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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FBG를 삽입한 사냑 루프 대역 통과 필터의 해석

        정은주,정명영,김창석,Jung, Eun-Joo,Jeong, Myung-Yung,Kim, Chang-Seok 한국광학회 2007 한국광학회지 Vol.18 No.2

        사냑 고리 광섬유 간섭계의 특성을 이용하여 FBG의 반사특성을 투과특성으로 전환하는 고효율의 파장 선택 필터를 제안하고 수식적으로 분석 및 구현하였다. 제안된 대역 투과 필터는 사냑 고리 간섭계 구조에 FBG를 삽입하여 구현하였다. 고효율의 가변형 파장 선택 필터는 편광조절기에 의해 FBG 브래그 파장영역이외의 영역은 사냑 효과로 광의 세기를 가변적으로 투과하도록 조절하였고, 브래그 파장영역에서는 마이켈슨 간섭효과로 20 dB 이상의 소멸비를 갖는 광 투과를 얻었다. A tunable band-pass filter of fiber Bragg gratings incorporating the Sagnac loop interferometer configuration is presented. The proposed band-pass filter with extinction ratio 20 dB has practical advantages in terms of price and performance in comparison with the conventional band-pass filter using a circulator.

      • KCI등재

        차강 박기정의 《활정십경백납도병》 연구

        정은주(Jeong, Eun-j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장서각 Vol.0 No.39

        강릉 선교장은 효령대군 11대손인 李乃蕃(1703~1781)이 1748년 터를 잡은 이래 명실상부한 장원의 규모로 성장하였다. 이후 선교장은 금강산과 설악산, 영랑호, 경포대 등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전국의 명류들이 모이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선교장의 열화당과 활래정은 이곳을 거쳐 간 많은 묵객들과 서화가들의 자취가 다수 남아 있다. 그중 주목되는 것은 『강원도지』에 근대 관동지역 서화의 대가로 알려진 此江 朴基正(1874~1949)의 작품이다. 박기정은 彛齋 權敦仁(1793~1859)의 문인으로부터 수학한 후 위정척사의 영수였던 유인석 휘하에서 의병활동에 가담하여 일본에 저항하였다. 그는 원주와 강릉을 배경으로 많은 서화 작품을 남겼으나 그의 화명은 화단에서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제 주도의 서화협회 등록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박기정은 일제강점기 선교장 주인이던 이근우와 그의 아들 이돈의의 적극적 후원으로 선교장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 글은 강릉 선교장에 소장된 차강 박기정의 《活亭十景百衲圖屛》을 중심으로 그 창작 배경이 된 활래정의 문화사적 의의와 작품 내의 제시 및 화풍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박기정의 《활정십경백납도병》은 1946년 활래정 수석지관에서 제작되어 선교장 주인 이돈의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이러한 百衲屛風은 方形, 圓窓, 扇面 등 다양한 화면에 각각의 주제를 모아 하나의 병풍에 담은 것으로 19세기에 새로 등장한 회화형식이다. 백납도병은 당시 物譜 성격의 청완품에 대한 수집과 완상, 이미지 편집과 재배열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활정십경백납도병》은 편화를 별도로 부착하지 않고 병풍 면에 직접 여러 화면을 구획한 후 그림을 그려 넣은 형태이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화면에 그린 여러 종류의 화목과 화제를 적은 서예 작품에 이르기까지 박기정의 서화 세계를 종합적으로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백납도병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화목인 산수는 박기정의 현존 작품에서는 드물게 나타나 더욱 의미가 있다. 대개 강안의 어촌 풍경을 묘사하였는데, 이는 경포를 생활 무대로 한 선교장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작품이 모두 실경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박기정은 남송대 강남지역 화가들이 망국의 쇠잔한 정취를 산수화에 이입하는 ‘殘山剩水’의 구도를 빌려 화폭에 옮겨 놓은 것이다. 