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 좁혀본 항목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 작성언어
          • 저자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한중관계의 쟁점 분석

          鄭千九(Jung Cheon-Koo) 대한중국학회 2005 중국학 Vol.25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 와카(和歌)에 대한 밀교적 해석

          정천구(Jung Chun koo)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2013 일본불교문화연구 Vol.- No.8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샤세카슈(沙石集)』는 중세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설화집으로, 무주 이치엔(無住一圓, 1226∼1312) 이 편찬하였다, 이 책의 권5에는 일본의 고유한 시기인 와카(和歌)기 대거 수록되어 있어 주목을 끄는데, 특히 이와카에 대해 이치엔이 밀교적 해석을 덧붙이고 있어 고찰할 필요가 있다. 외카애 대해서는 가인들에 의해 문학적으로 해석되어 왔으나, 이치엔처럼 밀교와 관련지어 해석한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이치엔 이전에 사이교(西行) 법사나 지엔(慈圓) 등과 같은 승려들에 의해서 와카가 진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암시되거나 간략하게나마 거론된 적은 있다. 그러나 이치엔은 더욱 심도있게 해석을 하여 일종의 가론(歌論)을 마련하였다, 이치엔은 와카에 총지의 덕이 있다고 하면서 와카와 진언이 하나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주정의 근거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기원에서 일본 토착의 신이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와카이고, 그 신은 부처나 보살과 다르지 않은 존재이므로 와카는 곧 부처의 말씀과 같다는 것이다. 둘째는 와카의 글자 수 서른 한 자가 『대일경』의 서른 한 품과 같다는 것이다. 셋째는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 진언이다"는 것을 틀어 와카 또한 입으로 나온 말이므로 진언과 다르지 않다고 한 것이다. 이치엔의 해석은 그대로 중세적 사유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세전기에는 문명권의 중심부와 주변부가 우열의 판제에 있어서 주변부는 중심부에서 공동문어인 한자와 보편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여서 높이 받들며 열등한 처지에 있었으나, 중세가 진행되면서 차츰 자국의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중심부와 대등하다는 인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문명권의 문화는 서로 대등하다는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 와카에 대한 밀교적 해석이었다. 즉, 주변부의 노래인 와카가 문명권에서 공통적으로 창작되던 한시와 다르지 않고 와카에 담은 뜻이 불교의 핵심과 통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중심부와 주변부는 대등하다는 것이었다. Muju Ichien(無住一圓, 1226∼1312) wrote a book titled Shasekishu(沙石集) in which is comprised many tales concerned with Buddhism and explanations for its tales. Especially, he compiled a hundred Waka(和歌) in volumn 5 and explained them in detail and in depth. WaKa is poetry native to Japan from ancient times, and has been explained from the viewpoint of literature by many poets. But Ichien explained it from the viewpoint of Tantrism(密敎). He was not originated in its explanation and inspired by predecessors who are Buddhists of Sagyo(西行) and Jien(慈圓). They suggested or explained briefly that Waka is connected with Dharni(眞言). Ichien said that Waka has the virtue of Dharni, and insisted that waka is the same with Dharni. His explanation is based on following facts. First, originally waka was sung by the native god who is not different from Budda or Boddhisattva. Therefore waka is the same with words laid tongue of Buddha. Second, waka is composed with 31 syllables, and its number is the san1e with chapters of Great Sun Sutra(大日經) which is the fundamental Sutra in Tantrism. Third, on the ground that all words from the tongue are Dharni, he insisted that waka sung by a spoken language is not different with Dharni. The explanation of Ichien indicated that a way of thinking was changing in n1iddle ages. Early in the middle ages, there was a relationship of superiority or inferiority between the center and the periphery of the civilization. In the East Asia, the people in the periphery had to adopt Chinese character and Buddhism to aspire to attain to the cultural society. It was because they were in inferiority. But they were getting to recognize their native culture from the other viewpoint, and finally attained to the awakening that the culture of the center and the periphery is equal in value. Ichien showed that equality in his Tantric explanations of Waka.

