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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G를 삽입한 사냑 루프 대역 통과 필터의 해석

          정은주,정명영,김창석,Jung, Eun-Joo,Jeong, Myung-Yung,Kim, Chang-Seok 한국광학회 2007 한국광학회지 Vol.18 No.2

          사냑 고리 광섬유 간섭계의 특성을 이용하여 FBG의 반사특성을 투과특성으로 전환하는 고효율의 파장 선택 필터를 제안하고 수식적으로 분석 및 구현하였다. 제안된 대역 투과 필터는 사냑 고리 간섭계 구조에 FBG를 삽입하여 구현하였다. 고효율의 가변형 파장 선택 필터는 편광조절기에 의해 FBG 브래그 파장영역이외의 영역은 사냑 효과로 광의 세기를 가변적으로 투과하도록 조절하였고, 브래그 파장영역에서는 마이켈슨 간섭효과로 20 dB 이상의 소멸비를 갖는 광 투과를 얻었다. A tunable band-pass filter of fiber Bragg gratings incorporating the Sagnac loop interferometer configuration is presented. The proposed band-pass filter with extinction ratio 20 dB has practical advantages in terms of price and performance in comparison with the conventional band-pass filter using a circulator.

        • KCI등재

          차강 박기정의 《활정십경백납도병》 연구

          정은주(Jeong, Eun-j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장서각 Vol.0 No.39

