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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실규명의 제도화와 다층적 재조명

          정호기(Jung Ho-gi)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2009 제노사이드연구 Vol.6 No.-

          Contrary to expectations that the new administration in Korea would drastically transform the country’s policy on the clarification of the past, there has been little change in the existing mechanism and basic tone of related activities for many reasons. The thorniest issue regarding settlement of the past is mass deaths of civilians during the period from liberation of the country from Japanese colonial rule to the Korean War. This study delves into the differences between and unique characteristics of laws and institutional schemes formulated to reveal the truth of such cases, and touches upon the controversies concerning their implementation, focusing on the purposes and goals of such laws, fact-finding decisions and authority, follow-up actions, and potential issues for the future. The four acts enacted to accommodate fact-finding efforts and changes in governance and to reflect political interests shed new light on mass deaths in an institutional respect. This simultaneously resulted in institutional imbalance and created multi-layered goals concerning the efforts to discover the truth of similar incidents, affecting the objectives and details of such efforts. Most fact-finding efforts, which entail investigations, reconstruction of incidents, and decision-making, were based on witness remarks and interviews due to lack and unavailability of necessary materials. It has been confirmed that the findings have lower-than-expected credibility. The credibility of findings depends on the relationships between the state, press, and victims, and the level of acceptance of them. The task to be tackled after discovery of the truth is to seek social acceptance and necessary changes. Progress in this task seems far below our expectations, which implies that substantive headway will be made only when critical thinking is applied to the truth surrounding mass deaths of civilians under a fundamental goal, thereby healing the wounds that were inflicted.

        • KCI등재

          이승만 시대의 위기 담론과 궐기대회

          정호기 ( Ho Gi Jung ) 한국사회사학회 2009 사회와 역사 Vol.0 No.84

          대중동원에 의한 집단행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많은 근대 국가들이 이를 선호했는데, 한국에서는 이승만 시대에 특히 중요한 통치 전략이었다. 이 논문은 집단행동들 가운데 그 목적과 특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궐기대회’가 ‘위기 담론’과 어떤 관계를 맺고, 특성을 갖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승만 시대에 등장한 위기 담론들은 세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 국가의 존립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구성원 전체에 영향을 주는 위기 담론, 둘째, 정치체제와 정권에 영향을 주는 위기 담론, 셋째,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조장된 위기 담론이다. 각 위기 담론들은 안보 위기와 전쟁, 선거, 그리고 반일운동에서 잘 확인된다. 위기 담론이 활발히 유포된 시기와 궐기대회가 집중적으로 열린 시기는 일치했다. 정부는 이러한 위기 담론들에 근거한 궐기대회의 실질적 주관자이거나 동기 유발자였다. 이승만 정권은 체제를 유지하고 안정화하는 방편으로 위기 담론과 궐기대회를 애용했다. 궐기대회의 구조와 문화적 특성은 주체, 동원 구조와 대상, 그리고 문화적 측면에서 고찰했다. 궐기대회는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각종 사회단체들이 주관했는데, 애국단체연합과 학도호국단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동원은 지역과 직종별 단체들이 동시에 또는 선별적으로 작동하는 구조였다. 대규모 궐기대회는 학생, 노동자, 주민의 동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승만 시대 후반기로 오면서 동원 대상들에 균열이 생겨났다. 궐기대회의 문화에는 식민지의 유산이 상존해 있었다. 동원 대상의 역할은 지극히 수동적이었으며, 시가행진을 통해 관례화된 스펙터클을 연출했다. Various group behaviors are manifested from mass mobilization. Many modern states encouraged such behaviors while they were leveraged as a key strategy in Korea, especially under the Syngman Rhee’ days.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indignation meetings’, of which the purpose and characteristics are distinctively clear among various group behaviors, as well as their relationship with “discourses on crisis.” The discourses on crisis that emerged during the Rhee administration can be categorized into three segments. The first is discourses on crisis that directly concerned national existence and affected the entirety of constituents. The second is discourses on crisis that impacted the political system and regime. And, the third is discourses on crisis that was manipulated based on uncertain substances. Each of these discourses can be well identified in a security crisis, war, election or anti-Japanese movement. The times in which discourses on crisis were being widely disseminated coincid d with those periods wherein rallies were being intensely held. It was the government itself that actually sponsored or motivated the indignation meeting that were grounded on such discourses on crisis. The Rhee administration used discourses on crisis and indignation meetings as a means to maintain and stabilize its regime. The structure and cultural characteristic of indignation meetings were researched in terms of the main group, structure and subject of mobilization and how indignation meetings affected society on a cultural aspect. Indignation meetings were sponsored by various organizations headed by Syngman Rhee with the Coalition of Patriotic Organizations and the Student National Defense Corps particularly active among them. Mobilization of the people was structured to take place concurrently or selectively by regional and occupational organizations. Large-scale indignation meetings were enabled through mobilization of students, laborers and residents, however, chasms emerged among those mobilized in the latter half of the regime. Some legacy of the colonial times still existed in the culture of indignation meetings. The role of those mobilized were extremely passive, and they staged customary spectacles through street marches.

