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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기 유엔한국묘지(적군 묘지)의 조성과 의미

          전성현 ( Jeon Sung-hyun ) 한국사회사학회 2021 사회와 역사 Vol.- No.132

          이 글은 한국전쟁기 적군 묘지의 조성 배경과 실체를 제한적인 자료를 토대로 살펴본 것이다. 요약하면, 적군 묘지의 조성은 표면적으로 국제 인도법인 제네바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미군은 제네바협약의 체약국이 아니었지만, 참전과 동시에 곧바로 승인했다. 이 같은 즉각적인 조치는 적진에 있는 미군 전사자의 수습과 송환을 위한 영현관리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영현관리가 어느 정도 체계화되는 1950년 9월 전후한 시기에 비로소 미군 묘지의 일부 구역에 최초로 적군 유해가 매장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서울 수복이라는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대규모의 적군 포로가 발생해 부산에는 약 14만 명을 수용하는 포로수용소들이 운영되는 가운데 독립적인 제2 적군 묘지가 1950년 12월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이와 병행해 미군 유해의 자국 송환을 위한 예비적 조치와 유엔군 전사자의 체계적인 영현관리를 위한 유엔묘지가 조성되자, 기존의 미군 묘지는 1951년 4월 중순부터 제1 적군 묘지로 전환되면서 적군 묘지는 제자리를 잡았다. 이들 적군 묘지는 1953년 7월 정전협정과 1954년 8월 조인된 전사자 유해의 인도인수에 의해 1954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면서 현장은 물론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기 전까지 부산 적군 묘지에 매장된 수는 제1 적군 묘지 1,691구, 제2 적군 묘지 5,459구, 추모사찰 79구 등 총 8,602구로 전체 인도 유해의 2/3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들 적군 묘지에 매장된 유해는 북한군, 중국군뿐만 아니라 국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각 국적의 민간인 억류자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확인을 통해 이장되기도 했지만 외국인도 매장되어 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기 적군 유해 대부분이 매장된 부산의 적군 묘지는 국제인도법에 따른 것이지만 미군의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고 본국으로 후송하기 위한 영현관리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매장자는 북한군과 중국인민군만이 아니라 국군, 민간인(억류자), 외국인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묘지였다. This study examines enemy cemeteries created in Korea during the Korean War. These enemy cemeteries were created in accordance with the Geneva Conventions. However, though the US Army was not a signatory to the Convention, it soon joined after entering the war, which led to a graves registration system for those killed in action and for the repatriation of remains. Therefore, it was not until around September 1950, when graves registration was systematized to some extent, that the enemy remains were first buried in some areas of US Army Cemetery in Busan. Furthermore, the Enemy Cemetery Number 2 was built and started operation in December 1950. At the same time, as UN Military Cemetery was created, the existing US Army Cemetery was converted into the Enemy Cemetery Number 1 in mid-April 1951. While numerous ‘transfer of remains of the dead’ took place after the signing of a repatriation agreement in 1954, the number of burials in the Busan enemy cemeteries was 8,602, including 1,691 in the 1st Enemy Cemetery, 5,459 in the 2nd Enemy Cemetery, and 79 in the Memorial Temple, accounting for 2/3 of the total repatriated remains. The remains buried in these enemy cemeteries include not only North Korean and Chinese People’s Army, but also South Korean soldiers. There were also many civilian internees of different nationalities buried in these cemeteries. Although many were transferred during the verification process, foreigners were also included. These enemy cemeteries in Busan, where most of the enemies’ remains were buried, was not simply a graveyard for the enemy. It was a graveyard with complex significance, for it was not merely one for Korean soldiers but also one that held civilians and foreig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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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기 지역철도 연구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경남사학회 2012 역사와 경계 Vol.84 No.-

