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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G를 삽입한 사냑 루프 대역 통과 필터의 해석

          정은주,정명영,김창석,Jung, Eun-Joo,Jeong, Myung-Yung,Kim, Chang-Seok 한국광학회 2007 한국광학회지 Vol.18 No.2

          사냑 고리 광섬유 간섭계의 특성을 이용하여 FBG의 반사특성을 투과특성으로 전환하는 고효율의 파장 선택 필터를 제안하고 수식적으로 분석 및 구현하였다. 제안된 대역 투과 필터는 사냑 고리 간섭계 구조에 FBG를 삽입하여 구현하였다. 고효율의 가변형 파장 선택 필터는 편광조절기에 의해 FBG 브래그 파장영역이외의 영역은 사냑 효과로 광의 세기를 가변적으로 투과하도록 조절하였고, 브래그 파장영역에서는 마이켈슨 간섭효과로 20 dB 이상의 소멸비를 갖는 광 투과를 얻었다. A tunable band-pass filter of fiber Bragg gratings incorporating the Sagnac loop interferometer configuration is presented. The proposed band-pass filter with extinction ratio 20 dB has practical advantages in terms of price and performance in comparison with the conventional band-pass filter using a circul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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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강 박기정의 《활정십경백납도병》 연구

          정은주(Jeong, Eun-j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장서각 Vol.0 No.39

          강릉 선교장은 효령대군 11대손인 李乃蕃(1703~1781)이 1748년 터를 잡은 이래 명실상부한 장원의 규모로 성장하였다. 이후 선교장은 금강산과 설악산, 영랑호, 경포대 등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전국의 명류들이 모이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선교장의 열화당과 활래정은 이곳을 거쳐 간 많은 묵객들과 서화가들의 자취가 다수 남아 있다. 그중 주목되는 것은 『강원도지』에 근대 관동지역 서화의 대가로 알려진 此江 朴基正(1874~1949)의 작품이다. 박기정은 彛齋 權敦仁(1793~1859)의 문인으로부터 수학한 후 위정척사의 영수였던 유인석 휘하에서 의병활동에 가담하여 일본에 저항하였다. 그는 원주와 강릉을 배경으로 많은 서화 작품을 남겼으나 그의 화명은 화단에서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제 주도의 서화협회 등록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박기정은 일제강점기 선교장 주인이던 이근우와 그의 아들 이돈의의 적극적 후원으로 선교장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 글은 강릉 선교장에 소장된 차강 박기정의 《活亭十景百衲圖屛》을 중심으로 그 창작 배경이 된 활래정의 문화사적 의의와 작품 내의 제시 및 화풍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박기정의 《활정십경백납도병》은 1946년 활래정 수석지관에서 제작되어 선교장 주인 이돈의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이러한 百衲屛風은 方形, 圓窓, 扇面 등 다양한 화면에 각각의 주제를 모아 하나의 병풍에 담은 것으로 19세기에 새로 등장한 회화형식이다. 백납도병은 당시 物譜 성격의 청완품에 대한 수집과 완상, 이미지 편집과 재배열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활정십경백납도병》은 편화를 별도로 부착하지 않고 병풍 면에 직접 여러 화면을 구획한 후 그림을 그려 넣은 형태이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화면에 그린 여러 종류의 화목과 화제를 적은 서예 작품에 이르기까지 박기정의 서화 세계를 종합적으로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백납도병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화목인 산수는 박기정의 현존 작품에서는 드물게 나타나 더욱 의미가 있다. 대개 강안의 어촌 풍경을 묘사하였는데, 이는 경포를 생활 무대로 한 선교장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작품이 모두 실경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박기정은 남송대 강남지역 화가들이 망국의 쇠잔한 정취를 산수화에 이입하는 ‘殘山剩水’의 구도를 빌려 화폭에 옮겨 놓은 것이다. 