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 KCI등재

        외국인노동자의 다양성관리에 관한 실증연구: 수용성 요인의 조절효과 중심으로

        장일규,임상혁 한국전문경영인학회 2018 專門經營人硏究 Vol.21 No.1

        본 연구는 외국인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기업의 기업인 및 관리자 그룹, 외국인노동자와함께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노동자 그룹, 외국인노동자들이 일상생활을 하고있는 지역사회의 소상공인 그룹, 그리고 외국인노동자와 일차적・직접적으로 사회적 관계가 없는 일반인 그룹 등으로 분류하여 관계 위치에 따른 인식 수준의 차이를 분석하고자하였다. 연구의 결과, 외국인노동자와 사회적 관계가 가깝거나 더 자주 만나게 되는 경우에 수용성및 인식의 수준이 오히려 낮은 경향의 연구 결과를 보였으며, 이는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거나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것과 같은 상호 현실적 이해관계가 달려 있는 경우에 보다현실적으로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임을 나타내는 결과라고 추정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외국 이주민과의 교류가 빈번하거나 외국인노동자와 함께 생활공간을 실질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집단과 같이 특정적으로 접촉이 많은 집단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도 연구 방향을 구분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하며, 그만큼 외국 이주민과 접촉면이 넓고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집단 대상의 수용성 제고 노력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본 연구를 통하여, 첫째, 보다 다양한 지역에서 보다 다양한 외국인노동자 형태에대한 인식의 수준을 분석할 필요가 있음과 둘째, 보다 다각적인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내국인을 대상으로 함과 동시에 외국인노동자의 인식 및 의식 내용을 파악하여 서로 비교하는 입체적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고, 셋째, 보다 실질적이고 다양한 결과를 도출해내기위해서는 질적연구와 함께 종적연구도 필요함을 제언하였다. The purpose of the research study is to analyze differences in awareness levels according to the status of relationships with foreign laborers by classifying groups in relation to foreign laborers into the group with businessmen and managers employing foreign laborers; the Korean laborer group working with foreign laborers in the work spot field; the local community small business group where foreign laborers live everyday life; and the general group without the primary, direct and social relationships with foreign laborers. The results of the study show that in case particular groups have close social relationships with foreign laborers or often encounter with them, there appears a rather low awareness level of acceptability and awareness about foreign laborers. It can be anticipated that the negative awareness about foreign laborers result from mutual real interests in association with competing for jobs or sharing a living space. Taking it into account, it is concluded that academic research needs to be considered of particular groups having frequent encounters like groups that make frequent exchanges with foreign laborers and/or share a living space with them. Furthermore, efforts must be made to raise acceptability of groups having broader and frequent contacts and exchanges with foreign immigrants. The research findings of the study propose as follows. First, it needs to analyze the awareness level of various types of foreign laborers in many areas. Second, stereotactic research needs to understand and compare the awareness and thoughts that domestic and foreign laborers have, in order to identify the types of foreign laborers from more multiple angles. Lastly, longitudinal research with qualitative research is required in order to present more substantial and various results.

