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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보이스의 “확장된 미술개념”과 대안문화

        전선자(Cheon Seon-Ja) 서양미술사학회 2008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Vol.29 No.-

        요셉 보이스는 자연과학적 지식에 인문학과 인지과학을 접목한 인식을 갖고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미술가적 이상을 발전시킨다. 그의 통합적인 사고 속에서 그의 미술가적 사명은 종교적ㆍ생태학적ㆍ신체적 관점을 넘나드는 미술개념과 동시대적 ‘조형미술의 원리’를 창안해낸다. 삶과 미술이 합일된 일상과 사회적 유기체 속에서 그의 조형원리의 실천은 사회에 변화를 이끌어내는 ‘확장된 미술개념”으로 발전되며 또 이것이 인류의 화합을 위한 대안문화로서 현대사회의 요구임을 우리에게 알린다. The 20th century was when a great narrative was prevalent. The stream of modem philosophy was reluctant to deeply inquire into the experience and perception of a daily life, all the more, categorized it as thinking as it is an imitator. Like keeping pace with that, the art theory and practice manifesting the 20th century modernism incited competition and achievements running parallelling with technology rapidly make a progress, in which the art community preferred political activity focusing on an outcome. From that, art education has picked out and taught one aesthetic value and theory by a closed art concept that it can be created only a trained artist, and led it having been created and appreciated. But since the 2nd world war, artists pointing out the limit of such an art concept, and devoting themselves to quite different art concept definitions with deep contemplation and reflection, and newly inquired theory, such as J. Beuys, R. Hamilton, A. Warhol, J. Kosuth, J. Jones, Nam June Baik etc.) have emerged. Those artists exerted themselves to express the nature of a uniformed existence since art culture is closely connected with a routine, not for recreation, but art practice separated from life was their reality. As Ather Danto put it, "everything can be an art work.", there was no boundary in the expression method and type of their work. The work contents put up a solitary struggle of search for our existence meaning and nature, and an alternative of the intellectual familiarity of various academic disciplines such as natural science and humanities, and transmission of the message. Especially, the thinking foundation, had already perception of a certain 'realization'. This is the very situation arousing us to perceive that there is something to know only by realizing many things to know as they are in the world. So this study assumed that the inquiry of such thinking should never be overlooked. Such Joseph Beuys(1921-1986) is the one grafting natural scientific knowledge, cognitive science and human science from religious, ecological, and physical viewpoint, and developing his artistic mission and ideal. For this, evolving integrated knowledge to contemporary one, he developed an artistic concept deepening it to social practice through artistic creation. Early, he realized that "Christusimpuls" through the cognitive science of Rudolf Steiner, and understood so-called 'Christ residing in us' in the 'ecological creation theory' of ecological theology as 'the substance of Christ'. In addition, friendship with an ecologist, Konrad Lorenz with him understanding a society as "an organism" and inquiring into it, deepens his ecological understanding, where he realizes that the existence of all creatures are moved and operated by a universal circular system. Here he perceives 'a physical body' underestimated by the legacy of scientific mechanical thinking, modem learning, that is, the value of the flesh. The perception that soul and spirit with a body can not exist gives a shape to the meaning of Jesus incarnation' in his deep faith. He made effort to fulfill this 'salvation meaning' as healing to humankind and ecological system like 'Transsubstantiation' taking place Catholic Communion through art creation. Having become a start-up member of German Green Party to an alternative thinking to future culture, he nude an fundamental inquiry to "Gegenraum-Waerme-Zeit" between the life of birth, death. Pointing out that as future natural science can't continue without anti-, or non-scientific thing, we live in materials things, but actually live in an immaterial thing, he puts emphasis on that art includes non-art as well. For him, non-art is a concept called 'space', and '(always not sufficient and definite)time', and 'substantial core not dying in a nun', and 'the life after death'. However, has a question about if a nun can credibly control his creation in space and time, or if there is any standard, so resolve such a q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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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현대 예술 및 문화 :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발터 벤야민과 연관 속에서의 백남준의 행위예술작품 <오마주 존 케이지 Hommage a John Cage>에 대한 해설시도 -생소화효과와 아우라

        전선자 ( Seon Ja Cheon ) 한국브레히트학회 2014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Vol.0 No.30