        • KCI등재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사석집(沙石集)」의 효에 대한 인식 비교

          정천구 ( Chun Koo Jung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08 嶺南學 Vol.0 No.14

          『삼국유사』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의외로 「효선」편에 대한 연구는 적다. 이는 설화의 수가 적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적은 수의 설화들이 어우러져서 간단하게 해석할 수 없는 복잡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복잡성이 『삼국유사』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내는 것이면서 편찬자인 일연의 인식 또한 잘 읽을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본 고에서는 그런 관점에서 「효선」편의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 읽으면서 새롭게 해석하려 하였다. 나아가 중국 선승들의 효에 대한 인식, 일본에서 편찬된 설화집인 『沙石集』에 실려 있는 효 설화들을 아울러 살펴봄으로써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선승들이 어떻게 세속의 효를 받아들이고 인식했는지를 비교하였다. 이를 통해 일연의 효 사상이 갖는 특성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중국의 선승들은 불교가 유교의 효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유교의 효와 불교의 효가 상통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일연은 유교의 효와 불교의 선이 둘이 아닌 하나이며, 이는 보편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沙石集』에서는 다양한 효 설화들이 실려 있어 효에 대한 인식이 넓기는 하였으나, 효 사상에서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There has been studied so much on Samguk yusa三國遺事. But treatises on the chapter called Hyoseon孝善 are not so many comparatively. Because there are just five tales in that and those tales have hermeneutic complexities. Those complexities are arisen out of weaving different tales which easily cannot unravel the meanings and purports behind those tales. In this thesis, I have perused each tales of Hyoseon and interpreted from a new standpoint. And then I have extracted thought of filial piety孝 of Ilyeon一然 from that interpretation. In addition, I have extracted that of Chinese Zen Masters from several sources and analyzed tales on filial piety in a collection of tales named Shasekishu沙石集 in Japan. And then I have compared those thoughts of Chinese and Korean, Japanese Zen Masters. With comparative study, I have lightened Ilyeon`s particular but universal thought of filial piety, which is original and distinct from Chinese and Japanese thoughts.

        • 『삼국유사』 <진표전간>의 의미 고찰

          정천구 ( Jung¸ Chunkoo )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2020 강원문화연구 Vol.41 No.-

