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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into, Nationalism and the Catholic Church in the Early Showa Era

        미요시 치하루(Miyoshi Chiharu)(三好 千春)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2011 신학과 철학 Vol.- No.18

        이 논문은 극단적 국가주의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초기 쇼화시대에 일본 가톨릭교회의 교회 선교정책인 ‘T적응주의’Q를 재검토한다. 일본 가톨릭교회는 신사참배가 죄, 또는 신사예식이 미신행위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신사를 방문하는 관행(‘T신사참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1932년의 ‘T상지대학교-야 수쿠니신사 사건’Q과 그 여파는 교회의 정책에 변화를 촉발하였다. 바티칸의 신앙교리 성성(Propaganda Fide)은 ‘luries instanterque’Q라는 교령을 발표하면서 신사 예식이 단지 시민사회와 관련된 가치만을 가진다는 이유로 가톨릭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허용할 뿐 아니라 격려하였다. 이 바티칸 교령과 더불어 일본정부도 신사참배는 애국적인 행위이지 결코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보증하였기에, 가톨릭교회는 신사참배를 적응주의의 한 행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논문은 ‘T국가 신토’T가 천황의 유일무이한 종교적 권위위에 세워졌다는 문제를 지적한다. 그래서 교회의 애국적 감정의 표현들은 살아있는 신인 천황에 대한 복종의 행위로 불가피하게 귀결되었다. 그러기에 일본의 가톨릭교회는 일본 문화에의 적응의 방법을 찾으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극단적 국가주의의 요구에 적응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This article discusses the topic of ‘accommodation’ in the Church’s policy in mission as it was understood by the Japanese Catholic Church in the early Showa era when ultra nationalism was very influential. The Catholic Church in Japan had rejected participation in the practice of shrine visitation since worshipping at shrines was regarded as a sin, and shrine rites were considered superstition. However, the ‘Sophia University-Yasukuni Shrine Incident’ in 1932 and its aftermath precipitated a shift in the Church’s policy. The Vatican’s Propaganda Fide issued an instruction Pluries instanterque that not only allowed but also encouraged Catholics to attend the Shinto shrine rites, since ceremonies at shrines, it maintained, had only civil values. With the Vatican decree and also guarantees by the Japanese government stating that offering reverence at shrines had patriotic but in no way religious meaning, shrine visits were seen by the Catholic Church as no more than an act of accommodation. However, this article points out, the problem was that the ‘State Shinto’ was founded on the unique religious authority of the Tenno(Emperor). Expressions of patriotic sentiment by the Church became unavoidably acts of obedience to a living god, the Tenno. Thus, although the Catholic Church in Japan intended to seek ways of accommodating to the Japanese culture, what the Church actually did resulted in accommodation to the demands of Japan’s ultra nationalism.

      • KCI등재

        日本カトリック教会の歴史認識- 記憶の連帯を目指して

        미요시 치하루(Miyoshi Chiharu)(三好千春)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2020 신학과 철학 Vol.- No.36