        1.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과정으로서 작곡 Komposition als Prozeß"즉 "무작곡 Akomposition"에서 영향을 받아, 케이지의 고유한 음악 단계에서 그 다음으로 자신의 음악 단계인 "안티음악 Antimusik"으로 즉 "무(無)음악 Amusik"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는 이 논제의 실천을 뒤샹의 "반예술 개념"과 함께 전통의 전복을 이끌면서, 음악의 범주를 원초적인 소리에까지 확대시켜 그의 음악을 "소리예술 Tonkunst"로 만든다. 백남준은 "행위예술"이라는 음악의 안티테제로 다다이즘을 완성하려한다. 2. 백남준은 유럽전통의 전복을 ``행위``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일회성, 지속성, 거리감, 원본성``을 갖는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행위자인 자신에게서 먼저 회복시키길 원했다. 이미 뒤샹의 반미학적인 도발인 <레디메이드>에서 ``예술가의 선택과 행위``가 새로운 창작원리로 자리 잡았기에, 이런 ``예술가의 태도``는 현실을 연출하는 ``행위예술``에서 ``아우라``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었다. 즉 그가 스스로에게 수행시킨 ``파괴``적인 행위는 그가 관객보다 먼저 전통으로 인한 문화예술의 정체를 씻어 내는 ``카타르시스``를 느껴 ``정신적인 성숙``에 도달하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샤먼의 굿 행위에서 무속인에게서 먼저 ``신 내림``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행위자의 ``이우라``를 먼저 강화하는 전략이다. 3. 백남준의 행위예술형식은 궁극적으로 관객의 인식변화를 위한 중요요소이다. 그래서 그는 보조수단인 각종 비품들을 갖고 ``시각적·청각적 복합행위로 콜라주``를 만든다. 이때 그의 행위예술의 1차 형식인 ``아우라``가 더 극적으로 표현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충격효과"를 사용한다. 이것은 브레히트의 "생소화효과"와 상응했으나, 작품 전체를 생소하게 만드는 새로운 양식으로 태어난다. 즉 그의 행위가 전통이라는 금기를 깨기 위해 ``고전음악의 상징인 피아노를 밀어 전복시키고``, ``의미 없는 언어를 호흡에 맞춰 리듬 있는 소리 즉 원초적인 음향으로 만들고``, ``내용상의 기능을 상실시켜 기능적으로 자유로워진 소리로 만드는`` 행위로 가시화된 시각성과 ``날 것 같은 생생한`` 비인위적인 소리로 관객을 경악시켜 곧 바로 그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예술형식의 한 전환점``을 추구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 행위예술형식으로 예술작품의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키려 한 것이다. 곧 이 ``충격적인 효과``는 관객과 갖는 ``상호작용 interactiv``의 가능성을 열었고, 동시에 예술소비자인 관객을 즉석에서 공연에 참여시키는 ``쌍방향`` 예술기능을 창조한다. 장차 관객이 예술창작자나 생산자가 될 것임을 선보인다. Im Sommer 1958 nahm Nam June Paik zum zweiten Mal am <Internationalen Ferienkurs fur Neue Musik> in Darmstadt teil und begegnete dort dem Komponisten John Cage. Diese Begegnung gab ihm einen Anlass, Musik radikal neu zu definieren. Cage benutzte hauptsachlich die ``aleatorische`` Kompositionsmethode, wobei Musik einen ``Prozess`` bedeutet, was von Paik als "Akomposition" verstanden wird. Die Musik ist als Prozess bei Cage schließlich eine Performance. In diesem Zusammenhang beeindruckte Cage Paik so sehr, dass Paik ihm spater seine erste Aktionskunst Hommage a John Cage widmete, die am 13 Oktober 1959 in der <Galerie 22> in Dusseldorf aufgefuhrt wurde. Zudem wurde er in Bezug auf den Antikunstbegriff vom Neo-Dada beeinflusst. Er besuchte die legendare Ausstellung <Dada-Dokumente einer Bewegung> im Dusseldorfer Kunstverein (5.9.-19.10.1958). Dort entdeckte er die antiasthetische, ``provokant-anarchische`` Eigenartigkeit von Collage, Aktionskunst und Ready-Made. Dabei wurde er besonders von der ``Antikunst`` Marcel Duchamps uberwaltigt. Sein musikalisches Konzept wechselt von Cages "Akomposition" zu jener dadaistischen "Amusik" hinuber, in der ohne musikalische und sprachliche Funktionen allein amusikalischer Ton und "acte gratuite (willkurliche Handlung)" existieren. Vor diesem theoretischen Hintergrund ergab sich seine erste Aktionskunst Hommage a John Cage. Außerdem w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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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문화와 디자인 1