          『삼국유사』의 <진표전간(眞表傳簡)>은 강원도 지역에서 구전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진표에 대해서는 『송고승전(宋高僧傳)』(988) 권14의 <진표전> 및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發淵藪石記)>(1199) 등의 전기가 있었음에도 굳이 구전을 실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따라서 <진표전간>을 자세하게 분석해서 그 의미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진표전간>은 서사와 논증으로 이루어져 다른 전기와 사뭇 다르다. 그러나 서사만을 비교해도 그 차이는 뚜렷했다. <진표전>은 오로지 득도 또는 상구보리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었다. <발연수석기>는 교화 또는 하화중생까지 서술했으나 교화의 대상으로 사람만을 중시했으며, 승려가 민중보다 우월한 대상이라는 통념을 따르고 있었다. 이 둘에 비해 <진표전간>은 상구보리보다 하화중생을 강조했고, 교화의 대상에 어족인 축생까지 포함했다. 이는 승려와 민중, 축생 셋을 차별적으로 보지 않고 대등하게 보는 ‘불이(不二)’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일연도 ‘찬시(讚詩)’를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일연은 논증을 통해서도 서사의 ‘불이’ 인식을 다른 측면에서 뒷받침했다. 경전과 위경을 그 내용 즉 부처의 교법에 적합한지, 수행과 득도에 유익한지로 판단해야지 번역자나 일시, 장소 따위 외형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진표전>이나 <발연수석기>와 같은 승려들의 기록과 <진표전간> 같은 민중의 구전이 대등하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전체적인 의미로 보자면, 오히려 <진표전간>이 불교의 교리를 더욱 충실하게 담아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진표전간>에는 불교 교리의 요체인 ‘불이(不二)’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이 일연이 다른 전기가 아닌 <진표전간>을 『삼국유사』에 실은 이유였다. < Jinpyojeongan(眞表傳簡) > written by Ilyeon(一然) in Samgukyusa(三國遺事) was originally a folktale transmitted orally in Gangwon-do region since 8th century. Regarding that there already existed Jinpyo's biographies in < Jinpyojeon >, the 14th Vol. of < Songoseungjeon >(宋高僧傳)』(988), and < Gwandongpungakbalyeonsuseokgi(關東楓岳發淵藪石記 >(1199), there seems to be a reason for adding this tale.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analyze < Jinpyojeongan > in detail and consider its meaning. < Jinpyojeongan > is different from other biographies in that it consists of both narrative and argumentation. The narrative itself shows differences. It focuses on spiritual enlightenment and Sanggubori(上求菩提, its pursuit). < Balyeonsuseokgi(鉢淵藪石記) > deals with Hahwajungseng(下化衆生, teaching people and leading them to enlightenment), but, focusing only human beings as subjects of education and following the common notion that monks were superior to average people. On the other hand, < Jinpyojeongan > more emphasized Hahwajungseng than Sanggubori and also regarded animals as those of edification, showing the perception of ‘non-duality(不二)’ which views each group of monks, people, and animals not discriminately but equally. Ilyeon supported this point clearly through ‘Chansi(讚詩).’ Ilyeon also showed the perception of non-duality through argumentation as well. He insisted that Buddhist texts(佛經) and apocrypha(僞經) should be judged by the suitability for the Buddha's teaching and the instructiveness for training and enlightenment for beings, not by when, where and by whom they were interpreted. It implies that the oral traditions of ordinary people such as < Jinpyojeongan > are parallel to the records by monks like < Jinpyojeon > and < Balyeonsuseokgi >. In the overall sense, < Jinpyogangan > is more faithful to the Buddhist doctrine than others. Thus, we could figure out that < Jinpyojeongan > represents the idea of non-duality, the main element of Buddhist doctrine, in various ways, and that it was the reason Ilyeon included this tale in Samgukyusa rather than other biographies.

        • KCI등재

          부산 지역 원효 설화의 의미 고찰 - 『삼국유사』 설화들과 비교를 통해 -

          정천구 ( Jung¸ Chun-koo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21 항도부산 Vol.42 No.-

