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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해방 초기 남한영화계의 재건 및 재편과 식민지 경험 및 역사의 관계성 고찰

          함충범(咸忠範) 한국국학진흥원 2017 국학연구 Vol.0 No.32

          본고에서는 해방 초기 남한영화계의 재건과 재편 과정에 식민지 경험과 역사가 어떻게 결부되어 있었는지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작업은 해방기 한국영화사를 다룬 그동안의 선행연구들이 대개 일제강점기 한국영화사와의 단절과 차이를 전제로 한 데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하였다. 그 결과, 영화인 조직과 직능 단체, 영화 정책 및 제도, 제작-배급-상영 체제와 방식, 다양한 영화 텍스트를 망라한 많은 부문에서 연속되고 공통되는 지점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규명하였다. 이러한 한국영화계의 특징적 양상이 정부 수립을 거쳐 한국전쟁 이후에도 존속 또는 변용되었음을 고려할 때, 본 연구를 계기로 향후 보다 다양하고 심도 깊은 후속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I researched how history and experience of being colonized were connected with reconstruction and reorganization of Korean film industry in early Liberation period. By presenting a problem about advanced researches which supposed break and difference between history of film and colonization, I started this research. As a result, I found common points and continuity between them through the group or people related with film industry, policy of film, production-distribution-screening system, various films. Because these aspects of Korean film industry last and were modified even after Korean War, based on this research, successive researches in depth should be done.

        • KCI등재

          중일전쟁 이전 시기 한반도에서의 뉴스영화, 그 역사적 궤적 및 특수성 연구

          함충범(咸忠範) 한국국학진흥원 2013 국학연구 Vol.0 No.22

          본 논문은 영화 유입 시기(1901)부터 중일전쟁 발발 시점(1937)까지 한반도에서 어떠한 뉴스영화가 어떻게 상영되고 제작되었으며 그 변화의 양상이 어떠하였는지, 그것이 동시기 일본 뉴스영화(계)와는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 등에 대해 주로 실증적으로 파악하였다. 구한말 한국(인)은 타자화된 대상으로서 카메라 렌즈의 피사체가 되었다. 그리고 러일전쟁-을사조약-고종 퇴위-군대 해산-사법권과 경찰권의 박탈-한일병합 등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카메라를 통한 시선의 주체가 서양(인)에서 일본(인)으로 교체되어 갔다. 1910년,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기존의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환원될 무렵, 경성을 중심으로 영화 상영이 제도화되었다. 조선인/일본인, 조선어/일본어라는 민족-언어로 경계 지어진 활동사진 상설 극장에서는 구미와 일본의 뉴스영화가 관객에게 특정사실과 세계(관)를 전시하였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대 조선 식민지 정책 기조가 소위 ‘문화 통치'로 전환되는 한편, 조선에서 (무성)영화 제작 활동 또한 활발해져 갔다. 그러면서 조선총독부를 위시한 권력 기구와 언론 기관, 그리고 단성사 등 극장을 중심으로 여러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1920년대를 통과하며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 등 조선어 민간지 발행사와 조선인 민간 조직체인 동아상공영화뉴쓰사를 통해 조선인을 주축으로 뉴스영화 제작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을 통과하며 수그러들고 말았다. This study focuses on empirical facts of the newsreels in Chosun from the Korean Empire era until the outbreak of Second Sino-Japanese war: what kinds of newsreels were produced and screened, how they changed along with turbulent times, and how they were related to the Japanese newsreels of the same period. In the newsreels of the late 19th century, Koreans were a subject as ‘the other'. Later, Western ego who held the camera had been replaced with Japanese one in the course of the events such as Russo-Japanese War, Eulsa Treaty, the abdication of Emperor Gojong, the disbandment of Korean army, the deprivation of jurisdiction and police power, and Japan-Korea Annexation treaty of 1910. As Japan colonized Korean Peninsula, the Korean Empire was swung back to ‘Chosun'. At this time movie screening was systemized with Kyungsung as the center in Chosun. In the motion picture theatres which were segregated into Korean and Japanese by both nation and language, the newsreels of western countries and Japan exhibited specific facts and world views. In 1920s, when Japan's Colonial policies against Korea were converted to cultural ruling(silence), film production got quite active. Many documentary films began to be produced by the enforcement agency, Governor-General of Korea and also movie theater, Dansungsa. In the late 1920s, Koreans started to try newsreel production with the support from newspaper agency, the Korean newspaper, Donga-Sanggong -Film -News, Korean. However, this movement was to decline due to the Sino-Japanese war(1937) which broke out.