이는 그의 작품 활동 시기가 일제강점기와 점철되어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박기정의 작품 중 묵매는 『완당화보』를, 석란은 『석파화보』를 임모한 작품이 전하여 이들 화풍과의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다. 박기정의 서화 세계는 사심이 없는 경지에서 붓을 잡아야 한다는 ‘用筆在心, 心正則筆正’과 초월의 자유를 추구하는 ‘秋水精神’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청강 장일순, 화강 박영기에게 전수되어 현대화단까지 그의 화맥이 계승되었다. This paper focused on the cultural background Hwallae-jeong pavilion and painting style of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painted by Park Gijeong ( 1874~1949). Since Seongyojang House was the former upper class residence of the Yi Naebeon (1703-1781) noble family of Gangneung, Gangwondo, his son Yi Sichun and grandson Yi Hu has credited with their family’s economic success. As more and more writers and artists traveled to the eight famous spots in Eastern Korea, such as Geumgang Mountain, Seorak Mountain, Gyeongpo-dae pavilion and Yeongnang-ho Lake, Hwallae-jeong pavilion became an attraction among prominent men of the times. Yeolhwa-dang and Hwallae-jeong pavilion of Seongyojang House, as the cradle for painters and calligraphers, possessed works of Cho Inyeong, Kim Gyujin, Jeong Byeongjo, Kim Donhee, Kim Taeseok, Ryu Jinchan and Park Gijeong.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painted by Park Gijeong in 1946 for Yi Donui, owner of Seongyojang House. It was a ten-fold folding screen of Baengnabdo (百衲圖) style painted with various pictures in quadrangle, circle and fan-shaped line. The ten-fold folding screen of Baengnapdo has origin in Mulbo (物譜) to take pleasure in works of art and visual images in 19th century.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shows the various paintings and calligraphies of Park Gijeong. His calligraphies were motivated literati poetry of China and Joseon, Park’s own poem and Cho Inyeong’s poetry of Hwallae-jeong pavilion by poem rhythm of Zhu Xi. Park’s calligraphy is so-called Chagang style, modified styles of Kim Jeonghui and Gwon Donin. Every screen of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folding screen is composed of seven sections. It was painted in the literary artist’s style of inkand wash painting. Especially this work includes rare landscapes as well as four gracious plants, grapes, oddly shaped rocks and withered trees. His landscapes described our country devastated in Japanese colonial era by Canshan shengshui (殘山剩水) style of Southern Song Dynasty. The paintings and calligraphies of Park Gijeong are seeking for the selfish stage and transcendental idea, so-called ‘Qiushui Jingshen ( 秋水精神)’. This tendency of his works passed to his grandson Park Giyeong and Jang Ilsun in modern art society.