          강릉 선교장은 효령대군 11대손인 李乃蕃(1703~1781)이 1748년 터를 잡은 이래 명실상부한 장원의 규모로 성장하였다. 이후 선교장은 금강산과 설악산, 영랑호, 경포대 등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전국의 명류들이 모이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선교장의 열화당과 활래정은 이곳을 거쳐 간 많은 묵객들과 서화가들의 자취가 다수 남아 있다. 그중 주목되는 것은 『강원도지』에 근대 관동지역 서화의 대가로 알려진 此江 朴基正(1874~1949)의 작품이다. 박기정은 彛齋 權敦仁(1793~1859)의 문인으로부터 수학한 후 위정척사의 영수였던 유인석 휘하에서 의병활동에 가담하여 일본에 저항하였다. 그는 원주와 강릉을 배경으로 많은 서화 작품을 남겼으나 그의 화명은 화단에서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제 주도의 서화협회 등록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박기정은 일제강점기 선교장 주인이던 이근우와 그의 아들 이돈의의 적극적 후원으로 선교장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 글은 강릉 선교장에 소장된 차강 박기정의 《活亭十景百衲圖屛》을 중심으로 그 창작 배경이 된 활래정의 문화사적 의의와 작품 내의 제시 및 화풍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박기정의 《활정십경백납도병》은 1946년 활래정 수석지관에서 제작되어 선교장 주인 이돈의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이러한 百衲屛風은 方形, 圓窓, 扇面 등 다양한 화면에 각각의 주제를 모아 하나의 병풍에 담은 것으로 19세기에 새로 등장한 회화형식이다. 백납도병은 당시 物譜 성격의 청완품에 대한 수집과 완상, 이미지 편집과 재배열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활정십경백납도병》은 편화를 별도로 부착하지 않고 병풍 면에 직접 여러 화면을 구획한 후 그림을 그려 넣은 형태이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화면에 그린 여러 종류의 화목과 화제를 적은 서예 작품에 이르기까지 박기정의 서화 세계를 종합적으로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백납도병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화목인 산수는 박기정의 현존 작품에서는 드물게 나타나 더욱 의미가 있다. 대개 강안의 어촌 풍경을 묘사하였는데, 이는 경포를 생활 무대로 한 선교장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작품이 모두 실경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박기정은 남송대 강남지역 화가들이 망국의 쇠잔한 정취를 산수화에 이입하는 ‘殘山剩水’의 구도를 빌려 화폭에 옮겨 놓은 것이다. 이는 그의 작품 활동 시기가 일제강점기와 점철되어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박기정의 작품 중 묵매는 『완당화보』를, 석란은 『석파화보』를 임모한 작품이 전하여 이들 화풍과의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다. 박기정의 서화 세계는 사심이 없는 경지에서 붓을 잡아야 한다는 ‘用筆在心, 心正則筆正’과 초월의 자유를 추구하는 ‘秋水精神’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청강 장일순, 화강 박영기에게 전수되어 현대화단까지 그의 화맥이 계승되었다. This paper focused on the cultural background Hwallae-jeong pavilion and painting style of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painted by Park Gijeong ( 1874~1949). Since Seongyojang House was the former upper class residence of the Yi Naebeon (1703-1781) noble family of Gangneung, Gangwondo, his son Yi Sichun and grandson Yi Hu has credited with their family’s economic success. As more and more writers and artists traveled to the eight famous spots in Eastern Korea, such as Geumgang Mountain, Seorak Mountain, Gyeongpo-dae pavilion and Yeongnang-ho Lake, Hwallae-jeong pavilion became an attraction among prominent men of the times. Yeolhwa-dang and Hwallae-jeong pavilion of Seongyojang House, as the cradle for painters and calligraphers, possessed works of Cho Inyeong, Kim Gyujin, Jeong Byeongjo, Kim Donhee, Kim Taeseok, Ryu Jinchan and Park Gijeong.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painted by Park Gijeong in 1946 for Yi Donui, owner of Seongyojang House. It was a ten-fold folding screen of Baengnabdo (百衲圖) style painted with various pictures in quadrangle, circle and fan-shaped line. The ten-fold folding screen of Baengnapdo has origin in Mulbo (物譜) to take pleasure in works of art and visual images in 19th century.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shows the various paintings and calligraphies of Park Gijeong. His calligraphies were motivated literati poetry of China and Joseon, Park’s own poem and Cho Inyeong’s poetry of Hwallae-jeong pavilion by poem rhythm of Zhu Xi. Park’s calligraphy is so-called Chagang style, modified styles of Kim Jeonghui and Gwon Donin. Every screen of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folding screen is composed of seven sections. It was painted in the literary artist’s style of inkand wash painting. Especially this work includes rare landscapes as well as four gracious plants, grapes, oddly shaped rocks and withered trees. His landscapes described our country devastated in Japanese colonial era by Canshan shengshui (殘山剩水) style of Southern Song Dynasty. The paintings and calligraphies of Park Gijeong are seeking for the selfish stage and transcendental idea, so-called ‘Qiushui Jingshen ( 秋水精神)’. This tendency of his works passed to his grandson Park Giyeong and Jang Ilsun in modern art society.

        • KCI등재

          《영사정팔경도(永思亭八景圖)》의 문화적 함의와 회화적 특징

          정은주(Jeong, Eun-j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한국학 Vol.39 No.3