이는 그의 작품 활동 시기가 일제강점기와 점철되어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박기정의 작품 중 묵매는 『완당화보』를, 석란은 『석파화보』를 임모한 작품이 전하여 이들 화풍과의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다. 박기정의 서화 세계는 사심이 없는 경지에서 붓을 잡아야 한다는 ‘用筆在心, 心正則筆正’과 초월의 자유를 추구하는 ‘秋水精神’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청강 장일순, 화강 박영기에게 전수되어 현대화단까지 그의 화맥이 계승되었다. This paper focused on the cultural background Hwallae-jeong pavilion and painting style of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painted by Park Gijeong ( 1874~1949). Since Seongyojang House was the former upper class residence of the Yi Naebeon (1703-1781) noble family of Gangneung, Gangwondo, his son Yi Sichun and grandson Yi Hu has credited with their family’s economic success. As more and more writers and artists traveled to the eight famous spots in Eastern Korea, such as Geumgang Mountain, Seorak Mountain, Gyeongpo-dae pavilion and Yeongnang-ho Lake, Hwallae-jeong pavilion became an attraction among prominent men of the times. Yeolhwa-dang and Hwallae-jeong pavilion of Seongyojang House, as the cradle for painters and calligraphers, possessed works of Cho Inyeong, Kim Gyujin, Jeong Byeongjo, Kim Donhee, Kim Taeseok, Ryu Jinchan and Park Gijeong.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painted by Park Gijeong in 1946 for Yi Donui, owner of Seongyojang House. It was a ten-fold folding screen of Baengnabdo (百衲圖) style painted with various pictures in quadrangle, circle and fan-shaped line. The ten-fold folding screen of Baengnapdo has origin in Mulbo (物譜) to take pleasure in works of art and visual images in 19th century.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shows the various paintings and calligraphies of Park Gijeong. His calligraphies were motivated literati poetry of China and Joseon, Park’s own poem and Cho Inyeong’s poetry of Hwallae-jeong pavilion by poem rhythm of Zhu Xi. Park’s calligraphy is so-called Chagang style, modified styles of Kim Jeonghui and Gwon Donin. Every screen of the ten views of Hwallae-jeong pavilion folding screen is composed of seven sections. It was painted in the literary artist’s style of inkand wash painting. Especially this work includes rare landscapes as well as four gracious plants, grapes, oddly shaped rocks and withered trees. His landscapes described our country devastated in Japanese colonial era by Canshan shengshui (殘山剩水) style of Southern Song Dynasty. The paintings and calligraphies of Park Gijeong are seeking for the selfish stage and transcendental idea, so-called ‘Qiushui Jingshen ( 秋水精神)’. This tendency of his works passed to his grandson Park Giyeong and Jang Ilsun in modern art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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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사정팔경도(永思亭八景圖)》의 문화적 함의와 회화적 특징