          원효 설화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부산 지역에서도 주목할 만한 설화들이 전하고 있다. 원효 설화에 대한 연구들이 적지 않았음에도 부산의 원효 설화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원효가 입적한 뒤로 1,3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전승되고 있는 설화들은 민중이 원효를 어떻게 생각하고 불교를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를, 다시 말해 민중의 심리와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다. 이 연구에서는 금정산 일대에 전하는 <원효대>, 기장 지역 사찰들의 내력을 알려주는 <척판암>, <안적사>, <석탑사>, <옥천사> 등 설화들을 『삼국유사』의 설화들과 비교하며 논의했다. <원효대>는 원효가 살생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왜구를 물리친 설화인데, 이에는 복수를 바라지 않는 민중의 마음이 반영되었다. <척판암>은 원효를 통해 신라의 승려가 중국의 승려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담아내 오래도록 지배적이었던 화이론, 즉 중국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며 주변의 오랑캐 나라들은 열등하다는 논리에 대담하게 반론을 폈다. <안적사>는 원효와 의상이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임을 보여주면서도 원효가 도력에서 의상보다 낫다는 것을 표현했다. 이는 민중이 왕실 및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의상의 귀족불교보다 민중들과 함께했던 원효의 민중불교를 더 우위에 두었음을 의미한다. <석탑사>와 <옥천사>는 관음보살이 ‘예쁜 아가씨’와 ‘아름다운 처녀’로 각각 나타나서 원효와 의상 두 스님에게 감로수 같은 물을 주어 갈증을 해소해 주는 설화다. 이 설화는 두 스님이 성불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숭고하게 추구했음을 보여주며, 특히『송고승전』과『삼국유사』 등에서 계율을 벗어난 행동을 거침없이 하여 비속한 승려로 묘사되었던 원효까지 숭고하게 보았음을 말해준다. 민중은 설화를 통해 역사를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인식이나 견해를 표현해 왔다. 부산 지역의 원효 설화들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교를 비난할 때면 등장하는 ‘기복신앙’의 요소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민중도 승려들이나 지식인들 못지않게 불법에 또 이치에 밝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Folktales of Wonhyo(元曉) who lived during 7th century are handed down from 8th century to these days and spread all over the country. In Busan region we can find some of them which are unique and universal but have hardly been studied by scholars. Those folktales are written down quite recently, and as follows: < Wonhyodae(元曉臺, Wonhyo's lookout >, < Cheokpanam(擲板庵, Thrown a tray hermitage) >, < Anjeoksa(安寂寺, Easily calm temple) >, < Seoktapsa(石塔寺, Stone pagoda temple) >, < Okcheonsa(玉泉寺, Jade water temple) > etc. In this study, I analyzed folktales of Wonhyo in Busan region and elucidated the phases and the meaning of them in comparison with folktales of Samgukyusa(三國遺事). This work showed up folks' thinking of Wonhyo and their understanding the Buddhism. In < Wonhyodae >, Wonhyo repelled Japanese invaders in the way of minimizing killing the enemy. It means that folk didn't have a will to pay off an old grudge against them. < Cheokpanam > have a purpose to refute Sino-Barbarian doctrine(華夷論) which is the claiming the supremacy of its central culture and the consciousness of intellectuals and ruling class from middle age to modern age. It insisted that Silla Buddhism is superior to Chinese Buddhism. In < Anjeoksa > folks are willing to express their mind being more favorable to Wonhyo than Uisang(義湘). It means that Buddhism for folks is more close to Buddha’s teaching and superior to Buddhism for king and noble. < Seoktapsa > and < Okcheonsa > have the same element of story that a pretty lady or a beautiful virgin gives sweet water or fountain water to Wonhyo and Uisang being thirsty. These two tales acknowledge that two monks exerted themselves to achieve the sublime and ultimate goal to be Buddha. Especially, it is notable that Wonhyo whose saying and behavior had been considered vulgar and beyond religious discipline is described as sublime.

        • KCI등재

          『선문염송』의 편찬에 대한 사상사적 연구

          정천구(Jung Chun-k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한국학 Vol.32 No.3

          신라 말에 들어온 선종은 고려 초기를 지나면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것은 나말여초의 선사들이 선사상을 온전하게 체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선사상은 교학의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이해와 문자에 대한 집착에 반발하여 직관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사상이어서 쉽사리 터득하기 어려웠다. 고려 전기에는 화엄종과 천태종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들 종파들은 왕실이나 귀족들과 결탁하여 경제적으로 윤택해졌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타락하면서 오히려 선종이 혁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지눌에 의한 수선사 운동은 바로 사상의 혁신을 이룩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이는 그의 제자인 혜심으로 이어져서 『선문염송』이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선종은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하면서 거듭표현의 혁신을 이룩하였는데, 그 본보기가 『경덕전등록』을 비롯한 전등록들과 송고, 염고 등의 선문학이다. 그런데 『선문염송』에서는 이를 아우르는 글쓰기 또는 구성을 함으로써 독자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동시에 송대의 선종이나 간화선과 같이 형식화나 정형화로 떨어질 위험도 내포하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선문염송』의 편찬이 사상과 표현 또는 사상과 글쓰기의 관계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 사상사적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In the End of Silla Dynasty, many Zen masters of Silla had brought in Zen Buddhism from T’ang China. But they had not mastered of Zen Buddhism and therefore it had been weakened considerably in the Middle of Goryeo Era. Ironically, Hua-yen(華嚴) sect and T’ien-t’ai(天台) sect which have gained power had depraved and corrupted morally by being allied with a royal family and noble families, and so Zen Buddhism had a golden opportunity to revive. The Essential nature of Zen Buddhism can be summarized in four short statements: (1) “special transmission outside the teaching”(敎外別傳), (2) “nondependence on writings“(不立文字), (3) ”direct pointing to the human heart“(直指人心), (4) ”realization of one’s own nature and becoming a Buddha“(見性成佛). Zen master Jinul(知訥) advocated practicing Zen meditation and wisdom simultaneously(定慧雙修), which was a kind of religious innovation. Zen Buddhism in Korea has been settled by Jinul’s innovative thought. Immediately his disciple Hyesim(慧諶) compiled Seonmunyeomsongjip(『禪門拈頌集』) which is a kind of innovation in writing. In this study, I have dealt with correlation of thought and writing in Zen Buddhism through Jingde chuandenglu(『景德傳燈錄』) and various works of Zen literature, and then clarified the meaning of compiling Seonmunyeomsongjip in the history of thought.