          영사정(永思亭)은 전북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내기마을에서 50m 거리의 야산에 있는 누정이다. 영사정은 순흥안씨 가문의 효의 상징이자 조선중기 호남사림의 교유 장소로서 이에 대한 다수의 시문학이 전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영사정의 연혁을 사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관련 인물들의 교유관계와 영사정과의 인연을 밝혀 영사정의 연혁과 문화적 함의를 정리하였다. 그 결과 안전(1518‒1571)이 선친 안처순을 기리기 위해 거처의 남록에 영사정을 지은 시점은 안처순의 사후인 1534년 이후부터 적어도 1557년 임희무가 사제당을 방문하여 영사정 제영을 쓰기 이전임을 알 수 있었다. 정자 이름은 부모의 사후에도 길이 효성을 바치려는 『시경』 출전의 ‘영언효사(永言孝思)’의 마음에서 ‘영사(永思)’라 지었다. 이후 영사정은 1590년 안전의 아들인 안창국(1542‒1595)에 의해 중건되어 삼대에 걸친 순흥안씨 문중의 효를 상징하고, 제영을 중심으로 16‒17세기 호남사림들이 결속을 다지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시에는 남원 일대에 주둔하던 명나라 장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장소였으며, 명나라 주지번의 영사정 편액이 전하여 대외관계에서도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영사정이 주목을 받은 것은 1997년 한 전시회에서 처음 소개된 《영사정팔경도》를 통해서이다. 이 작품은 지본수묵화로 전체 8폭 중 6폭만 남아 있고, 화면의 박락이 심하여 처음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각 화면의 측면 상단에 남아 있는 ‘殘照’와 ‘孤舟’, ‘方丈晴雲’ 등 일부 화제(畵題)가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이 지은 「영사정팔영(永思亭八詠)」 시제(詩題)와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영사정팔경도’라고 명명되었다. 현재는 각 화폭을 유리 액자에 보관하고 있지만, 각 화폭의 크기는 박락 부분을 제외하고 대략 70×50cm로 일반 화첩의 크기와 달라 원래는 조선중기 유행한 8폭 소병풍 형식으로 장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사정팔경도》의 내용은 주로 영사정이 위치한 남원의 명승을 중심으로 선정된 팔경을 주제로 팔영시와 쌍을 이루며, 사계절의 풍광을 묘사하였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양대박이 지은 「영사정팔영」과 여러 문인의 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영사정팔경도》의 남원 실경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그린 것인지 파악하고 당대의 화풍과 비교하여 16세기 조선회화에서 유행한 안견파 화풍과 절파 화풍을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제1경 <창송냉월>은 영사정의 일곱 그루 소나무에 걸린 쓸쓸한 달빛, 제2경 <수죽청풍>은 영사정(永思亭) 뒤쪽 대숲에 이는 맑은 바람, 제3경 <순강모우>는 순강의 저녁 비, 제4경 <방장청운>은 지리산에 피는 청운, 제5경 <야도고주>는 순강 나루터의 외로운 배, 제6경 <단안쌍루>는 축천을 사이에 두고 단안 위에 마주한 보허정과 북정, 제7경 <폐성잔조>는 영사정 인근 황폐한 옛 산성 터의 낙조, 제8경 <장교효설>은 금석교의 새벽 눈발을 소재로 한 양대박의 「영사정팔영」과 《영사정팔경도》가 쌍을 이룬다. 따라서 《영사정팔경도》는 양대박의 생졸년을 고려할 때, 「영사정팔영」과 동시에 제작되었거나 그와 멀지 않은 1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사정팔경도》는 조선중기 실경을 바탕으로 그린 현존 팔경도가 희귀한 현실과 더욱이 남원 지역의 팔경을 그린 최고(最古) 사례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학술적 연구 가치가 매우 높다. According to record of Sunheung An clan and poetical composition, Yeongsa‒jeong pavilion built by An Jeon(安瑑, 1517‒1571) between 1534 and 1557 to take care of graves of his father An Cheo‒sun(安處順, 1492‒1534) and his mother from Buryeong Han clan. The name of pavilion derived from ‘Yeong‒eon ‒hyo‒sa(永言孝思)’ of the Book of Odes. Yeong‒eon‒hyo‒sa means to secure a lasting filial duty even after parent’s death. It was repaired by An Chang‒guk(安昌國, 1542‒1595) who was a son of An Jeon in 1590. It was a filial symbol of Sunheung An clan and a solidarity place of Honam scholars through the poetical composition on the pavilion in 16th and 17th Centuries. Ming military camped out at Yeongsa‒jeong pavilion during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3. The plaque lettering of the pavilion was written by Ju ji‒beon(朱之蕃, 1558‒1624) who came to the Joseon as an envoy of Ming in 1606. The eight scenic views of Yeongsa‒jeong pavilion remains six out of eight views. Its original type was an eight‒fold screen. Because the names of three views on the painting match up with the poetry of Yang Dae‒bak(梁大樸, 1544‒1592),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the work painted in the late 16th Century. The painting style is reminiscent of Yi Jeong(李楨, 1578‒1607) and Yi Gyeong‒yun(李慶胤, 1545‒1611) who acted in the 16th Century. The eight scenic views of Yeongsa‒jeong pavilion painted by An Gyeon(安堅) and Jeolpa(浙派) painting style at that time. This picture has high academic and artistic value as the oldest work drawn from scenic spots around the Yeongsa‒jeong pavilion in Namwon.