          정은주(Jeong, Eun-j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한국학 Vol.39 No.3

          영사정(永思亭)은 전북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내기마을에서 50m 거리의 야산에 있는 누정이다. 영사정은 순흥안씨 가문의 효의 상징이자 조선중기 호남사림의 교유 장소로서 이에 대한 다수의 시문학이 전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영사정의 연혁을 사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관련 인물들의 교유관계와 영사정과의 인연을 밝혀 영사정의 연혁과 문화적 함의를 정리하였다. 그 결과 안전(1518‒1571)이 선친 안처순을 기리기 위해 거처의 남록에 영사정을 지은 시점은 안처순의 사후인 1534년 이후부터 적어도 1557년 임희무가 사제당을 방문하여 영사정 제영을 쓰기 이전임을 알 수 있었다. 정자 이름은 부모의 사후에도 길이 효성을 바치려는 『시경』 출전의 ‘영언효사(永言孝思)’의 마음에서 ‘영사(永思)’라 지었다. 이후 영사정은 1590년 안전의 아들인 안창국(1542‒1595)에 의해 중건되어 삼대에 걸친 순흥안씨 문중의 효를 상징하고, 제영을 중심으로 16‒17세기 호남사림들이 결속을 다지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시에는 남원 일대에 주둔하던 명나라 장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장소였으며, 명나라 주지번의 영사정 편액이 전하여 대외관계에서도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영사정이 주목을 받은 것은 1997년 한 전시회에서 처음 소개된 《영사정팔경도》를 통해서이다. 이 작품은 지본수묵화로 전체 8폭 중 6폭만 남아 있고, 화면의 박락이 심하여 처음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각 화면의 측면 상단에 남아 있는 ‘殘照’와 ‘孤舟’, ‘方丈晴雲’ 등 일부 화제(畵題)가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이 지은 「영사정팔영(永思亭八詠)」 시제(詩題)와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영사정팔경도’라고 명명되었다. 현재는 각 화폭을 유리 액자에 보관하고 있지만, 각 화폭의 크기는 박락 부분을 제외하고 대략 70×50cm로 일반 화첩의 크기와 달라 원래는 조선중기 유행한 8폭 소병풍 형식으로 장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사정팔경도》의 내용은 주로 영사정이 위치한 남원의 명승을 중심으로 선정된 팔경을 주제로 팔영시와 쌍을 이루며, 사계절의 풍광을 묘사하였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양대박이 지은 「영사정팔영」과 여러 문인의 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영사정팔경도》의 남원 실경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그린 것인지 파악하고 당대의 화풍과 비교하여 16세기 조선회화에서 유행한 안견파 화풍과 절파 화풍을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제1경 <창송냉월>은 영사정의 일곱 그루 소나무에 걸린 쓸쓸한 달빛, 제2경 <수죽청풍>은 영사정(永思亭) 뒤쪽 대숲에 이는 맑은 바람, 제3경 <순강모우>는 순강의 저녁 비, 제4경 <방장청운>은 지리산에 피는 청운, 제5경 <야도고주>는 순강 나루터의 외로운 배, 제6경 <단안쌍루>는 축천을 사이에 두고 단안 위에 마주한 보허정과 북정, 제7경 <폐성잔조>는 영사정 인근 황폐한 옛 산성 터의 낙조, 제8경 <장교효설>은 금석교의 새벽 눈발을 소재로 한 양대박의 「영사정팔영」과 《영사정팔경도》가 쌍을 이룬다. 따라서 《영사정팔경도》는 양대박의 생졸년을 고려할 때, 「영사정팔영」과 동시에 제작되었거나 그와 멀지 않은 1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사정팔경도》는 조선중기 실경을 바탕으로 그린 현존 팔경도가 희귀한 현실과 더욱이 남원 지역의 팔경을 그린 최고(最古) 사례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학술적 연구 가치가 매우 높다. According to record of Sunheung An clan and poetical composition, Yeongsa‒jeong pavilion built by An Jeon(安瑑, 1517‒1571) between 1534 and 1557 to take care of graves of his father An Cheo‒sun(安處順, 1492‒1534) and his mother from Buryeong Han clan. The name of pavilion derived from ‘Yeong‒eon ‒hyo‒sa(永言孝思)’ of the Book of Odes. Yeong‒eon‒hyo‒sa means to secure a lasting filial duty even after parent’s death. It was repaired by An Chang‒guk(安昌國, 1542‒1595) who was a son of An Jeon in 1590. It was a filial symbol of Sunheung An clan and a solidarity place of Honam scholars through the poetical composition on the pavilion in 16th and 17th Centuries. Ming military camped out at Yeongsa‒jeong pavilion during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3. The plaque lettering of the pavilion was written by Ju ji‒beon(朱之蕃, 1558‒1624) who came to the Joseon as an envoy of Ming in 1606. The eight scenic views of Yeongsa‒jeong pavilion remains six out of eight views. Its original type was an eight‒fold screen. Because the names of three views on the painting match up with the poetry of Yang Dae‒bak(梁大樸, 1544‒1592),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the work painted in the late 16th Century. The painting style is reminiscent of Yi Jeong(李楨, 1578‒1607) and Yi Gyeong‒yun(李慶胤, 1545‒1611) who acted in the 16th Century. The eight scenic views of Yeongsa‒jeong pavilion painted by An Gyeon(安堅) and Jeolpa(浙派) painting style at that time. This picture has high academic and artistic value as the oldest work drawn from scenic spots around the Yeongsa‒jeong pavilion in Namwon.