      • 謙齋(겸재) 鄭敾(정선)의 신분과 화풍 형성에 대한 소고(小考)

        정은주 ( Eun Joo Jeong ) 전남대학교 예술연구소 2014 藝術論集 Vol.14 No.-

        본고에서는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에 대한 선행 연구와 정선 당대 문인들의 문집에 나타난 글을 바탕으로 겸재 정선을 재평가하고, 그가 제작한 화첩을 시기별로 분석함으로써 그의 진경산수화의 형성과정과 발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또한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의 연구에 있어 현안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데 의미를 두었다. 즉, 최근 다시 대두되고 있는 겸재 정선의 출신 문제에 대해서는 『광주정씨세보』와 정선 당대의 문헌 기록을 통해 겸재가 ‘鄭君子’,‘生員’,‘선비(士)’등의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군왕인 영조가 그의 이름 대신 호를 정중하게 사용했다는 점과 조선후기 藝壇의 최대 文士인 사천 이병연, 윤순과 함께 겸재 정선이 ‘三藝의 雄者’로서 나란히 비견되었던 점은 예술적 성취와 위상을 직업적 수단으로 삼는 이들의 그것과 명백히 구분하고 있는 점에서 문인화가로서 당시 겸재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정선이 실경을 그리는데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점과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 계기는 화명으로 당시의 명사들과의 교유를 통해서 가졌던 詩會나 契會의 기념화 제작 등 사회적 요구에서 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 진경산수 작품 중 상당량이 그의 교유관계를 통해 제작된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眞景은 실경산수를 의미하지만, 조선후기에는 실경보다는 ‘眞景’또는 ‘眞境’이라는 용어로 일반화되었다. 이상주의를 추구한 유가와 도가적 산수화의 개념과 유관하며, 진경에서 ‘眞’의 의미를 실재 자연산수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외면적 사실성을 추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산수에서 趣를 발견하고 산수가 지닌 본래 性情을 파악한 후 그 정신을 전하려는 지속적 노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중국의 화론과 남종산수화를 적극 수용 후, 전선후기의 천기론적 문예관과 미의식을 바탕으로 중국인들도 그의 그림의 독창성에 탄성을 지를 만큼 중년이후 현격하게 화풍을 발전시켰다. 18세기 화단에 새로운 움직임과 함께 정선의 영향으로 우리 풍경에 매료되어 실경을 그리는 일에 참여한 일군의 화가를 겸재파 또는 정선파로 불리게 되었다. 본고는 겸재와 진경산수화의 현재까지의 학계 연구 동향을 살펴봄으로써 세부적인 문제로 부상하는 眞景의 의미, 鄭敾派의 문제 등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This study is aimed at reviewing the pending issues of Gyeomjae (謙齋) Jeong Seon(鄭敾, 1676-1759) and his paintings in Joseon Dynasty. He entered government service for the first time at 41 as an astronomer and professor for whom the gentry was responsible in 1716. Some theory presented possibilities that he would be a painter of Dohwaseo (圖畵署, Painting Bureau) before he entered government service by conducting wrong analysis of system and historical records at that time. But Gyeomjae completed his career as government official over about 40 years by retiring from Sadosi Cheomjeong (司도寺 僉正) to the rank of prime minister by becoming a Dongjijungchubusa (同知中樞府事) as a government position for the aged again when he was 81 years old and was granted Jeongyeong (正卿) of Hanseongpanyun (漢城判尹) by his greatest devotion in 1772 when thirteen years passed after his death. He could spend life as a government official for a long time and could advance to the rank of the prime minister and could be granted until Jeonggyeong by the support of government officials as well as the great king Youngjo(英祖). His paintings showed good feature bearing comparison with any government official in the class of the literati such as Yi Byeong-yeon (1671-1751) and Yun Sun (1680-1741) in his own age. It’s not clarify when he start the painting of real scenery landscapes. But most of his paintings come from the gatherings with scholars, literati and government officers and his government careers. His paintings of real scenery landscapes were concerned with an ideology of Taoism and Confucianism. The real (眞) means the essence of nature as well as similar figure. His paintings developed originality from the Chinese painting of the Southern School and achieved admirable results from even the Chinese literati. Indeed, the result he pulled Gyeomjae School, the art circles of 18th century in Joseon Dynasyt.

      • KCI등재후보
      • KCI등재

        일본(日本)에서 제작된 계미(癸未)(1763) 통신사행(通信使行) 관련 회화(繪畵) -빈례(賓禮) 관련 기록화(記錄畵)와 통신사절의 인물화(人物畵)를 중심으로-

        정은주 ( Eun Joo Jeong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1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49 No.-