        • 謙齋(겸재) 鄭敾(정선)의 신분과 화풍 형성에 대한 소고(小考)

          정은주 ( Eun Joo Jeong ) 전남대학교 예술연구소 2014 藝術論集 Vol.14 No.-

          본고에서는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에 대한 선행 연구와 정선 당대 문인들의 문집에 나타난 글을 바탕으로 겸재 정선을 재평가하고, 그가 제작한 화첩을 시기별로 분석함으로써 그의 진경산수화의 형성과정과 발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또한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의 연구에 있어 현안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데 의미를 두었다. 즉, 최근 다시 대두되고 있는 겸재 정선의 출신 문제에 대해서는 『광주정씨세보』와 정선 당대의 문헌 기록을 통해 겸재가 ‘鄭君子’,‘生員’,‘선비(士)’등의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군왕인 영조가 그의 이름 대신 호를 정중하게 사용했다는 점과 조선후기 藝壇의 최대 文士인 사천 이병연, 윤순과 함께 겸재 정선이 ‘三藝의 雄者’로서 나란히 비견되었던 점은 예술적 성취와 위상을 직업적 수단으로 삼는 이들의 그것과 명백히 구분하고 있는 점에서 문인화가로서 당시 겸재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정선이 실경을 그리는데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점과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 계기는 화명으로 당시의 명사들과의 교유를 통해서 가졌던 詩會나 契會의 기념화 제작 등 사회적 요구에서 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 진경산수 작품 중 상당량이 그의 교유관계를 통해 제작된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眞景은 실경산수를 의미하지만, 조선후기에는 실경보다는 ‘眞景’또는 ‘眞境’이라는 용어로 일반화되었다. 이상주의를 추구한 유가와 도가적 산수화의 개념과 유관하며, 진경에서 ‘眞’의 의미를 실재 자연산수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외면적 사실성을 추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산수에서 趣를 발견하고 산수가 지닌 본래 性情을 파악한 후 그 정신을 전하려는 지속적 노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중국의 화론과 남종산수화를 적극 수용 후, 전선후기의 천기론적 문예관과 미의식을 바탕으로 중국인들도 그의 그림의 독창성에 탄성을 지를 만큼 중년이후 현격하게 화풍을 발전시켰다. 18세기 화단에 새로운 움직임과 함께 정선의 영향으로 우리 풍경에 매료되어 실경을 그리는 일에 참여한 일군의 화가를 겸재파 또는 정선파로 불리게 되었다. 본고는 겸재와 진경산수화의 현재까지의 학계 연구 동향을 살펴봄으로써 세부적인 문제로 부상하는 眞景의 의미, 鄭敾派의 문제 등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This study is aimed at reviewing the pending issues of Gyeomjae (謙齋) Jeong Seon(鄭敾, 1676-1759) and his paintings in Joseon Dynasty. He entered government service for the first time at 41 as an astronomer and professor for whom the gentry was responsible in 1716. Some theory presented possibilities that he would be a painter of Dohwaseo (圖畵署, Painting Bureau) before he entered government service by conducting wrong analysis of system and historical records at that time. But Gyeomjae completed his career as government official over about 40 years by retiring from Sadosi Cheomjeong (司도寺 僉正) to the rank of prime minister by becoming a Dongjijungchubusa (同知中樞府事) as a government position for the aged again when he was 81 years old and was granted Jeongyeong (正卿) of Hanseongpanyun (漢城判尹) by his greatest devotion in 1772 when thirteen years passed after his death. He could spend life as a government official for a long time and could advance to the rank of the prime minister and could be granted until Jeonggyeong by the support of government officials as well as the great king Youngjo(英祖). His paintings showed good feature bearing comparison with any government official in the class of the literati such as Yi Byeong-yeon (1671-1751) and Yun Sun (1680-1741) in his own age. It’s not clarify when he start the painting of real scenery landscapes. But most of his paintings come from the gatherings with scholars, literati and government officers and his government careers. His paintings of real scenery landscapes were concerned with an ideology of Taoism and Confucianism. The real (眞) means the essence of nature as well as similar figure. His paintings developed originality from the Chinese painting of the Southern School and achieved admirable results from even the Chinese literati. Indeed, the result he pulled Gyeomjae School, the art circles of 18th century in Joseon Dynasyt.