        • 謙齋(겸재) 鄭敾(정선)의 신분과 화풍 형성에 대한 소고(小考)

          정은주 ( Eun Joo Jeong ) 전남대학교 예술연구소 2014 藝術論集 Vol.14 No.-

          본고에서는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에 대한 선행 연구와 정선 당대 문인들의 문집에 나타난 글을 바탕으로 겸재 정선을 재평가하고, 그가 제작한 화첩을 시기별로 분석함으로써 그의 진경산수화의 형성과정과 발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또한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의 연구에 있어 현안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데 의미를 두었다. 즉, 최근 다시 대두되고 있는 겸재 정선의 출신 문제에 대해서는 『광주정씨세보』와 정선 당대의 문헌 기록을 통해 겸재가 ‘鄭君子’,‘生員’,‘선비(士)’등의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군왕인 영조가 그의 이름 대신 호를 정중하게 사용했다는 점과 조선후기 藝壇의 최대 文士인 사천 이병연, 윤순과 함께 겸재 정선이 ‘三藝의 雄者’로서 나란히 비견되었던 점은 예술적 성취와 위상을 직업적 수단으로 삼는 이들의 그것과 명백히 구분하고 있는 점에서 문인화가로서 당시 겸재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정선이 실경을 그리는데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점과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 계기는 화명으로 당시의 명사들과의 교유를 통해서 가졌던 詩會나 契會의 기념화 제작 등 사회적 요구에서 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 진경산수 작품 중 상당량이 그의 교유관계를 통해 제작된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眞景은 실경산수를 의미하지만, 조선후기에는 실경보다는 ‘眞景’또는 ‘眞境’이라는 용어로 일반화되었다. 이상주의를 추구한 유가와 도가적 산수화의 개념과 유관하며, 진경에서 ‘眞’의 의미를 실재 자연산수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외면적 사실성을 추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산수에서 趣를 발견하고 산수가 지닌 본래 性情을 파악한 후 그 정신을 전하려는 지속적 노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중국의 화론과 남종산수화를 적극 수용 후, 전선후기의 천기론적 문예관과 미의식을 바탕으로 중국인들도 그의 그림의 독창성에 탄성을 지를 만큼 중년이후 현격하게 화풍을 발전시켰다. 18세기 화단에 새로운 움직임과 함께 정선의 영향으로 우리 풍경에 매료되어 실경을 그리는 일에 참여한 일군의 화가를 겸재파 또는 정선파로 불리게 되었다. 본고는 겸재와 진경산수화의 현재까지의 학계 연구 동향을 살펴봄으로써 세부적인 문제로 부상하는 眞景의 의미, 鄭敾派의 문제 등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This study is aimed at reviewing the pending issues of Gyeomjae (謙齋) Jeong Seon(鄭敾, 1676-1759) and his paintings in Joseon Dynasty. He entered government service for the first time at 41 as an astronomer and professor for whom the gentry was responsible in 1716. Some theory presented possibilities that he would be a painter of Dohwaseo (圖畵署, Painting Bureau) before he entered government service by conducting wrong analysis of system and historical records at that time. But Gyeomjae completed his career as government official over about 40 years by retiring from Sadosi Cheomjeong (司도寺 僉正) to the rank of prime minister by becoming a Dongjijungchubusa (同知中樞府事) as a government position for the aged again when he was 81 years old and was granted Jeongyeong (正卿) of Hanseongpanyun (漢城判尹) by his greatest devotion in 1772 when thirteen years passed after his death. He could spend life as a government official for a long time and could advance to the rank of the prime minister and could be granted until Jeonggyeong by the support of government officials as well as the great king Youngjo(英祖). His paintings showed good feature bearing comparison with any government official in the class of the literati such as Yi Byeong-yeon (1671-1751) and Yun Sun (1680-1741) in his own age. It’s not clarify when he start the painting of real scenery landscapes. But most of his paintings come from the gatherings with scholars, literati and government officers and his government careers. His paintings of real scenery landscapes were concerned with an ideology of Taoism and Confucianism. The real (眞) means the essence of nature as well as similar figure. His paintings developed originality from the Chinese painting of the Southern School and achieved admirable results from even the Chinese literati. Indeed, the result he pulled Gyeomjae School, the art circles of 18th century in Joseon Dynasy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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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지식인의 지도 제작과 지리인식

          정은주(Jeong, Eun-joo)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17 한국학논집 Vol.0 No.69