        • KCI등재

          1940년대 식민지 조선영화 속 일본인에 관한 연구

          함충범(咸忠範) 한국국학진흥원 2018 국학연구 Vol.0 No.35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식민지 조선 극영화 가운데 일본인 배우가 출연한 예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영화 속 일본인 배역이 현저히 늘어났고, 일본 본토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배우의 출연 사례도 많아졌다. 그 원인으로는 발성영화 시대 조선영화의 제작 여건과 전쟁의 확대와 전시체제 강화라는 역사적 환경을 지목할 만하겠지만, 이러한 산업적 측면과 시대적 측면이 맞물려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아가 영화 속 일본인 등장과 출연의 양상은 제작시기·주체·목적 등에 따라 다양성과 다중성을 지녔다. 1940년대 식민지 조선영화 속 일본인 배우들은, 처음에는 주로 조연으로 참여하였으나 영화 속 배역의 비중이 커져 갔다. 또한 극중에서 대개 일본인으로 등장하였으나 조선인으로 설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일본인 배역을 맡은 이들 중에 조선인 배우가 포함된 예도 존재하였다. 영화 속 일본인들은 전반적으로 정의롭고 성실하며, 강건한 의지와 인내심의 소유자로 나온다. 조선인 주인공과 동행하며 그(녀)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면에서도 공통점을 지닌다. 물론 젠더나 민족에 따라 그 안에서 인물 간 차이점과 차별적 경향도 발견된다. 1940년대 식민지 조선극영화 속 일본인에 관한 고찰은 당대 조선영화의 시대적 특수성을 이해하는 통로가 됨과 동시에, 여러 가지 연구 과제들을 파생시키기도 한다. There are only a few examples that Japanese actors/actresses appear in Korean feature films mad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owever, the number of Japanese roles in films and Japanese actors/actresses who acted in Japan increased remarkably in the 1940s. It is worth pointing out the conditions of production of the Joseon cinema and the circumstances of the wartime system strengthened, respectively. However, a more important fact is that industrial and historical aspects of this period are intertwined. Furthermore, aspects of Japanese appearances in films are diverse and multiple according to the time, subject, and purpose of the production. At first, Japanese actors/actresses in Korean films in the 1940s participated as a supporting role, but they got bigger roles later. Also, usually, they appeared as Japanese, but sometimes they acted Korean characters in films. On the contrary to this, Korean actors/actresses sometimes played Japanese roles, as well. The Japanese characters in films had in common. They were usually just and sincere, with strong will and patience. Also, by accompanying with the main Korean character, they had a great influence on him/her. Of course, depending on the gender and race, there are also differences and discriminatory tendencies among the characters. Reviewing the aspects of Japanese in the 1940s' Korean feature films will be a way not only to understand the specificity of the colonial Joseon cinema, but also to lead to various research tasks.