        • KCI등재

          일연의 역사지리 인식

          정천구(Jung, Chun?k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 한국학 Vol.43 No.3

          『삼국유사』는 제목에서 ‘삼국의 유사’임을 밝혔음에도 「기이」편의 앞부분에 ‘삼국 이전’의 역사와 관련된 조목들을 열 편 이상 수록하고 있다. 이 조목들은 단순히 역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신라시조 혁거세왕〉 이후의 조목들과 글쓰기에서도 차이가 난다. 이런 독특한 구성과 글쓰기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일연은 「기이」편의 앞부분에서 삼국 이전의 역사적 사실을 주로 설명과 논증의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신라시조 혁거세왕〉 이하가 거의 서사라는 점과 대비된다. 사실을 전달하는 설명과 주장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논증이 쓰인 것은 지리적 정보를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이 지리적 정보는 두 개의 큰 흐름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고조선〉에서 〈오가야〉까지이며 다른 하나는 〈북부여〉에서 〈우사절유택〉까지다. 이 두 갈래는 고대사가 북방의 대륙에서 남방의 해양으로 지리적 이동을 해온 역사임을 공통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이는 일연이 ‘삼국 이전’의 역사를 단순히 시간적 흐름에 따라 이해하지 않고 지리적 변화와 아울러 파악했음을 의미하며, 왕권이나 정치체의 계승이 아닌 다른 계통을 세우려 했음을 의미한다. 고대사를 북방에서 남방으로, 대륙에서 해양으로 전개되거나 이동한 역사로 본 것이다. 일연이 고대사의 흐름을 지리적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 즉 역사지리적으로 파악한 것은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뛰어난 인식이다. 이를 부실하고 불충분한 자료로 말미암아 고대사의 전개를 온전하게 서술할 수 없었던 한계에서 나왔다고 볼 여지도 있으나, 그보다는 한국의 고대사가 ‘대륙에서 해양으로’ 지리적 이동을 한 역사임을 통찰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The title of Samgukyusa(三國遺事) means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Korea(三國) which is Goguryo, Baekje, and Silla. But Ilyeon(一然) who is the author of Samgukyusa had written the history of before the three kingdoms in Kiyi(紀異), which is a foremost chapter(篇目) in it and contains 57 items(條目). In Kiyi there are 17 items concerned with the history of before the three kingdoms. In this study I will analyze them and find out the purport of them. There is a wide difference of writing between 17 items and the other items in Kiyi. The former are written with exposition and argument, but the latter written with narrative. Ilyeon had made a difference deliberately in writing of Kiyi. He adopted the writing of exposition and argument to suggest geographical information, which shows two streams of the history of before the three kingdoms. The one is a stream coming down to Ogaya(五伽耶) from Gojoseon(古朝鮮), the other is a stream to Jinhan(辰韓) from Bukbuyeo(北扶餘). Two streams flows side by side into Silla which is a southernmost country of the three kingdoms. It means that Ilyeon took a look at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from the standpoint of geographical movement. Ilyeon had a particular and marvelous insight fusing geographical changes into a chronicle. His insight was derived from abandoning a perspective of succession and having a perspective of geographical system. To sum up, 17 items in Kiyi have connotation that the ancient Korean was moving ceaselessly to the south from the north or to the ocean from the continental.