        • KCI등재

          건륭연간(乾隆年間)<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연구(硏究)

          정은주 ( Eun Joo Jeong ) 중국사학회 2011 中國史硏究 Vol.72 No.-

          This thesis analyzes five paintings entitled Wanguo-laichao tu(the many nations presenting tributes) during the Qianlong Emperor`s reign. Wanguo-laichao-tu are the paintings of zhaohui(the morning rally) of the national holidays such as Longevity Festival and New Year`s Day in the Qing Imperial Palace. These paintings described vividly many envoys, including Joseon envoy, getting tributes to present for Qianlong Emperor and the Emperor`s honor guards displayed in Qing Imperial Palace. There is a little different from the real diplomatic rite of zhaohui on the images, but Wanguo-laichao-tu show a reflection of the time of peace and the great power during the Qianlong Emperor`s reign. Wanguo-laichao-tu painted first in the 25th year of Qianlong period conquered against Jungar and Xinjiang. Qianlong Emperor`s poem on the Wanguo-laichao-tu, painted in 1761, is the same poem as a preface of Huangqing-zhigong-tu. Both works painted by Zheng Guanfeng, Jin Tingbiao, Yao Wenhan, Xie Sui and Gu Quan. Huangqing-zhigong-tu described separately the various customs of tributary countries and all ethnic minorities. Wanguo-laichao-tu rearranged synthetically many nations and ethnic minorities of Huangqing-zhigong-tu at one place. Wanguo-laichao-tu reflects the future prosperity of Qing Dynasty as well as the rite of the first writing in the New Year`s Day through the Qianlong Emperor with Imperial descendants sitting in front of the Mingchuang(a window coming light) of Yangxin-dian and Yangxing-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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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지식인의 지도 제작과 지리인식

          정은주(Jeong, Eun-joo)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17 한국학논집 Vol.0 No.69

          지도란 그 시대와 민족의 지적 유산으로 지도를 통해 우리는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지도는 사용을 전제로 제작된 것이므로 지도를 만든 이의 구체적 사고나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조선시대 국가나 관에서 제작한 지도의 최전선에는 그것을 직접 손으로 그려내는 화원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지도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계층은 바로 지도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구상하고, 이를 위해 지리지와 지도의 중요성을 먼저 간파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역량을 가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선행연구를 심화하여 현존하는 조선시대 지도 중 지식인이 직접 제작에 참여한 지도를 중심으로 그들이 지도 위에 구현하려했던 사상과 지리인식을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첫째, 중국식 직방세계를 구현한 천하여지도와 도교사상에 근거한 천하도에 반영된 중화인식을 살펴보았다. 둘째, 조선전도의 형세적 윤곽을 중심으로, 숙종연간 백두산 정계 이후 북방에 대한 영토의식이 반영된 관방지도와 경제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된 도서 지역에 대한 지도 상의 변화를 검토하였다. 셋째,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본격적으로 제작된 서양식 세계지도에 대한 인식과 지식인들이 모본으로 삼은 중국의 漢譯 세계지도 원본과의 비교․고찰을 통해 중화를 탈피하고 세계를 사실적으로 파악하려던 노력을 살펴보았다. Maps, as the intellectual legacy, provide much information about the people and Nations. Maps reflect the thought of makers because they were made by actual demand. There were many painters in the front line to paint maps made in Joseon Dynasty. But intellectuals gathered data of the geography books and maps, and they knew how to fill the contents in maps. This paper focuses on geographical perception of the maps made by intellectuals in Joseon Dynasty. This study aimed at Cheonha-do (天下圖) realized the Sino-centrism and ideals of Taoism, the complete maps of Joseon (朝鮮全圖) reflected the islets and northern territories issue and the Western maps into Chinese (漢譯世界地圖) introduced from China during the 17th and 19th centuries. Especially, the intellectual thought got out of Sino-centrism through the western maps. The most of existing western maps made by Joseon’s intellectuals in Jeollado province, it is a subject to research in the future.