          부산의 일본인사회가 처음 계획한 전철 노선은 ‘부산시가’ 일주선과 서부 신시가지를 순환하는 시가 횡단선이었다. 그러나 이윤을 목적을 한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와 제국주의 관점의 조선총독부로 말미암아 부산항에서 동래온천장까지의 직선 노선이 먼저 개통됨으로써 부산의 중심축이 북쪽으로 이동했다. 일본인사회는 시가 일주선과 횡단선을 중심으로 구심력을 회복하기 위한 전철 건설요구에 들어갔고, 노선은 확대 변형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한편, 조선의 개발과 내륙으로의 확장을 목표로 한 부산진선과 동래선의 연결과 전철 전환은 부산진을 경계로 시내선과 시외선으로 구분되어 운영되었다. 이후 지역적 차이는 민족적 차이와 결부되면서 지역 차별과 민족 차별이 뒤섞이는 분절의 공간 분할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전철의 건설과 운영은 일방적이지 않았다. 대체로 전철 건설과 운영에 제국, 자본, 지역의 힘이 강하게 작용했다. 건설의 경우, 계획단계는 지역의 힘이 강했지만 실제 건설은 제국 및 자본의 힘이 상호 협력하며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식민지 경영 초기였기에 제국의 힘이 초기 건설 과정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중 · 후기가 되면서 다시 지역의 힘이 각종 단체 및 조직을 통해 노선 건설을 관철시키기 시작했고, 결국 계획대로 노선을 완성시켰다. 반면, 전철 운영에는 시종일관 자본의 힘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전차요금과 관련해서는 지역의 힘과 행정기관의 힘도 그다지 위력적이지 못했다. 한편, 민족의 힘은 오히려 식민성과 근대성에 저항하는 측면에서 발휘되었다. 지역과 민족의 이중 차별로 힘들어하던 조선인은 지역사회의 ‘공론장’에 일부 참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냈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e Japanese society in Busan made its first plans for electric railways involving a circle line and transversal line(including the western Shingajiji) across "Busan town." However, a straight line between Busan Port and the hot springs resort of Dongnae was first opened due to the Chosun Gas and Electric Corporation with a profit in mind and the Colonial Japanese Authorities with an imperialistic perspective, shifting the central axis of Busan northward. The Japanese society made repeated requests for electric railways in order to recover its centripetal force around a circle and transversal line across the town, contributing to the expanded and changed form of electric railways across the city. The connection between the Busanjin line and the Dongnae line intended to promote the development of Chosun and expansion into inland along with conversion into electric railways made a distinction between in-city and out-of-city lines at the Busanjin line. Later area differences led to spatial segmentation in which area and race discriminations were mixed together with race differences added. However, the construction and operation of electric railways was not one-sided, being under the huge influence of empire, capital, and area. Areas had powerful impacts on the planning stage of electric railways, whereas the empire and capital influenced on their construction in mutual cooperation. The empire had particularly strong effects on the early construction process as it was in the early days of colonial management. Entering the middle and late period, areas saw through line construction by forming all sorts of groups and organizations and eventually succeeded in completing a line as planned. The operation of electric railways was overwhelmed by the force of capital from beginning to end. The areas and local administrative agencies did not exercise very powerful influence on the fares. The power of Chosun people was exercised when they resisted coloniality and modernity. Suffering from the dual area and race discrimination, Chosun people took partial part in the “public sphere” of the community and voiced their opinions, only to receive “echoes with no answers.” As a result, they could not help engaging in such resistance as overturning an electric car to form connections with electric rail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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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지역언론’에서 ‘제국언론’으로 -신문체제와 지면을 통해 본 『조선시보』의 특징과 의미-

          전성현 ( Jeon Sung-hyun ),이가연 ( Lee Ga-yeon ),배병욱 ( Bae Byoung-wook ),하지영 ( Ha Ji-young )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2019 항도부산 Vol.37 No.-

          개항 이후 부산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에 의해 이른 시기 창간된 『조선시보』는 당초 부산의 일본인사회를 대변하는 지역 상업신문으로 창간되었다. 그리고 조선이 식민지가 되고 식민지체제가 심화되자 식민지 전조선의 신문으로 성장하고자 했다. 나아가 제국언론으로 확장하고자 신문지사·지국의 확대는 물론 지면 구성도 제국과 식민지 전체를 다루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같은 흐름은 현재 확인 가능한 1914년부터 1941년까지의 신문체제의 변화와 지면내용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을 위한 지역신문인 『조선시보』는 지면 구성과 게재 기사를 대략적으로 분석해 보면 몇 가지 특징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을 대변하는 신문이었기에 제국주의, 식민주의, 지역주의의 경계를 넘나 들었다. 즉,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입장에서 조선총독부를 대변하기도 했지만 지역주의의 입장에서 총독정치의 미흡한 점을 언급하거나 성토하기도 했고, 일본 본국의 정당정치와 식민정책에 대해 과감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둘째, 다른 일본인 지역신문인 『부산일보』보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지역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으며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울 수 있는 신문이었다. 