        전선자(Cheon Seon-Ja) 한국디자인학회 2000 디자인학연구 Vol.- No.39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우리를 대중으로 만드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디자인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 대중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메커니즘을 알아내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대중문화〉와 〈디자인〉의 관계가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관계 속에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여기서는 〈대중문화〉와 〈디자인〉을 각각의 독립변인으로 분리하여, 이미 연구되어진 대중문화개념 규정의 여섯 가지 기준들을 통해 끊임없이 변모하는 디자인의 목표, 역할, 내용, 그리고 조형성 등을 '문화적 요소'로 연구하여 분석하였다. 따 라서 여기서는 디자인 초기단계인 '디자인 기획'에 있어서 '문화적 사고'를 담아 〈문화가 있는 디자인〉의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 것이다. If researching popular culture is understanding a mechanism to make us the general public, then researching, design is discovering and developing a mechanism to qualitatively improve the life of the general public's life. Since this means that the relation of popular culture and design is correlated among social, cultural and historical ties, but this study isolated popular culture and design as a separate variable, and examined and analyzed cultural factors such as the constantly changing objective, role, contents and formativeness(Gestaltung) of design through already researched various(6) criteria of the concept of popular culture. Thus, this study strives to present the orientation of design with culture by including cultural thinking starting from the stage of design, design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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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예술교육과 인문학적 바탕

        전선자(Cheon, Seon-Ja)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11 한국문학과 예술 Vol.8 No.-

        지금은 과학기술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 ‘우리를 자유롭게’ 혹은 ‘인간답게’ 하는 ‘인문학의 전형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갖고, 문화예술교육에서 인문학적 바탕을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명확히 반영되는 새로운 지식의 활용을 통해 고찰한 연구논문이다. 이 연구방법을 택한 것은 현장은 살아남기 위해 항상 앞서가는 고도의 전문지식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또 현장의 문화예술인들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창의적인 지식을 생산하며 또 그 지식을 확산해 사회적으로 활용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들이 창출한 지식은 자신을 성찰하고 정신적 성장만을 도와주는 전통적 의미의 지식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기존의 틀을 깨고 창의적이고 새로운 실용성을 입증하는 새로운 시대의 지식을 창출한 것이다. 사회 현상 속에서 이 같이 꼭 필요한 지식은 교육의 장에서 반드시 가르쳐야 할 학습대상이다. 그 이유는 교육의 장에서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화예술의 현장 속에서 과학시대의 인문학적 소양이 어떻게 변화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과학기술의 시대의 ‘인문학’과 ‘과학’은 인류문명의 두 축이다. 이 관계는 대립이나 경쟁관계가 아니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이다. 바로 인간과 인간적 삶의 가치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가 전제된 가운데 자연과 인간에 관한 과학적 탐구와 그 의미도 소용이 된다. 문화예술분야도 이제 과학기술의 활용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은 문화예술교육에서도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현장 속의 문화예술인들의 전문지식활용을 통해 보면, 과학과 인문학과 문화예술의 창조적 발전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하는 인문학적 바탕을 여전히 필수전제조건으로 갖는다. 따라서 우리 문화예술교육의 혁신과 발전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새로운 지식창출과 활용능력과 함께 교육목표로 삼았을 때 가능할 것이다. 자동차디자인, 광고디자인, 미디어아트라는 문화예술의 실상이 이제는 우리 공교육현장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In the era of science and technology, I asked the question "what is the typical model for humanities that "set us free" or make us "humanly"?" and looked up the study of arts educations with humanities in the very field that arts education is being applied. What is the necessary in the field of society is the targets that must be learned in the field of education. This is the study that indicates knowledge of humanities are strongly essential in the field where arts education is applied, through several cases. In the era of technology, "Humanities" and "Science" are the two axes of human civilization, and these two axes are not antagonistic nor competitive but rather compatible, and need each other. It is useless of scientific study of nature and human without the understanding of humanities which includes comprehension of human and the value of human lives. Also, nowadays arts education needs the scientific technology. Therefore, "the merge of Humanities and science" is undetachable in the field of arts education. However, I found the appropriateness of humanities being prerequisites in arts education, for the creative evolution of science, humanities, and arts education. This work looks up "humanities" in 3 cases of arts educational field: Car Design, Advertisement Design, and Media Art. I hope this work be a help to the internal change and development of our arts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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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과 플럭서스(FLUXUS) -실증자료를 통한 플럭서스 공연의 중심인물 백남준-