        • KCI등재후보

          전쟁 기억의 공간화와 구조의 분화: 전쟁박물관을 중심으로

          정호기 ( Ho Gi Jung ) 한양대학교 제3섹터연구소 2011 시민사회와 NGO Vol.9 No.2

          한국에는 전쟁을 주제로 하는 많은 기념물과 공간이 있다. 이 글은 전쟁, 특히 한국전쟁에 관한 사회적 기억의 공간화 주제들과 그 분화 그리고 건립 구조의 특성을 전쟁박물관들을 중심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전쟁박물관은 공식적 전쟁 기억을 공간화 했던 주제들의 형성과 변화를 잘 보여준다. 이 글은 먼저 전쟁박물관의 정의와 의미를 정립하고, 이에 의거하여 건립 주제들의 형성과 분화를 성찰한다. 전쟁박물관 건립의 특성과 변화는 주체, 장소성 그리고 재현과 담론을 쟁점으로 분석한다. 전쟁박물관은 1962년에 처음 등장했다. 전쟁박물관의 건립 주제는 군사정부와 민간정부에서 차이보다 연속된 점이 많았다. 주제는 전사자 숭배, 각 군의 역사, 전적지, 참전, 전쟁 영웅, 베트남전쟁 등으로 확장되고 다양화되었다. 이는 군사정부 시대에 정립되었고, 민간정부에서 다소 변화했으나, 대체로 관철되었다. 여기에는 통치체제의 특성이 중요했는데, 전쟁 기념의 주기성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박물관 건립은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를 경과하면서 감소했다. 주체는 국가가 직접 주관하는 방식에서 간접 지원 혹은 후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민간정부 시대에는 중앙정부가 아닌 군 관련 단체, 지방정부 등이 건립 주체가 되었다. 건립 장소는 주제 및 주체의 특성을 반영했다. 전쟁박물관은 전시를 통한 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전시 공간은 주로 군사적 재현과 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평화박물관 건립이 갖는 문제의식과 재편 방안의 수용이 요구된다. There are numerous monuments and spaces in Korea about war. They honor those who fell in war in defense of the motherland, memorialize battles and other war-time events, and educate the public about war and its history. This article considers how society`s memories of war, especially the Korean War, have been embodied in spaces such as war museums. Other subjects considered are the nature of the process of establishment of such spaces and diversification of their characteristics. War museums bear clear evidence of the embodiment of official memories about the wars and the formation and change of the themes. This article looks into the definition and meaning of war museums and introspects on the formation and change of their themes.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 in their establishment are analyzed from the perspectives of the main agent, spatial nature, and reproduction and discourse. The first war museum in Korea was established in 1962. The themes of war museums have been more consistent than not regardless of whether a military or civil government was in power. The themes have expanded and diversified to include memorializing those killed in battle; the history of each branch of the armed forces; battlefields; participation in wars; war heros; the Vietnam War, and more. This framework was defined during the military government era and changed somewhat after the civilian government came into existence but remained largely intact. This demonstrates that though the type of ruling system is important, the periodicity of war celebration also has a huge impact. Fewer war museums were established through the Kim Youngsam and Kim Daejung governments. The role of the government has changed from direct supervision to indirect support or sponsorship. During the civilian governments, not the central government but military-related organizations, local governments, and other such parties emerged as the main agents of establishment. War museums have been built at appropriate sites depending on their purpose and the main agents of establishment. The war museums have focused on education of the public through exhibitions, and their exhibition spaces are filled with military reproductions and discourse. As such, there is a critical need for the establishment of peace museums and for the restructuring of war museums.

