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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對馬藩 소멸 과정과 한일관계사

        현명철 동북아역사재단 2013 東北亞歷史論叢 Vol.- No.41

        근세(조선 후기)의 한일 외교 관계는 敵禮를 기본 원리로 하는 대등하고 공식적인 외교관계였다. 이 외교 관계는 기유약조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조선은 對馬藩을 완충지역으로 통제 하에 두기 위하여 특별한 대우를 허락하여 왜관을 열어주고 세견선을 통한 공작미와 공목을 지급하였다. 왜관은 대마도인을 접대하는 장소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마도에서 보내는 세견선과 비선, 그리고 표류민 송환선 등이 부단히 들어오는 장소였다. 이러한 독점적 지위는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圖書)를 사용한 路引발급권, 그리고 세견선에 관한 규정을 통해 법제적으로 확보되었던 것이다. 막부말기 대마번에서는 이봉운동과 양이정권의 성립, 그리고 원조요구 운동 등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대마번은 위의 도서 사용과 세견선 무역을 일본의 치욕이라고 언급하게 된다. 따라서 메이지 정부가 성립하고 난 후, 외교 개혁 즉 도서를 사용하지 않고 세견선을 파견하지 않는 외교 관계의 수립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이는 대마번을 조선의 통제 하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지만, 하지만 이는 대마번의 독점적 이윤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므로, 대마번이 쉽게 응하지는 않았으며, 조선정부도 기존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결국 대마번은 메이지 정부에 대해서는 외교 개혁을 주장하면서 원조를 요구하고, 조선에 대해서는 세견선을 파견하면서 기득이권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또한 메이지 정부도 왜관을 그들의 조계지로 사용하기를 원하였다. 본 논문은 대마번의 소멸 과정과 한일관계의 변화를 살펴본 것이다. 대마번의 소멸은 법제적으로는 1871년의 폐번치현이지만, 대마도인들이 왜관을 떠나는 것은 1872년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1872년까지 한일관계사를 살펴본다. 특히 이 연구는 『동래부계록』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기존의 연구를 재검토 할 수 있었으며, 기존의 연구 성과와는 매우 다른 역사상을 그려낼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 외무성 기록이 정치적 선전이 많음으로 사료 비판이 필요함을 입증하고, 앞으로의 연구가 필요한 부분을 지적하고자 하였다. Joseon and the Tokugawa Bakufu established equal and official diplomatic relations. These relations were regulated by the Giyu Agreement of 1609 (己酉). Joseon wanted to keep Tsushima domain under control as a buffer, and Joseon opened a port for a Japan House (K. Waegwan 倭館) in Pusan and gave rice and cotton to Tsushima. The Japan House was a reception place and trade zone for Tsushima, and the boats of Tsushima sailed into the Japan House’s port for rice. This monopoly status was enabled because Joseon gave a seal (圖書) to Tsushima. Tsushima could compose a license (路引) which allowed port entry when this seal was affixed. In the late Edo period, Tsushima petitioned for subinfeudation, and men who sought the exclusion of foreigners seized power in Tsushima and demanded economic aid. During this process, Tsushima remarked that the Tsushima-Joseon relations were a humiliation of Japan. Accordingly, the Meiji government wanted to reform relations with Joseon. This meant that Tsushima would be beyond the control of Joseon, and that Tsushima could not receive rice from Joseon nor use the trade zone of the Japan House. Thus, Tsushima wanted to be paid greatly for this. But Joseon wanted to maintain the existing relationship. Tsushima on the one hand insisted upon diplomatic reforms to the Meiji government, and on the other hand upon becoming a buffer of Joseon receiving rice and usingthe trade area of the Japan House. The Meiji government wanted the Japan House as a concession. This article examines the process of passing Tsushima domain and the Joseon-Japan relations. The passing of Tsushima domain was due to the abolition of the domains (廢藩置縣) in 1871, but Tsushima men were ordered to leave the Japan House in 1872. Thus this article investigates the political history of Tsushima and Joseon-Japan relations until 1872. I use the Korean document “Report of Tongnae-bu”(東萊府 啓錄) to reexamine existing research and to offer different explanations of the facts. And this article asks whether the Japanese material about the Japan House reflects a political agenda and not the truth.

