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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사제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0 국내석사
朴趾源是生活在18世纪朝鲜后期伟大的文学家,他的作品生动反映了当时社会的面貌表现出作者深厚的思想内涵.上世纪80年代开始韩国学界对其实学思想进行了广泛的研究,并取得许多重要成果.另外,对其游览中国后创作的『热河日记』也有不少专门论著.比如对『热河日记』内包含的小说进行研究.同时学界也涉猎于朴趾源的散文.比如对尺牍和记文的研究. 然而, 通过对记文研究的整理可以发现, 大多数研究都是从单一作品出发,分析作品的结构和艺术性, 或者以记文为对象发掘朴趾源的思想, 没有从整体考察朴趾源记文的特点, 以及通过某种特点考察当时社会和作家的关系, 因此本文以『燕岩集』为研究对象, 通过对朴趾源的35篇记文的分类, 分析其文章特点. 众所周知,朴趾源被誉为朝鲜后期古文家. 其作品无论是思想还是内部特征无一例外表现出对传统古文的崇尚和继承.因此,本文首先分析其记文表现出对传统的继承.例如文章的首尾呼应, 行文的抑扬顿挫, 还有文学创作中普片使用的修辞和用事等, 都和传统古文的构造, 铺陈一脉相连. 然而朝鲜后期作为当时历史的重要转换期, 无论是社会还是思想都开始发生巨大的变化.当这种变化最后延续到文学创造时,大多数文人作家开始选择接受. 朴趾源也不例外, 因此他的记文还表现出对传统古文的脱离, 开始进行新式样的文学创作的特点.这种所谓新样式的文学创作和当时晚明盛行的小品文有相似之处.其原因, 一方面是朴趾源接受当时中国文人的思想熏陶,认为文章不能一陈不变的沿袭古文,而要有自我发展的创新意识. 因此, 他的记文又表现出对传统古文构造的背离, 例如在对某种事物进行叙述的时候, 抛弃传统的地理方位式结构描写, 以空间为中心, 以自我感情为基础, 创造了许多优秀的记文. 不仅如此, 文章中还出现了大量对话结构. 最后, 作家还以中国晚明小品文结构为基础, 在文学创作中大量采用时空交错的结构, 或者以作家视觉为主线, 将对话, 描写,叙述以及抒情融为一体的多重意象组合,这都是传统古文所不具有得特征. 然而,在正祖实行'文体反正'以后, 朴趾源停止了这种创新的文学活动.其原因一方面在于朝鲜社会仍然延续对儒家思想的继承, 因此在某一程度上束缚了国家的发展, 禁锢了个人的创作. 这是无法避免的历史的局限性, 而从他本人来说, 传统的士大夫家庭的身份使他不能从根本上抛弃家庭的制约, 忠君爱国, 教化百姓的责任和目标依然是他文学创作的主体之一. 因此, 他的记文一方面保留对古典的延续,另一方面以古典为基础创造于与时代相呼应的特点. 这种探索方式和其倡导的'法古创新'交相呼应. 另外, 朴趾源的文学创作和较为先进的思想为后世文学家提供了坚实的后盾,在文学史上有重要的意义. 이 논문은 연암 박지원의 산문문학 가운데 실린 기에 대한 분석으로 이를 통해 그의 문체적 특징과 그 의의를 규명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지원에 대한 연구를 정리해보면 우선, 초기 연구는 그의 실학사상을 중심으로 다루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熱河日記」를 대상으로 포함된 한문단편 소설이 큰 주목을 받았다. 마지막은 박지원의 산문에 대한 연구이다. 산문은 실용적인 용도가 있기도 하고 문예 미학적 특징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의 산문 형식과 내용이 어떻게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문체인 古文體에서 일탈했는지, 산문 작품에서 지닌 문예미적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記와 관한 연구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본고는 연암의 記를 연구대상으로 하여 박영철본 󰡔燕巖集󰡕을 텍스트로 그 가운데 실린 35편 기 작품을 분석하였다. 박지원의 기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 이전에 우선 기의 일반적 개념부터 살펴보았다. 기의 광범위의 개념으로 문자적인 뜻은 ‘識記’인데 정통 산문의 영역에 속한다. 기의 문학적 분류를 淸 姚鼐로부터 시작되어 󰡔古文辭類纂󰡕에서 13가지로 나누웠는데 기를 雜記類에 분류시켰다. 曾國藩은 요내의 주장을 바탕으로 11가지로 나누고 3개 부문으로 묶었는데 雜記는 記載門에 포함되어 있다. 林纾는 이러한 분류를 토대로 雜記類 기문의 내용에 따라서 園亭樓台記, 書画器物記, 山水遊記, 人事雜記등 4가지로 구분하였다. 한문학의 경우는 중국 고전에 대한 수용하여 발전하는데 이와 관한 분류는 歷史記錄體, 傳狀體, 雜記體, 筆記體, 혹은 傳記體, 雜記體, 筆記體로 구분하였다. 그 기능에 대하여 樓亭記, 畵記, 山水遊記, 人物記事 등 하위 장르로 분류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가서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한 주자학적 통치이념을 강화시키면서 그 교화적 載道적 기능은 문학의 영역까지 확산되었다. 기의 형태와 내용은 고문의 양식을 그대로 유지해 왔지만 새로운 양상이 생기게 되었다. 여기서 발굴의 성과를 보여준 작가는 박지원이라 들 수 있다. 필자가 박지원의 기 작품에 대해 수록양상과 내용별로 분류한 과정을 통해 그 기는 전통고문의 틀을 계승이면서 시대와 맺은 문학관을 바탕으로 새로운 記文의 시작점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Ⅲ장에서 구체적으로 이러한 양상을 분석하였다. Ⅲ장에는 박지원 기의 글 쓴 방식과 문체적 특징에 대해 고찰하였다. 우선, 「澹然亭記」와 「不移堂記」의 구조를 통해서 전통고문 가운데 開阖對照적 구성방식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전통고문 구조적 배치는 논리와 맥락을 뚜렷하게 규범화하여 진행하고 문장 기본적인 논리에 따라서 보편적인 의미를 밝혔다. 그러나 18세기이란 역사적 큰 전환기로서 조선에 들어온 진보적인 사상을 토대로 고문에 보다 새로운 사고방식을 더하여 새로운 글쓰기 과정을 전개하였다. 