          지도란 그 시대와 민족의 지적 유산으로 지도를 통해 우리는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지도는 사용을 전제로 제작된 것이므로 지도를 만든 이의 구체적 사고나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조선시대 국가나 관에서 제작한 지도의 최전선에는 그것을 직접 손으로 그려내는 화원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지도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계층은 바로 지도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구상하고, 이를 위해 지리지와 지도의 중요성을 먼저 간파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역량을 가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선행연구를 심화하여 현존하는 조선시대 지도 중 지식인이 직접 제작에 참여한 지도를 중심으로 그들이 지도 위에 구현하려했던 사상과 지리인식을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첫째, 중국식 직방세계를 구현한 천하여지도와 도교사상에 근거한 천하도에 반영된 중화인식을 살펴보았다. 둘째, 조선전도의 형세적 윤곽을 중심으로, 숙종연간 백두산 정계 이후 북방에 대한 영토의식이 반영된 관방지도와 경제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된 도서 지역에 대한 지도 상의 변화를 검토하였다. 셋째,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본격적으로 제작된 서양식 세계지도에 대한 인식과 지식인들이 모본으로 삼은 중국의 漢譯 세계지도 원본과의 비교․고찰을 통해 중화를 탈피하고 세계를 사실적으로 파악하려던 노력을 살펴보았다. Maps, as the intellectual legacy, provide much information about the people and Nations. Maps reflect the thought of makers because they were made by actual demand. There were many painters in the front line to paint maps made in Joseon Dynasty. But intellectuals gathered data of the geography books and maps, and they knew how to fill the contents in maps. This paper focuses on geographical perception of the maps made by intellectuals in Joseon Dynasty. This study aimed at Cheonha-do (天下圖) realized the Sino-centrism and ideals of Taoism, the complete maps of Joseon (朝鮮全圖) reflected the islets and northern territories issue and the Western maps into Chinese (漢譯世界地圖) introduced from China during the 17th and 19th centuries. Especially, the intellectual thought got out of Sino-centrism through the western maps. The most of existing western maps made by Joseon’s intellectuals in Jeollado province, it is a subject to research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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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1년 신미통신사 빈례(賓禮) 관련 회화 연구

          정은주(Jeong, Eun- j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 한국학 Vol.38 No.1

          1811년 신미통신사행을 이전 통신사행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은 통신사의 외교 의례가 에도가 아닌 쓰시마 부중에서 치러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례 장소의 변경을 조선에서는 ‘역지통신’, 일본에서는 ‘역지빙례’ 라고 불렀다. 통신사행의 규모는 종사관을 제감하고 양사만 파견하여 366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1764년 제11회 통신사행 이후 무려 47년 만에 성사된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시대의 격변, 위기감을 반영하여 일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많은 기록과 회화를 남겼다. 이 글에서는 1811년 통신사행의 공식 일정에 따라 일본 측에서 제작된 통신사 빙례 관련 기록화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811년 통신사의 일정은 윤3월 12일 부산포를 출발하여 윤3월 29일에 쓰시마 부중에 도착하였고, 의례를 마친 후 6월 27일 쓰시마 부중에서 발선하여 7월2일 부산포에 정박하였다. 이때 일본 측에서는 통신사 노정지도와 통신사선의 규모, 그리고 국분사를 개조한 통신사 객관의 구조와 위치를 자세히 그렸다. 1811년 쓰시마 통신사행의 외교 의례는 먼저 에도 사신들이 통신사의 객관을 방문하여 쇼군의 뜻을 대신 전하고 숙공을 베푸는 위로의가 있었으며, 이어서 쓰시마 도주의 저택에서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의와 관백연향, 쓰시마 도주 저택에서 막부 쇼군의 회답국서를 받는 회답서의가 있었다. 