      • KCI등재

        기유약조체제의 붕괴 과정에 대하여

        현명철(玄明喆) 한일관계사학회 2016 한일관계사연구 Vol.54 No.-

        기유약조 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조선의 외교 능력과 동래부의 교섭 태도에 대한 철저한 멸시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메이지 일본이 우호를 요청하였으나 쇄국을 고집하는 조선이 사소한 자구를 문제삼아 거절을 반복’하였다는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모든 외교적 갈등을 조선의 책임으로 돌렸다. 본고에서는 동래부에 시점을 두고 출입국 선박에 대한 문정과 동래부의 보고를 토대로 연표를 작성하여 기유약조 체제의 붕괴 과정을 복원해 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대수대차사 서계의 수리 하나만을 둘러싸고 공방이 지속되었던 것은 아니며 일본 내부의 변화에 따라 대마주의 태도가 변하였으며 외교적 쟁점도 변화하였다. 둘째, 대수대차사의 서계는 즉시 조정에 보고되었으며 1개월 만에 조정의 지시에 따라 거부된다. 따라서 훈도가 문정 시에 바로 거부하였다거나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셋째, 그 후 대마주에서 신인(新印)을 사용한 서계와 노인을 지참한 선박을 도항시켰을 때, 동래부는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이에 대마주는 비선을 통해 관례에 따른 수정된 서계와 노인을 가지고 옴으로써 20일 만에 해결된다. 넷째, 판적봉환 이후 태정관 지령으로 세견선과 문인 발급권을 다시 확보하게 된 대마주는 ‘좌근위소장 평조신 의달’의 명칭을 고집하여 다시 문제를 일으킨다. 이 문제 역시 4개월 여 만에 해결되며 ‘좌근위소장’은 인정, ‘조신’의 사용은 불인정으로 타협을 보게 된다. 이때 조선은 막부의 멸망을 인정하여 諱字를 논의하고 있음은 주목된다. 다섯째, 외무성 관리들이 20여 일 간 왜관에 머물고 침한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막부 말기 이래의 침한론의 연장이며, 조선이 거절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이 절교하려는 뜻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침한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조선이 병인양요 이후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었기 때문임은 강조되어야 한다. 여섯째, 일본 외무성의 외교 일원화 정책이 가시화됨에 따라 왜관의 대관소를 중심으로 저항이 있었다. 이 때 동래부는 대마주를 통한 무역·외교를 희망하는 서한을 외무성에 발송하는 등 대마주를 지원하였다. 일곱째, 일본은 폐번치현 후, 前대마도주 종의달을 외무대승에 임명하여 서계를 보내었고 동래부는 즉시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때 관수와 차사가 난출을 하였고, 훈도는 이 수문장과 설문장에게 명하여 문을 열어주어 직접 교섭의 실마리를 열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관소의 상인들과 동래부의 상고들의 저항으로 결국 동래부사는 서두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면접을 하지 않았다. 여덟째, 외무성 관원들이 돌아가고 왜관에 대마도인들만 남게 된 상황에서 동래부사는 왜관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였으며, 왜관에서는 앞으로 3년간은 대마 상인을 통한 무역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합의가 성립되었다. 마지막으로 아홉째, 외무대승 하나부사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동래부사와 대등한 지위임을 과시하면서 입항하였고, 대관소를 철수시켰으며 기유약조의 붕괴를 가시화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역의 유지와 외교의 유지를 언명하고 표류민을 송환하였으며 조선이 준 도서를 사용한 노인(입항증명서)을 지참시킨 선박을 왕래시킴으로 조선의 국법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기유약조 붕괴 이후에도 물밑 교섭을 가능하게 하였다.