        본고에서는 계미통신사행과 관련하여 일본에서 제작한 賓禮관련 기록화와 통신 사절의 행렬도 그리고 일본의 교유 문인들의 문집에 포함된 통신사절의 인물화를 분석해 봄으로써 계미통신사행의 문화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하였다. 계미통신사행에 대한 빈례 관련 기록화와 일본 문인들과 시문수창이나 서화를 통한 문화적 교류의 결과물은 일본 현지에 다수가 남아 있다. 빈례 관련 기록화는 주로 사행노정을 그린 일본전도, 入港행렬도, 관소 도면, 船橋등 통신사 영접과 관련하여 해당 노정을 관할하던 藩에서 제작한 것이 다수이다. 또한 통신사 행렬도를 묘사한 방각본과 ≪韓客輿行圖≫, ≪韓使來聘圖≫, ≪朝鮮通信使繪卷屛風仕立圖≫ 등 필사본이 전하여 당시 통신사행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일본 남화가 池大雅가 김유성 화의를 따라 그린 지두화풍의 행렬도권 ≪韓客輿行圖≫는 다른 행렬도권과 비교할 때 매우 이례적인 예이며, 이케노 타이가가 김유성에게 남긴 서신과 함께 그들의 교유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로 주목된다. 사와다 토코 『傾蓋集』, 劉維翰『東?餘談』, 니야마 다이호 『韓客人相筆話』 등 교유문인들의 문집 내에 통신사절의 인물화가 삽입되어 해당 인물의 신상 정보와 화상찬을 적어 인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동사여담』이나 『한객인상필화』에는 필담에 참여한 인물들 외에도 급사나 노복 등 하관의 모습까지 인상착의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는 에도 중기 도일한 청나라 화가들이 화보를 통해 화조화나 산수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데 반하여, 이미 청나라에서 찾을 수 없었던 명대 문물과 유가 예법의 근간이 된 복식에 대한 관심이 일본문인들의 문집에 조선 통신사의 복식과 인상을 옮겨 그리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This study is aimed at reviewing the documentary paintings and figure paintings of Tongsinsa in 1763-1764. There are many works of the Tongsinsa in 1763-1764, such as Japan rout maps, paintings of Korean envoys` procession, accommodation drawing and bridges on board ships for Korean envoys reception by Japanese painters. Especially the paintings of Korean envoys` procession are a mirror of Japanese interest of Tongsinsa. Ikeno Taiga, who is the most famous artist of Japan Nanga, painted Korean envoys` procession imitated Gim Yuseong`s idiom by finger painting style. The figure paintings and information of Tongsinsa included in the collection of works written by Japanese Scholars, such as Ryu Yuhan`s Dongsa-yeodam, Sayada Doko`s Gyeonggae-jip and Niyama Daiho`s Hangaekinsang-pilhwa. But the portraits absolutely did not resemble real people, as Nam Ok had been mentioned. Because Japanese writers were interested in Ming`s style dress Korean had.

      • SCIESCOPUS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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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시대(江戶時代) 장기(長崎) 당관(唐館)을 통해 유입된 중국화풍(中國畵風)의 영향