        한일 가톨릭교회 간 ‘기억의 연대’를 지향함에 있어, 일본 가톨릭교회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당시 교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인식을 밝히고 이를 기억하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그 예로, 이전의 일본 가톨릭교회의 3.1운동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 관한 담론을 다루고 있다. 전후(戰後)가 되어, 일본 가톨릭교회는 1970년대 한국 민주화 투쟁을 지원하는 가운데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마주 대하는 자세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 행해진 지문 날인 제도 반대 운동에의 지원을 계기로 일본 가톨릭 주교단은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시달리고 있는 여러 문제를 알아차림과 함께, 그 문제의 연원(淵源)인 일본에 의한 조선 식민지 지배에 눈을 돌렸다. 거기에서, 시라야나기 추기경에 의한 ‘전쟁 책임 고백’이 생겨나고, 1995년 주교단 메시지 ‘평화로의 결의’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리고 일본 주교단은 ‘평화로의 결의’에서 말한 결의를 토대로 하면서, 한국 주교단과 함께 ‘한일 공동 역사 의식을 갖는다’는 것을 목표로 하여, 한편 한일 주교단이 종종 편하게 의견 교환이 가능한 ‘교류회’를 만드는 것을 1996년에 합의하고, 그 이후 매년 ‘한일 주교 교류회’가 열리고 있다. 이 교류회에서 한국인 연구자들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한국사 입문서가 생겨나면서, 몇몇 한일 교구간의 유대도 깊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 측에는 역사수정주의적인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으며,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는 노력을 일본 가톨릭교회가 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 In order to build “Mnemonic Solidarity,” one of the tasks the Japanese Catholic Church should undertake is to bring to wider public awareness the prevalent understanding of Korea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As an example, this paper examines the perceptions and opinions on the “March 1st Movement” held by the Japanese Catholic Church before the war. After the Second World War, in supporting the South Korean democracy movements in the 1970’s, the Japanese Church began to face the facts of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In the 1980’s, inspired by the Fingerprinting Refusal Movement, the Japanese Bishops began to take notice of the hardships that faced the Korean-Japanese in Japan and turned their eyes on its origin: The era of colonial rule of Korea by Japan. In 1986 Cardinal Seiichi Shirayanagi made a public admission of “the Japanese Catholic church’s responsibility for the war”, and in 1995 the Japanese Catholic Bishops’ Conference issued a declaration titled “Resolution for Peace”. Building on the “Resolution for Peace,” in 1996 the Japanese bishops agreed with the Korean bishops to organize “exchange meetings” at which they would share opinions on areas of mutual interest, working towards “sharing common historical perceptions of relations between Korea and Japan”. As a result of this agreement, the Korean-Japanese Bishops’ Exchange Meeting has been held every year. The Meeting yielded a beginner’s book on Korean history for Japanese people written by three Korean scholars. Also, some dioceses in Korea and Japan have been seeking to deepen their relationships. However in Japan, the revisionist movement has become more vocal and influential in the media and among some policy makers. In responding to this trend the Japanese Catholic Church needs to make greater efforts to record faithfully what the Japanese people must remember. 日韓カトリック教会間での 「記憶の連帯」を目指すにあたって、日本カトリック教会が行うべきことの一つは、当時の教会自身が抱いていた植民地期朝鮮への認識を明らかにし、それを記憶することである。本論文では、その一例として、戦前の日本カトリック教会の3·1運動に対する認識とそれに関する言説を扱っている。 戦後になって、日本カトリック教会は、1970年代に韓国民主化闘争を支援する中で日本の朝鮮植民地支配に向きあう姿勢を持ち始めた。そして、1980年代に行われた指紋押捺制度反対運動への支援を契機に、日本カトリック司教団は在日コリアンが日本で苦しんでいる諸問題に気付くと共に、その問題の淵源である日本による朝鮮植民地支配に目を向けた。そこから、白柳枢機卿による 「戦争責任告白」が生まれ、1995年の司教団メッセージ 「平和への決意」へと結実したのである。 そして、日本司教団は 「平和への決意」で述べた決意を土台にしつつ、韓国司教団と共に 「日韓共通の歴史認識を持つ」ことを目指し、かつ日韓司教団がしばしば気楽に意見交換ができるような 「交流会」を作ることを1996年に合意し、それ以降、毎年「日韓司教交流会」が行われている。この交流会から韓国人研究者たちによる日本人のための韓国史入門書が生まれ、いくつかの日韓教区間のつながりも深化している。しかし、日本側には歴史修正主義的な動きが強まってきており、記憶すべきことを記憶する努力を日本カトリック教会が行っていく必要がある。