      • KCI등재

        Radiofrequency catheter ablation of atrioventricular nodal reentry tachycardia in children and adolescents: a single center experience

        현명철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2017 Clinical and Experimental Pediatrics (CEP) Vol.60 No.12

        Purpose: Atrioventricular nodal reentry tachycardia (AVNRT) is less common in pediatric patients than in adult patients. Thus, data for pediatric AVNRT patients are insufficient. Hence, we aimed to analyze the patient characteristics, treatment, and any recurrences in pediatric AVNRT patients. Methods: We reviewed the records of 50 pediatric AVNRT patients who had undergone radiofrequency catheter ablation (RFCA) between January 1998 and December 2016 at a single regional center. The patients were aged ≤18 years. Results: Among 190 pediatric patients who underwent RFCA for tachyarrhythmia, 50 (26.3%; mean age, 13.4±2.6 years) were diagnosed as having AVNRT by electrophysiological study. Twenty-five patients (25 of 50, 50%) were male. Twenty patients (20 of 50, 40%) used beta-blockers before RFCA. All patients had no structural heart disease except 1 patient with valvular aortic stenosis and coarctation of the aorta. RFCA was performed using the anatomic approach under fluoroscopic guidance. The most common successfully ablated region was the midseptal region (25 of 50, 50%). Slow pathway (SP) ablation and SP modulation were performed in 43 and 6 patients, respectively. Complication occurred in 1 patient with complete atrioventricular block. During follow-up, 6 patients had recurrence of supraventricular tachycardia, as confirmed by electrocardiography. Among them, 5 underwent successful ablation at the first procedure. In 1 patient, induction failed during the first procedure. Conclusion: RFCA is safe and effective in pediatric AVNRT patients. However, further research is needed for establishing the endpoints of ablation in pediatric AVNRT patients and for identifying risk factors by evaluating data on AVNRT recurrence after RFCA.

      • KCI등재

        한ㆍ일 역사 갈등의 뿌리를 찾아서

        현명철(玄明喆) 한일관계사학회 2011 한일관계사연구 Vol.40 No.-

        본고는 한ㆍ일간의 역사 갈등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밝히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기유약조를 통해 형성되었던 조선후기 대등-교린의 한일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게 되는 일본의 정치적 변화를, ‘정한론’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과 국제정치학의 영향을 받아 합리화되어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근대 일본에서 역사관 만국대치의 국제법정 싸움을 위한 선전과 근거자료의 확보였다. 따라서 역사왜곡이 발생하게 됨은 피할 수 없었다. 근대 일본은 독자적 국체를 강조하여 국민을 맹신에 빠뜨리고 타국을 무시한 독선주의와 편협한 우월사상을 확대 재생산 하였다. 총독부 간행의 조선사 교재 즉,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제』와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제 교수참고서』의 기술은 이러한 왜곡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따라서 총독부 간행의 교과서를 분석하는 것은 현재 나타나는 역사 갈등의 뿌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으며, 또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앞으로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할 부분을 제안할 수 있다.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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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복성 혈뇨(IgA 신병증 및 non-IgA 신병증)와 알레르기성 자반증 신염의 면역지표의 변동에 관하여

        현명철,고철우,구자훈 慶北大學校 醫科大學 1991 慶北醫大誌 Vol.32 No.1

        A prospective study was conducted to see the changes of immune system in recurrent gross hematuria(IgA nephropathy and non-IgA nephropathy) and HSP nephritis in children. Study patients consisted of 60 children with recurrent gross hematuria and Henoch-Scho¨nlein purpura nephritis (8 IgA nephropathy, 24 non-IgA nephropathy and 28 HSP nephritis). The cellular immune indices(total T, T4, T8 cells and T4/T8 ratio) and humoral immune indices (IgG, A, M and E) were measured during the hematuric and non-hematuric period. Following results were obtained. The proportion of T4 cells of peripheral blood during the hematuric period of patients with IgA nephropathy rose to 35.4±14.9% from the non-hematuric value of 20.0±9.1%. The T4/T8 ratio during hematuric period of patients with IgA nephropathy rose to 1.51±0.77 from non-hematuric value of 0.73±0.33. The values of serum IgA and IgE during hematuric period of patients with IgA nephropathy rose to 237±106 ㎎/dl, 231±226 IU/dl from non-hematuric values of 140±10, 28±23, respectively. These changes of cellular and humoral immune indices showed statistically significant differences(p<0.05). However, these changes were not found in patients with non-IgA nephropathy nor HSP nephritis. In conclusion, it can be said that the immune mechanism involved in IgA nephropathy is different from that of HSP nephritis.

