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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희롱-이성애제도-조직문화 그 연관성에 관한 고찰

        이성은(Lee Sung Eun) 한국여성학회 2003 한국여성학 Vol.19 No.2

        본 논문은 이성애적 실행으로서의 성희롱이 한국의 이성애 제도를 재현하는 성적순결, 결혼제도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는 지를 검토하고 또한 성희롱이 일어나는 대표적인 장인 조직 내의 성별, 성문화가 성희롱의 발생과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를 고찰한다. 이를 고찰하기 위하여 질적 방법론에 기초하여 28명의 사무직 여성 노동자와 심층 연접법을 수행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서 첫째, 이성애적 제도로서 순결이데올로기와 결혼 제도 내에서의 성에서 비롯된 지배적인 이중규범은 여성을 성희롱의 저항할 수 없는 피해자로 남성을 일상화된 성희롱의 가해자로 만드는데 주요하게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이러한 이성애제도에 근거한 남생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성별, 성문화는 다양한 양태에 성희롱을 유발시킬 뿐 아니라, 성희롱을 유지 공고화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본 논문은 성희롱의 문제 해결은 단지 새로운 법안의 수립,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가능하기 보다는 이성애 주의에 대한 도전, 조직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제기를 통해서 가능함을 주장한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sexual harassment as a heterosexual incident is not only perpetuated by heterosexuality as an institution but also related to gendered and sexual organizational culture in Korea. In doing so, the data of this research derives from qualitative interview with 28 female clerical workers who work in Seoul in Korea. Firstly, this research found that the specificity of Korean heterosexuality is characterized as the dual norm based upon the ideology of sexual chastity and sexuality within marriage. Therefore, Korean female workers affected by the institution of heterosexuality are unable to assertively respond to sexual harassment. Whereas women are defined as a sexual victim, men are regarded as a common harasser. Secondly, this research shows how the incident of sexual harassment is linked with the gendered and sexual culture in the Korean workplace. The gendered organizational culture is featured as the first, inequality of opportunity in employment, sex-discrimination in income and promotion, the second, sex discrimination against married female workers, the third, a uniform for female workers only. The sex-discriminated features contribute to see women not as a worker with an equal ability but as a office wife and a sexual object. Moreover, sexual culture of Korean organizations is mainly related to the 'drinking culture' within the institution of the 'office party'. This drinking culture is male-centered and male-dominated, so most female workers are forced into sexual service roles. In this circumstance, the various forms of sexual harassment are occurred within the office parties and therefore it demonstrates that the sexualized organizational culture is a main cause of sexual harassment. As a result, in order to study incidents of sexual harassment within each society, a research on the sexual harassment- heterosexuality-organizational culture complex is indispensible.