        •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에 나타난 불교적 사유

          정천구(Jung chun Koo)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2012 일본불교문화연구 Vol.- No.6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일본 임제종의 개조로 불리는 에이사이(榮西 1141-1215) 는 일본 차 문화사에서도 주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는 『끽다양생기』를 저술하여 건강을 지가고 생명을 기르는 일에 차가 매우 효과가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후 『끽다양생기』는 널리 읽히는 다서가 되었다. 그럼에도 저술의 계기나 동기에 대해서는 오해가 적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차의 약리적(藥理的).본초적(本草的) 인 특성만을 서술한 것으로 이해하는 데 그쳤다. 그리하여 본고에서는 이 속에 에이사이의 사유를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의 층위가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에이사이가 『끽다양생기』를 저술한 데는 고 자신이 송나라에 유학하면서 겪었던 경힘이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특히 선을 배우기 위해 건너갔을 때가 아닌, 그 선언 1168 년에 천태 승려로서 갔을 때의 경험이 더 중요한 제가가 되었다. 그때 무더위로 고생하는 그에게 중국인이 건네준 차가 그의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었던 것이 아주 오래도록 그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을 견주어 보았을 때에 차를 마사지 않는 일본인들이 더 병약하고 수척하였다고 판단한 것, 그리고 의술이 쇠퇴한 시대가 되었으므로 차로써 예방하고 치료하는 젓이 가장 유익하다는 것 등이 주요한 계기 또는 동기가 되었다. 그래서 책의 제목에서도 "차를 마시는 것이 생명을 기르는 데 보탬이 된다"는 뜻의 '양생'을 넣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양생 또한 독특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단순히 도가적 양생법을 수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밀교석안 사유를 더함으로써 불교적 양생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것은 오장(五臟)을 오행(五行)에 결부시키고 이에 오미(五味)를 더하여 질병을 논하고 그 치유책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심장이 오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데, 그 심장은 쓴맛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그 쓴맛을 제공함으로써 심장을 튼튼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차라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끽다양생기』에 자주 등장하는 '말세' 또는 '말대'라는 용아다. 이 용어는 불교적 시간관인 삼시(三時) 가운데서 말법시대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는 에이사이가 활동하던 당시에 일본에 널리 퍼져 있던 말법사상과, "선은 말세의 법이 아니다"라면서 자신의 선을 반대하던 히에이잔(比叡山) 승려들의 비판이 자극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이사이의 말서l 관은 동시대에 활동하던 호오덴(法然)의 말법사상보다는 불철저하기는 했지만, 차가 말세의 영약이며 말대의 의술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나름대로 그 시대 사람들의 몸과 건강을 이해하는 실마리 빛 말법시대를 헤쳐 나갈 방편을 제시했다는 의의가 있었다. 호오넨의 전수염불이 내세의 안락을 구했던 것과 달리 차를 마시는 것으로써 현세의 삶을 더 낫게 하려던 것 또한 독특한 사유였다. Eisai(榮西) who was born in 1146 and died in 1215 was not only the first transmitter of Zen Buddhism formally but also a propagator of drinking tea in Japan. He had written a book named Kissa Yōjōki(喫茶養生記, Drinking tea for Vitalizing) in which insisted that tea have an effect on not losing health and vitalizing. Thereafter it was read widely as the first tea book(茶書) and influenced many tea masters. It was, however, misread in many respects and up to the present misunderstood its motive of writing and its value. It was because tea masters or scholars did not read it scrupulously. In this study I analyzed it for hidden meaning. Why did Eisai write Kissa Yōjōki? What was the motive of his writing? First, he was affected with his experiences for his first studying away to Song. He was so tired with long journey in high humidity. Then a Chinese gave him a bowl of tea for cheering up. Indeed it n1ade him feel freshness all over the body and mind. It made a strong impression on him so that even forty years later he was written its experience in Kissa Yōjōki. He thought that Japanese not drinking tea were more weak and haggard than Chinese drinking tea. And he regarded his clays as the age of a decline in medical arts. Hence he was written a tea book named drinking tea for vitalizing.' In Kissa Yōjōki Eisai bestowed unusual meaning on vitalizing. His view of vitalizing was based on Taoistic Regimen(道家的 養生法) and added by thinking of Esoteric Buddhism密敎. He reconstructed a Buddhist regimen in his own way, as it were. In his regimen the Five Viscera(五臟) is connecting with the five Phases(五行) , and the Five Tastes(五昧) attaches to them. Here the heart is most important in the Five Viscera and it needs the bitter in the Five Tastes to strengthen the heart. In his book Eisai insisted that tea supplies the bitter for the heart. In Kissa Yōjōki I have an interest in the word mentioned repeatedly. It is the Final Age(末世) which mea11s the, Age of the Final Dharma(末法時代) in Buddhism. Eisai was influenced by mappō thought(末法思想) prevailed in Japan those days and stimulated by criticism of monks of Hieizan(比叡山) who reproaches saying that the Zen is not the Dharma of the Final Age, I think. His view of the Final Age being limited to the affairs of the body and health is far more incomplete than his contemporary Hōnen(法然) who claimed that senju nembutsu (專修念佛) is the only way to emancipate in the Age of the Final Dharma. But he proposed an expedient useful to people in the Age of the Final Dharma. In his view people drinking tea can promote health and lead a better life in this world.