      • KCI등재

        메이지 초기 송환 표류민 사례 연구

        현명철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8 한국학논총 Vol.50 No.-

        In this paper, I analyzed the 40 cases about 252 castaway who repatriated from Japan to Korea from 1869 to 1873. As a result, We can highlight the following points. First, to introducing the steadily repatriated castaway even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Meiji regime, will be a basis for properly criticizing the myth that diplomatic disconnection was in progress. Second, till September 1872, when the Meiji government collapsed the existing diplomatic system between Korea and Japan, the repatriating castaway was carried out according to the traditional practice by officer who return drifter[漂民領來差倭] with Rental vessel[駕船=借倭船]. Third, after the collapse of the traditional Korean - Japanese diplomatic system, repatriation through Flying boat[飛船] without by officer who return drifter[漂民領來差倭] takes place. Fourth, I introduced the flow chart of drifting through the castaways' statement. And the average number of being repatriated people is estimated to be about 8vessel, 50 people per year. And 19 cases of Jeju Province, 9 cases of Jeolla Province, and 10 cases of Gyeongsang Province. In addition, it can introduce that large ship was mainly engaged in marine rental business or commercial. For further research, it is necessary to translate the drifting statements into a database. Through this, we can understand the acquisition of information through drifting, contents of ship rent and commerce, and course. I think that it can reveal the trend of the price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one side of marine commerce. 본고는 메이지 초기 한일관계사를 재조명하려는 작업의 일환으로 메이지 초기 표류민 송환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변화하는지 실제 사례를 통해 소개하고 표류의 여러 모습을 복원함을 목적으로 한다. 2장에서는 1869년에서 1873년에 이르기까지 5년간 송환된 표류민 40건 252명의 사례를 소개하였다. 이 소개를 통해 대수대차사 서계가 거절되는 상황에서도 세견선과 표류민선이 꾸준히 입항하고 있음을 실증하고 서계 수리의 거부로 말미암아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기존의 단순한 이해가 잘못된 것임을 부각하였다. 3장에서는 다음 사항을 부각시켰다고 생각한다. 메이지 정부가 대마주의 외교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기존의 한일외교시스템을 붕괴시키는 1872년 9월까지의 표류민 송환은 전통적 관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 이후에는 비선 노인(路引-입항증명서)을 소지한 선박을 통해 표류민이 송환되고 있음을 입증하였다. 이는 ‘왜관접수’혹은 ‘왜관침탈’로 알려진 기존 한일외교 시스템 붕괴 이후에도 외교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동래부 역시 접대를 중지하였을 뿐 외교 단절을 표명하지 않았으며 왜관의 시설을 수리해 주고 입항 선박에 대한 문정과 출항 선박에 대한 노문(路文-출항증명서)발급에는 변화가 없었다. 4장은 해양학에 첫발을 내딛은 필자의 새로운 시도이다. 우선 송환된 표류민의 진술을 토대로 표류의 흐름도를 소개하였다. 표착지를 중심으로 히젠 오도열도, 대마도, 동해 연안의 초슈와 시마네현, 그리고 큐슈 남부의 사쓰마와 오스미[大隅]에 이르는 표류민이 어디서 표류를 시작하였는지 소개한다. 다음으로는 표류민 선박이 수리되어 송환되는 경우를 선박의 종류에 따라 소개하고, 표류민의 지역적 분포를 소개하였다. 또한 선박의 크기와 표류민의 생업의 관계도 살펴보았다. 표류민은 한・일간의 정치적 변화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송환되고 있었으며, 큰 배(2파 삼선 이상)의 경우는 주로 선박대여업이나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표착지에서 수리를 거쳐서 귀환하는 비율이 높았다는 당연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서 표민 문정 기록을 수집・번역하여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할 필요를 제기하였다. 이를 통하여 표류의 참상과 표류를 통한 정보의 획득, 선박의 임대료와 상업의 내용 그리고 항로 등을 이해할 수 있으며, 조선 후기 물가의 동향과 해상 상업의 일면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많은 연구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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