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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冥集』 丙午(1606)本의 발견과 그 의의

          이상필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17 남명학연구 Vol.53 No.-

          The controversy on whether 『Nam-myeong Collection』 was first published in 1602 or 1604 has been provoked in the thesis of Jeon Byeong-yoon, Oh Yi-hwan and Kim Yoon-su. Lee Sang-pill revealed in 『The Study on Nam-myeong』 30th collection (Published on December 31, 2010) that the first publication of 『Nam-myeong Collection』 has to be in August, 1604 when Jeong In-hong, the writer of Nam-myeong wrote the preface. After, the woodblock was burned down but could be re-engraved and published by help of Governor Yoo Yeong-sun, and that woodblock-printed book was called the 1606 edition. The book discovered recently is the 1606 edition, which the 1st volume is in one book and the 2nd and 3rd volume are in one book. The 1st volume includes 3 pages of preface, 9 pages of Nam-myeong record, 6 pages of Nam-myeong inscription and 37 pages of the 1st edition, total 55 pages. The 2nd volume includes 88 pages of the 2nd edition and 36 pages of the 3rd edition, total 124 pages. This book has 7 traces of correction which means that it is not the first 1606 edition but the late 1606 edition, the oldest edition and the complete set of books among discovered 『Nam-myeong Collection』 until now. After comparing the 1606 edition and the 1609 edition and examining which parts were edited from the 1606 edition to the 1609 edition in detail, it is concluded as follows. First, 112 parts were edited from the 1606 edition to the 1609 edition. Jeon Byeong-yoon and Oh Yi-hwan claimed that 28 parts were edited, but 84 corrections were more discovered in the same volume and 28 corrections in 45 pages of the 2nd volume that they could not see were discovered, thus there are total 112 corrections. Second, it is claimed that there are 72 simple misspelling corrections and parts that should be corrected are corrected, but 'sunseungcheil(先乘霽日)' may need reconsideration and 'yoonson(胤 孫)' is wrongly corrected. Third, among editing related to poetry style, 'ohshibnyeon(五十年)' of 'jeonshin ohshibnyeon cheonlu(全身五十年前u)' can confirm the original on grounds of this woodblock-printed book. Fourth, editing related to context worths being future subject of research. The most wellknown among these, the complete deletion of latter part of Shinmyeongsamyeong is interpreted that it is due to comment of Toigye. Saying 'Pro-independence' to Toigye, Sending Ohju to Kwon Eung-in to make him find his dying hour, describing adoptees from different clans and supplementing the poet 'Ganglu' can be quoted as part of future research. 『남명집』의 간행이 언제 처음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은 이미 전병윤과 오이환, 김윤수의 논문에서 1602년이냐 1604년이냐의 논란이 있어 왔다. 이에 대해 이상필이 『南冥學硏究』 30집(2010.12.31간행)의 「『南冥集』 初刊年代 辨證」이란논문에서, 『남명집』의 초간은 남명의 문인 정인홍이 그 서문을 쓴 1604년 8월이라 볼 수밖에 없으며, 그 뒤 목판이 불타 관찰사 柳永詢의 도움으로 다시 판각되어 간행되었다는 그 판본을 병오본으로 명명하게 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번에 발견된 이 책은 바로 그 병오본으로서, 제1권이 한 책으로 장책되어있고, 제2권과 제3권(부록)이 한 책으로 장책되어 있다. 제1책은 서문 3장, 남명행장 9장, 남명비문 6장, 제1권 37장 등 모두 55장으로 되어 있다. 제2책은제2권 88장, 제3권 36장 등 모두 124장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남명집』으로서는 最古本이며 完帙本이다. 이 병오본과 기유본을 대조하여 병오본의 내용을 기유본에서 어떻게 고쳤던가 하는 점을 낱낱이 살펴본 결과 그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는 병오본에서 기유본으로 바뀌면서 112곳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전병윤과 오이환은 28곳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같은 곳에서 84곳이 더 발견되었고, 그들이 보지 못했던 2권 마흔다섯 장에서 28곳을 발견함으로써, 그 사이에 변화된 곳이 모두 112곳임이 드러난 것이다. 둘째는 단순한 오자 수정이 72곳에서 이루어졌고 이들은 대체로 수정될 만한것을 수정했다고 하겠으나, ‘先乘霽日’의 경우는 재고의 여지가 있고, ‘胤孫’의경우는 잘못 수정한 것이었다. 셋째로 시 형식과 관련하여 이정한 것 가운데 ‘全身五十年前u’의 ‘五十年’은, 이 판본을 근거로 기존의 ‘四十年’을 수정하여 이를 정본으로 확정할 만하다. 넷째로 문맥과 관련하여 이정한 것은 앞으로의 연구과제가 될 만하다. 이 가운데서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특히 신명사명의 뒷부분을 완전히 삭거한 것은 退溪의 指斥을 염두에 둔 결과로 해석된다. 그리고 退溪에게 ‘獨立之地’라고한 것이라든지, 權應仁에게 五柱를 보내어 자신의 임종 시기를 알아보게 한 편지라든지, 異姓養子를 분명히 기술한 것이라든지, ‘江樓’ 시를 보각한 것 등은앞으로 연구의 한 부분으로 인용될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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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冥集』 初刊年代 辨正