특히 식민자 측면에서는 ‘부민의 여론’과 ‘공공성’을 명분으로 사회 상층은 물론 중산층 이하의 여론까지 대변하고자 하였다. 또한 피식민자 측의 동향에도 매우 촉각이 예민하여 부산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조선인사회에 대해서도 당대 주요 한글신문에 보도된 내용보다 상세히 보도하거나 빠진 부분에 대한 기사도 자주 게재했다. 다만 『조선시보』가 강조하는 ‘부민’, ‘여론’, ‘공공성’에는 사회 하층의 절대 다수인 조선인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들이 조성한 ‘여론’과 ‘공론’에 조선인이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동원했지만 일상에서는 차별과 배제라는 식민자의 시선으로일관했다. 그렇기에 중앙지에 비해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모욕적 기사 보도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상과 같이 『』조선시보『』는 식민성, 지역성, 계층성, 민족성이 한데 얽혀 복잡하고 독특한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언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The 『Chosenjiho』, which was founded in the early days by the Japanese who came to Busan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was originally established as a regional commercial newspaper representing the Japanese society in Busan. When Chosun became a colony and the colonial system deepened, the 『Chosenjiho』 tried to escape from the local newspaper. In other words, the proportion of articles covering the whole empire and colony as well as the expansion of newspaper offices and branches has increased. This trend can be confirmed through the change of the newspaper system from 1914 to 1941 and the contents of the paper. The Japanese local newspaper 『Chosenjiho』 of colonial Chosun has some characteristics. First, it represented the position of the Chosun governor general as a private newspaper. However, it did not hesitate to criticize the governor-general politics and Japanese party politics as well as colonial policy. Secondly, it reported more about the area than the other local newspaper 『Fusannippo』, and it was a newspaper that could fill the gap. Especially, from the aspect of the colonizer, it tried to represent not only the society upper class but also the public opinion below the middle class with 'public opinion' and 'publicness'. In addition, from the viewpoint of the colonized, it published an article on the details or missing parts of the Chosun people society than reported in major hangul newspapers of the day. However, there was no place for Chosun people, who are the majority of the under-society in the ‘Bumin(府民)’, ‘public opinion’, and ‘Publicness’. Although the "public opinion" included Chosun people, it was consistent with the gaze of colonizer such as discrimination and exclusion in everyday life. Therefore, there were relatively many discriminatory and insulting articles about Chosun people compared to the central newspaper. As mentioned above, 『Chosenjiho』 was a Japanese media of complicated and unique colonial Chosun, which was intertwined with coloniality, locality, hierarchicality and ethni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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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말기 경남지역 근로보국대와 국내노무동원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경남사학회 2015 역사와 경계 Vol.95 No.-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일제가 전개한 식민지에서의 인적, 물적 자원의 총동원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의 제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특히 조선 안 노동력 동원은 운동 차원에서 비롯되어 법에 의한 근로보국대로 수렴되고 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전황이 더욱 불리해지고 일본마저 전쟁터가 되자 일제는 종래의 근로관계 5법령을 종합하여 隊조직과 개인까지 ‘몽땅’ 동원토록 했다. 이른바 정신 총동원에 의한 ‘근로봉사’에서 생산력 확충의 ‘근로협력’을 거쳐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물자의 조달과 국가총동원에 필요한 업무의 ‘근로동원’으로 귀결되었다. 학생 노동력 동원도 일반의 동원과 함께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일반인과 유사하게 근로보국대에 의해 동원되다가 학교 조직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중등학교 이상 학교에 별도로 학교총력대를 두고 이를 통해 군사훈련과 노동력 동원에 종사토록 했다. 하지만 1943년부터 내려진 일련의 학생 동원조치들과 1944년 10월 ‘학도근로령’은 ‘근로가 곧 교육’이라는 교육이념 아래 학교보국대로 일원화하고 원칙적으로 1년 전체를 동원하도록 법제화했다. 이때부터 학교에서의 교육은 완전히 사라졌고, 1945년 전시교육령의 제정과 함께 준군사조직인 ‘학도대’로 귀결되며 병력 동원으로 이어졌다. 조선 안 노동력 동원의 흐름은 경남지역에도 거의 그대로 관철되었다. 1938년 부터 중등학교 3학년 이상을 대상으로 한 학교근로보국대는 점차 늘어났고 이후 국민학교까지 확대되어 1년 동안 수시로 식량 증산과 관련된 피뽑기, 종자채취 등의 작업에 집단 동원되었다. 한편 이 지역에서도 학교총력대가 결성되었고, 1943년부터 학도근로령으로 수렴되던 전쟁 말기에는 아예 학교에서의 수업을 포기하고 통년 동원으로 노동현장에 내몰렸다. 부산은 부두로 말미암아 군수물자의 결전수송을 위한 하역작업에 수시로 동원되었고 군수공장과 포대진지 구축사업 등에도 동원되었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은 후방 군사기지로서 비행장이 많이 건설되었는데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비행장 건설에 집중적으로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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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기 東萊線건설과 근대 식민도시 부산의 형성