이때 외교 의례를 위해 쓰시마 도주 저택으로 이동하는 통신사 행렬도의 필사본뿐만 아니라 목판본이 쓰시마번에서 제작되어 에도에서 판매되었다. 화면에는 종사관과 마상재 등 통신사행에서 제감인원은 그려지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현존하는 1811년 통신사행의 인물 복식도는 화권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후에 에도에서 모사되기도 하였다. 내용은 외교 문서교환이나 향응 시에 통신사의 인상과 복식을 위주로 그려졌다. 외교의례에서 통신사의 복식은 일본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유발시켰는데, 특히 1811년 통신사의 경우 초상과 복식이 본격적인 화권 형식으로 제작되어 기존 통신사행에서 교류 문인 문집에 삽화 형식으로 삽입되던 것과 차이를 보인다. 통신사에 대한 향응은 쓰시마에 도착한 4월 9일부터 4월 13일까지 도주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후 5월 26일 대마도주 저택에서 관백연향이 행해졌다. 이때 상상관 이상에는 칠오삼미상을 접대하였다. 이는 에도 쇼군의 의례에 제공되던 상차림보다 호화로워 당시 막부와 쓰시마번에서 통신사 접대에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제작된 1811년 통신사 관련 기록화는 쓰시마번에서 역지통신사행 빙례 관련 의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통신사행의 외교 의례를 회화 사료로써 보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가치가 높다. Since Shogun Tokugawa Ieharu(1737-1786) passed away in 1786, the Tokugawa shogunate several times delayed for invite the Joseon Envoys. But Tsusima, has cast a financial bottom line, kept trying to invite Joseon Envoys for over twenty years. In result, Joseon Dynasty sent the Envoys into Tsusima 1811. After 47years, Tsusima managed to put the deal through, and the third envoy and the talented men who get on horses ruled out of the total number of Joseon Envoys. They paid attention to Joseon Envoys and recorded many paintings, which reflected a sense of international crisis into turbulent times. This paper focused on the paintings of diplomatic events for Joseon Envoys into Tsusima in 1811. There are some maps of route, the paintings of vessels Joseon Envoys boarded and the residence remodeled a provincial temple in Tsusima. The progresses of diplomatic events are the banquet for Joseon Envoys to offer comfort at the residence, the event to deliver the diplomatic document of King Sunjo of Joseon to shogunate, the banquet thrown by Shogun Tokugawa and the event to deliver the answer document of Shogun Tokugawa at the provincial capital of Tsusima. There are some roll paintings and wood paints of Joseon Envoys’ parade at that time of diplomatic events. Those paintings made in Tsusima, and sold in Edo. Many Japanese attracted to the costumes of Joseon Envoys, and they expertly painted the figure paintings of Joseon people at the diplomatic events. Those separate color paintings distinguished from the illustrations in some literary works of other times. Joseon Envoys were given a warm receptions and offered dazzling set menu better than Shogun Tokugawa’s at the banquet. The feudal lord of Tsusima spent a great deal of money to order many ceramics used for Joseon Envoys. Some drawings and paintings of set menu showed that the feudal lord of Tsusima had an extreme interest for warm receptions. Those documentary paintings are very important visual data to represent the diplomatic events between Korea and Japan in 1811.