          이상필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10 남명학연구 Vol.30 No.-

          이 논문은 『남명학연구』 29집 소재 「『南冥集』 諸板本의 刊行年代」라는 오이환의 논문에 대한 반박 논문이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집』 기유본 문경호 발문의 ‘임인(1602) 년간’은 문집의 편집 작업이 진행된 시점을 언급한 것이고, 초간된 것은 서문이 찬술된 갑진(1604)년이며, 장판각에 불이 난 뒤 순찰사 유영순의 후원에 의해 병오(1606)년 무렵에 1차 중간이 있었고, 다시 이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보유를 추가하여 간행한 것이 기유(1609)본이다. 둘째, ‘年間’, 즉 ‘즈음’이란 용어가 간행연대를 적시한 용어로 보기에는 분명하지 않고 너무나 느슨하다. 간행한 것은 분명한 것이고, 문집 편찬을 의논한 것은 오늘날처럼 간행위원회를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1600년의 『퇴계집』 간행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시기가 불분명하였던 것이다. 셋째, 갑진년 8월에 정인홍이 찬술한 서문이, 문경호가 발문을 실은 그 책에 같이 실려 있다는 것은 문집의 초간이 갑진년에 있었다는 것을 가장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초간본의 장판각이 불타고 유영순에 의해 중간이 되었다면 이는 유영순의 관찰사 재임 기간[1605년 9월-1607년 3월]과 관련시키면 병오(1606)년 무렵이라 해야지, 오이환처럼 갑진(1604)년으로 볼 수는 없다. 다섯째, 오이환이 『고대일록』의 신축(1601)년과 임인(1602)년 등에 보이는 ‘看役’이 문집 간행의 일이라고 해석할 근거가 없다. 더구나 계묘(1603)년 겨울에 李堉이 鄭逑의 심부름으로 『남명집』의 편집 작업을 주도하던 鄭仁弘에게 특정한 글을 제외하기를 요구하였는데, 정인홍이 “선생의 문자라면 片言隻字라도 가볍게 취하거나 뺄 수 없다.”며 거절하였으니, 이는 1603년 겨울 이전까지 문집의 편집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근거 자료가 된다. 여섯째, 이상 네 가지 이유로 임인(1602)년에 『남명집』이 초간되었다고 주장한 오이환의 설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일곱째, 이에 오이환은 유영순에 관한 문경호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며, 하징의 「덕천서원기」와 배대유의 「신산서원기」에서의 관찰사 기록 착각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이는 논리가 닿지 않는다. 하징과 배대유가 설사 관찰사에 대하여 착각했다 해도, 그것이 문경호의 착각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조차 오이환이 사실이 아닌 주장을 한 것으로 논증하였다. 여덟째, 우선 하징의 「덕천서원중건기」에서 윤근수가 관찰사로서 재임 기간[1574년 10월-1575년 10월] 중에 덕천서원의 창건을 지원하였다는 것을 오이환은 하징이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재임 중에 그가 지원한 뒤 1576년 봄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보면 하징의 기록에 전연 무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아홉째, 배대유의 「신산서원기」는 『모정집』 기록을 보면 ‘방백읍재’ 밑에 윤근수와 하진보가 각각 세주로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주를 후인이 추기한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것은, 오이환이 배대유가 착각했다고 보기 위함에 다름 아니다. 배대유는 당시의 관찰사 김수와 김해부사 양사준의 인품을 문제삼아 그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애초에 ‘방백읍재’라고만 하고, ‘金方伯睟梁知府思俊’이라 표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This paper intends to refute the suggestions made by I-hwan Oh in his paper entitled "The timing of the publication of various editions of the Nam-myeong Collection," which is put in the 29th collection of "A research into the Nam-myeong study" published on June 30, 2010. The following are this research's summary. First, the phrase ‘published in 1602’ in the epilogue written by Gyeong-ho Mun of the 1609 edition of the Nam-myeong Collection tells the timing when the compilation of the collection was started. The first edition was published in 1604 when the prologue was composed. The first reprinting was done around 1606 with supports from Royal Envoy Yeong-sun Yu after the national library was burned down. The reprinted edition was partially corrected and complemented and then issued again in 1609. Second, ‘in that year’ or ‘at that time’ is too unclear and loose to pinpoint the timing of the publication. That the