        • KCI등재

          건륭연간(乾隆年間) 북경성(北京城) 지도(地圖)와 국가전례(國家典禮) 기록화(記錄畵)

          정은주 ( Jeong¸ Eun-joo ) 명청사학회 2021 명청사연구 Vol.- No.55

          This paper is aimed to understand in aspect of the structural changes of the capital city through the maps of Beijing and the documentary paintings during the reign of Qianlong Emperor. Due to the influence making techniques of the Western cartography, the map of Beijing in detail showed the more systematic aspect of Beijing's governance than before. In addition, the maps reflected the past trace of Beijing over time. The paintings of the imperial ceremonies against the backdrop of Beijing were made in great styles in the reign of Qianlong. These paintings are national-scale recordings centered around the palace and outside the walls of Beijing capital city at the time and are meaningful visual materials that show the actual status of rituals held at the site along with the related records. The paintings were classified by the state rituals in the Qing Dynasty. These allow for practical access to the intentions of the Qing emperor and politicians to realize in the capital city of Beijing. The ceremonies of the Emperor and the Empress dowager' Birthday were held to celebrate on a national scale. The imperial family were also congratulated by the government officials and foreign envoys. A number of court paintings and wood-blocks were made in the background of the celebration of the Emperor and the Empress dowager' Birthday. The paintings of the banquet for victorious campaign at Ziguang-ge(紫光閣) and the ceremony offering captives and the head of an enemy to the Emperor at Wumen(午門) are the military ceremonies commemorating the victory on a foreign expedition in 1760. The military skating game on ice at Taiyechi(太液池) around the time of winter solstice to promote the martialism and to make a show force to foreign countries. The paintings of the national ceremonies against Beijing capital focused on the powerful imperial power, the era of prosperity, and the images reproduced great powers of the Qing Dynasty.

        • KCI등재

          계미(1763)통신사행의 화원(畵員) 활동 연구

          정은주(Jeong Eun-j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한국학 Vol.34 No.2