        • KCI등재

          『삼국유사』와 『겐코오샤쿠쇼(元亨釋書)』의 역사인식 비교

          정천구(Jung Chunkoo)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6 동양한문학연구 Vol.23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13세기 동아시아는 정치ㆍ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몽고의 침입으로 시작된 전란의 폭풍은 동아시아 전체를 긴장시켰다. 그러한 변화와 긴장은 불교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불교사서의 편찬이다.<BR>  불교사서의 편찬은 그 자체가 이율배반적이다. 현상 세계는 찰나마다 변하고, 언어는 그런 현상 세계를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볼 때, 사서의 편찬은 간과되거나 매우 혁신적인 서술방식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불교사서는 그 편찬자의 역사인식과 언어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된다.<BR>  송대에는 불교사서가 활발하게 편찬되었는데, 선종의 불교사서와 천태종의 불교사서가 주류를 이루었다. 『경덕전등록』(1004)에서 시작된 선종의 불교사서는 『오등회원』 (1252)에서 마무리되는데, 비록 선종내의 여러 사상적 흐름을 각기 반영하고는 있으나, 선종이라는 종파적 관점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선종사서에 대한 반발로 편찬된 『석문정통』(1237)과 불조통기 (1269) 역시 사서(史書) 글쓰기에서는 다소 변화가 있었으나, 역시 천태종의 정통성이라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짐으로써 종파적 성향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여주었다.<BR>  송나라의 불교사서와는 달리 고려와 일본의 불교사서는 독특한 형식과 역사인식을 보여주었다. 고려의 『삼국유사』 (1289)는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어 역사적 사실보다 그 진실을 어떻게 드러낼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불교사서였다. 게다가 세간의 역사와 출세간의 역사를 아우름으로써, 역사서가 닫힌 세계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BR>  일본의 『원형석서』 (1322)는 완벽한 형식 속에 오로지 불교적 사실만을 서술한 것이었다. 비록 종파적 관점에서는 자유로웠으나, 지나치게 체재나 서술 형식에 매임으로써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나아가 모든 일은 변화한다는 평범하고도 보편적인 진리를 간과하게 되었다. 이는 역사를 과거형으로 또 닫힌 세계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In 13th century, there was such a great change on politics and society in East Asia. Invading Sung China, The Mongol made East Asia fall into war, which got into high tension. Such a change and tension also affected Buddhism and various sects of it. Especially, that catches our eyes is Buddhistic historiography.<BR>  The writings of Buddhistic history is antinomy in itself. In Buddhism, Everything is changing momentarily, and anything changing cannot be expressed with words. Therefore, Buddhistic historiography cannot but be taken care by Buddhist monks, if can, there must be made innovations in writing.<BR>  A lot of Buddhistic historiography compiled through the Sung dynasty, which are mainly performed by two sects. They are Zen Buddhism(禪宗) and Tientai Buddhism(天台宗). In Zen Buddhism, Buddhistic historiography began with Jinde chuandenglu(景德傳燈錄) and then came to an end in Wudeng huiyuan(五燈會元). These shed light on each standpoints of various sects within Zen Buddhism, however, it goes to be proved sectarian. In Tientai Buddhism, Shimen zhengtong(釋門正統) was compiled in 1237, and Fozu tongji(佛祖統紀) in 1269. These historiographies were written from a sectarian viewpoint of Tientai. Even if there have been transformations or changes in writing, it could not go beyond Tientai sect like Zen Buddhistic historiographies.<BR>  In Korea and Japan, another formations and writings were taken up in Buddhistic historiographies. Samgukyusa(三國遺事) which was compiled in 1289 cir. in Korea is focused on how to reveal historical truth than historical facts, in which facts and fiction are combined exquisitely. In Samgukyusa, history of the world and that of beyond the world are harmonized, and therefore show us that historiography should not written to manifest the closed world, but the open world.<BR>  Genk?shakusho(元亨釋書) was compiled in 1322 in Japan, in which facts are piled up in perfect formation, and are only Buddhistic. It is free from sectarian viewpoint, but tied up to formation or writing. And thereby it fails to reveal common and simple truth that everything is changing, and history is not fixed. It means that the author of Genk?shakusho took historical facts as being closed.