          전성현(Jeon Sung Hyun) 역사문화학회 2009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12 No.2

          Construction and reform process in Dongnae-Line(東萊線) of local railroad understand to increase economic gain of Japanese capitalists in Busan and to expand colonial space with priority given to Busan-port. Because local of Busan has a colonial feature. In other words, Busan taken shape colonial space of Japanesedominated(Colonial space in Japanese center), because of Busan was close from the Japanese Empire. Also, there was ‘Bridgehead’, ‘Gateway’to enter Chosun and Continental in Japanese Colonial Period. Therefore, it was possible that Japan reorganized modern state. In addition, Dongnae-Line of local railroad had close relation that was local development centering around Busan-port. On that account, there was plan and promote to aggressively intervene local capitalist and people of Japanese as the central figure. And we could to find colonial feature. Namely, development in key industries of railroad was generally progress in Government-led. But, it’s know that independent railroad planning and constructing progress region-centered, because of Busan had colonial feature and relation to Japanese government. Meanwhile, completion of urban railroad, from Busan-port to Dongnea-oncheanjang(東萊溫泉場), was influence to form urban structure of Busan. It was accomplished horizontal space distribution in ‘downtown’that centered Japanese people, Busanport, ‘subcenter’that was expected for industial area by progrssing reclamation work, ‘suburbs’that constructed hot spring, entertainment facilities and villa of capitalists and government officials, Dongnea-oncheanjang. And there was propelled nationally vertical hierarchy in downtown, subcenter, suburba at the same time. Namely It was completed that in downtown Bnsan-port, Daesindong(大新洞), Choryangdong(草梁洞), and youngjudong(瀛州洞) were Chosun people settlement, that in subcenter Busanjin(釜山鎭) filled-up land and around Busanjin were Chosun’s streets, that in suburbs Dongnea-oncheanjang, around Dongnea were Chosun’s streets.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철도건설은 조선의 철도건설과 함께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말 박기종 등 조선인에 의한 철도건설이 시도되었지만 부산중심의 철도건설은 철저하게 일본인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부산의 일본인들은 우선 일제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경부선 건설에 주주로 적극 참여하는 한편, 직접 철도건설에도 뛰어들었다. 이른바 ‘대륙의 관문’인 부산항을 정점으로 하여 그들은 경남 서부, 경남 중부, 경남 동부의 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조선철도망의 건설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경남 동부로 뻗어나가는 철도건설을 가장 먼저 추진하였다. 그들에 의해 설립된 부산궤도주식회사는 1909년 부산진성으로부터 동래온천장에 이르는 약 6마일의 동래선을 건설하였다. 이때의 동래선은 전통적인 부산진과 동래의 조선인 시가를 포함하지 않는 일본인 중심의 부산항과 교외인 동래온천장을 연결하는 도시간철도였다. 하지만 ‘대륙의 관문’에 걸 맞는 도시의 완성과 내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기반마련을 위해서는 그에 부합하는 철도건설이 시급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자본을 끌어들여 더욱 큰 회사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설립된 회사가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였다.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는 부산의 도시화와 직결되는 전기, 가스, 전철의 보급은 물론 기존 동래선의 인수 및 개선을 그 목표로 하였다.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는 우선 기존 동래선의 협궤(2?)를 광궤(2?6?)로 개선하는 한편, 그때까지 포함되지 않았던 조선인 시가를 적극 포함함으로써 도시철도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부산지역의 여론에 떠밀려 설립당시 계획하였던 전철건설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당초 계획한 일본인 중심의 ‘시내일주선’보다 오히려 부산항으로부터 동래온천장을 하나로 연결하는 전철을 우선 추진ㆍ완성하였다. 전철로의 전환 과정에는 동래선의 개선 때 계획되었지만 실행하지 못한 부산진 조선인 시가는 물론 도심의 주변이었던 초량과 영주동의 조선인 시가까지 포함되었다. 이처럼 지역철도인 동래선의 건설과 개선은 부산항을 중심으로 하는 식민공간의 확장이었으며 부산지역 일본인자본가의 경제적 이익 확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부산의 도시구조를 도심, 부도심, 교외로 구분하는 한편, 각각 민족적인 수직적 위계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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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체제기 학교 대(隊)조직의 변화와 집단 노동력 동원 -조선총독부의 학생동원정책을 중심으로-