        정은주 ( Jeong Eun-joo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66 No.-

        에도시대 長崎畵派는 나가사키에서 유행했던 중국화파 및 네덜란드계 서양화파를 총칭하며, 특정 양식을 가진 유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가사키라는 해외 무역항의 특수성으로 인해 일본 재래 요소와 서양화풍, 중국화풍을 반영한 다채로운 화파가 존재하여 동일 화가의 작품 중에도 다양한 양식이 병존한다는 점이 長崎畵派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일본의 특수한 문화적 환경에서 발달한 長崎 회화는 일본 회화사에서도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長崎에서 회화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제1기는 1571년 개항에서 포르투갈인이 나가사키에서 추방된 1639년까지이다. 제2기는 포르투갈인의 추방 후 명 말기 전란을 피해일본으로 건너온 중국인이 증가하면서 黃檗宗 승려의 長崎 渡來로 당시 나가사키 회화에 新風을 몰고 온 시기이다. 제3기는 18세기에서 19세기 초 청조 중국화의 도입과 일본 막부 소속 唐繪目利職 화가의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이다. 기독교의 포교를 목적으로 한 南蠻의 유화풍 성상화 제작이 활발하던 제1기를 제외하고, 1635년 이후부터 1854년까지 쇄국정책으로 나가사키에서만 중국과 네덜란드 2개국을 상대로 무역이 허용되면서 형성된 長崎畵派는 양국에서 유입된 새로운 회화 양식이다. 그중 중국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화파는 黃檗派, 南?派, 南畵派, 唐繪目利派 등 4가지 화파이다. 唐繪라고도 불리는 이들 중국화파는 명청 회화의 영향이 농후하였고, 나가사키에 들어온 명말 청초 중국 이민사회가 만든 唐館(唐人屋敷)을 중심으로 회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당관은 1689년 막부에서 설치한 청인 격리구역으로 명 말기 전란을 피해 나가사키로 이주한 중국인들, 상선을 통해 일정 기간 왕래하던 상인,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온 황벽파 승려 등이 당관 내의 사찰에 거주하며 나가사키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먼저 1642년 황벽승 逸然(1601~1668)이 渡日하여 그린 도석인물화를 비롯하여 이후 일본에 정착한 黃檗宗 승려들의 眞影을 중심으로 정면상과 두드러진 명암법을 특징으로 하는 황벽파 초상화의 신양식을 유행시켰다. 남화파는 1720년 伊孚九(1698~1747경)가 도일한것을 계기로 1734년 費漢源, 1786년 張秋穀, 1804년 江稼圃 등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소위 ‘渡日四大家’의 영향으로 나가사키에 유입된 남종산수화풍으로 일본 제자들에 의한산수화보 제작이 활발하였다. 또한 1731년 沈銓(1682~1762 이후)은 제자들과 일본에서 3년을 머물며 정밀한 채색 화조화를 위주로 ‘南?派’를 형성하여 에도시대 일본의 장식적 화조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중국 서화를 감평하는 唐繪目利派의 화풍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나가사키 봉행소의 御用畵師의 역할을 겸하여 기물, 화훼, 鳥獸類 등 수입 物産을 寫眞的으로 사생하여 화조, 영모화의 사실주의적 화풍을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서구에 의한 강제 개방으로 일본의 유일한 무역항으로서 長崎의 특권이 소멸되면서 당관 제도와 長崎奉行所가 폐지되고 무역 형태도 큰 변화를 겪었으며, 나가사키를 통해 에도 화단에 미쳤던 중국 회화의 영향력도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Nagasaki was a unique trade port in the Edo Period. Often called “Nagasaki school” is a distinctive style of Chinese paintings through the influence of Obaku monks, other Chinese painters and Western painters in Nagasaki. Nagasaki painting styles, formed in its own culture under the Tokugawa shogunate, had a specific status in the history of Japanese painting. Obaku-syu school, Nanga school, Nanpin school and Kara-e Mekiki school were seriously affected by the Chinese painting styles introduced through Tojin yashiki (唐 人屋敷, Toukan 唐館 ) in Nagasaki. Because those paintings were influenced by the art of Ming-Qing Dynasty, they were called Karae and had a distinctive characteristic from the Kano school in Edo and Tosa school in Kyoto. After Iryeon (逸然 1601~1668) of Obaku-syu school (黃檗宗 one of the three leading Zen sects in Japan) came to Nagasaki in 1642, Obaku-syu school painted portraits of chief Buddhist monks and merchants. The portraits were described a new style with a front view and the contrast between light and shade. Nanga school (南畵 Southern painting or literati painting) refers to the Chinese painting of Southern school by Yi bugu, Bi Hanwon, Jang Chugok and Gang Gapo who came to Nagasaki from China. There were many Chinese paintings and woodcut books of the Southern school loaded on the ships for Nagasaki by Chinese merchants in Edo Period. Japanese painters were learned directly by above painters came over from China to Nagasaki and they made some woodcut books of Chinese painters. While Sim Jeon (沈銓 1682~after 1762, byname 南?) and his followers stayed in Nagasaki from 1731 to 1733, they taught Japanese painters. So-called Nanpin school painted a flowers and birds with detailed style and effects of color. It takes its name from Chinese painter Shen Nanpin (沈南?). Yuhi Kumashiro (熊代 熊斐 1712~1773) played an important role to promote and settle the Nanpin school in whole Japan, including Nagasaki. The Nagasaki school included official painters of Nagasaki Bugyo (長崎奉行), called Kara-e mekiki (唐繪目利), who were responsible for making copies of important Chinese works. They appraised the value of Chinese paintings and describe imported flowering plants, animals and products. The main objective of their paintings was not artistic value but detailed and realistic description. Some of Kara-e Mekiki school learned Western painting style from Western foreigners in Dejima, but most of their paintings looked closer Nanpin school than oil painting style. Nagasaki was shorn of its privileges as an exclusive port, while other ports of Japan were forced open by the Western powers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Chinese influence on Japanese paintings was dramatically reduced after Tojin yashiki and Nagasaki Bugyo were abolished in 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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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 도성의 동문, 흥인지문과 주변 이야기

