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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요동 진출과 영역

        임기환 고구려발해학회 2013 고구려발해연구 Vol.45 No.-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언제 완전하게 확보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현재 학계의 논의는 대략 두 입장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영락 5년(395) 이전에 요동지역을 장악하였다고 보는 견해, 400년~402년 무렵에야 요동지역을 확보하였다는 견해이다. 후자의 견해는 최근에 다수 제기되었기 때문에, 본고는 이러한 신설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작성하였다. 기존 연구에서 주목한 광개토왕비의 영락 5년조의 요동 순수 기사와 396~7년경 후연에 의한 광개토왕의 책봉 기사는 그대로 고구려의 요동 장악을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니다. 이에 본고에서는 400년, 406년에 전개된 후연의 군사행동의 양상, 그리고 영락 17년 기사가 후연과의 전쟁 기사라는 점을 주목하였다. 400년 이후에 고구려와 후연의 충돌은 대체로 요동 이북 지역에서 거란을 포함하는 요하 상류 지역의 루트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이는 襄平(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반도 지역은 고구려가 이미 안정적으로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400년 이전 시기에 요동지역을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397년 무렵 모용보가 광개토왕을 책봉한 책봉호에 平州와 遼東, 帶方 등 군현명이 포함된 것은 요동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실질적인 지배를 후연 입장에서 인정한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397년에서 400년 사이에 요동지역을 둘러싼 양국간에 충돌을 보여주는 기사가 없는 상황에서 397년의 책봉호를 허구로 볼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 이전 395년 광개토왕의 요동지역 순수 기사를 요동지역에 대한 영유권의 확인 행위로 볼 수 있다. 395년에서 406년까지 12년 동안 고구려와 후연의 관계를 보여주는 7건의 기사가 있을 정도로 매우 밀도 높게 자료가 남아있는데, 이들 기사 중에 고구려의 요동 진출과 장악을 직접 보여주는 기사가 없다고 한다면, 이는 고구려의 요동 진출이 이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한다. 따라서 고구려의 요동지역 장악은 395년 이전 즉 후연의 요동 장악이 이루어진 385년에서 394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함이 자료가 보여주는 정황상 타당하다. 그런데 광개토왕비에서 395년(영락 5년) 요동 순수 기사 이전에 관련 기사가 없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요동 진출과 장악은 광개토왕 즉위 이전 즉 고국양왕대인 386년에서 고국양왕이 사망한 해인 391년 사이로 추정된다.

      • KCI등재

        南北朝期 韓中 冊封ㆍ朝貢 관계의 성격 : 고구려ㆍ백제의 冊封ㆍ朝貢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임기환 한국고대사학회 2003 韓國古代史硏究 Vol.32 No.-

        The diplomatic relations(a relation of investiture and tribute:冊封-朝貢) that Southern Dynasty and Northern Dynasty of China maintained with Koguryo(高句麗) and Paekje(百濟) were similar in appearance, but composed of various layers and substance. That is because the specifics of relations between the investing states and the tributary states varied. Additionally, the investing states and the tributary states had different diplomatic strategies and understandings of each other. Koguryo utilized the iuvestiture conferred by the Emperors to obtain recognition of its powers. In the case of Paekje, the system of investiture was used to govern its own political machinery. In addition, while Koguryo and Paekje were in the position of a tributary state, they maintained political independence and particularity, and Southern Dynasty and Northern Dynasty of China(南北朝) could not but acknowledge this. As Su(隋) Dynasty and Tang(唐) Dynasty, which brought China under one authority, emerged, the international relations began to change, because Su Dynasty and Tang Dynasty expected au international order centered around them. Therefore, Koguryo and Paekje, which insisted upon their political independence, could not accept the political dynamics, and that was the background upon which the two nations were conquered by the allied force of Tang Dynasty and Shilla(新羅).

      • KCI등재
      • KCI등재

        「삼국사기」 백제본기 대외관계 기사의 재구성 시론-지명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임기환 한국고대사학회 2008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52

        百濟本紀에 보이는 百濟와 新羅의 관계 기사는 신라측에서 전승된 자료에 의해 찬술된 共有記事가 대부분이었다. 즉 百濟와 新羅와의 대외관계를 보여주는 백제측 전승 자료는 극히 제한된 범위에 불과했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의 대외관계 기사의 紀年은 신라측 자료가 갖는 기년상의 문제점으로 인하여 재조정하여 검토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마도 몇몇 기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6세기 중반 이후 백제와 신라의 충돌이 격화된 이후의 사정을 전하는 기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년상의 문제는 신라측 전승 자료 내지는 新羅本紀 기사의 紀年 문제와 연관하여 풀어갈 문제이다. 다음 百濟本紀의 백제와 고구려 관계 기사는 대부분이 백제측 전승 자료에 의해 편찬된 기사이다. 그 중 熊津으로 천도한 이후에 나타나는 백제와 신라 사이의 군사 同盟과 관련된 기사는 신라측 전승 자료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백제와 고구려의 대외관계 기사에서 등장하는 雉壤城․水谷城․浿水라는 지명은 백제인의 영역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熊津으로 천도한 이후에 등장하는 한강유역 관련 기사는 4세기 후반~5세기 후반 대의 기사가 뒤섞인 결과로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측 전승 자료에도 熊津 천도 이후 고구려와의 관련 기사는 그다지 많지 않다. 즉 백제측 전승 자료도 기본적으로는 漢城에 도읍하였던 시기인 近肖古王~蓋鹵王代에 고구려와 각축전을 벌일 때의 기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靺鞨, 樂浪과의 관련 기사 역시 전시기에 걸쳐 분포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漢城都邑期의 사실을 반영하는 기사가 분산 기술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기사들은 전적으로 백제측 전승 자료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이 百濟本紀에 기술된 대외관계 기사 중에서 백제측 전승 자료는 靺鞨 관련 기사와 4세기 중후반~5세기 후반의 高句麗와의 관련 기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보급형 지진동 경보기의 시범운영을 통한 문제점 및 개선방안

        임기환,최선화,박기종,김재선 한국재난정보학회 2021 한국재난정보학회 학술대회 Vol.2021 No.11

        지난 2016년 발생한 규모 5.8의 9.12 지진과 2017년 규모 5.4의 포항지진은 인적 물적 피해와 함께 전 국민이 지진발생에 대 한 불안에 떨었다. 지진 발생 시 국민이 느끼는 지진의 공포와 불안을 최소화하고 적절한 행동과 대피를 통해 국민 생활의 안전 성과 지속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지진 발생 즉시 지진동 발생 여부를 판단하고 국민이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필 요하다. 이를 위해 2018년부터 지진동 경보기 시제품을 개발하여 성능을 검증하는 연구를 수행하였다. 보급형 지진동 경보기 는 MEMS(Micro Electro Mechanical Systems) 가속도 센서와 MCU(Micro Controller Unit), WiFi 모듈, 부저, LED 등으로 구 성된 저가의 보급형 장치로 인공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 ANN)을 활용한 지진동 감지 모델이 탑재되어 있다. 본 연구 에서는 보급형 지진동 경보기 계측데이터 및 지진동 감지 모델 관리를 위해 수행한 보급형 지진동 경보기 시범운영 현황과 이를 통해 찾아낸 보급형 지진동 경보기의 문제점과 개선사항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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