      • KCI등재

        『계원필경집』과 최치원의 교유관계

        張日圭 한국고전번역원 2010 民族文化 Vol.- No.34

        최치원은 857년(신라 헌안왕 1)에 태어나 908년(신라 효공왕 12) 이후까지 활동하였다. 그의 집안은 儒學과 佛法을 존숭하면서 숙위학생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경문왕계 왕실과 친밀하였다. 자연히 최치원 역시 입당유학을 통해 왕실과 가까운 관직으로 진출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868년(경문왕 8) 당나라에 들어간 최치원은 당나라의 인재 등용 방법인 常選과 制擧에 모두 관심을 보였다 낙양에 자리한 국자감의 태학에서 습업한 그는 874년(경문왕 14) 7월 이전에 예부시랑 배찬 아래서 빈공의 자격으로 생도시의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876년 겨울에 선주 율수현위로 나아갔지만, 보다 높은 관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877년 겨울에 현위직을 사임하고 박학굉사에 응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박학굉사의 중단과 황소군의 침략 위협이 더해지자, 최치원은 당시 성행했던 벽소제를 통해서 보다 높은 관직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그는 879년(헌강왕 5) 10월 이후부터 884년 8월까지 약 4년 동안 당시 당나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던 회남절도사 고변의 휘하에 나아가 관역순관을 맡았다. 객관과 역원을 돌아다니며 부정비리를 감찰하고 전적과 문서를 검열하는 임무를 담당하면서 그는 중앙 관직으로 轉職할 수 있다는 희망도 가졌다. 하지만 고변이 실각하고 회남도가 붕괴하여 더 이상 관직 진출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최치원은 귀국길에 올랐다. 최치원은 886년 정월에 고변의 휘하에서 막료생활을 하면서 지은 370수의 글을 모아 『계원필경집』20권을 엮어 헌강왕에게 바쳤다. 『계원필경집』은 여러 글을 유형별로 나누어 구성하였고, 각 권에 유형별로 나눈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찬술 연도의 시대순으로 글을 배열하였다. 특히 권1~권16까지는 대체로 고변을 대신한 글을 배열하였지만, 권16의 일부 글부터 권20까지는 최치원 자신과 관련된 글을 수록하였다. 최치원은 자신과 관련된 글에 고변이나 지인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혀 두었다. 최치원은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담은 글에 배찬, 배료,배숙, 배졸,裵秀才 등 裵瓚의 일족과 송현, 양섬, 오만, 이관, 장고, 장웅 등의 활동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중앙 관서의 관료나 지방관을 맡은 사람도 있었지만, 판관이나 순관 등 절도사의 막료 출신도 있었다. 지인들은 최치원이 국자감에서 진사시를 준비할 때나 급제 후 현위직으로 나아갈 때, 고변 휘하로 옮길 때 도움을 주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성행했던 좌주?문생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때문에 최치원은 자신의 관직 진출에 가장 근본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진사시 좌주 배찬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계원필경집』은 당나라 황실과 고변의 관계는 물론 고변과 재상의 관계, 고변 휘하 인물의 활동상을 담았지만, 그보다는 재당시절 자신과 교유하였던 지인들을 소개하면서 재당시절에 관직 진출을 위해 변함없이 노력하였다는 점과 여전히 당나라에 자신의 지인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 편찬되었다. 곧 『계원필경집』은 경문왕계 왕실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던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를 담았다.

      • KCI등재후보
      • 신라의 동해안과 삼척

        장일규 한국이사부학회 2015 이사부와 동해 Vol.10 No.-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영역을 확대한 과정을 지리적 조건이나 육로 ․ 해로와 관련하여 살펴본 것이다. 특히 동해안 해로의 중심으로 삼척의 역사적 위상을 주목하였다. 신라는 소지마립간 9년(487)에 왕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친 官道를 수리하였 다. 이미 1세기 중반∼2세기 초반에 탈해이사금이 등장하고 음즙벌국을 정복하면서 동로와 북로가 개설되었다. 신라는 당시에 실직곡국을 정복하면서 북로를 신라의 영역을 확대하는 주요 통로로 중시하였다. 