      • 교도권과 교부들 :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성, 신앙, 권위 이해

        이성효(Lee, Seonghyo) 수원가톨릭대학교 이성과신앙연구소 2017 이성과 신앙 Vol.62 No.-

        하느님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 신학의 주체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직 이성만으로 진리에 이르고자 마니교에 빠지기도 했고 아카데미 학파의 학설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이성만으로 진리에 도달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이성으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권위가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체득한다. 그는 성경과 교회의 권위에 자신을 맡기면서 이성과 신앙의 조화란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고, 믿기 위해서 이해하라고 권고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직접 계시하신 진리, 곧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바로 신학의 주체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학의 대상은 하느님이시다. 어느 누구도 계시된 진리와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지 않으면 신학의 대상에 대해 알 수 없다. 신학의 대상은 신앙의 내용이다. 신앙의 내용은 신자들이 ‘살아 왔고’ ‘살고 있는’ 신앙 안에 보존되고 전승된다. 누군가 전승된 신앙의 내용과 다른 내용을 언급하면 교회는 권위를 발동하여 올바른 신앙의 내용을 지키고 보존한다. 교회는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아 신경을 선포하고 지역교회에 전해준다. 가톨릭 신학의 목적은 하느님께 이르는 것이다. 덴칭거가 교회의 권위로 최종 결정한 신앙과 도덕에 관한 실증적 문헌들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고 자기 임의대로 이해하는 것이 신학 연구에 가장 큰 해를 끼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신학의 진정한 목적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덴칭거가 『신경 편람』을 편찬한 것은 새롭고 훌륭한 가톨릭 신학을 드러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God is the subject of Augustine’s theological world. In his search for ultimate truth he flirted with Manicheanism and was temporarily swayed by Neo-Platonism. His intellectual quest, however, which lead him to see the limitations of these approaches, eventually brought him to understand the necessity of authority. That is, in giving himself over to the authority of Sacred Scripture and the Church, Augustine discovered the harmony of faith and reason. He came to affirm that “I believe, in order to understand; and I understand, the better to believe.” We, in other words, arrive at the truth within humans and in the Sacred Texts, through an a priori faith in God. God is, in other words, the ultimate subject of theology. Likewise, the subject of Catholic theology is God. Without God’s help, no one can understand this theological reality. The curriculum of theology is faith: the lived and living faith which believers preserve and transmit. The exercise of magisterium in the Church is to distil from amongst its competitors the faith which is to be proclaimed. The heart of this belief is found in its proclamation by the local churches. The goal of Catholic Theology is to arrive at God. Denzinger is a great help in awakening this most sacred purpose of theology and pointing to the more damaging mistakes of ignoring, neglecting or arbitrarily interpreting the teaching magisterium. Within this context, the publication of Denzinger. as a “Compendium of Faith ” is rightly to be seen as a refreshing and worth revelation of Catholic faith and doctrine.

      • KCI등재

        『해주일록<SUP>海洲日錄</SUP>(1922~1933)』을 통해 본 영덕의 유학자 남붕<SUP>南鵬</SUP>의 농사관리방식

        이성임(李成妊) 한국국학진흥원 2020 국학연구 Vol.0 No.41

        본고는 남붕南鵬(1870~1933)의 『해주일록海洲日錄(1922~1933)』을 자료로 하여 일제강점기 경상도 영덕 소재 유학자의 농사관리와 농업과정 상의 특징을 살핀 것이다. 일본의 침략정책이 노골화된 시기에 남붕이 어떠한 방식으로 가정경제를 이끌어 갔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반적으로 남붕은 열강의 침략과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수용되던 시기에 평생 구학舊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되는데, 이는 그의 경제생활도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는 무너져 가는 종가宗家를 복원하고 조상 전래의 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았다. 전체 60마지기의 농지 중에 절반가량이 제위전祭位田과 계답契畓이라는 사실을 이를 보여준다. 과거가 폐지되어 학문을 통해 관직진출이 단절된 상황에서 학문과 농사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는 결국 농사를 지으며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농사짓는 것은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며, 집안을 다스린 뒤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붕은 30여 마지기 농지와 1년에 220원 정도를 지출할 수 있는 살림살이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토지거래를 하기는 했지만 재산 증식의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동생이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린 조상의 땅인 미려尾閭 밭을 되찾아 보리와 조를 심던 밭을 논으로 바꾸는 번답(反畓) 과정을 진행하고 여기에 보리와 벼를 이모작으로 재배하여 수확량을 증대하였다. 남붕은 손자를 통해 자신의 토지를 관리했는데, 실질적인 일은 머슴을 통해 해결해 나갔다. 이들 머슴은 노비제가 해체된 사회구조에서 노비를 대체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머슴은 주인의 손발로서 농업과정뿐만 아니라 집안의 잡다한 일에 동원되기도 했다. 남붕이 살던 시기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시기로 일본이 토지조사사업이 끝나고 본격적인 산미증식계획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는 일제의 정책을 이의 없이 수용하였다. 농무회 설립문제나 식산조합殖産組合에 활동에 대해서는 오히려 온정적이었다. 그가 화학비료를 사용하여 토지의 생산성을 높이고자 했으면서도 일본의 정자井字의 이앙방식을 거부하는 것은 일본의 정책을 수용하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혹한 시기에 별다른 저항 없이 일본의 정책을 수용하는 점이 안타깝지만, 전통의 회복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꿈꾸던 입장에서 일본의 정책에 일일이 저항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구학舊學을 지향한 영남의 보수 유학자 남붕은 모든 측면에서 전통의 회복이라는 목표를 갖고 살아갔다.