박지원의 중국 연행 때 형성된 진보적인 사상, 심지어 당시 유행해온 소품문의 경향을 받아서 전통고문보다 새롭고 실감이 있는 기 작품을 많이 창출하였다. 이에 그의 기 작품은 전통고문의 계승이면서 ‘새로운 글쓰기’를 추구하는 정신도 찾을 수 있었다. 가령 「孔雀館記」과 「荷風竹露堂記」의 경우는 지리방위에 대한 서술방식보다 공간적 구성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사대부의 생활공간을 대상으로 전통고문의 나타난 物-人-理적 전형방식보다 사건을 대상으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는데다가 인간과 자연, 논리와 도덕의 관계를 함께 보여 준다. 게다가 「馬首虹飛記」, 「醉踏雲從橋記」, 「晩休堂記」등 작품을 통해 박지원은 시간과 공간을 전환하거나 다중 이미지를 복합적 사용하여 단순히 이야기 하지 않고 여러 모티프를 제시함으로써 문장의 주제를 뚜렷하게 나타냈다. 따라서 독자들로 하여금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을 통해 작가가 자유를 동경한 마음을 느끼게 하였다. 다음은 정서표출에 관한문제이다. 「咸陽郡學士樓記」와 「獨樂齋記」를 통해 先抑後揚적 정서표출을 분석하였고「馬首虹飛記」와「百尺梧桐閣記」를 통해 頓挫적 정서표출을 분석하였다. 先抑後揚적 정서표출은 작가의 정서를 먼저 억제하다가 끝부분에는 절정으로 올라간다. 頓挫적 정서표출이 문장 가운데 齊行과 散行의 안배, 또한 四言句를 활용하여 원래 짧은 구조의 어조부터 전환하다가 그 촉급함을 통해서 정서의 흠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지막은 형상화에 대한 검토이다. 박지원은 자신이 표현하려는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게 위해서 형상화의 수단을 사용하였다. 「素玩亭記」와「觀齋記」에 나타난 1인칭대화와 3인칭 대화 방식은 독자들은 작가의 심리활동과 생각을 쉽게 이해하거나 액자 중에 있는 대화를 보면서 작가의 입장에 따라서 생각하여 錦上添花화한 문예적 미감을 지니게 된다. 수사 화룡의 특징을 보면 우선「荷風竹露堂記」와「澹然亭記」에서 바람과 이슬로 백성에 비유하는 것과 연꽃과 대나무로 당정자에 비유하는 것이 백성과 함께 즐겨야 비로소 진정한 즐거움이라 표현하였다. 또한 도하와 청장은 명예와 권세를 추구한 자와 세속을 버리고 자유자제한 모습으로 지낸 자에 비함으로써 작가가 공명에 무심 하는 지조를 고조시켰다. 역설은 항상 작가의 태도에 따라서 풍자의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해학의 표현으로도 나타난다. 가령「念齋記」에는 박지원은 송욱이 발광하고 이상한 행동에 대해 역설하여 과거를 그만둔 정신을 긍정하였다. 「竹塢記」에서 양호맹이 귀찮게 기를 써달다고 했는데 이러한 표현은 역시 해학의 표현으로써 독자에게 익살스러운 느낌을 준다. 풍자의 수사기법은 항상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전제하여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본질과 현상의 직접적인 통일과 대조를 통해서 표현된다. 예를 들면「荷風竹露堂記」에는 자주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외워야만 하는 선비들을 풍자하고「晩休堂記」에는 역시 권세와 명예를 추구한 사람을 풍자하였다. 용사의 경우는 깔끔한 언어로 이야기와 주제를 요약함으로써 그 뜻을 전달했다.「貂裘記」나「愛吾廬記」 등 작품에서 많이 인용했는데 독자로 하여금 단일한 화면부터 교묘한 감상에 이르게 까지 한다. 전적에 대한 수용은 󰡔서경󰡕, 󰡔시경󰡕, 󰡔주역󰡕, 󰡔춘추󰡕 등 경전을 수용을 통해 박지원 개인적 고문에 대한 높은 학습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사대부로서 오랜 세월을 통하여 굳어져 온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그의 문학창작 활동도 방해되었다. 그에 의하면 교화나 제도의 유학적 기능을 떨어진 문장은 常道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자신 마음대로 지향하는 문장은 결국 속류로 되는 폐단이 생기게 될 것이다. 창신은 일정한 규범성과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은 박지원은 고문과 소품문의 융합, 고문과 소품문이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박지원의 기 작품을 보면 한편, 그는 학문적, 사상적 기반인 고문의 지향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에서 그의 기에 있어서 고문에 대한 깊은 수양을 사용함으로서 고전에 대한 수용과 계승하여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지향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전환 속에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하였다. 그는 동시대 일부 다른 문인보다 단순히 기존에 문학관을 계승이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수용하며, 실학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개성적이고 현실적인 문학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참신한 개성적인 문학관은 후세를 지향해 나가는 사회에 대해 큰 시사점을 주며 현대의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작품을 통해 조선후기 신진 문인지식층들이 자신의 재능과 포부를 더불어 국가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