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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학파의 율곡 성리설 수용 양상

        崔英成 영남퇴계학연구원 2009 퇴계학논집 Vol.4 No.-

        종래 조선 성리학사는 대립의 연속이었고, 끝내 귀일(歸一)할 가 능성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화해(和諧)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왔음이 드러나고 있다. 율곡학파는 퇴계학설의 수용에 비교적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다. 퇴계학파 또 한 표면적으로는 비판과 공격 일색이었던 것 같지만, 그 수용적 양상이 끊이지 않았다. 퇴계학파 학인들은 기호의 학인들에 비해 폐쇄적이고 자존적(自尊的) 경향이 강하였고, 또 정치적으로 피해 의식이라든지 적대의식이 적지 않았던 탓에 퇴계학파의 율곡설 수 용 양상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 가 거의 없었다. 조선 유학의 양대 학파인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겉으로는 오랫동안 서로 대립하면서도 속으로는 상대측 학설을 수 용하여 성리학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어가려 한 사실은 조선 성 리학사 연구에 중요한 논점을 제시한다. 본고에서는 조선 성리학 사, 나아가 한국 유학사의 시각을 새롭게 하자는 데 목적을 두고, 퇴계학파의 율곡설 수용 양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 KCI등재

        신라 성덕대왕신종의 명문(銘文) 연구– ‘사상성(思想性)’ 탐색을 겸하여

        최영성 한국철학사연구회 2018 한국 철학논집 Vol.0 No.56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중대(中代)의 사상사, 불교사, 정치사, 공예사, 한문학사, 서예사, 금석학사 등 여러 면에서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그러나 신종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에 비추어 명문(銘文)에 대한 연구는 아직 활발하지 않다. 명문에 대한 판독과 번역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체계적인 분석과 연구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기초한다. 부제(副題)를 ‘사상성의 탐색’으로 한 것은 제2차 연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종래의 판독과 역주(譯註)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였다. 변려문(騈儷文)의 문체적 특성에 대한 연구도 병행하였다. 그 결과 약 20건 정도의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특히 ‘工匠畫模’, ‘日月僣暉’ 등 중요한 문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은, 명문 해석의 중요성을 부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종의 명문은 사상사의 측면에서 연구할 가치가 높다. 명문에는 불교사상, 유교사상, 도가사상은 물론 우리나라 고유사상 등이 서로 걸림이 없이 무르녹아 있다. 전반적으로 철학성이 높은 글이다. ‘원공(圓空)’을 주제어로 신종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울러 불교사상의 핵심과 통치철학을 제시한 것이 돋보인다. 한편 성덕왕의 정치이념, 통치원리가 우리 고유의 풍류도(風流道)에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 것은, 풍류도 전승의 맥락을 추적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다. 혜공왕 대에 유교사상에 입각한 개혁파와 민족 고유사상에 기반을 둔 보수파와의 대결을 시사한 대목도 함께 보아야 할 대목이다.

      • KCI등재

        ‘眞知實踐’의 교재 ⌈朱子書節要⌋- ⌈주자서절요⌋ 서문 분석을 중심으로 -

        崔英成 영남퇴계학연구원 2014 퇴계학논집 Vol.- No.15

        ?성학십도(聖學十圖)?, ?천명도설(天命圖說)?, ?주자서절요?, ?자성록 (自省錄)?은 퇴계 이황의 저술 가운데 4대 저술로 꼽힌다. 퇴계는 주자 (朱子) 저술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주자 저술 가운데 서간(書簡) 부분 을 따로 뽑아 20권으로 엮고 주해와 고증을 가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주 자학 연구사에서 선구적인 일이었다. 퇴계의 ?주자서절요? 편찬은 자신 의 인격 완성에 목적이 있다. 퇴계는 주자를 통해 자신이 나가야 될 참 된 길을 찾으려 했다. 또 자신이 편찬한 책을 통해 다른 사람과도 그런 인식을 공유하려 했다. 교육적 목적이 가장 컸다. 이 글에서는 ?주자서절요? 서문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퇴계가 이 책을 편찬한 목적과 교 육적 의미에 대해 고찰하였다. 그동안 ?주자서절요?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였다. ‘개성 없는 편집 서’라는 선입견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필자는 이 ?절요?야말로 퇴계 학의 본령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한다. 학문과 실천이 별개의 것이 되고 교육이 인격 형성과 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을 되돌아봄에 있어, ?주자서절요?는 우리에게 바람 직한 교육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바 크다고 본다.