      • KCI등재

        정산의 치교사상

        이성전(李聖田)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6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Vol.69 No.-

        정산(鼎山宗師, 法名 宋奎, 1900-1962)은 원불교 초대 종법사로 교조 소태산 대종사(少太山大宗師 朴重彬, 1891-1943)의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구세경륜(救世經綸)을 체계화하고 실현하기위해 진력하였다. 소태산의 인도상(人道上) 요법(要法)을 주체로 결함 없는 문명세계를 건설한다는 이상 실현의 한 축은 정산에게서 치교사상으로 정리된다. 치교란 ‘이끌고 함께 함’을 뜻하는 교화(敎化)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를 막론하고 사람을 다스리고 교화하는 세 가지 길로 도치, 덕치, 정치를 제시한 것이 그것이다. 도치는 도로써 다스리고 교화함을 말하고 덕치는 덕으로 다스리고 교화함을 의미하며 정치는 정으로 다스리고 교화함을 뜻한다. 치교의 가장 원만한 길은 도치와 덕치와 정치가 함께 아울러 조화 협력해나가는 것이다. 이 가운데 도치와 덕치는 종교가에서 맡았고 정치는 법률가에서 맡았다고 한다. 정산은 치교에서 지도자의 정신적 자각을 가장 중요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자각된 정신을 지닌 지도자의 사심 없는 마음에서 솟아난 지혜와 용단이 치교의 핵심이다. 지도자의 가장 근본은 텅 비어 두렷하고 원만하여 흔들림 없는 마음 바탕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종교적 지도자의 입장에서 구체적 현실사회의 정치를 거론하면서도 천지의 마음에 바탕하여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종교적 심성을 기반으로 할 것을 제시한다. 본고에서는 그의 치교사상 가운데 정치사상을 『건국론(建國論)』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건국론』은 정산이 광복 2개월 후에 저술한 것으로 바람직한 건국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건국론』에 나타난 그의 치교사상은 기본적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정교론을 계승하고 있다. 소태산은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수레의 두 바퀴, 엄부와 자모, 동남풍과 서북풍에 비유하여 함축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이며, 각자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완성시켜준다는 입장이다. 특히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에서는 지도자의 역할과 민중의 단합된 힘이 이루어내는 균형 잡힌 상생의 사회진화론을 천명하였다. 정산이 『건국론』에서 밝힌 정치의 입장은 이념적으로는 좌우의 편향성을 배제하고 중도를, 외교적으로는 중립주의 외교노선을 지향하고 제도는 공화제도를 제시하였는데 여기서 공화제는 민주공화제의 의미로 받아들여 진다. 사회경제에서는 균등의 원칙을 제시한다. 『건국론』의 정치사상은 좀 더 확장되어 세계보편윤리로서 드러난다. 민족, 종교, 사상의 갈등을 넘어 상생의 정신으로 큰 문명세계를 건설하자는 이념이다. 정산은 미래 시대를 어두운 음시대가 아닌 밝은 양 시대라고 전망한다. 치교의 방향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적절하게 응하며, 많은 사람이 행할 수 있고 실제로 유익을 얻는 법이어야 한다. 그의 치교론은 이러한 시대인식에 바탕하여 밝은 문명세계를 건설하고자하는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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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과 미국의 위기 사태시 대응 전략