        • KCI등재

          1930년대 전반기 ‘전북교원사건’의 구성과 재해석

          정호기 ( Jung Ho-gi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20 역사학연구 Vol.79 No.-

          사회주의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이해하고 구성하는데 생략할 수 없는 주제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에 대한 인식은 양면적인데, 하나는 존재와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서와 자료에 남겨진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당국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조직사건이 구성되었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글의 연구 대상은 1930년대 전반기에 사회주의 항일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전북교원사건’이다. 이 사건의 공식 별칭은 ‘조선공산주의운동통일동맹사건’이다. 이 사건은 1933년 중반에 전북 임실에서 시작되었고, 1935년 10월 25일 재판부의 판결로 종결되었다. 1년여에 걸친 경찰의 수사와 검거는 전북을 넘어 전남의 동부 지역과 경상도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그 외 지역들에서도 수사가 전개되었다. 경찰은 수사 초기 단계에 사건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록과 자료에 의하면, 평소 주시하던 사회주의자들과 조직운동 전력자를 ‘투망식’으로 조사ㆍ검거하면서 사건을 확대하고 구성했음이 확인된다. 경찰은 장기간 구금과 강압적인 조사를 벌여 단일 사건으로 구성했는데, 수사의 과정에서 새로운 수많은 조직사건들이 생겨났다. 수백 명을 연행하여 조사했으나, 예심에 회부된 사람들은 42명이었고, 재판부는 32명만 유죄를 인정했다. 예심과 재판결과는 ‘전북교원사건’이라는 명칭이 표상하는 성격을 점점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성격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판결했으나, 판결문은 이를 입증할 충분한 개연성을 담고 있지 않았다. Socialism is a subject that cannot be omitted in understanding and constitut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nti-Japanese movement. The perception of socialist anti-Japanese movements during this period is two-sided. One is denying existence and activity itself. The other is to acknowledge records left in documents and materials as true.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reveal that the Japanese colonial era socialist organizational incidents may have been organized according to the needs and purposes of the authorities, and that there is room for interpretation. The subject of this study is the ‘Jeonbuk Teachers Incident,’ which was tried for the socialist anti-Japanese movement in the early 1930s. The official name of the incident is ‘Unification Alliance of Chosun Communism Movement.’ The incident began in Imsil, Jeonbuk province, in mid-1933 and ended with a court ruling on October 25, 1935. The investigation and arrest operations over a year have expanded beyond Jeonbuk to eastern Jeonnam and Gyeongsang province, while investigations had also been carried out in other areas. Police claimed to have grasped the structure and characteristics of the case in the early stages of the investigation. However, records and data show that the case was expanded and cleared by investigating and arresting the socialists and those whom the authorities have been keeping an eye on. The police conducted long-term detention and coercive investigations and formed a single case, which resulted in numerous new organizational incidents. Hundreds of people were taken into custody for questioning, but 42 were referred to a preliminary hearing, while only 32 were found guilty. The outcome of the preliminary trial and trial were no different from the increasingly denying the character of the name ‘Jeonbuk Teachers Incident.’ The court ruled the nature of the case as a movement to rebuild the Communist Party of Korea, but the ruling did not contain enough probability to prove it.

        • KCI등재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의 결성과 진상규명운동

          정호기(Jung Ho-Gi) 역사문화학회 2006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9 No.2

          Entering the 2000s, South Korea has witnessed the launch of various organizations and associations to honor the memory of the civilian victims who passed away during, or immediately before or after the Korean War. Besides, these organizations further serve to find the causes of death for the deceased. Among those groups, associations embarked on by the bereaved have the most direct bearing on such civilian victims. Most of the associations of bereaved families were formed five to six years ago, but have grown rapidly to gain large memberships and wield a tremendous influence on society. In particular, more survivors' associations have been set up in Southern Jeolla Province or Jeollanam-do than in any other region of the country. Furthermore, the large quantity of activity performed by the associations has been remarkably noticeable. In addressing this phenomenon, this research examines the structural and process-related aspects of the formation of such associations as social movement organizations. It also analyzes the way they recruit their members and develop their own identity. The research further reviews the position the associations have secured in the context of so-called fact-finding movements. Finally, the research attempts to define and categorize characteristics of the relationships the associations have with a range of organizations and groups engaged in fact-discovery initiatives. The reason the province has seen the formation of more associations of the bereaved than the other parts of the country is related to the fact that it has opportunity structures that assist the issue of civilian victims to emerge as a point of social contention. Moreover, the area has historical incidents or regional traits that facilitate those opportunity structures to function effectively. The number of victims dwarfs the memberships of the bereaved associations. However, becoming a member of such an organization is anticipated to involve potential losses and persecution and thus, calls for unusual courage. In addition, in order to become a member of such an association, one has to be fully committed and ready to bear any possible financial costs that are required to carry out activities as a member. The procedures and documentation requirements for one to be a member is simple, but the way such associations substantiate the death of a victim is apparently controversial. While the associations' activities to proceed with fact-finding movements and promote 'mutual fellowship' serve to strengthen their identity, their behavior to divide and differentiate the activities of the victims and direct causes of death undermines their identity. Fact-finding movements, more specifically, comprises fact investigations, memorial events and memorial projects. In many cases, associations do not play a leading role in the fact-finding research, but are able to press ahead with their fact-discovery endeavor only with support and assistance from other related organizations and groups. However, notwithstanding their limited roles, the symbolic significance of those associations tend to place them at the heart of the fact-finding movements.

