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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초 복용에 의한 저칼륨마비와 횡문근융해가 병발한 1예

        홍현일,한군희,황정원,김영돈,심명숙,김진엽 대한내분비학회 2005 Endocrinology and metabolism Vol.20 No.2

        Prolonged ingestion of licorice can cause hypermineralocorticoidism, with sodium retention, potassium loss and hypertension. Nevertheless, its initial presentation with a very severe degree of hypokalemic paralysis and rhabdomyolysis are exceedingly rare. We describe a patient who experienced hypokalemic paralysis and rhabdomyolysis after licorice ingestion. The patient’s initial blood pressure was 160/80mmHg. The major biochemical abnormalities included; hypokalemia(K+ 1.3mEq/L), metabolic alkalosis, with a pH of 7.64, and urine myoglobin > 3000ng/mL. The plasma rennin activity and aldosterone level were suppressed. The 24 hour urine cortisol concentration was normal. The patients, over a 1 month period, had ingested 500g of licorice boiled in water. After quitting the licorice, the hypokalemia and muscle paralysis gradually improved and blood pressure returned to normal 감초 복용은 이차성 고혈압과 저칼륨증의 원인 중 하나이며 증상으로 저칼륨 마비와 횡문근융해로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저자 등은 81세 여자 환자가 장기간 소량의 감초를 복용한 후 저칼륨 마비와 횡문근융해로 내원하여 감초의 주성분인 glycyrrhizic acid에 의한 AME syndrome을 진단하고 치료한 1예를 경험하였기에 문헌 고찰과 함께 보고하는 바이다.