          전성현 ( Sung Hyun Jeon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5 石堂論叢 Vol.0 No.62

          전시체제기 학생들의 노동력 동원은 1938년 공공 및 국가시설의 ‘근로봉사’에서 시작했지만 1941년 식량증산 등 실제 노동력 동원인 ‘근로협력’의 형태로 전환했다. 이어서 1943년 전황이 불리해지자 국가총동원에 필요한 업무 등과 함께 병력 동원의 예비적 단계인 방공방위를 포함한 본격적인 ‘근로동원’의 형태로 전환했다. 이러한 흐름은 학교 隊조직의 결성과 변화, 그리고 통일과 잇닿아있었다. 1938년 학생들은 ‘학교근로보국대’을 통해 동원되기 시작했다. 1941년에는 총력연맹의 결성과 학교연맹의 가입에 의해 ‘학교연맹근로보국대’로 바뀌었고 곧바로 국민근로보국협력령에 의해 ‘국민근로보국대’(국민학교만 포함)로 전환되었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학생들의 직접적인 동원과 향후 병력 동원을 위한 군사 훈련을 위해 조선총독부-도-학교로 이어지는 명령체계를 중심으로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학교총력대를 조직했다. 이후 국민학교는 근로보국대, 중등학교는 학교총력대를 통해 노동력 동원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1943년부터 일제는 수많은 전시동원 긴급조치들을 통해 기존의 학교총력대를 점차 국가총동원업무로의 동원뿐만 아니라 군사교육을 통한 병력 동원의 예비 작업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학도근로령으로 수렴되었고, 대조직도 국민학교와 학교 교직원을 포함하는 학교보국대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1945년 전시교육령이 발포되고 방공방위를 강조하는 준군사조직인 학도대로의 전환을 통해 병력 동원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동원 대상도 1938년 중등학교 3학년 이상으로 규정되었지만 1941년에는 국민학교 4학년 이상, 다시 1945년 국민학교로 확대되었다. 더불어 동원 기간도 1938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1년에 10일간이었던 것이 1941년 1년 30일내 수시 동원으로 확대되었다. 1943년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개정에 따라 동원 기간은 1년에 60일간으로 확대되었다가 다시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책에 의해 1년에 넉 달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1944년부터는 1년 상시 동원이 가능해졌고 결국 1년 통년을 원칙으로 하는 전면적인 동원이 실시되었다. In 1938, students began to be mobilized through “School Labor Patriotism Corps.” In 1941, it became “School Federation Labor Patriotism Corps” according to the formation of National Total Chosun Federation and admission of School Federation. It was soon converted into “National Labor Patriotism Corps”(including only grade schools) according to the Ordinance on National Labor Patriotism and Collaboratio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formed School Total Corps in secondary schools or higher educational institutions along the order system of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 provinces - schools in order to mobilize the students directly and do military training through military force mobilization. Students in grade and secondary schools were mobilized for their labor force through Labor Patriotism Corps and School Total Corps, respectively, since then. In 1943, the ruling Japanese started to utilize the old School Total Corps in preliminary works for military force mobilization for military education as well as national mobilization works through many emergency measures for wartime mobilization. They converged into Student Labor Law with the fleet organizations unified into School Patriotism Corps including grade schools and school faculties. It was later converted into Student Corps, a semi-military organization with an emphasis on air defence and national defence, to allow for even military force mobilization after the proclamation of Wartime Educational Ordinance in 1945. The students eligible for mobilization were third graders or older in secondary school in 1938, and the mobilization criteria for students expanded to fourth graders in grade school or older in 1941 and entire grade schools in 1945. The duration of mobilization was ten days during summer vacation per year in 1938 and expanded to spot mobilization of 30 days or less per year in 1941. As the Ordinance on National Labor Patriotism and Collaboration was revised in 1943, the duration of mobilization was further expanded to 60 days per year and then four months per year according to the emergency wartime measure on education. In 1944, students were to be mobilized anytime throughout the year and eventually subjected to full-scale mobilization throughout the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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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자와 조선 - 일제시기 大池忠助의 지역성과 ‘식민자’로서의 위상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3 한국민족문화 Vol.49 No.-