지증마립간 6년(505)에 수로와 해로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운송과 교역, 군사 활동의 이점을 높이려는 방안으로 ‘舟楫之利’가 제정되었다. 동시에 삼척과 흥해, 영 천 등지에 12곳의 성을 쌓은 뒤에 실직을 주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 신라는 6세기에 해로의 정비와 관련하여 삼척을 강조하였다. 동해의 해안선은 육로로 통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灣이 잘 형성되지 않 았기에 큰 항구가 발달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양양, 강릉, 삼척, 흥해, 영일, 포항 등지에는 하천 유역에 제법 넓은 평지에 형성되었다. 삼척은 바닷가에 연접하였으면서도 오십천을 통해 낙동강 상류는 물론 남한강 상류로 가는 육상교통로를 갖추었으며, 넓지는 않지만 오십천의 하구를 군항이나 수군 양성 기지로 쓸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에 따라 지증마립간은 삼척에 주를 두고 이사부를 주둔시 켰다. 지증마립간 13년(512)에 이사부는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그는 지도로왕 때 沿 邊의 관리를 맡아 내륙수로는 물론 해로에도 익숙하였고, 연안 해로는 물론 원양 해로에도 익숙하였다. 그는 왕경과 가까워 기밀을 유지하기에 편리하면서 선박 제 작에 필요한 수림이 울창하였던 흥해 일대에 주목하여 선박의 제조와 수군의 양성을 주도하였다. 나아가 연안 해로를 따라 선박과 수군 등 인적․물적 자원을 운송하여 삼척을 동해안 최대 군항으로 활용하였다. 그런 다음에 원양 해로를 이용 하여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은 신라의 동해안 인식을 확고하게 하였다. 신라 왕실은 삼척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인식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삼국통일 전후에 왕실과 緣故된 의상과 원효, 진표 등은 낙산사와 고성군을 찾았다. 그들은 무열왕 5년에 삼척에 설치한 北鎭에서 연안 해로를 따라 북상하였다. 신라 말에 헌강왕은 일본의 사신 파견과 관련하여 울산 일대의 항구와 포구에 관심을 가졌다. 더불어 신라 北邊의 상황과 관련하여 삼척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다. 그 것은 삼화사와 관련되어 나타났다. 당시 왕실과 결연한 해인사 승려 決言은 860년 쯤에 삼척 삼화사 철불 조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당시의 해인사 승려들은 헌강 왕은 물론 정강왕이 주관한 선왕의 명복을 기원하는 佛事를 주도하였다. 자연히 신라 왕실은 삼화사를 통해서 삼척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삼척은 동해안 일대의 여러 군현 가운데 신라의 영역 확대는 물론 신라 국가의 안녕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끊임없이 주목되었던 곳이었다. This article is studying the East Sea Coast route and historical position of Samcheok. Among the public road of Silla, The east road and north road ware placed in the mid and 2nd century a century. At the time, Silla was conquered Siljik. For expanding the area, The northern roads was major route. ‘How to use the ship in good shape(舟楫之利)’ was established in the early 6th century. Looking up the sea route, this time stressed Samcheok. It was the center of a traffic route was Samcheok. Also, a naval port and naval forces bases were installed. Because of Silla set up a ju(州) in Samcheok. Isabu was Minister of Siljikju. General Isabu was invaded Usan(Ulleungdo). He knew their way around the sea. Heunghae and Samcheok is important to him. East Sea Coast of the most important naval port was Samcheok. Because of this Kingdom occupied was able to. Samcheok was constantly emphasized in The Silla royal family. Uisang, Wonhyo, such as jinpyo, the monks went north along the East Sea coast. King Heongang was focused on Samcheok. Temple Samhwasa was interested and involved it. The most important place on the East Sea coast was Samcheok.

