)에게 이어졌는데, 이들에게 전수된 서풍은 다소 매너리즘화 경향을 보이며 변모되는 양상을 띠었다. 이밖에 전라 지역에서 활동한 宋日中(1632-1717),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金世欽(1649-1720) 역시 황기로의 초서풍을 계승한 17세기의 대표적 서예가이다. 이처럼 황기로의 초서풍은 시기나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 다수의 서예가들에게 그 영향이 이어졌다. 황기로의 초서풍이 유행했던 배경에 관해서는 당시의 書壇이 이미 二王의 전형을 벗어난 서풍을 받아들일 만큼 심미적 취향이 다양화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 황기로의 개인적 삶이 당시 사람들에게 찬탄과 숭모의 대상이 되었던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황기로는 당대 또는 후대의 여러 문사들에게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유유자적 살다 간 처사로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이처럼 황기로의 처사적 삶은 그의 뛰어난 글 솜씨와 함께 당시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를 숭모하던 당ㆍ후대인들에 의해 그의 서풍이 지속적인 유행을 보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황기로의 초서풍은 조선 중기뿐만 아니라 18세기에 이르는 시기까지도 그의 영향이 지속되었다. 이는 그의 초서풍이 후대의 서예가들에게 모방의 대상이자 學書의 규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황기로는 장욱ㆍ회소로부터 시작되어 장필로 이어진 광초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이들을 통해 터득한 서풍을 보다 조선적 미감에 맞는 초서풍으로 발전시켰다. 이로 인해 조선 중기의 서예사에 기왕의 초서와는 구별되는 개성적 초서풍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development and significance of Hwang Gi-ro's cursive script style in the middle Joseon period, by looking into the characteristics and influence on the later ages of his style. Hwang Gi-ro (1521-after 1575) was a master of cursive script active in me early 16th century. Though his ability was so great that he passed Sama examination only at his fourteen, he did not enter the government service but spent life drinking and practicing calligraphy at a pavilion at the Bocheontan riverbank in Seonsan, the Northern Gyeongsang province. He also named me Bocheontan riverbank Gosan and the pavilion Maehakjeong (梅鶴亭, a pavilion of plums and crane), which became his penname. This was derived from his admiration to a recluse-poet of the Northern Song period, Lim Pu (林逋), who planted plum trees and raised cranes at Sihu Gushan (西湖 孤山) in China, thus called "Spousing a Plum and Fathering a Crane." Hwang Gi-ro's cursive script style formed a unique style with based on Chang Wu (張旭)'s wild and broad-minded stroke and Huai Su (懷素)'s fine and smooth brush strokes called ''Wild-cursive Script (狂草)" in the Tang period in China, and by mixing me transformed stroke style of Chang Pi (張弼, 1425-1487), a master of liberal cursive script style in the Ming dynasty. Liberal cursive script style in Ming dynasty was transmitted to Joseon and created a great sensation around the sixteenth century. Upon this, Joseon produced several masters of the cursive script, and among them Hwang Gi-ro was the one who most vigorously developed such calligraphic style. His cursive script style has a tendency to stress the characteristics in Chang Pi's works more than Chang Pi himself. However, omission stroke that omits tittle resolutely, speedy brushing that sizes the space between strokes and clean and pure lines written by centered tip stroking (中鋒) are his unique characteristics clearly different from Chang Pi. Hwang Gi-ro's cursive script style were popular widely through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 Representative calligraphers in the sixteenth century who followed Hwang's cursive script style is Yi U (1542-1609). Being the son-in-law of Hwang Gi-ro, he inherited Hwang's calligraphy better than others, along with articles and Maehakjeong. Besides, Yi San-hae (1538-1609) was also influenced by Hwang, O Un (1540-1617) and Seo Ik (1542-1587) were typical calligraphers who inherited Hwang's style in the area around Andong where Hwang was mainly active. In the seventeenth century, the representative case of accepting Hwang Gi-ro's cursive script style is Yeju Yi's Seongho family. Among them, Yi Ji-jeong (1588-1650) is regarded as a reformer in Seongho family's calligraphic style. He adopted Hwang Gi-ro's cursive script style better than any other calligraphers in successive generations. maximizing the characters of Hwang's style. Yi Ji-jeong's stroke technique was handed down to his nephew Yi Ha-jin (1628-1682) and his son Yi Seo (1622-1723), but they showed some mannerism. Song Il-jung (1632-1717) in the Jeolla province and Kim Se-heum (1649-1720) in Andong were also the seventeenth century calligraphers in the school of Hwang Gi-ro. Hwang Gi-ro's cursive script style influenced on many calligraphers. The popularity of Hwang Gi-ro's cursive script style was made possible by the fact that Joseon's calligraphy at the time was so diversified in aesthetic taste to accept many other trends than two Wang's. Also, Hwang's personal life became me subject of admiration for people at the time. Hwang Gi-ro was highly esteemed by many literati people as a hermit who lived free from worldly cares not coveting secular honor and interest. Along with his excellent writings, his script style seems to have kept up in vogue. Hwang Gi-ro's cursive script style had influenced even the calligraphers of the eighteenth century. His style was treated as a model for later generations and a norm of scholarly calli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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