      • KCI등재

        조선 후반기 경복궁의 관리와 운영 연구 - 고종 대 중건 이전을 중심으로 -

        홍현 한국건축역사학회 2024 건축역사연구 Vol.33 No.1

        경복궁은 조선 건국과 함께 창건된 궁궐로 태종, 세 종, 세조를 거치면서 법궁(法宮)으로 위상을 갖췄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를 시작으로 여러 국왕은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국 270 년간 중건하지 못하였다. 경복궁의 공지(空地)에는 내농포(內農圃)가 들어섰으 며, 때에 따라 군사훈련을 하거나 왕실의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소실 이후 경복궁에는 전각터를 비롯하여 궁성(宮城) 과 궁성문(宮城門), 수계(水系)와 천문 관련 시설 등이 남아 있었는데, 그중 궁성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로 유지 관리되었다. 궁성문에는 돌을 쌓아 출입을 막았으나, 광화문 동협문에는 경복궁의 관리를 위해 별 도의 문을 두어 출입하도록 했다. 경복궁의 수계시설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祈雨)를 위해 정비되었으며, 영조 대에 들어 물이 잘 흐를 수 있 도록 준천(濬川)되었다. 이외에도 간의대(簡儀臺), 소간 의대(小簡儀臺) 등의 천문 관련 시설이 남아 있었으며,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이 발견 되어 관상감(觀象監)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광화문 밖에 남아 있던 세조 대 제작된 동종(銅鐘)은 종각을 세워 보 호하였다. 경복궁의 수비와 관리를 위하여 공궐위장(空闕衛將) 과 수궁내관(守宮內官)이 경복궁 내에 위치한 위장소와 수궁에 상주하였으며, 매일 포도청과 삼군문이 경복궁 외부를 순라(巡邏)하였다. 이러한 인력을 통한 관리와 함께 난입과 벌목, 내맥(來脈)의 굴토(掘土)를 금지하는 금령(禁令)이 마련되었으며, 이를 어기는 경우 처벌하였 다. 이러한 경복궁의 관리와 함께 근정전, 사정전, 강녕 전, 경회루 등의 전각터에서는 선대왕의 고사를 바탕으 로 왕실행사가 계속되었다. 현종 대 강녕전 터에서는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종묘 부묘(?廟)를 위한 제주(題柱)가 행해졌으며, 숙종은 경 복궁 신무문 밖에서 행해지는 회맹제(會盟祭)를 위해 경복궁에 친림하였는데, 이러한 회맹제 때 국왕이 경복 궁을 찾는 것은 이후 경종과 영조 대까지 이어졌다. 숙 종은 회맹제 외에도 세조 대 경회루에서 행해진 양로연 (養老宴)의 고사를 따라 노인연(老人宴)을 열었다. 영조는 회맹제를 시작으로 숙빈 최씨 사당의 전배(展 拜)와 관련하여 경복궁에 친림하였다. 이와 함께 경복궁 에서 과거시험을 열었으며, 친잠례(親蠶禮), 진작(進爵), 조참(朝參) 등을 행하였다. 영조 대 친잠단과 문소전 터에 세워진 어필비는 영조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관리되었으며, 문소전구기비의 경 우 이후 국왕들이 지속적으로 전배하였다. 또 경복궁은 춘당대(春塘臺)와 함께 정시(庭試) 과장(科場)으로 정해 졌기 때문에 철종 때까지 정시가 계속 열렸다. 경복궁 신무문 밖 공지에서도 회맹제(會盟祭)와 군사 의례가 행해졌다. 영조 대 육상궁(毓祥宮)과 연호궁(延祜宮) 등의 사묘(祠廟)가 건립되고, 인원황후의 탄생지 인 양정재(養正齋)가 어필 봉안처가 됨에 따라 소란스 럽게 행해진 신조기휘제(新造旗麾祭), 호궤(胡?) 등의 군사의례는 한양 내 다른 곳으로 옮겨져 행해졌다. 경복궁 중건을 위한 기초자료로써 문헌에 기록된 소 실 이전의 경복궁 전각배치와 중건 초기 경복궁 내의 수계와 내맥 등이 반영된 다양한 <경복궁도>가 제작되 었다. 고종 대 경복궁 중건은 경복궁 내부 청소를 시작으로 수계와 내맥이 정비되었다. 우선 경회루지와 후원지를 준척(濬滌)하였으며, 준척에서 나온 흙으로 내맥을 보토 하였다. 이와 함께 경회루지의 제방(堤防)과 첨계(?階), 섬 등은 개축(改築)되었다. 수로 역시 정비되었는데 기 존에 관리되던 수문은 시설의 변화 없이 단순히 준천만 하였지만 관리되지 못한 수로와 수문은 새롭게 고쳐 쌓 았다. 경복궁 공지를 차지하고 있던 내농포와 궁성 밑 민가 들은 한양 곳곳으로 옮겨졌으며, 어필비각과 위장소와 수궁 역시 훼철되었다. 간의대와 소간의대를 훼철한 후 나온 석재는 경회루 첨계, 건춘문 지대석, 근정전 품계 석 등에 재사용되었으며, 광화문 밖 동종 역시 녹여 향 로와 토수(吐首) 등을 제작하였다. 신무문 북쪽 지역은 중건과 함께 경복궁 후원으로 포 함된다. 이에 따라 육상궁 동쪽에 담장을 쌓으면서 후원 안에 위치하게 된 연호궁은 창의궁(彰義宮)으로 이봉 (移奉)되었으며, 양정재는 영조와 정조의 어필 봉안처로 서 경복궁 후원에 남게 되었다. 경복궁 중건과 함께 궁성과 궁성문, 주요 전각터 등 은 훼철 후 다시 지어졌지만, 그 규모와 배치는 크게 바 뀌지 않았다. 다만 강녕전과 사정전 사이에 행각이 건설 되어 강녕전 전면 좌우 건물의 위치와 명칭에 변화가 있었다. 광화문과 강녕전에는 다른 궁궐과 같이 월대를 새롭게 쌓았으며, 경회루와 근정전, 광화문 월대에는 난 간이 새롭게 세워졌다. 이와 같이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270년간 중건되지 못하였지만, 경복궁의 관리를 위해 조직과 법 령이 마련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경복궁은 유지관리 되 었다. 이러한 관리를 바탕으로 유지된 경복궁에서는 왕 실행사가 행해졌으며, 이로써 법궁으로서의 상징성이 유지되었다. 문헌과 중건 초기상황이 반영된 <경복궁도>는 고종 대 경복궁 중건의 기초자료로 쓰였다. 경복궁 중건에서 내부를 점유하고 있던 시설들은 훼철되거나 자재로 재 사용되었다. 경복궁 내 남아 있던 전각터를 바탕으로 전 각이 중건되었으며, 경복궁 궁역이 신무문 밖까지 확대 되었다. 중건 경복궁에는 270년간 궁궐 건축 변화가 적 용되었으며, 월대의 난간과 같은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 기도 하였다.