        • KCI등재

          한국영화사에서 일본인 관련 서술의 동향과 과제 -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함충범(咸忠範) 한국국학진흥원 2019 국학연구 Vol.0 No.39

          본 논문은 해방 이후부터 최근까지 발행된 일제강점기 한국영화사 관련 단행본과 논문 등을 분석의 주요 대상으로 삼아, 일본인 관련 서술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에 관한 전체적인 양상을 시기 순으로 종합, 정리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해방 후 한국에서는 민족 중심, 국가 중심의 영화사가 구축되는 가운데 일본인에 관한 서술에 있어서도 필자 개인의 기억이 재구성되고 관련 내용이 (무)의식적으로 선택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그 질서가 흔들리고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논란이 펼쳐지면서 민족-국가 영화사에 균열이 생기기도 하였다. 한편, 2000년대 들어서는 포스트 콜로니얼이라는 학문적 흐름 속에 한국영화사 분야에서도 ‘식민지 조선영화' 연구가 활성화되고 그러면서 일본인 관련 내용의 비중도 커져갔다. 이어 2010년대 이후 최근 학계에서는 식민지 조선영화(계)와 연관된 일본인에 관한 연구가 시대, 지역, 부문, 영역별로 이전에 비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여전히 연구 상의 문제가 존재하는 바,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연구와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 In this paper, I explore the description aspect of Japanese in Korean cinema history focusing o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subjects of the analysis are books and papers published from the liberation period(1945~1950) to the present(2010s). Since 1945, the history of cinema was described mainly in nationalism in South Korea, As for the contents of the Japanese, the writer's memories were reconstructed and related contents were selected. Since the 1980s, the order has been shaken and the controversy surrounding the historical fact has arisen. There was also a crack in the history of Korean cinema. On the other hand, in the post-colonial trend, research on ‘colonial Joseon cinema' was activated in the field of Korean cinema history in the 2000s. As a result, the proportion of description about Japanese has increased too. In the 2010s, studies on Japanese in the history of Korean cinema in the colonial period are actively being carried out. But there are still research limitations. Therefore, more systematic research and active discussions are needed to solve this problems.

        • KCI등재

          한국영화의 출발 기점에 관한 재고찰 : 영화사에서의 ‘1919년론'을 중심으로

          함충범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2019 亞細亞硏究 Vol.62 No.3

          Until the early 2000s there was a heated debate in the academia of Korean cinema history over two issues concerning the first kino drama, <Fight for Justice(Uilijeog guto)>produced by the Koreans in the colonial period. First, can this film be recognized as the first Korean film? Second, is it possible to see 1919, when this work was performed, as the starting point for Korean film (making) history? After the move to the general question of whether or not the kino drama can be accepted as a movie, since the mid - 2000s there have been attempts to acknowledge the style itself or to look at it from a theater perspective. In addition, discussions on the <Fight for Justice> tend to be extended to (the first) documentary film and feature film. And in 2010, the center of discourse has been shifted to focus on the cinematic personality from paying attention to the hybridity of kino drama. However, 1919, when <Fight for Justice> was performed, it was established as the starting point of Korean cinema history in 1966, three years ahead of ‘50 years' after ‘40 years of Korean cinema'. And there was a background of the times. It has been 50 years since then. We must reaffirm the appropriateness and validity of the ‘nation' unit classification in the cinema studies. It is necessary to reconsider the rationality of the element of ‘nationality' as the standard of Korean cinema history. Furthermore, it is necessary to explore desirable methods of research and writing of cinema history by giving independent significance and value to important events and works of the period. 2000년대 초까지 한국영화사 학계에서는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에 의해 제작된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에 대한 두 가지 쟁점을 둘러싼 뜨거운 논란이 있었다. 첫째, 이 작품을 최초의 한국 영화로 인정할 수 있는가. 둘째, 이 작품이 공연된 1919년을 한국영화 제작사(製作史)의 출발 기점 으로 볼 수 있는가. 이는 연쇄극을 영화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일반적인 문제로 옮겨진 후,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 양식 자체를 인정하거나 연극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도 펼쳐졌다. 아울러, <의리적 구토>에 관한 논의는 (최초의) 기록영화와 극영화 등에 관한 것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띠기도 하였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서는 연쇄극의 혼종성에 주목하다가 그 영화적 성격을 중시하는 것으로 담론의 중심이 이동되어 왔다. 그런데, <의리적 구토>가 공연된 1919년이 한국영화의 출발 기점으로 세워진 것은 ‘한국영화 40년'을 지나 ‘50년'을 3년 앞둔 1966년의 일이었고, 여기에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뒤로 다시 50년이 지났다. 영화사 연구에서 ‘국가' 단위 분류화의 적절성과 타당성을 재확인하고, 한국영화사 서술 기준으로서의 ‘민족(성)'이라는 요소의 합리성에 대해 재점검하며, 시대별 주요 사건과 작품에 독립적인 의의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향후 영화사 연구 및 서술의 바람직한 방안을 탐색해 볼 시점이다.