          계미통신사행은 그 어느 때보다 교유 일본인들의 창화 문집이 많이 남아 있어 당시 양국 간 문화교유가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화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본문에서는 계미통신사행과 관련하여 일본에 소장된 계미통신사절의 기록 및 일본 현존 작품을 근거로 계미통신사행에 동행한 화원 김유성(1725-1775 이후)과 별화원 변박, 그리고 변탁의 활동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케노 다이가가 그린 조선통신사행렬도 「한객여행도」와 김유성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을 면밀히 분석하여 1763년 계미통신사행에서 화원 김유성과 일본 남화의 대가 이케노 다이가와의 교유 상황과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교유관계를 파악하였다. 특히 최근까지도 선행 연구에서 별화원 변박과 변탁을 동일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 글에서는 통신사행의 좌목과 문집에서 사용된 이들의 자와 호의 차이에서 별개 인물임을 명확히 하였다. 동래부에 소속 인물들로 조엄의 신임으로 기선장에 발탁되었으나, 그들의 서화에 대한 재예가 이들의 선발기준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변박의 경우는 그림에 능하여 막부 장군이 참관하는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 수행화원 김유성과 같은 포상을 받았으며, 정사 조엄으로부터 요구되는 회사(繪事)를 맡아 수행하였다. 이 글에서는 변박이 에도까지 입성하여 세이켄지에 남긴 차운시와 관상가 니야마 다이호가 변탁을 만나 그에 대한 자세한 인상과 신상을 소개한 『한객인상필화』의 내용을 자세히 예시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계미통신사행에서 문화 전파의 한축인 화원들의 활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동래 화원 변박과 변탁에 대한 학계의 혼선을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This study is aimed at reviewing the painters of the Tongsinsa in 1763-1764. There are some paintings of painter Gim Yuseong, Byeon Bak and Byeon Tak in the Japan. Five works of Gim Yuseong painted in Japan during 1763-1764, the rest with Japanese monk’s poetry after 1764 would be brought into Japan as trade goods. Ikeno Taiga, who is the most famous artist of Japan Nanga, painted Korean envoys’ procession imitated Gim Yuseong’s idiom by finger painting style. Byeon Bak and Byeon Tak were regarded as the same person in some researches up to recently; however, this paper uncovered that they were entirely different. That is verified through Byeon Bak’s poem of Seikenji, Byeon Tak’s record of Hangaekinsang-pilhwa by Niyama Daiho and the Tongsinsa’s list of Diaries written by Nam Ok and Jo Eom.

        • KCI등재

          《江華府宮殿圖》의 제작배경과 화풍

          정은주(Eun Joo Jeong)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09 문화 역사 지리 Vol.21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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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江華府宮殿圖》는 1866년 병인양요로 인해 전소돼버린 강화부 궁전의 옛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화로, 《동궐도》나《수원궁궐도》등과 함께 19세기 궁궐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강화부궁전도》는 적어도 1858년(철종 9)에 봉선전이 유수 俞章煥에 의해 復建된 후부터 1866년 병인양요로 소실되기 이전 강화부 궁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제작시기와 관련하여 『승정원일기』의 기사를 통해 1865년(고종2)에 있었던 강화부 행궁 및 관아, 성곽 등에 관한 보수 작업과 관련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강화부궁전도》의 제작 목적은 세부 건물의 규모를 그림으로 기록하여 보수공사를 완료한 후 국왕에게 진상하기 위한 일종의 彩色圖形으로 19세기 일반화된 평행투시도법으로 건물을 布置하고 붉은 색을 비롯한 원색을 주로 사용하여 도감과 의궤의 樓閣 界畵에 능했던 화원이 제작 실무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Ganghwabu Gengjeondo is a masterpiece of Gyehwa (fine-line architectural paintings) compared with Donggwoldo and Suwon Gunggwoldo in the 19th century. Ganghwabu Gungjeondo painted in 1858 to 1866, because Bongseonjeon Hall on th painting was rebuilt in 1858 and every building is destroyed by fire in 1866. According to the Seungjeongwon Ilgi(Daily Records of the Royal Secretariat), the date painted might be related to repairing the facilities and buildings of Ganghwabu in 1865. After repairing works of the buildings, Ganghwabu Gungjeondo was painted to present to the king Gojong (r. 1864-1907) as a plane figure for a briefing. The buildings composed with the parallel perspective generalized and their composition is similar to the plane figures. The painter of Ganghwabu Gungjeondo is most likely to be a court painter to make the state event manuals.

