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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인의 사생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정효운 동아시아고대학회 2019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55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find out how to change the perception of death of modern Koreans through the historical view of ancient Koreans in ancient Korean history books. Ancient history books for review are Samguk-Sagi(三國史記) and Samgug-Yusa(三國遺事). As a methodology, I examined ‘sasaeng(死生)’, the use of ‘saengsa(生死)’, the ideology of the soul and the afterlife to recognize the state after death and where the soul lives. As a result, the term ‘sasaeng’ is used more frequently than ‘saengsa’ in ancient Korean times and preceded the era. The idea of the soul after death is divided into ‘yeong(靈)’ and ‘hon(魂)’, ‘gui(鬼)’, ‘sin(神)’ etc. In the case of the afterlife, the Confucian and Buddhist post-mortem worldview prevailed more than ideas such as shamanic otherworld and Taoist fairyland. In other words, Samguk-Sagi emphasized the temporal view of Confucian scholars, and Samgug-Yusa reflected Confucian view with the rebirth and paradise of Buddhism. Therefore, it can be seen that there are complex aspects of ancient Korean thinking that are stratified and stratified by the difference in the perception of the Confucianism and Buddhism. 본 연구는 고대 한국인의 사서에 나타난 고대 한국인의 死生觀 분석을 통해 현대인 한국인이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식을 전환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고대 한국의 역사서인 이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나타난 사생관을 비교 분석하고, 방법론으로는 삶과 죽음의 용어인 ‘생사’와 ‘사생’의 용례 비교, 죽은 후의 상태를 인식하는 영혼의 관념과 영혼이 거처하는 사후세계의 공간을 의미하는 他界觀이나 來世觀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 결과, 한국 고대에서는 ‘사생’ 의 용어가 ‘생사’ 보다 많이 사용되고, 시대적으로도 선행하였다. 사후 영혼의 관념도, ‘靈’, ‘魂’, ‘鬼’, ‘神’으로 구분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세관의 경우, 무교의 저승이나 도교의 선계와 같은 관념보다 유교적, 불교적 사후세계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즉, 『삼국사기』는 유학자의 합리적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기에 충효를 강요하는 현세적 사생관이 강조되었고, 『삼국유사』에는 불교사관의 영향으로 윤회와 극락이란 연기설 중심의 사생관과 더불어 유교적 사생관이 함께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고대한국인의 사생관과 타계관 혹은 내세관 역시 한국의 고대가 불교국가였다는 막연한 관념에 의해 접근하는 방식은 재고를 요한다고 본다. 유교를 숭상하는 지식계층이나 불교를 신앙하는 집단 등과 같이 영혼관과 사후세계관의 인식의 차이에 의해 계층화, 중층화 되는 복합적인 측면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효운 대한일어일문학회 2003 일어일문학 Vol.20 No.-
『日本書紀』에 기술되어 있는 이와이 전쟁의 기년을 비판적 검토없이 역사적 연대로서 이해할 경우에는 일본열도 내의 내전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년을 수정하여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에 환원하여 재해석하여 본다면, 이 전쟁은 6세기 한·일세계에서 전개된 국제선적인 성격을 지닌 정쟁으로 여기에는 신라의 국익으로 대변할 수 있는 국가적 이해관계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6세기 한·일세계에 있어서의 특징적인 역사적 전개는 한반도에서의 신라의 약진과 일본열도에서의 九州정권의 대두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세기대의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신라는 대내적 개혁과 대외적 성장을 바탕으로 7세기대에 이르면 한반도를 통일하게 된다. 신라가 이러한 대외적 팽창정책을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야를 자국형으로 흡수함으로서 가야의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할 수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야와 九州지역과의 역사적 친연관계는 지리적, 역사적 조건에 의해 지속적인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행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와이의 전쟁은 신라의 세력 팽창정책에 일조를 한 사건으로 평가하룻 있다. 부언하자면, 이와이 전쟁은 親內세력의 九州 세력의 제압이라는 일본사적 평가보다는 이와이 세력과 야마토정권의 대립 관계를 적절히 활용한 신라 대외정책의 승리라는 한국사적 역사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