      • 고대 동해안의 교통과 삼척

        張日圭 한국이사부학회 2016 이사부와 동해 Vol.11 No.-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삼척을 중심으로 한국 고대의 동해안 교통로를 살펴본 것이다. 동해안 교통로는 선사시대에 이미 개설되었다. 선사인은 동해안을 따라 백두산 일대의 흑요석을 동해안 중부 지역인 지금의 고성, 양양, 양구 등지로 운반하였다. 그 뒤 신라는 1세기 초반부터 2세기 후반까지 포항과 삼척 일대에 자리한 소국을 점령하면서 동해안 남부의 교통로를 중부까지 개설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지방 지배를 위해서 운용하였던 동해안 북부의 교통로를 장악하면서 동해안 북부 지역의 진출을 꾀하였다. 그 결과 6~7세기에 신라는 전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면서 점차 동해안 교통로의 효율적인 운용을 도모하였다. 신라의 동해안 교통로는 수도 왕경에서 지금의 포항-영덕-울진-삼척-강릉-양 양-고성-안변-이원으로 연결되는 北路였다. 다만 초기에 동해안을 따라 영역을 확대하면서 특별히 삼척을 주목하였기에, 북로의 중심지로 삼척을 고려하였다. 삼척이 속한 명주는 곡성군, 야성군, 유린군, 울진군, 나성군, 삼척군, 수성군, 고성군, 금양군 등으로 편제되었는데, 동해안과 바로 접해 있는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를 고려할 때, 백두대간의 서쪽에 자리한 곡성군, 나성군 등까지도 명주 관내에 포함하였다. 이것은 신라가 지금의 강원과 경북 내륙 지방을 남북으로 이으면서 삭정군과 정천군에 이르는 관도인 ‘삭주로’와 동해안 교통로를 잇고자 하였기 때문 이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태백과 정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삼척은 주목되었다. 삼척은 양양, 강릉, 흥해, 영일 등지와 함께 동해안 일대에서 비교적 넓은 평지가 분포한 곳이다. 특히 바닷가에 연접하였으면서도 오십천 유역의 들판과 함께 오십천을 통해서 낙동강 상류는 물론 남한강 상류로 진출할 수 있었다. 신라 말에 궁예는 원주에서 주천, 영월, 평창을 거쳐 울진으로 나아가 영역을 확대하였다. 당시 원주에서 울진으로 나아가는 교통로는 자연지리적 조건을 고려할 때, 정선으로 나아가 백복령을 넘은 뒤, 삼척을 거쳐 울진에 이르는 길이었다. 궁예가 삼척을 거쳐 울진에 이른 것은 당시 동해안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지였던 북진이 삼척에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삼척을 아우른 뒤 강릉을 점령하고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신라의 동해안 교통로에서 삼척은 동해안 교통로를 제어하면서 한편으로는 낙동강과 남한강 상류를 통해서 여러 지역으로 인적 ․ 물적 자원을 유통할 수 있는 중심지였다. This writing looked into a traffic route in the eastern coast of Korean Ancient age mainly with Samcheok on the basis of existing research result. The traffic route in the eastern coast was established already in prehistoric times. Along the eastern coast, people in prehistoric times transported obsidian of Baekdusan region to Goseong, Yangyang, and Yanggu area, the central area of the eastern coast. Later, from the early 1st century to the late 2nd century, Silla occupied a small kingdom situated in present Pohang and Samcheok region and then, it extended the southern traffic route to the central area in the eastern coast. While Silla seized the traffic route which Goguryeo operated for district control, it also seized a traffic route to advance to northern part of the eastern coast. In the 6th - 7th century, Silla gradually sought efficient operation of a traffic route in the eastern coast in order to efficiently control the whole country. Silla's traffic route in the eastern coast was a northern road connecting from the capital Wanggyeong to the existing Pohang-Yeongdeok-Uljin-Samcheok-Gangneung–Yangyang -Goseong-Anbyeon-Yiwon. However, expanding its realm along the eastern coast in the beginning stage, it specially paid attention to Samcheok and therefore, it considered Samcheok as a center of the northern road. Myeongju to which Samcheok belongs was organized as Gokseong-gun, Yaseong-gun, Yurin-gun, Uljin-gun, Naseong-gun, Samcheok-gun, Suseonggun, Goseong-gun, Geumyang-gun but Gokseong-gun and Naseong-gun located in the west of Baekdudaegan were also included considering the big range of Baekdudaegan immediately adjacent to the eastern coast. This was because Silla attempted to connect 'Sakjuro' which was a road between Sakjeong-gun and Jeoncheon-gun, and a traffic route in the eastern coast while it connected inland areas of existing Gangwon and Gyeongbuk from north to south. In such process, Samcheok also got attention because Silla could advance to Taebaek and Jeongseon. Samcheok is a place with a relatively vast flatland in the eastern coast along with Yangyang, Gangneung, Heunghae, and Yeongil. Especially, it connected to seashore and could advance not only to Nakdong River upstream but also to Namhangang River upstream through Oshipchen and basin of Oshipchen field. At the end of Silla age, Gyungye stayed at Wonju and expanded its realm to Uljin through Jucheon, Yeongwol, and Pyeongchang. Considering geographical condition from Wonju to Uljin at that time, the traffic route was to going to Jeonseon, crossing Baekbok-ryeong, passing Samcheok, and to reach Uljin. Reason why Gyungye reached Uljin by way of Samcheok was because Bukjin, the most important military base in the eastern coast, was situated in Samcheok. Having embraced Samcheok, he could occupy Gangneung to expand his power. Samcheok was the center to distribute personal and material resources to many other areas through Nakdong River upstream and Namhangang River upstream controlling the Silla's traffic route of the eastern coast.