        정은주(Jeong Eun-joo) 명지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2016 미술사와 문화유산 Vol.5 No.-

        흥인지문은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 도성에 딸린 사대문 가운데 하나로 정동에 있어서 동대문이라고 한다. 흥인지문의 명칭에 ‘之’를 넣은 이유는 서쪽 인왕산은 웅장한데 동쪽 낙산이 낮고 수구가 벌어져 이를 보충하기 위한 비보(裨補)의 수단이라 전한다. 도성의 내사산 중 낙산이 상대적으로 지세가 약하였기 때문에 풍수적 이유로 인해 한성의 성문 중 유일하게 성 밖에 옹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396년 흥인지문의 성문 위에 2층 문루가 건립되었는데, 성벽의 석재는 태조, 세종, 숙종시기 축성의 특징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1899년에는 새로운 도로 계획으로 돈의문에서 청량리 구간에 개설된 전차가 흥인지문의 홍예문과 옹성의 개구부를 통과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도로의 폭을 넓히고 1926년 경성운동장 건립을 위해 흥인지문 북쪽과 남쪽 성벽이 크게 철거되었다. 흥인지문 주변의 역사 유적으로는 도성의 개천 수문 오간수구와 이간수구, 임란 이후 관우를 제향하는 사당인 동관왕묘가 있다. 또한 국마를 기르던 사복시 소속의 살곶이 목장이 아차산 서쪽으로 조성되었다. 개천의 수문 위로는 성곽을 쌓아 올렸고, 성벽을 따라 조그만 길을 만들어 수문을 관리하는 군졸의 순라길이 있었다. 조선에 관왕묘가 건립된 계기는 임진왜란 명나라 장수 진린이 병사 위기에 놓이자 남관 왕묘를 세운데 이어 명나라 장수들이 왜적과 싸울 때 관왕이 현성하여 도움을 주었다고 하자 명 신종황제가 4천금을 교부하여 한양에 관왕묘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이에 흥인지문 밖 동편 영도교 옆에 터를 정하고 대신에게 공사 감독을 명하여 1602년 동관왕묘가 비로소 준공되었다. 건립 직후 선조가 한차례 배례한 이후 광해군 대에 와서 관왕묘의 치제는 국가의 小祀로 정비되었고, 숙종 대에 국왕이 친림하여 제례를 올리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수리가 이루어졌다. 이후 영조 대에는 무려 17차례 친림하여 치제하였고, 정도 대에 관왕묘의 제례를 中祀로 승격시켜 관왕묘 제례가 정립되었다. 이후 1871년 본격적인 수리가 이루어졌고, 1876년부터 1884년에 걸쳐 관우와 관련한 다양한 경전이 간행되었다. 살곶이는 한성의 동교(東郊)로,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여 울타리를 둘러쳐서 조선시대 국마를 기르는 목장이 조성되었다. 목장 내 주요 시설물인 화양정은 1432년(세종 14) 지었고, 『서경』의 전마(戰馬)를 풀어 화산의 남쪽으로 돌려보낸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 편액을 달았다. 그밖에 흥인지문에 얽힌 역대 인물들의 사연이 전한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1440~1521)가 1457년 단종의 사망 이후 폐서인되어 낙산의 동망봉 아래 위치한 사찰에 머물며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애도하였다고 전한다. 1771년(영조 47)에 영조가 이 사찰 내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우고, 동망봉이라는 친필 표석을 세워 단종을 애도 하였는데, 이때부터 이 절을 정업원이라 불렀다. 이수광이 그의 외고조부였던 유관(柳寬)의 초옥 옛터에 소당을 짓고 대개 풍우를 간신히 피한다는 의미로 ‘비우(庇雨)’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청렴했던 선조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흥인지문은 동관왕묘와 함께 중종연간 이사균과 김안로, 숙종연간 남용익과 그의 지인들의 전별 사유가 전하여 도성을 나서는 문인의 전별 장소로도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는 조선시대 도성의 동문이었던 흥인지문에 대한 연혁과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또한 그 주변의 주요 역사 유적 및 인물들과 얽힌 이야기를 중심으로 흥인지문의 건축적 가치뿐만 아니라 과거 조선의 역사와 어우러진 한양의 상징적 랜드마크로서 그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Heunginjimun Gate was the great east gate of Capital city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structure was first built by King Taejo during his fifth year of reign (1398). It was renovated in 1453, and the current structure is the one rebuilt in 1869. The most unusual characteristic is its outer wall, Ongseong (jar-shaped wall). Ongseong was constructed to compensate the weakness of the target from multiple invaders. The stone wall of Heunginjimun Gate destroy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Cheonggyecheon stream was named Gaecheon (open stream) after the first refurbishment project to construct a drainage system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work, which included dredging and bolstering the banks of the stream and building the bridges, was carried out every 2~3 years during this period from the reign of Taejong, the third king of the Joseon Dynasty. King Yeongjo especially undertook the refurbishment work as a national project. Dongmyo is a shrine in metropolitan Seoul built in honour of 3rd century Chinese military commander, Guan Yu. The Joseon government embarked on construction in 1599 and completed the work in 1601. The Wanli Emperor of Ming provided funds for construction of shrine, along with plaque with his own calligraphy. Four shrines, Nammyo (south shrine), Dongmyo (east shrine), Seomyo (west shrine) and Bungmyo (north shrine), were actually constructed in Seoul until 1904. However, three shrines forces into Dongmyo Shrin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Salgoji royal ranch was famous for a hunting site of Kings, and it was the place to maintain royal horses. King Sejong the Great built a pavilion nearby and named it Hwayangjeong, from which its name gets the Book of Documents (Shujing) among the Five Classics. There are many other historic sites of historic figures related Heunginjimun Gate. Donmangbong peak (a peak of longing in the direction of the east) is the place where Queen Jeongsun missed her husband in Yeongwol, after Separation at Yeongdogyo Bridge. Biudang is a thatched house that was built in memory of a classical scholar Yi, Su-gwang and his ancestor Yu Gwan who led a frugal life. Biudang means, “A house in which one can barely take shelter from rain”. This paper is focused on the history of Heunginjimun Gate and other historic sites near the Gate, thereby raising its status as a symbolic landmark of Seoul.