      • KCI등재

        「경복궁도」 제작 시기와 배경 연구

        홍현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건축역사연구 Vol.32 No.4

        Gyeongbokgungdo depicts the composition and layout of Gyeongbokgung Palace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s well as a monument related to pro-jamrye held at the site of Gyeongbokgung Palace in Yeongjo. Based on literature such as Dongguk Yeoji Seungram, such as Gyeongbokgungdo painted major buildings, government offices, and buildings in the backyard. In addition, the literature and the foot of the mountain, waterway, and Pond, which were identified as the site identified during the reconstruction process, are reflected, and some of the Gyeongbokgungdo contain reconstruction records. As such, Gyeongbokgungdo depicts Gyeongbokgung Palac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facilities built after the Imjin War based on the literature, and seems to have been produced around the time of reconstruction as it reflects the mountain and water system. In addition, the layout of the main hall of Gyeongbokgungdo was partially reflected in the reconstructed Gyeongbokgung Palace and used as a material to understand the layout of Gyeongbokgung Palac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임진왜란 이전 경복궁 모습을 추정하는 그림은 여러 차례 그려졌다. 이렇게 제작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경복궁도」는 총 12점으로 임진왜란 이전 경복궁 건물 구성과 배치를 묘사하고 있으며, 영조 대 경복궁터에서 열린 친잠례와 관련하여 채상대와 정해친잠비도 함께 그려져 있다. 친잠례 관련 시설과 함께 간의대, 소간의대 등 천문관련 시설과 수문, 수로 등 수계와 산록 역시 대부분 「경복궁도」에 표현되어 있다. 지금까지 「경복궁도」의 제작 시기는 「경복궁도」에 표현된 친잠례 관련 시설에 따라 대체로 영조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경복궁도」 건물 배치와 구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그려졌으며, 특히 임진왜란 이후 각종 행사를 통하여 계속해서 관리된 근정전, 강녕전, 경회루 등은 대부분「경복궁도」에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 천추전, 연은전을 비롯하여 궐내각사나 후원 건물들은 「경복궁도」별로 차이를 보인다. 「경복궁도」에서 표현된 것 중 문헌과 차이를 보이는 것이 있는데 바로 궁성 규모로 「경복궁도」에 기록된 궁성 규모는 실제 경복궁 규모와 유사하다. 이와 함께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산록과 수문, 수로 등 수계 관련 시설은 경복궁 중건 당시 상황과 상당히 일치하여 중건 당시 경복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일부 「경복궁도」에는 중건 일정 및 중건 당시 궁성 밑 민가 훼철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대부분 「경복궁도」는 중건 무렵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조선 전기 주요 건물의 배치가 그려졌으며, 중건 당시 경복궁의 상황을 반영하여 산록과 수계 등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경복궁 중건 당시 소실 이전 경복궁 건물 배치를 이해하는 자료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KCI등재

        선택적 이산화탄소 포집을 위한 KOH 첨착활성탄 제조연구

        홍현의,Adedeji Adebukola Adelodun,조영민 한국냄새환경학회 2013 실내환경 및 냄새 학회지 Vol.12 No.4

        본 연구의 목적은 활성탄의 CO2 흡착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화학적 전처리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과 이론이 존재하지만 이번 연구에서는 아미노화와 분해를 비교하여 흡착능을 비교하기로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4가지 유형의 활성탄 입자를 원료 물질과 크기에 따라 준비하였고, 수산화칼륨으로 전처리하여 열처리 및 아민화과정을 거 친 후, CO2 흡착능을 비교 평가하였다. 실험결과, 단순 열처리과정만 적용할 때는 600℃ 가 가장 우수하였고, 800℃에서 아민화시킨 시료가 1.4 mmol/g의 가장 좋은 흡착능을 보 였다. 400~600℃에서 아민화를 시킨 시료는 처리온도와 비례하는 선택도를 보여주었다. 분해시간 또한 흡착능과 정비례하는 관계가 나타났다. This study attempted to gain improvement of CO2 adsorption capability of activated carbon (AC). Four types of AC pellets based on carbon type and size were prepared with calcination and amination after KOH pretreatment, and examined in CO2 adsorption amount. Experimental results showed that calcination at 600℃ and amination at 800℃ of KOH-doped AC were the most suitable treatment temperature to achieve the enhanced adsorption capacity, 1.4 mmol/g. With amination between 400 and 600℃, the adsorption selectivity for CO2 increased with increasing temperature. It also was observed that the heat-treatment time would be directly proportional to the adsorption efficiency.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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