      • KCI등재후보

        日本映画産業の好転とその傾向 -2000年~2007年の実写映画を中心に-

        이즈미 치하루 중앙대학교 일본연구소 2008 日本 硏究 Vol.0 No.25

        1990년대 저조했던 일본영화시장에 있어서의 일본영화는 2000년에 들어서 회복의 기미를 보여줬다. 특히, 2005년 이후 실사영화의 성장은 두드러졌다. 2006년에는 일본영화의 흥행수입이 1,079억엔으로 영화시장에서 일본영화의 점유율은 53.2%가 되어 1985년 이래 21년 만에 외국영화를 앞질렀다. 이 시기 흥행 성적이 좋은 영화의 특징은 토호(東宝)에서 배급했고, 방송국이 제작을 주도하는 제작위원회방식(製作委員会方式)으로 제작된 영화였다. 이들 영화의 주 된 소재는 원작 시나리오나 인기TV드라마의 리메이크와 같은 지명도가 높은 것이었다. 또한 이 성공의 열쇠는 우선 메이저영화사, 특히 토호의 산업적 전략의 성공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토호의 영상본부영화조정부(映像本部映画調整部)에서는 방송국에서 들어오는 기획을 취사선택하여 영화의 공개시기와 규모 등을 결정해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웠다. 제작위원회에는 메이저 영화사를 비롯하여 방송국, 광고회사, 출판사, 연예매니지먼트사, 음반제작사 등 여러 기업이 함께 투자하여 국내극장 배급수입은 물론 미디어믹스로 2차, 3차 수입이 기대되는 투자가치가 높은 비즈니스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렇듯 제작위원회가 좋은 성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영화는 투자가치가 있는 비즈니스 기회라는 인식이 높아지며 투자할 기업이 많아지면서 거액의 자본이 필요한 영화제작이 손쉬워지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가 작품이기 이전에 투자가치가 있는 상품이라고 인식되어, 성공한 작품을 역순으로 계산된 기획으로 획일화되기도 했다. 또 TV드라마와 영화 사이에서 리메이크를 되풀이 하여 시청자와 관객이 서로 교차되기도 했다. 더불어 확실한 흥행성적을 올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오리지날 시나리오보다 원작을 선호하였고, 개성 넘치는 영화감독보다 기술이 뛰어난 TV 프로듀서를 기용해 모두 비슷한 드라마의 스페셜버젼 같은 평범한 내용이 되어버렸다. 이런 경향 속에서 영화가 TV 드라마의 연장이 아닌 만큼 영화만의 특색을 지닌 작품이 아니면 언젠가는 관객들에게 외면 당 할 것이라는 우려가 일어났다. 평론가나 영화관계자가 선택한 「21세기 일본영화베스트 30(21世紀日本映画ベスト30)」에서 10억 엔 이상의 흥행성적을 낸 작품은 여섯 편에 불과하며, 이 중 20억 엔 이상의 흥행수입을 얻은 작품은 30위에 오른『무사의 체통(武士の一分)』단 한편 뿐이다. 좋은 작품라고 인식되는 영화와 흥행에 성공한 영화의 간극이 커진 것이다. 물론 이 영화들 중에는 토호배급작 5편, 쇼치쿠배급작 3편 등이 포함되어있지만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영화사로서는 자랑스럽지 못한 결과였다. 한편 독립계 영화회사는 TV방송국이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방송국의 정보코드 속에 휘말리지 않고 개성적인 감독을 기용하여 개성적인 작품 제작이 가능하였다. 그 결과 메이저영화사들이 놓치지 쉬운 소재나 기획을 수용해 『유레카(EUREKA ユリイカ)』,『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언젠가 독서하는 날(いつか読書する日)』과 같은 영화관계자의 평가도 높고 해외영화제에 수상한 작품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시네콰논와 아스믹 에스 엔터테인먼트는 자금의 조달에 제작위원회가 아닌 펀드를 이용해 영화를 제작했다. 투자기업들의 합의의 장이 되어버린 제작위원회가 아니라 순수 투자인 시네마신탁 등을 이용함으 ...

      • KCI등재후보

        1차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독일 도자기 산업의 재생과 디자인의 전개 - 일본과 독일의 도자기 산업과 디자인에 관한 연구 -

        나까이 치하루 한국도자학회 2012 한국도자학연구 Vol.9 No.1

        1930년대 전반은 독일의 디자인 운동의 총체기라고도 할 만큼 도자기 업계에서는 식기 디자인에 있어서 많은 명작이 탄생했다. 독일 도자기 산업은 초창기에는 저가 제품으로 세계 시장을 석권했지만,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불황과 수출 부진 속에서「질 높은 제품」을 가지고 국제 수출 경쟁에 뛰어 들었다.이 논문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 배경 및 수출 동향을 분석하고, 독일 도자기 산업이 어떻게 ‘제품 품질에 의한 독자성을 확립’이라는 방침을 하기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검증하였다. 또한 도자기 업계의 디자인 개혁의 구체적인 실천 모델로서 베를린 가마(KPM)를 예로 들고, 독일 공작 연맹과 디자인 교육 기관과의 연계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도자기 산업은 원가 상승 및 급성장한 일본의 수출 도자기 산업의 맹추격에 의해 해외 수출시장에서 저가격 경쟁을 단념하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수출 제품에 필요한 새로운 특징과 거대한 공장 생산 체제 유지를 위한 제품의 ‘규격화’와 ‘표준화’를 필요로 하게 된다.이에 따른 독일 공작 연맹의 ‘고품질 사상’이 도자기 업체에서 현실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밝혀졌다.

      • KCI등재

        海外帰国者の日本語使用と言語管理―日本から帰国した在日済州人の事例を中心に―

        今千春(곤 치하루),고민정 한국언어연구학회 2018 언어학연구 Vol.23 No.3

        As globalization in society advances, the number of people who are moving again and returning to their own country after migrating abroad and living there for a certain period of time is increasing. Returnees from overseas have experienced using and acquiring various languages during migration, therefore it is thought that their experiences have an effect on their language use after they return home. As basic research on language management of returnees from overseas, this paper analyzes the management of the Japanese language of Korean returnees from Japan in Jeju in South Korea. Jeju Island of Korea has had a culture of migrating to other countries or regions for a long time, and there has especially been frequent migration to Japan. As a result, there are many people who have experienced living in Japan in Jeju Island, and it is supposed that some management of Japanese language is still done by them. Based on our interviews of Korean returnees from Japan, we examined features of the management of Japanese language and actual use of Japanese language by returnees. Then, we suggested variations in their Japanese language acquisition and their management of the Japanese language as a language resource after returning to Jeju Island.