          ‘식민자’ 또는 ‘풀뿌리 식민자’로 평가되는 재조일본인 오이케 츄스케는 1856년 쓰시마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해인 1875년 부산으로 건너와 대일무역에 종사하면서 친형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무역 및 고리대업은 물론이고 일제의 조선 침탈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며 조선의 출입구인 부산과 오이케여관을 통해 일본군부와 관계를 맺고 토지구매, 군수물자조달을 통해 자본을 확장했다. 개인사업과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오이케는 강고한 인적네트워크도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기반과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확대해 나갔다. 그가 맺은 인적네트워크는 제국주의 일본의 핵심적인 인사인 관료와 군인은 물론, 일본 본국의 재벌 및 경제인, 그리고 조선 또는 부산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 등이었다. 부산에서 쌓은 인적·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오이케는 경제활동과 공직활동을 통해 ‘부산의 오이케’에서 ‘조선의 오이케’로 나아갔다. 우선 그는 개인경영의 11개 부문을 토대로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동시에 부산 및 조선의 각종 회사와 조합의 설립과 경영에 뛰어들어 1929년 사망 때까지 부산 및 조선재계의 원로로서 활동하였다. 더불어 지역사회의 ‘공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업회의소, 부협의회(도평의회), 학교조합 3단체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면서 향리인 쓰시마에 입후보하여 당당히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이케는 ‘부산의 오이케’를 넘어 ‘조선의 오이케’로 표상되며 조선의 대표적인 성공한 식민자로 위치 지워졌다. 하지만 식민지에서의 성장과 제국주의 내의 위상은 식민지 조선이라고 하는 공간, 특히 부산이라는 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여기서 본국 일본인과 식민지 일본인 간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며 그 독특한 위치도 드러난다. Considered as a "colonizer" or "Grassroots colonizer," Oike Chusuke, a Japanese colonial settler, was born in Tsushima in 1856 and moved to Busan in 1875 when he became 20. In Busan, he started to build his foundation by the assistance of his elder brother, engaging in trade with Japan. Like most Japanese people that made growth in Chosun, he conformed to the situations of the times including Japan"s invasion of Chosun as well as smuggling and loan sharking and accumulated capital by forming relations with the Japanese military through Busan with its geographical and spatial advantages and Oike Ryokan, purchasing land, and delivering war supplies. He established a solid human network based on his personal business and Busan with its geographical and spatial advantages, further solidifying and expanding his foundation and position. His human network encompassed the government officials and soldiers, who were the core figures of imperial Japan, the financial cliques and businessmen of Japan, and Japanese and Chosun people residing in Chosun or Busan. Based on his human and material foundation, he evolved from "Oike of Busan" to "Oike of Chosun" through economic activities and public duties. He first managed his economic activities based on his 11 personal establishments and then got involved in the foundation and management of all kinds of companies and associations in Busan and Chosun around the 1900s. He served the financial community of Busan and Chosun as an elder until 1929 when he passed away. He was also an active, central figure in the chamber of commerce(商業會議所), Pu-council(府協議會), and school corporation(學校組合), which were part of "public duties" during the Japanese rule. His activities of "public duties," in fact, expanded to Japan beyond Busan. In 1914, the Japanese colonial settlers lost their autonomous body after the abolition of the Georyumindanje(居留民團制). Once feeling a need for political activities in Japan in order to promote their stability and expand their foundation in colonized Chosun, they started to advance to the Japanese Imperial Diet. Joining the flow, Oike was elected in his hometown Tsushima and finally advanced to the Japanese Imperial Diet, which is why he was represented as "Oike of Chosun" beyond "Oike of Busan" and positioned as one of the representative successful colonizers in Chosun. However, his growth in the colonized country and his status within imperial Japan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the space of Chosun or more particularly Busan. Here, the differences between Japanese people from Japan and those from a colonized country become obvious along with their unique position. They faced their contradictory position between "colonizers" and "residents of colonized land" in reality through the Japanese rule, which is why the contradictions of imperialism also took place within the in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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