        • KCI등재후보

          일반논문 : 역사박물관의 구성과 전시 그리고 재현 논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3∼4전시실을 중심으로-

          정호기 ( Ho Gi Jung ) 한양대학교 제3섹터연구소 2013 시민사회와 NGO Vol.11 No.2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2012년 12월에 개관했다. 이 박물관 건립은 제17대 정부의 역사 인식과 정책을 잘 보여주는 국책 사업이었다. 200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표되었던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를 구현하는 것이 이 박물관의 사명이었다. 이 글은 이 박물관의 역사관이 가장 잘 투영된 것으로 판단되는 제3∼4 전시실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했다. 이 글은 어떤 배경과 맥락에서 이 박물관이 건립 및 구성되었고, 공간 연출의 주안점이 어디에 있었으며, 공간의 재현 논리가 어떻게 관철되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가장 많은 면적이 할당되고, 사업비가 투입된 제3전시실은 제3∼5공화국을 대상으로 하지만, 사실상 박정희 시대관이라고 할 수 있다. 제6공화국을 대상으로 하는 제4전시실은 각 정부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 보다, 근래에 세계에서 선호를 받는 한국의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초점이 있다. 전시공간은 조명과 주제를 연계지어 제3전시실은 어둠의 강약으로, 제4전시실은 밝음으로 시대상을 표현했다. 전시공간에는 소품과 전시기법의 사용과 배치가 중요한데, 제3전시실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제4전시실은 첨단전자제품들로 채워져 있다. 한편 대통령 집무실의 배치는 이 박물관의 장소성을 암시해준다. 전시공간의 재현 논리에서 보면, 제3전시실은 성장과 발전의 시대를, 제4전시실은 한국 경제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음을 재현 한다. 이러한 특성들을 고려하면, 제3∼4전시실은 생활관이나 사회관의 요소들도 갖고 있지만, 보다 지배적인 성격은 홍보관과 산업관인 것으로 평가된다.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was opened in December 2012. The construction of this museum was national project well be exposed historical view and policies of the 17th government of Korea. The mission of this museum was to implement ``history of success``, ``history of progress`` and ``history of miracles`` announced by the president on independence day in 2008. The subject of this study was exhibition 3-4 hall, which has shown to be well reflected historical perspective of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This study deals with some backgrounds and contexts of constructing and composition of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what is the point of the space direction and how did carry through the representation logic of space. Exhibition hall 3 which was assigned to the large area and committed the most cost included Republic of korea 3-5, in fact can be said Park Chung-hee government exhibition hall. Exhibition hall 4 targeting Republic of Korea 6 didn`t show the characteristics of each government, rather emphasized to show the preferred image of Korea in the world in recent years. Images of each period seemed to be expressed by linking illumination and theme in exhibition space, exhibition hall 3 adjusted by strength of the darkness, and exhibition hall 4 was represented by the brightness. In the exhibition space, props, use of display techniques and placement are important, the focus is aligned the exhibition hall 3, the exhibition hall 4 is filled with high-tech electronic products. Meanwhile, artful spatial arrangement of the president office provides a hint about location of this museum. In the representation logic of exhibition composition, exhibition hall 3 reveals the growth and development period, exhibition hall 4 shows Korea`s economic level is developed countries. Given these characteristics, exhibition hall 3-4 have elements of exhibit rooms about life and society, but also have more dominant elements of public information and industrialization.