        • KCI등재

          1634년 명 사신 영접과 〈황강연조도〉

          정은주(Jeong, Eun-j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한국학 Vol.36 No.3

          이 글에서 연구 대상으로 한 〈황강연조도〉는 규장각 소장 〈의순관영조도〉 이래 명사 영접을 기록한 희귀본이다.〈황강연조도〉는 명나라에서 1634년(인조 12) 사례감 태감 노유녕(1590?미상)을 칙사로 임명하여 소현세자의 책봉 고명과 면복 및 채단을 보냈던 배경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황강연조도〉는 황주에서 명사 일행을 영접하였던 원접사와 종사관을 비롯해 관반으로 동원된 황해관찰사 오숙 이하 황해도 지역 지방관 명단이 좌목에 상세히 적혀 있어 그림의 제작 배경을 추정하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황강연조도〉가 그려진 1634년을 전후한 시대적 배경은 명과 후금이 주도권 다툼을 하던 명청교체기로, 조선과 중국 간에 긴박한 대외 관계가 전개되던 때이다. 1634년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태감 노유녕은 조선의 영접 의주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인정물품을 무리하게 요구하여 정묘호란 이후 황폐한 조선의 경제 상황에 큰 부담을 주었다. 이 글에서는 도경유의 문집 『낙음집』을 통해 성주도씨 종중에서 소장해온 〈황강연조도〉의 제작 경위를 파악하여 현존 작품에 대한 양식적 선후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 현재 성주도씨 종중이 소유한 〈황강연조도〉필사본 2점은 당시 관반으로 참여한 봉산군수 도경유가 소장한 작품과 관련이 있다. 그중 계회축 형식 1점과 『낙음집』 내에 삽입된 〈황강연조도〉 목판은 성주도씨 종중에 의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었고, 그림 부분만 있는 1점이 도경유를 제향하는 대구 병암서원에 소장되었다. 양식적으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계회도 형식을 갖춘 작품이 병암서원 소장 그림보다 17세기 화풍을 비교적 잘 반영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6년 목판으로 판각한 〈황강연조도〉가 제작되어 『낙음집』의 삽도로 인출되었다. 한편 광주에서 구장되었던 작품은 19세기 민화풍을 반영하여 모사되었으나, 당시 황주에서 관반으로 참여하였던 인물들의 좌목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작품으로 주목하였다. 대부분의 가전 기록화가 그렇듯 현존하는 〈황강연조도〉는 도경유가 소유했던 원본을 지속적으로 후대에 전승하고 보전하기 위해 두 차례 이상 모사하였으며, 도본을『낙음집』에 함께 남기기 위해 1906년에 목판본으로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성주도씨 종중의 조상 숭모의 의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1634년 그려진〈황강연조도〉의 원본을 유추할 수 있는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이들 작품은 가문의 기록을 넘어 명청교체기 해로를 통해 조선에 온 명사를 황주에서 영접하는 장면과 명사 및 원접사 일행의 행렬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여 규장각 소장 〈의순관영조도〉이래 조선과 명의 대외관계 일면을 보여주는 희귀한 기록화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This Study is aimed at reviewing the diplomatic ritual of Ming envoys of the Ming?Qing transition as a historical background and the painting details of Hwanggang Yeonjo?do. Hwanggang Yeonjo?do is a documentary painting of diplomatic ritual of Ming envoy Lu Wei?ning, who came with the document of the last Ming Emperor for the installation of the Crown Prince Sohyeon in Hwangju 1634. Hwanggang Yeonjo?do, painted by professional painters, distributed 24 people; including Bongsan county governor Do Gyeong?yu as reception committee of Ming envoy in Hwangju. The composition of picture is three part, the title of the top, painting of the middle and participant list of the bottom. There are four existing works, three paintings and one woodcut. Three works of Do Gyeong?yu’s family are not original painted in 1634. One is a painting with only 23 participants except Jaenyeong county governor Choe Taek?seon, another is just a painting without the title and name list, and the other is a woodcut inserted in Nageum?gip as a collection of Do Gyeong?yu’s works in 1906. Two paintings among them were copied by a painting style of the 17th Century. Another one was unveiled on a journal by a collector in Gwangju in 1974. The 24 participants of the reception committee listed at the bottom of this work, but the painting style was a folk painting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works of Do Gyeong?yu’ family were painted more than twice for the cult of ancestor worship. Above all, they have a distinct historical value as rare documentary paintings of the Sino?Korean diplomatic relations among the Ming?Qing tran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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