      • KCI등재

        신라 문한직과 당 문한직의 관계-≪구당서≫를 중심으로-

        장일규 신라사학회 2019 新羅史學報 Vol.0 No.45

        The Tang Dynasty's Hóngwénguǎn Dàxuéshì worked mainly as a member of the Xīzōng, Zhāozōng, āidì Emperor. No official who worked as a member of the Imperial Household Agency during the Mùzōng and as a member of the Jìngzōng Emperor. Only Hànlínyuàn Xuéshì, a memb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was confirmed to be a memb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but he did not engage in any activities from the beginning of the Xīzōng to the end of the Zhāozōng Emperor. The Chinese literary profession performed the ranks of Hànlínyuàn, Jíxiándiàn and Hóngwénguǎn. At first, however, Hànlínyuàn officials were active, but gradually the Hóngwénguǎn officials expanded their activities. Since Silla international student was closely connected with the Chinese Chóngwénguǎn, Silla a Literary Public Service was influenced by Chinese a Literary Public Service during the establishment and conversion process. 이 글은 신라 문한직의 설치와 변화에 영향을 미친 당 문한직의 모습을 ≪구당서≫ 본기를 중심으로 시기별・유형별로 살핀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한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한림은 詞學에 능한 待詔가 대체로 書詔의 임무를 담당하면서 비롯되었다. 현종 때 한림대조와 한림공봉이 각각 설치되었다가 한림학사로 고쳐 불렸는데, 특히 한림공봉이 한림학사로 고쳐 불리면서 한림대조의 역할을 아울렀다. 다만 이 때까지 진왕부문학관, 홍문관, 여정전, 집현전 등이 한림원을 대신하여 서조의 임무를 담당했다. 홍문관은 656년~905년, 집현전은 725년~905년, 한림원은 763년~905년에 활동하였던 관인이 확인된다. 홍문관 대학사의 활동은 희종, 소종, 애제 때 활발했다. 집현전 관인은 덕종~순종 때, 목종~경종 때 활동한 관인이 보이지 않는다. 한림원 관인은 대체로 한림학사를 맡은 관인만 주로 확인되는데, 희종 때 전반~소종 때 말기 전까지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집현전 관인과 한림원 관인, 한림원 관인과 홍문관 관인은 서로 대비될 정도로 활동상을 달리 했다. 또한 한림학사는 집현전의 학사나 대학사로 승진했고, 비록 희종과 소종 때만 보이지만 집현전 대학사가 홍문관 대학사로 轉職하기도 했다. 한림학사는 대체로 집현전 학사나 대학사로 이동했고, 그 반대의 경우는 없었다. 자연히 당의 문한직은 한림원, 집현전, 홍문관 등의 위계를 가졌다. 다만 처음에는 한림원 관인이 활발히 활동했지만 점차 홍문관 관인이 활동 폭을 확대했다. 신라 숙위학생은 당의 숭문관과 밀접히 관계했으므로, 신라 문한직은 설치와 변화 과정에서 당 문한직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 문한 관서로는 한림대, 숭문대, 서서원 등이 확인되는데, 한림대 관직명이 주로 혜공왕~헌강왕 말까지 나타나는 데 비해, 한림학사만은 흥미롭게 최치원의 귀국 이후에 주로 보인다. 771년에 한림대에 랑, 대조, 서생 등 여러 관원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한림’, 곧 ‘한림대’의 개칭은 경덕왕 재위 18년(759)에 이루어진 중앙관부와 관직의 한화 개편과 밀접히 관련되었을 것이다. 다만 당제의 한림학사와 관련하여 신라 한림학사의 활동은 최치원 귀국과 연관되었다. 최치원과 박인범의 한림학사 재임은 당의 한림학사 활동이 전무한 희종 초~소종 말에 해당하는데, 경덕왕 때 이래로 한림의 기능을 유지했다가 최치원의 귀국을 계기로 당과 대등한 문한관으로 한림학사를 설치하면서도 실제 한림의 주요 기능은 신라의 고유한 이름을 붙인 서서원을 통해서 주도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당시 서서원은 당의 홍문관이나 집현전처럼 군왕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문사를 중용하는 관서로 자리했고, 최치원과 박인범은 그 역할을 맡았다.

      • KCI등재후보

        신라 문한직의 설치와 그 변화

        장일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9 한국학논총 Vol.31 No.-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구축된 ‘한국사상 관인ㆍ관직DB’를 활용하여 신라하대 문한직의 변화 과정을 추적ㆍ정리하고, 문한관의 활동과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신라는 삼국통일전쟁 전후 시기에 문한관을 두었다. 이 때 문한관인 상문사는 외교문서 작성이나 외교사행 파견은 물론 문한관 양성을 위한 교육도 담당하였다. 상문사의 직임은 그 뒤 통문박사, 한림대로 각각 개칭되면서 계속 이어졌다. 혜공왕대 이후 한림대의 직제는 더욱 다양해졌다. 특히 경문왕 말년 이후 헌강왕대까지 근시기구에 소속된 관인은 문한관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였다. 그들은 국왕의 명령을 받아 여러 비명과 기문을 작성하는 한편으로 국왕의 경연을 담당하면서 국왕의 교서를 작성하였고, 중앙관부와 지방관서의 요직을 맡았다. 문한직은 외교문서와 외교사절의 고유 업무 이외에 국왕의 측근 관료로 기능하였다. 885년 이후에 한림대를 개편한 서서원이 다시 문한관의 역할을 회복하여 비명과 기문 찬술을 전담해 나갔다. 서서원의 관인은 근시직으로 국왕의 측근 관료로 활동하면서 문한직과 함께 중앙관서와 지방관서의 실무직을 맡아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정강왕대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헌강왕은 선왕인 경문왕처럼 측근 관료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경문왕은 왕손과 함께 근시직 문한관을 중앙관서의 차관직이나 지방관서의 장으로 임명하여 측근정치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헌강왕 말년에 이들이 대개 사망하자, 헌강왕은 보다 축소된 세력을 중심으로 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서원 중심으로 문한직을 개편하고, 문한관에게 중앙관서의 차관직이나 지방관의 장을 겸직시켜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 때 김원, 최치원, 박인범 등의 유학지식인은 국왕의 측근관료로 활동하면서 육두품 출신의 신분적 기득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 KCI등재
      • KCI등재