      • KCI등재

        김시습과 무량사의 관계 몇 가지 - 문헌 고증을 중심으로

        최영성 (사)율곡학회 2019 율곡학연구 Vol.39 No.-

        Kim Siseup entered Muryangsa Temple(無量寺) in Hongsan(鴻山), Chungcheong Province around August 1492(23rd year of King Seongjong) and then passed away on March 13th next year. Though his stay was only 7-month long, the relation between Kim Siseup and Muryangsa Temple is profound. Kim Siseup had been related with Muryangsa Temple even before his retirement, on which it is assumed that the Buddhist priest Jihee(智熙) at Muryangsa Temple would have played a role as a bridge between Kim Siseup and the temple. After entering Muryangsa Temple, Kim Siseup stayed at Maewoldang(梅月堂) and left the final two pieces of article at the request of Jihee before leaving this world, which are Beophwagyeongyohae(法華經要解) and epilogue on Suneungeomgyeong(首楞嚴經). Kim Siseup thought of ending his life at Muryangsa Temple before entering Muryangsa Temple. After he entered the temple, he lived a life of a Buddhist, focusing on Zen meditation(參禪) and left a will for things to be done after his passing. It was told that there was a grave of Choi Chiwon around Muryangsa Temple, which proves Kim Siseup was to trace back to the origin of his thoughts. As his stupa was formed within Muryangsa Temple area, it made Muryangsa Temple a shrine of integrity ideology(節義思想). The fame of Kim Siseup and the status of Muryangsa Temple has become inseparable. This study first clarifies that the name of room where Kim Siseup stayed was Maewoldang. It is proved that his residence was all named Maewoldang regardless of Suraksan Mountain, Geumosan Mountain or Mansusan Mountain. In addition, the stupa field [浮屠田] where that of Kim Siseup is laid also has stupas of Buddhist priests related to Muryangsa Temple. Personal information about them cannot be described in detail as of now. It can only be assumed that they would have belonged to Cheongheodang(淸虛堂) Hyujeong (休靜). The Buddhist priest Neungheodang(凌虛堂) Cheoyeong(處英) is a different person with the same name with the Buddhist priest Noemukdang(雷默堂) Cheoyeong. 김시습은 1492년(성종 23) 8월 무렵에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 들어와 이듬해 3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머문 기간은 약 7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김시습과 무량사의 관계는 간단하지 않다. 김시습은 은거 이전부터 무량사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무량사에 주석하던 지희(智熙)라는 승려가 교량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시습은 무량사에 들어온 뒤 매월당(梅月堂)에서 거처하였으며, 지희의 부탁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최후의 글 두 편을 썼다. 『법화경요해(法華經要解)』, 『수능엄경(首楞嚴經)』에 붙인 발문이 그것이다. 김시습은 무량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무량사에서 삶을 마칠 생각을 하였다. 들어온 뒤에는 참선(參禪)을 중심으로 한 불교인의 삶을 살았으며, 죽은 뒤의 일처리를 유언하였다. 무량사 부근에는 최치원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왔다. 결국 김시습은 자신의 사상적 연원(淵源)을 찾아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량사 역내(域內)에 김시습의 부도(浮屠)가 조성됨으로써, 무량사는 절의사상(節義思想)의 성지가 되었다. 김시습의 명성과 무량사의 위상이 상호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김시습이 거처했던 당실(堂室)이 매월당이었음은 본고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김시습의 거처는 수락산, 금오산, 만수산 할 것 없이 매월당이었음이 증명되었다. 한편 김시습의 부도가 있는 부도밭[浮屠田]에는 무량사와 관련 있는 승려들의 부도가 함께 있다. 현 단계에서는 그들의 인적 사항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다. 다만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계열이었음은 추측할 수 있겠다. 능허당(凌虛堂) 처영(處英) 스님은 뇌묵당(雷默堂) 처영 스님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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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致遠撰「佛國寺毘盧遮那文殊普賢像讚」⋅「佛國 寺阿彌陀佛像讚」과 불국사 金銅毘盧遮那如 來坐像⋅金銅阿彌陀如來坐像의 關係再論 — 文明大교수의 所論에 대한 반론 —

        최영성 한국철학사연구회 2007 한국 철학논집 Vol.0 No.20

        This article attempts to refute Professor Myung-dae Moon's article presented in 1976, which suggests the period of two pieces of guilt bronze image of Buddha placed in the temple of Bulguksa. In the process of identification of chronology and manufacture of the two pieces of guilt bronze image of Buddha, he objects that quoting the two legends of the image of the Buddha(佛像讚) written by Mr Chiwon Choi (崔致遠) in the latter period of Shilla Kingdom, they are decisional evidence of the fact of manufacture of two guilt bronze image of Buddha and of the chronology of them. However, his objects are derived from misunderstanding and arbitrary interpreting the two legends written by Mr. Chiwon Choi. In a word, he unreasonably drawn the literary evidence that Mr. Chiwon Choi's two legends were associated with the two pieces of guilt bronze image of Buddha ( 金銅佛), of which the dates are suggested as the same manufacture period of them and so on. The refutation of his suggestions is based on showing and presenting various academic evidence of the fact of manufacture and the chronolgy of them. Although his article has passed about 30 years, his incorrect suggestions on the above-mentioned fact and chronology are yet valid as a correct object. Therefore, I expect to correct his wrong identification of the two piece of guilt bronze image of Buddha in the temple of Bulguksa. 이 글은 1976년 문명대 교수가 발표한 논문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띤 것이다. 문교수는 이 논문에서 현재 불국사에 안치되어 있는 두 금동불상의 제작 연대를 추정하면서 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이 찬한 두 개의 불상찬(佛像讚)을 인용하여, 이 두 글이 두 금동불상의 제작 사실과 연대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문헌 자료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최치원이 찬한 자료에 대한 이해 부족과 자의적인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마디로 전혀 관계가 없는 최치원의 두 글을 불국사 두 불상과 연결시키고, 찬문에 나오는 불상과 동일한 것이라 추정하는 등 무리하게 문헌적 뒷받침을 이끌어 낸 것은 잘못이요 과욕이다. 이에 대한 반론은 필자가 여러 가지 고증을 통해 밝혔다. 문교수의 논문은 발표된 지 30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학계에서 거의 통설로 통한다고 들었다. 필자가 초한 이 글을 통해 역사적 사실이 바로잡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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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晦峯 安圭容의 春秋精神과 義理思想