        전선자 ( Seon Ja Cheon )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人文科學 Vol.0 No.48

        <플럭서스 공연>는 당시 주류인 추상표현주의나 주류음악인 국제양식파 또는 시의 기존 유파에 반대하는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개방된`` 집단공연으로서 상이한 매체들을 결합시킨 ``인터미디어``이다. 조형예술, 음악, 시각·무대예술, 시 등을 융합한 ``통합`` 양식을 갖는 이 플럭서스 첫 공연의 성사는 그룹 차원의 준비된 태동단계를 거친 것이 아니라, 백남준이 행위예술가 역할 외에 처음부터 플럭서스 공연의 조직가로서 연출가로서 또 조력자로서 자신의 라인지역에서 쌓은 초기 예술 활동의 소산을 사회문화적 변화로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연예술로서 활용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한 그의 중심역할은 사후에 다시 그의 플럭서스 동료들에 의해 확증되지만, 아직도 오해와 학술적 오류가 남아 있다. 본 연구에서는 그가 플럭서스 공연의 중심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초기예술 활동과정을 실증자료를 통해 이를 밝히고자 한다. Paik Nam June was incredibly educated, he was familiar with all the German philosophers(Hegel, Heideger) and writers and Buddhism. He was a great enricher to that post-serial or still serial music scene. In 1957-1959, <Internationale Ferienkurse fur Neue Musik> in Darmstadt was the centre of modern art. Schoenberg and Weber and their music had already accustomed our ears to shrill tones, but that had not happend in ``visual art`` yet. In art, there was Tachismus and also abstract art, but it didn`t hurt our eyes the way the music hurt our ears. In the sphere of visual art, it was still a matter of visible things that did not hurt. But Paik hurt our ears and our eyes with acoustic and visual collage, and that was his intention. Yet Paik was not determined to create new objects, but to create new states of awareness(Bewusstseinszustaende). His concern was with the deeply philosophical: what is the square root of ... what is the quintessence? Cologne was a center of modern music with Electronic Studio. For that reason Paik came to Cologne. The occupying forces had divided Germany into five zones and that each zone had its own radio programme. They were competing with and against one another with new music of diverse genres and in that way man got far many modern music on those different, decentralized radio programmes. Germany, as a result of this division into separate radio stations, led the way, and WDR Cologne was the most progressive broadcaster. Here Paik was never one of Karlheinz Stockhausen`s pupils, as one can often read or hear today in the media. But he was a close observer. He was always a loner and certainly a man on his own. At that time, when he was welcomein Jean Pierre Wilhelm`s Galerie 22 in 1958-59, he was not a group. Later, when Maciunas came from America, he always became a part of people who attached themselves to him, or he himself joined in with Things. The avantgard artists in the Rheinland had Dada-intention and asceticism and in September 1958 paik entered into this situation with his keen mind and his demand that music had to move things-he was still a musician. And than in Winter he was going to change medium, to enter art soon. In 13. November 1959 he did the first concert <Hommage a John Cage> in Galerie 22, Dusseldorf. He could play the piano fantastically. But in 6. September 1960 in concert <Etude fur Piano Forte> he played Chopin-and at the moment when man was all happily listening to Chopin, he suddenly banged his head on the keys and dashed all their expectations of ultimate ``salvation though the classical and harmonious``. Exactly it was the destruction of traditional music and performance by him. And than he was something in-between, between music and art. And that sums up in the <Originale>(1961.10.26-11.6), that is the originalle people-artists-, Paik as painter, and played some time of their own. Paik was in such a state of concentration with his hands in front of his face. At the same time the Kontakte are playing, with incredibly alien sounds, there is this Zen-like peace, the thin ascetic face of Paik: that was a moment of deep emotion. he performed something different every evening. It all had something to do with DADA revival. He was still the loner at the time. It was Paik with his own distress, with his knowledge of culture, with his crossing over the borders between music and the visual, and with his consciousness of action and time. And he brought an enhancement that truly moved Europe. But there was no Fluxus yet. Basically, abstract Modernism was dead, its pretensions were too high, and Paik had seen these things on a very deep level, had experienced them deeply, and he introduced them again in an entirely different way. He said the way it was <Fluxus> as "a new world", where he was a center of the group as organizations man, as performer, as assis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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