        조선시대 최치원 추숭과 그 특징

        장일규 신라사학회 2022 新羅史學報 Vol.- No.55

        This article focuses on Seowon, where the evaluation of Choi Chi-won during the Joseon Dynasty appeared differently in the early and late periods. Representative Confucian academies related to Choi Chi-won in the Joseon Dynasty were Seoakseowon Confucian Academy in Gyeongju and Museongseowon Confucian Academy in Jeongeup, and the shrine was Busungsa in Seosan. The two Confucian academies were built by local governments to promote local education and foster scholars. The opinions and requests of Confucian scholars in the region were also included. However, after the establishment of Seoakseowon Confucian Academy, Museongseowon Confucian Academy was rebuilt, and after Seoakseowon Confucian Academy was approved by the state, the influence of Seoakseowon Confucian Academy was quite significant. However, while the support and solidarity of local Confucian scholars were strongly maintained in the construction and reconstruction of Seoakseowon Confucian Academy, there was a widespread atmosphere in Museongseowon to simply honor outstanding local figures. This appearance was not irrelevant to the change in the tendency to emphasize as an excellent writer and an early Confucian scholar, gradually following Buddhism and Taoist hermit and evaluating him as a literary man with insufficient Confucian knowledge. 조선시대 최치원 추숭과 평가는 차이가 있었다. 초기에는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되어 고대 인물로는 가장 많은 글을 선별하여 수록하거나 정몽주・길재・김숙자 이전에 조선 유학의 종통을 이끌어 온 유학자로 강조하였다. 무성서원의 재건, 서악서원의 건립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서악서원 사액 전후에는 불가나 선가의 지식인으로 정리되어 문묘 배향 인물에 대한 존숭 이상으로 받들지 않았다. 오히려 경주최씨 문중에서 도시조로서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는 일가와 일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거나 선가와 연고되어 곳곳에 ‘친필 석각’을 조성하고 설화와 전승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최치원에 대한 평가와 존숭은 조선시대 내내 꾸준히 변화하였다. 이 글은 조선시대 최치원 존숭의 내용을 서원을 중심으로 살피고, 그 변화의 특징을 제시하고자 작성하였다. 최치원 관련 서원과 사우 중에 주목되는 곳은 경주 서악서원과 정읍 무성서원, 서산 부성사 등이다. 서악서원은 최치원을 모시는 영남의 대표적인 서원이었고, 무성서원은 역시 호남의 대표적인 서원이었다. 두 서원은 주・배향 인물과 해당 지방의 연고와 함께 물론 지방 교육과 선비 양성을 도모해야 할 해당 지역 지방관에 의해서 건립되었는데, 해당 지역 유림의 공의와 요청도 반영되었다. 다만 서악서원 건립 이후 무성서원이 재건되었고, 서악서원 사액 이후 무성서원이 사액되었다. 서악서원의 건립과 사액은 무성서원의 재건과 사액에 영향을 미쳤다. 서악서원과 무성서원의 건립과 재건에는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조선 유학의 정통성과 함께 지방관으로서 향촌 교화와 교육을 올바르게 이끌겠다는 조선의 국정 운영 방향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서악서원의 건립과 재건이 조선의 서원 건립 초기에 해당하여 유림의 지지와 연대가 강하게 유지되었던 반면, 무성서원의 그것은 전국적으로 많은 서원이 남설되었던 때였기에 이전과 달리 전국적이라기보다는 해당 지역 선현에 대한 숭봉 의지를 담은 결과로 나타났다. 이것은 건국 초에 뛰어난 문장자이자 조선 유학의 종통으로 자리매김되었던 최치원이 점차 불가와 선가에 침잠하였던 유학적 소양이 부족한 문인으로 평가되는 변화와도 밀접히 관련되었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