        이성봉(李聖鳳, LEE Seong-Bong) 신아시아연구소(구 신아세아질서연구회) 2009 신아세아 Vol.16 No.4

        한국전쟁 이후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몇 차례 무력충돌 직전까지 가는 위기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1968년의 푸에블로호(Pueblo) 나포사건, 1976년의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 그리고 1993∼1994년의 제1차 북핵위기를 들 수 있다. 이 3가지 위기는 각각 연대를 달리 하지만 북한과 미국이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고, 갈등이 증폭됨으로써 무력충돌 직전까지 가는 위기로 발전했으며, 최후의 순간에 극적으로 타결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사례에 대한 검토는 북한과 미국이 위기사태에 대처하는 전략의 특징을 도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There were several crises between U.S.A. and North Korea that brought two parties at the brink of military conflict after Korean War. The crises are Pueblo Incident of 1968, Panmunjom Incident of 1976, and the first North Korean Nuclear Crisis of 1993∼94. These Crises have the same characteristics that U.S.A. and North Korea were the concerned parties, troubles developed to the brink of military conflict, and the crises were dramatically settled at the last minute. So the analysis to these three cases will help to find the patterns and characteristics to deal with crisis between the two par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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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 · 百濟遺民 墓誌의 出自 기록과 그 의미

        李成制(이성제) 한국고대사학회 2014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75

        그동안 高句麗?百濟遺民 묘지의 출자 기록은 이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이해해왔다. 하지만 泉男生의 묘지와 列傳을 비교해보면, 두 기록은 동일한 典據를 이용하였고, 그것이 일족이 唐 朝廷에 제출한 行狀이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묘지의 제작을 위해서는 書家?石工 등 제 3자의 관여가 불가피하였다. 그 제작과정으로 보아 묘지는 私的인 기록이면서 公的인 성격을 띤 자료로 이해되는 것이다. 정체성과 같은 자의식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자료라고는 여길 수 없겠다. 행장이 墓主의 이력을 밝혀 그 활약상을 唐朝로부터 평가받고자 하는데 있었던 만큼 이를 전거로 삼은 묘지도 이 같은 성격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본다. 묘주의 출자는 先代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천남생 묘지처럼 자세하게 기술하기도 하지만, 高足酉 묘지와 같이 그 계보를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경우도 보인다. 전자는 그가 고구려 國政을 오로지했던 가문 출신으로 그의 귀부로 고구려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고족유의 것은 당 장수로서의 활약상만으로 그 이력을 채웠다. 이로 보아 계보를 포함한 망자의 이력 가운데 어떤 내용이 당조의 평가를 더 받을 것인가를 고려한 유민들의 전략적 선택이 있었고, 그것이 묘지 간 기술 내용의 차이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출신지는 출자를 구성하는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로, 어떻게 쓴다라는 일정한 양식에 따라 작성되었다. 유민은 망국에 따라 당의 臣民으로 편입된 까닭에, 본적을 떠나 현재의 거주지에 안치된 경위는 就官의 유래와 歷官을 언급하기 위해 꼭 필요한 내용이었다. 이에 본적과 새로 얻은 貫籍을 기재하여 출신지의 변화상을 보이는 것이 상례였지만, 둘 가운데 하나만을 기재한 경우도 보인다. 이는 출신지를 어떻게 기재하는 것이 망자의 활약상을 돋보이게 할 것인가를 고려한 기술방식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본적만을 언급한 천남생과 달리 藩將으로 활약했던 고족유나 黑齒常之가 출신지의 변화상을 기재했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한편 묘주의 출신지를 ‘遼東郡 平壤城人’이나 ‘熊津 ?夷人’이라 기술한 것은 망자가 어디 소속의 지역 출신임을 밝히는 것으로, ‘都督府+지역’의 기재방식에 따른 것이다. 이는 당대 대표적 유민집단인 突厥人에게서도 동일한 기술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일부 묘지에는 조상의 기원을 중국 전설상의 인물이나 유명인에 두고 그 후손임을 자처한 사례들이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유민 1세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계보인식의 변화라고는 볼 수 없다. 돌궐인과 소그드인에게서도 동일한 현상이 보인다는 점에서 이민족으로 당에 정착하게 된 이들의 생존전략이었다고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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