        • KCI등재

          4월혁명기 전남지역의 노동조합과 노동쟁의

          정호기(Jung, Ho-Gi) 역사문화학회 2013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16 No.1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4월혁명기’는 중요한 변환점이었다. 이 시기 전국에서 노동조합들이 재편 또는 신설되었고, 노동쟁의가 급증했다. 그런데 노동부문은 4월혁명이 ‘미완의 혁명’이었음을 입증 하는 적절한 사례이기도 했다. 4월혁명기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들이 여럿 있지만, 전남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미흡했다. 그래서 이 글은 4월혁명기 전남지역 노동조합의 변화와 노동쟁의의 특성을 중심으로 이 시기 노동운동의 일면을 규명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노동조합의 변화는 지속, 교체, 신설로 유형화하여 고찰했다. 노동조합들은 기존의 흐름이 지속되거나, 지도부가 교체되었지만 실질적 의미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다수의 노동조합 위원장들이 대한노총에서 배제 혹은 다른 입장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에 기인한 바가 크다. 노동조합의 재편과 변화는 도시별 4월혁명 양상과 관계가 있었고, 많은 노동조합들이 신설되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전남지역의 노동쟁의는 4월혁명이 진행되던 무렵부터 시작되어 5?16이 발생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쟁의의 쟁점은 체불임금 지급 요구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임금인상, 단체협약 체결 또는 경신, 노동환경 개선 등이 많았다. 노동쟁의는 노동쟁의가 빈발한 사례, 노동쟁의가 장기화된 사례, 경영진의 적극적 노무관리가 돋보이는 사례 등으로 다양한 특징을 보였다. In the history of Korea’s labor movement, ‘the period of the April revolution’ was a very important turning point. In this period, labor unions were reorganized or established in the country, labor disputes were greatly increased. In the division of labor, the April revolution was an appropriate case to prove ‘unfinished revolution.’ Although there are a large number of studies on labor movement of the period of the April revolution, there is insufficient on Chonnam region.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aspects of labor movements focusing on the change of regional unions in Chonnam and characteristics of labor disputes. The main subjects of this study are the changes of labor unions and labor disputes in Chonnam during the period of the April revolution. The changes of labor unions in Chonnam during the period of the April revolution had been classified to maintain, replace and organize newly. Existing flow of labor unions was lasted or leadership was replaced. But in most cases, there was no practical means. The main reason was that a large number of union chairpersons have to be excluded or different comments and careers about DaeHanNoChong. Reorganization and changes of labor unions was related to patterns of the April revolution by city, and confirmed many labor unions were organized newly. Labor disputes occurred continuously in Chonnam from progressing time of the April revolution to outbreak of 5?16. Unpaid payroll needs is the most common issues of labor disputes, higher wages, collective agreements concluded or renewed, and better working conditions was next. Labor disputes had various aspects such as cases of frequent labor disputes, cases has been prolonged labor disputes and cases the company’s active labor management practices were revealed.

        • 일반논문 : "과거사"의 상흔 치유와 효과에 대한 성찰

          정호기 ( Ho Gi Jung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기억과 전망 Vol.0 No.20

          `과거사`의 상흔 치유를 위한 제도가 실행된 이래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지만 그 방법의 적절성과 효과에 대한 논의는 빈약하다. 이 글은 과거사의 상흔에 대한 사회적 치유의 일환인 국가가 주체가 된 청산작업이 어떤 효과를 거두고 있는가를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 글에서 관심 있게 보려는 것은 과거청산 모델의 형성과 치유 방법의 구성, 제도적 상흔 치유의 실효성과 한계, 그리고 상흔 치유에 대한 사회의 반향 등이다. 과거사의 상흔 치유를 위한 제도는`5·18 모델`, `민주화 모델` 그리고 `민간인 희생 모델`로 유형화할 수 있다. 이들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후속 모델들의 성격과 청산작업의 수준은 점점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도의 치유를 위한 구체적 조치들은 거의 무시되고 있었고, 사법부의 판결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상흔 치유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피해의 배·보상은 사실상 답보 상태였다. 과거사의 상흔 치유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향도 미비했다. 이와 같은 현상들로 인해 시민사회에서 과거사의 상흔 치유를 위한 새로운 주체를 구성하고 대안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크게 요구되고 있다. More than a little time has passed since the implementation of systems for healing the wounds of the past. However, there has been little discussion about the suitability and effects of the methods used in such systems.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osely examine the effects of work aimed at clearing the past, which the government is pursuing as part of social healing of wounds from the past. What this paper intends to focus on are the composition of the method of forming models for the clarification of the past and of healing, the effectiveness and limitations of institutional healing, and the social response toward healing, among other matters. Systems directed at healing the wounds of the past can be categorized into several types: the `May 18 model` the `democratization model` and the `civilian sacrifice model` They are all closely related. For several reasons, the characteristics of the later models and the level of work committed to clearing the past have been steadily diminishing. The detailed measures adopted to bring about healing have been largely disregarded. It was not until rulings were made on these measures by the judiciary that they began to demonstrate some effects. Compensation for damages, which is regarded as an important way of healing the wounds of the past, is practically at a standstill. The response by civic society toward healing the wounds of the past is also weak. Due to the abovementioned phenomena, there is a significant need to create a new entity in civic society to lead efforts to heal the wounds of the past and to find alternative ways of do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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