publication was made is very clear, but the timing is not clear since publishing the collection was not discussed by the appropriate publishing committee, as in these days, but the publishing seems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issuance of the Toe-gye Collection in 1600. Third, that the first collection was published in 1604 is most definitely demonstrated by the fact that the prologue was composed by In-hong Jeong in August 1604 and the epilogue written by Gyeong-ho Mun are in the same book. Fourth, if the first edition was burned down along with the national library and it was reprinted by Yeong-sun Yu, the timing for its reprinting should not be in 1604 as I-hwan Oh contends, but around 1606 considering the tenure of Governor Yeong-sun Yu (from September 1605 to March 1607). Fifth, there is no ground for I-hwan Oh to interpret that the word ‘supervision’ attested in the 1601 edition and the 1602 edition of the Ancient Daily Records is connected to the collection in question. Moreover, it is crystal clear that the collection was being compiled in winter 1603 when, at Gu Jeong's request, Yuk Yi asked In-hong Jeong, who was leading the compiling, to remove specific phrases from the collection and then Jeong refused it by saying, “One jot or one tittle shall be in no wise removed from the book.”Sixth, based on the above-mentioned four reasons, the contention of I-hwan Oh that the Nam-myeong Collection was first published in 1602 is groundless. Seventh, I-hwan Oh says that Gyeong-ho Mun's records about Yeong-sun Yu are not reliable since the records are mistaken about the governor in the Deok-cheon Private School Records written by Jing Ha and in the Sin-san Private School Records written by Dae-yu Bae. But this saying is contrary to logic. Even though Jing Ha and Dae-yu Bae were deluded about the governor, there is no way to prove how the delusion affected the mistakes of Gyeong-ho Mun. Yet, the present author has already demonstrated that the contention of I-hwan Oh is not true as well. Eighth, according the Records about the Reconstruction of Deok-cheon Private School written by Jing Ha, during his tenure (between October 1574 and October 1575), Governor Geun-su Yun supported the foundation of Deok-cheon Private School. And I-hwan Oh asserts these records are wrong and mistaken. Nevertheless, the records should not be considered wrong when it is understood that Geun-su Yun supported the foundation during his tenure and then the construction as begun in spring 1576. Ninth, according to the Mo-jeong Collection, Geun-su Yun and Jin-bo Ha are each considered as a 'government official' in the Sin-san Private School Records written by Dae-yu Bae. I-hwan Oh will not accept that the word 'government official' was not added by someone in later times, just because he wants to interpret that Dae-yu Bae made a mistake. It seems that Dae-yu Bae did not clearly declare the names of Provincial Governor Su Kim and Kimhae County Governor Sa-jun Yang but vaguely mentioned them just as government officials, 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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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來庵 鄭仁弘 所撰 南冥 神道碑銘 小考