        • KCI등재후보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상영의 제도적 기반 연구-1940년대 초반 배급, 흥행 부문 신체제를 중심으로

          함충범 명지대학교(서울캠퍼스) 인문과학연구소 2014 인문과학연구논총 Vol.35 No.2

          This research is about the new system of screening in colonial Chosun in the 1940s. Focusing on Focused on the fields of distribution and performing in 1942, it looked intotheir exhibition practices in practical and analytical ways and have found out what isfollowed. First, in the aftermath of the Sino-Japanese War the practice of film exhibitionin Chosun was reformed like that of Japan. And this was connected closely thecontrolling policy of the distribution and performance under the cinema new systembuilt in 1942. Second, the proclamation and enforcement of Chosun Yeongwha-Ryeong(Film Law of colonial Chosun) and related reforms would lead to various forms ofchanges in the film exhibition practice. At the time, its film screening practice consisted of three kinds of screening, regular, mobile and intermittent film screening. Also, the showing time was more and more shorten and a set of film exhibition practice, consisting of newsreels, cultural movie (Munwha Yeongwha), and feature film, was established. And the last, Because of the consolidation of film productions in Chosun after 1942, the trade of films between the imperial Japan and colonial Chosun was vitalized. Such changes had a decisive effect on even the production of feature films in Chosun during this period.

        • KCI등재

          한국영화사에서 일본인 관련 서술의 동향과 과제―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함충범 한국국학진흥원 2019 국학연구 Vol.0 No.39

          In this paper, I explore the description aspect of Japanese in Korean cinema history focusing o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subjects of the analysis are books and papers published from the liberation period(1945~1950) to the present(2010s). Since 1945, the history of cinema was described mainly in nationalism in South Korea, As for the contents of the Japanese, the writer's memories were reconstructed and related contents were selected. Since the 1980s, the order has been shaken and the controversy surrounding the historical fact has arisen. There was also a crack in the history of Korean cinema. On the other hand, in the post-colonial trend, research on ‘colonial Joseon cinema' was activated in the field of Korean cinema history in the 2000s. As a result, the proportion of description about Japanese has increased too. In the 2010s, studies on Japanese in the history of Korean cinema in the colonial period are actively being carried out. But there are still research limitations. Therefore, more systematic research and active discussions are needed to solve this problems. 본 논문은 해방 이후부터 최근까지 발행된 일제강점기 한국영화사 관련 단행본과 논문 등을 분석의 주요 대상으로 삼아, 일본인 관련 서술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에 관한 전체적인 양상을 시기 순으로 종합, 정리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해방 후 한국에서는 민족 중심, 국가 중심의 영화사가 구축되는 가운데 일본인에 관한 서술에 있어서도 필자 개인의 기억이 재구성되고 관련 내용이 (무)의식적으로 선택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그 질서가 흔들리고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논란이 펼쳐지면서 민족-국가 영화사에 균열이 생기기도 하였다. 한편, 2000년대 들어서는 포스트 콜로니얼이라는 학문적 흐름 속에 한국영화사 분야에서도 ‘식민지 조선영화' 연구가 활성화되고 그러면서 일본인관련 내용의 비중도 커져 갔다. 이어 2010년대 이후 최근 학계에서는 식민지 조선영화(계)와 연관된 일본인에 관한 연구가 시대, 지역, 부문, 영역별로 이전에 비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여전히 연구 상의 문제가 존재하는 바,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연구와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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