        최영성 호남사학회 2014 역사학연구 Vol.56 No.-

        Focusing on life of Hoebong Ahn Gyu Yong(1873~1959), this article is to cast light upon his Chunqiu spirit and thought of loyalty. Born in Boseong(寶城), Jeollanam-do, Ahn Gyu Yong is a scholar specialized in Daoxue. At the close of Joseon Dynasty, he exhibited entire aspects of Joseon Daoxue. He was a 'practical Confucianist' who demonstrated 'thought of loyalty in Daoxue,' the most predominant characteristic in Korean Confucianism. Emphasizing duties and responsibilities of a scholar, he was assured that the state's energy was to be revived when scholars fully performed their tasks. He had a strong sense of anxiety(憂患意識) to be concerned about the world and decline of morals and that of responsibility as an intellectual. He thought that inheritance of 500-year-old Confucian tradition depended on his own behavior. His study and thoughts can be summarized as Chunqiu justice(春秋大義) and thought of loyalty(義理思想). His Chunqiu justice is to resist injustice and unconscionableness and to defend civilization from barbarism. Following the example of Song Si Yeol (宋時烈) who made a critical choice between civilization and barbarism and turned the stream, Hoebong traced the path of Song Si Yeol. His lifelong footstep can be called as ‘tracing back to Song Si Yeol's path.’ 이 글은 회봉 안규용(1873~1959)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의 춘추정신과 의리사상을 집중 고찰한 것이다. 안규용은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신의 도학자다. 그는 조선왕조의 끝자락에서 조선 도학의 면모를 온전하게 보여주었다. 한국유학의 특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도학의 의리사상’의 측면을 실증한 ‘실천유학자’였다. 그는 선비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면서 선비가 제구실을 할 때 나라의 원기(元氣)가 소생할 것임을 확신하였다. 세상을 걱정하고 도덕문명이 쇠퇴하는 것을 염려하는 우환의식(憂患意識), 지성인으로서의 책임의식이 강렬하였다.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5백년 유교 전통이 단절될 수 있고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안규용의 학문과 사상은 춘추대의(春秋大義)와 의리사상(義理思想)으로 요약된다. 그가 말하는 춘추대의는 불의와 무도에 저항하는 것이요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는 문명과 야만의 갈림길에서 중대한 선택을 하였던, 그리고 물줄기를 돌려놓았던 송시열(宋時烈)을 본보기 삼아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걸었다. 그의 일생 발자취는 ‘송시열의 길 다시 걷기’였다고 할 수 있다.

      • KCI등재후보

        寒齋 李穆의 道學思想 硏究

        崔英成 한국사상문화학회 2001 韓國思想과 文化 Vol.12 No.-

        한재(寒齋) 이목(李穆)은 오늘날 학계에서 활발하계 연구되고 있는 인물은 아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의 「다부(茶賦)」가 차(茶) 동호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전에 비해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학술사상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전무한 상태에 있다. 한재는 '거인유의(居仁由義)'의 표본적인 인물이다. 그는 단순한 실천가가 아니요, 이론을 겸비한 실천가이다. 조선 순조 때 사학(四學) 유생들이 그의 도덕과 절의를 추앙하여 '선비 정신의 귀감'으로써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청했던 사실은 사림(士林)에게 그의 위상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케 한다고 할 것이다. 그동안 그의 학문세계가 절의에 가려져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만시(晩時)의 탄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연구는 필요하다고 본다, 한재에게 있어서 '차'의 위상은 상당하다. 그는 차문화(茶文化)의 선구자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차'는 결코 그의 본령일 수 없다. 그의 본령은 도학에 있고 '기다(嗜茶)'는 하나의 여사(餘事)에 속한다. 후학의 입장에서 각자의 관심사나 취미·기호에 따라 연구할 수는 있지만, 그의 학문과 사상의 본령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인식해야 될 줄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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