      • 최근 일본의 ESCO산업 동향

        무라코시치하루,Muracoshi, Chiharu 에너지절약전문기업협회 2007 esco Vol.45 No.-

        이 발표자료들은 지난 2월 2일 일본 도쿄빅사이트 전시장에서 일본NEDO와 ESCO추진협의회가 공동 개최한 '아시아 ESCO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것들이다. 주최국인 일본에 이어 태국, 인도, 대만,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순서로 각국의 ESCO산업 현황에 대해서 알아본다.

      • KCI우수등재

        백두산 지역의 마이오세 알칼리 현무암(황송푸 현무암)의 암석학적/지화학적 특성

        김은주 ( Eunju Kim ),히라타치하루 ( Hirata Chiharu ),정훈영 ( Hoon Young Jeong ),길영우 ( Youngwoo Kil ),양경희 ( Kyounghee Yang ) 한국암석학회·(사)한국광물학회 2020 광물과 암석 (J.Miner.Soc.Korea) Vol.33 No.4

        백두산 북동쪽으로 약 25 km 떨어져있는 지역의 마이오세 현무암(황송푸 현무암, 20 Ma)에 대한 주성분원소와 미량원소, Sr-Nd 동위원소 조성에 대한 연구가 수행되었다. 황송푸 현무암은 비현정질 암석으로 Na<sub>2</sub>O+K<sub>2</sub>O=3.5~4.7 wt.%, MgO=9.9~11.1 wt.%을 보인다. Mg 성분이 풍부한 감람석(Mg#=75~86)과 단사휘석(Mg#=72~85), Ca성분이 풍부한 사장석 미반정을 함유하고 있다. 이 현무암은 경희토류원소 부화가 나타나는 해양도현무암과 유사한 미량원소 패턴을 보이고, 높은 Cr(394~479 ppm)과 Ni(389~519 ppm) 성분, Nb-Ta 부화 이상치, Rb과 Ba을 포함하는 LILE가 부화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조직과 주성분원소/미량원소 조성 데이터는 황송푸 현무암이 알칼리 마그마 계열에 속하는 원시적인 마그마임을 나타낸다. 황송푸 마그마는 상승하는 도중에 분별결정작용, 지각오염, 마그마혼합과 같은 분화작용을 거의 경험하지 않은 액상선 환경에서 고화된 암석으로 이는 황송푸 현무암이 부분용융이 일어났던 맨틀에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반영한다. 황송푸 현무암의 높은 (Gd/Yb)<sub>sample</sub>/(Gd/Yb)<sub>PM</sub> 비율(2.8~3.5)은 황송푸 현무암이 판내부 환경에서 형성된 마그마로써 석류석이 존재하는 맨틀에서 페리도타이트의 낮은 부분용융(3~5%)으로 형성되었다. BSE보다 모두 높은 <sup>143</sup>Nd/<sup>144</sup>Nd와 <sup>87</sup>Sr/<sup>86</sup>Sr 성분을 보이는 황송푸 현무암은 이 지역 아래 부화된 맨틀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송포 현무암은 과거(ancient)의 태평양판 섭입대에 의해 공급되어 재활용된 해양지각 혹은 대륙지각으로 교대작용을 경험한 맨틀에서 부분용융에 의해 형성되었다. Major and trace elements, and Sr, Nd, isotopic composition analysis have been carried out on the Miocene basalt (Huangsongpu basalt, 20 Ma) 25 km to northeast from the Mt. Baekdu. The basalt has Na<sub>2</sub>O+K<sub>2</sub>O=3.5~4.7 wt.%, and MgO=9.9~11.1 wt.%, containing Mg-rich olivine (Mg#=75~86), clinopyroxene (Mg#=72~85) and Ca-rich plagioclase micro-phenocrysts. These data suggest that the basalt belongs to the alkaline magma series with a primitive nature, crystallized at a near-liquidus. The basalt is also characterized by high Cr (394~479 ppm) and Ni (389~519 ppm) contents, Nb-Ta enrichment anomalies and OIB-like trace elements patterns, displaying identical signatures to those of typical intraplate magmas. The rare earth element (REE) patterns of the basalt and high (Gd/Yb)<sub>sample</sub>/(Gd/Yb)<sub>PM</sub> ratio (=2.8~3.5) suggest the parental magma was derived from relatively low-degree (3~5%) partial melting of garnet peridotite. The <sup>143</sup>Nd/<sup>144</sup>Nd and <sup>87</sup>Sr/<sup>86</sup>Sr composition of the basalt are higher than those of BSE. The high <sup>87</sup>Sr/<sup>86</sup>Sr (= ~0.7058) ratio of the basalt indicates a contribution of recycled ancient oceanic crust or continental crust on the Pacific slab suggesting that the Huangsongpu basalt was generated from metasomatized man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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