        • KCI등재

          華陽九曲圖를 통해 본 尤庵 학통의 계승 양상

          정은주(Jeong Eun-joo) 조선시대사학회 2018 朝鮮時代史學報 Vol.- No.87

          본문에서는 조선 문인들의 구곡문화 전통을 개략적으로 살펴 본 후 우암 송시열이 화양동에서 우거한 내력과 그의 사후 형성된 구곡의 명칭 유래를 분석하였다. 또한 기록으로 전하는 화양구곡도 시문과 현전 작품의 관련성을 파악하였다. 그 결과 우암의 후학들이 송시열과 주자의 사상을 연결하는 道統의 상징으로 화양구곡을 구현하려 했던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화양구곡도의 제작 목적과도 일맥상통한다. 현전 작품 중 권상하 후손가에서 구장했던 충북대학교박물관의 『화양구곡도』에는 금사담의 바위 위에 1762년 각자한 ‘蒼梧雲斷, 武夷山空’이 포함되어 제작시기를 그 이후로 추정할 수 있었다. 이형보의 『화양구곡도』는 우암 후손가의 소장본으로, 제9곡 화면에 “乙巳冬溪墅作竝題”라는 낙관을 통해 화첩의 제작시기가 1845년 겨울임을 밝혔다. 한편 조선민화박물관 소장 『화양구곡도병』은 이형보의 『화양구곡도』에 직접적 영향을 받았고, 호남의 기호학파 가문에서 소장했던 『화양산수병』의 模本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화양구곡도를 그리고 소장했던 가문 간의 영향 관계에서 우암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paper is focused on the characteristic of Gugok culture of Joseon literati and researched the origin of the names of the Hwayang-gugok(華陽九曲) formed after Song Siyeol’s death. According to the poetry of Zhu Xi’s Jeongsa architecture painting by Seo Geojeong, Wuyi Gugok-do was brought into this country in 15th Century. Gugok Garden(九曲園林) management and Gugok poetries(九曲詩歌) have caught on domestic circumstances of Joseon in 16th Century. Especially the Kiho School followed Gugok Garden management of Zhu Xi, developed new scenic sights. They showed off cultural superiority and succession of Zhu Xi’s scholastic mantle, while writing Gugok poetries and painting Gugok-do. Song Si-yeol put emphasis on Daemyeong Euiri Discourse to keep faith with the Ming Dynasty and Jonju Yangyi to respect the Zhou Dynasty based on the studies of Zhu Xi and Yi I. Song’s follower Gwon Sangha and Kim Jinok, descendants of Kim Jangsaeng, decided on the names of Hwayang-gugok after his life. The names included some historical sites of Song Siyeol. Min Jinwon engraved the Gugok names put together the physical places on rocks of Hwayang-gugok. This paper tried to find a correlation with the works existing and assumed the age that they were painted, through the analyses of the poetry and prose related to paintings of Hwayang-gugok. According to some records, there were picture books of Hwayang Gugok-do supported by Kim Jinok in 1719 and painted by Jeong Seon and Jo Yeong-seok from 1721 to 1736. Gwon Sineung, grandson of Gwon Seop, drew Gugok-do including Seonyu-dong in 1756. The literati studied under Ki Jeongjin who uphold the school ties of Song Siyeol in Jolla province such as Kim Nokhyu and Ki Dong-gwan shared the Hwayang Gugok folding screens in the late 19<SUP>th</SUP> Century. These are related to an example of Hwayang Gugok eight fold folding screen housed in the Chosun Minhwa Museum. There are two picture books of Hwayang Gugok-do from Gwon Sangha’s family made by unidentified person after 1762 and Song Siyeol’s family painted by Yi Hyeong-bo who was a descendent of Yi Deoksa father-in-law of Song Si-yeol in 1845. In addition to three artworks in Hwayang-dongji were edited by Seong Hae-eung before 1839. Hwayang Gugok-do embodied the thought connected between Zhu Xi and Song Si-yeol. Song’s thought and studies inherited his school through the paintings of Hwayang Gugok-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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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화(界畵) 기법(技法)을 계승한 원강(袁江)의 누각산수(樓閣山水) 연구(硏究)

          정은주 ( Jeong Eun Joo ) 중국사학회 2016 中國史硏究 Vol.105 No.-

          After that the literary artist`s style paintings began to emerge in the Song Dynasty, Jieh-hua was placed last among the 13 sections of paintings in the Yuan Dynasty. During the end of the Ming Dynasty and early Qing Dynasty, Jieh-hua was defined a kind of skilled craftsmen jobs. After hunting up the paintings of the Tang and Song Dynasties, Yuan Chiang made his official debut as a Jieh-hua painter in Yangzhou during the middle of Qing Dynasty. At that time the Chinese painting style of the Southern School followed the trend in Yangzhou, his Jieh-hua painting style developed new fields of Chinese painting of the Northern School. Yuan Chiang usually works in Yangzhou and Nanjing, and he was supported by the salt merchants of Shanxi. He painted the historical and mythical architectural landscapes and the gardens of the salt merchants of Shanxi. It`s not certain that he was a court painter of Qing Dynasty because there is no “chen(臣)” signature meaning of “offered picture to the Emperor” on the existing his works. His painting style was similar to court painting style with technical finesse and close observation. More than 10 works among the existing Jieh-hua paintings by Yuan Chiang were influenced by the Court painters` paintings of Song Dynasty such as Guoxi, Li Tang, Ma Yuan and Liu Songnian. And he established a distinction as a painter through the bluish-green painting style of Qiu Ying. Jieh-hua paintings by Yuan Chiang are characterized by buildings with the perspective drawing method and shading. That is affected by Western painting style such as Jinling School, Suzhou woodcut print and Qing court paintings. Yuan Yao was in succession to his father Yuan Chiang`s Jieh-hua paintings, however, follow them Jieh-hua paintings show the tendency to a steady decline.