      • KCI등재

        조선후기 繪畵式 郡縣地圖 연구

        정은주(Eun-joo Jeong) 韓國文化歷史地理學會 2011 문화 역사 지리 Vol.23 No.3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회화식 군현지도의 구도와 회화적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회화식 군현지도는 대부분 18세기 후반 이후 제작된 것으로 완상이 용이한 병풍으로 지도가 대형화 되면서 수지법과 준법 등 당시 유행하던 실경산수화풍을 가미하여 회화성을 높이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감영 병영 수영 등에 파견한 도화서 출신 화사군관 제도를 바탕으로 군현지도는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독자적인 완상 영역을 개척하였다. 또한 대상 지역의 인문 정보는 물론 일부 지도에서는 당대의 풍속과 행사 장면을 포함하여 기록화와 접목시키는 가교라 할 수 있다. 『1872년 지방도』는 기존 관찬지도와 달리 통일성은 결여되었지만 지역별 지도 제작의 역량과 지리인식 19세기 말 군사적·경제적 정세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19세기 말 실경산수화풍의 전통을 계승하여 조선말기 군현지도의 예술성 제고에 기여한 점에서 회화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This paper focused on characteristics of the pictorial maps in the late Joseon Period. Each provincial Eupchi painted by Feng-shui theory and the ruling ideas on the pictorial maps. Most of pictorial maps advanced with landscape painting style in late Joseon period. The pictorial maps of folding screen type then in vogue are apt to appreciate such as landscape paintings. The painters who dispatched in provincial barracks painted many provincial maps and that lift the level of them. Some maps with genre subject and procession build bridges between maps and document paintings. Provincial maps compiled by government in 1872 are very important historical source for analyzing of military and economical situation in end of the 19th century. Especially Jeolla and Gyeongsang province maps maintain high stand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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