        • KCI등재

          『명심보감』의 사상적 특성 연구

          정천구(Jung, Chun-koo)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9 동양한문학연구 Vol.29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한국에서 『명심보감』은 현재 완본과 초략본 두 가지가 번역되어서 읽히고 있다. 아직까지는 완본보다 초략본이 더 널리 읽히고 있고, 또 초략본외에 완본이 있는 줄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 때문에 대개 『명심보감』을 동몽서(童蒙書)나 권선서(勸善書)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완본을 들여다보면 단순하게 볼 수 없는 면이 많다. 유교와 불교, 도교의 글들이 두루 실려 있고, 그 가운데 유교의 글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도교의 글들이다. 특히 원대를 지나면서 유교와 불교가 쇠퇴한 반면, 도교는 흥성하고 삼교합일이라는 사상을 확고하게 정립하였으므로 『명심보감』의 편찬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이에 『명심보감』의 사상적 특성을 밝히는 작업이 요구된다. 『명심보감』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대개 저자나 판본, 유통과 전승 등 서지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사상적 특성에 대해서는 유가적이라거나 도가적이라거나, 또는 유·불·도가 어우러져 있다는 인상 비평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본고에서는 『명심보감』이 편찬되던 시기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사상적 배경을 먼저 살펴봄으로써 그 사상적 특성과 의의를 더욱 명확하게 밝히고자 하였다. 『명심보감』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도교적 사유가 바탕이 되어 편찬된 책이다. 편찬자의 의도는 좋았으나 학문적 역량이 부족하였고, 또 확고한 사상적 또는 사상사적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삼교 각각의 독자적인 사상이 살아나지 못하고 또 잘 어우러지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세속화된 경향을 보여주었다. In Korea, there are two versions named Myeongsim Bogam明心寶鑑, which are original version and abridged version. At present, abridged version has been read widely, and most people do not aware of whether original version is or not. To make it more worse, Myeongsim Bogam is estimated and treated as a guide book for children or a book for moral training. But it is taken in naively and superficially. We have to focus on the variety and diversity of writings which are represented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Two thirds of Myeongsim Bogam is related with Confucianism, but it cannot be taken as Confucian writing. Myeongsim Bogam is simple in appearance but more complicated in philosophy or thought. When Myeongsim Bogam had been compiled in early Ming Dynasty, Taoism had reached the zenith philosophically and socially but Confucianism and Buddhism was in decline. The compiler lived at Hangzhou which was a city being developed commercially and culturally from Song dynasty to Ming dynasty. He intended to compile a book for the people who are not interested in moral life and the Tao. In this study, I investigate the social and cultural background, philosophical background from Song to early Ming dynasty. And then I analyzed the preface and contents of Myeongsim Bogam. As a result, it made clear that the compiler could not have achieved because of his insufficiency of scholarly talent and philosophical insight. Myeongsim Bogam had been compiled on the basis of Taoism and its unity of three religions but had an inclination to secularization.

        맨 위로 스크롤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