        • KCI등재

          1634년 명 사신 영접과 〈황강연조도〉

          정은주(Jeong, Eun-joo)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한국학 Vol.36 No.3

          이 글에서 연구 대상으로 한 〈황강연조도〉는 규장각 소장 〈의순관영조도〉 이래 명사 영접을 기록한 희귀본이다.〈황강연조도〉는 명나라에서 1634년(인조 12) 사례감 태감 노유녕(1590?미상)을 칙사로 임명하여 소현세자의 책봉 고명과 면복 및 채단을 보냈던 배경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황강연조도〉는 황주에서 명사 일행을 영접하였던 원접사와 종사관을 비롯해 관반으로 동원된 황해관찰사 오숙 이하 황해도 지역 지방관 명단이 좌목에 상세히 적혀 있어 그림의 제작 배경을 추정하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황강연조도〉가 그려진 1634년을 전후한 시대적 배경은 명과 후금이 주도권 다툼을 하던 명청교체기로, 조선과 중국 간에 긴박한 대외 관계가 전개되던 때이다. 1634년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태감 노유녕은 조선의 영접 의주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인정물품을 무리하게 요구하여 정묘호란 이후 황폐한 조선의 경제 상황에 큰 부담을 주었다. 이 글에서는 도경유의 문집 『낙음집』을 통해 성주도씨 종중에서 소장해온 〈황강연조도〉의 제작 경위를 파악하여 현존 작품에 대한 양식적 선후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 현재 성주도씨 종중이 소유한 〈황강연조도〉필사본 2점은 당시 관반으로 참여한 봉산군수 도경유가 소장한 작품과 관련이 있다. 그중 계회축 형식 1점과 『낙음집』 내에 삽입된 〈황강연조도〉 목판은 성주도씨 종중에 의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었고, 그림 부분만 있는 1점이 도경유를 제향하는 대구 병암서원에 소장되었다. 양식적으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계회도 형식을 갖춘 작품이 병암서원 소장 그림보다 17세기 화풍을 비교적 잘 반영하여 원본에 더 가까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6년 목판으로 판각한 〈황강연조도〉가 제작되어 『낙음집』의 삽도로 인출되었다. 한편 광주에서 구장되었던 작품은 19세기 민화풍을 반영하여 모사되었으나, 당시 황주에서 관반으로 참여하였던 인물들의 좌목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작품으로 주목하였다. 대부분의 가전 기록화가 그렇듯 현존하는 〈황강연조도〉는 도경유가 소유했던 원본을 지속적으로 후대에 전승하고 보전하기 위해 두 차례 이상 모사하였으며, 도본을『낙음집』에 함께 남기기 위해 1906년에 목판본으로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성주도씨 종중의 조상 숭모의 의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1634년 그려진〈황강연조도〉의 원본을 유추할 수 있는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이들 작품은 가문의 기록을 넘어 명청교체기 해로를 통해 조선에 온 명사를 황주에서 영접하는 장면과 명사 및 원접사 일행의 행렬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여 규장각 소장 〈의순관영조도〉이래 조선과 명의 대외관계 일면을 보여주는 희귀한 기록화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This Study is aimed at reviewing the diplomatic ritual of Ming envoys of the Ming?Qing transition as a historical background and the painting details of Hwanggang Yeonjo?do. Hwanggang Yeonjo?do is a documentary painting of diplomatic ritual of Ming envoy Lu Wei?ning, who came with the document of the last Ming Emperor for the installation of the Crown Prince Sohyeon in Hwangju 1634. Hwanggang Yeonjo?do, painted by professional painters, distributed 24 people; including Bongsan county governor Do Gyeong?yu as reception committee of Ming envoy in Hwangju. The composition of picture is three part, the title of the top, painting of the middle and participant list of the bottom. There are four existing works, three paintings and one woodcut. Three works of Do Gyeong?yu’s family are not original painted in 1634. One is a painting with only 23 participants except Jaenyeong county governor Choe Taek?seon, another is just a painting without the title and name list, and the other is a woodcut inserted in Nageum?gip as a collection of Do Gyeong?yu’s works in 1906. Two paintings among them were copied by a painting style of the 17th Century. Another one was unveiled on a journal by a collector in Gwangju in 1974. The 24 participants of the reception committee listed at the bottom of this work, but the painting style was a folk painting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works of Do Gyeong?yu’ family were painted more than twice for the cult of ancestor worship. Above all, they have a distinct historical value as rare documentary paintings of the Sino?Korean diplomatic relations among the Ming?Qing tran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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