          이상필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13 남명학연구 Vol.40 No.-

          The first-ever Ghost Road Monument for Nam-myeong Jo Sik was set up around 1617 and its epitaph was composed by a literary man named Jeong In-hong who was taught under Jo and carved by Bae Dae-yu a literary man taught under Jeong In-hong. This monument was eliminated after 1623 when Jeong In-hong was executed as a rebellious subject during the enthronement of King In-jo. Apparently it was demolished because it was composed by a rebellious subject named Jeong In-hong but, in fact, it was removed since it was a writing which implicitly criticizes Toe-gye. The monument could be set up since Nam-myeong was appointed to the prime minister in 1615 and Jeong In-hong was the leader among literary men of Nam-myeong. Jeong In-hong supposed that, in the presence of his literary men, Toe-gye had often criticized Nam-myeong by means of a letter or dialogue and that, consequently, Nam-myeong was not enshrined at a Confucian shrine. So, in return, In-hong often tried to criticize Toe-gye by means of writings, of which at least 7 was extant when In-hong composed this epitaph which may be the finest example of the criticisms. Being convinced that the gravestone inscription composed by Dae-gok is what best describes the life of Nam-myeong, in this Ghost Road Monument Epitaph, In-hong just elaborates to explain that only the learning of Nam-myeong is the orthodox principles of Confucianism and that Toe-gye’s criticism against Nam-myeong was wrong. Such an intention of Jeong In-hong is explicitly expressed in a solution to the epilogue insomuch as In-hong as a pupil of Nam-myeong could not allow the academic learning of his teacher to be slandered. Being so much assured that it was his duty to treat his master in a proper and righteous manner, In-hong did not hesitate to boldly criticize Toe-gye who was considered the greatest scholar in those times. His attempt of such a kind resulted in a failure firstly because Jeong In-hong had never been appointed to a government official during the rule of Prince Gwang-hae but remained to be just a so-called senior minister living in the woods and remotely controlling the government and because his endeavor was intricately interconnected with the political situations at the time of enthronement of King In-jo and secondly because In-hong could not overpower the strongest influence of Toe-gye which had been long exerted at that time. After the enthronement of King In-jo, due to which Jeong In-hong was reduced to a political failure, most of literary men of Nam-myeong or the posterity of literary men of Jeong In-hong gradually turned to be sided with the clique called “the people of the south” or the clique called “the people of the west.” Yet, for more than 400 years, many people have followed the spirit of Nam-myeong in Jinju and other regions in the western part of South Gyeongsang Province, which fact clearly indicates that the academic influence of Nam-myeong has not been simply meager. In this sense, the present author believes that Jeong In-hong has some sense of prophecy since the last part of the Ghost Road Monument Epitaph for Nam-myeong mentions ‘the solar light over a dark road.’ 南冥 曺植의 神道碑로서 가정 먼저 세워진 것은 1617년 무렵, 그 문인 鄭仁弘이 찬술하고 정인홍의 문인 裵大維가 글씨를 쓴 것이다. 이 비석은 1623년 仁祖反正에 의해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형되고 난 뒤 사람들의 눈앞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겉으로는 적신으로 처형된 정인홍이 찬술한 글이기에 넘어진 것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퇴계를 은근히 비판한 글이기에 더욱 세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이 찬술된 것은 1615년에 남명이 영의정에 증직되어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던 조건이 충족되었고, 정인홍이 남명의 문인 가운데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인홍은, 퇴계가 그 문인들에게 편지나 대화를 통해 여러 차례 남명을 비판하였으므로 그것이 알려져 남명이 문묘에 종사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 글을 쓰기 이전까지 적어도 7편 정도의 글이 남아 전할 정도로 여러 차례 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으며, 이 글은 그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명의 일생에 대해서는 대곡이 찬술한 묘갈명이 가장 극진하다고 생각하고, 이 신도비명에서는 오로지 남명의 학문 내용이 유가의 정통에 해당되며, 퇴계의 남명 비판은 잘못된 것이라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정인홍이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점은 「跋文解」에 보이는 바, 문인으로서 스승의 학문이 誣陷당한 데 대하여 坐視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師生間의 義를 생각한 데서 나온 정당한 행동으로 스스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알려져 있던 퇴계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이는 정인홍이 광해군 때 實職에서 行公해 본적이 없으면서도 遙執朝權하던 山林政丞이었다는 점과 인조반정이라는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에 묘하게 맞물려 있었던 것이 첫째 원인이었고, 다음으로는 당대부터 퇴계가 가지고 있었던 막강한 영향력을 내암이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둘째 원인이라 할 것이다. 정인홍이 정치적으로 패퇴한 인조반정 이후 대부분의 남명 문인이나 정인홍의 문인 후손들이 차츰차츰 남인화하거나 서인화했지만,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일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 남명 정신을 추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남명의 학문적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인홍의 남명 신도비명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冥道日月’이라 표현한 기대가 앞날을 내다 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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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泰安朴氏 門中과 南冥學 繼承 樣相

          이상필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03 남명학연구 Vol.15 No.-

          As soon as Taean Parks arrived at Jinju, about four hundred years, he had produced a large number of talented persons like Park Taemu(Seogae), Park Jeongsin(Eoeun), Park Ji-seo(Nulam). But it was true that Nammyeong's study had a very difficult situation to inherit in this place(Gangwoo), because of Injobanjeong(a kind of war to depose a Injo king) and Moosin disturbance. Taean Parks can't blink the fact such as social atmosphere. Juggling reference of Nulam teaching method is printed in authology. Seogae became Yi Jae's disciple and he had deeply access to scholastic mantle of a Taegae school. As he had a large acquaintances, Nul-am won general applause "the best of south Area." Because Nulam learned by An Jeong-bok(Seoam) and Kim Jongdeok(Chensa), Jeong Chong-ro(Ibjae) -- they were scholars in Andong place. So, generally, Taean Parks were placed under the category of a Taegae School in side of scientifically. In spite of in a Nammyeong School criticized this man. This is related with historically characteristics of in the Gangwoo place. The person in Gangwoo place generally is related with Nammyeong School or his pupils. So they are deeply related with a Taegae School in the temperature blood. But they tended towards in a Nammyeong School in their mind. If we study more, a Nammyeong School's feature will be revealed clearly. 泰安朴氏는 晉州에 정착한 지 400년 정도 동안, 凌虛 朴敏 이후에 西溪 朴泰茂·漁隱 朴挺新·訥庵 朴旨瑞 등 두드러진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 강우 지역이 仁祖反正과 戊申亂을 겪은 데다, 이와 관련하여 남명의 학문 자체에 대한 일부 서인 세력의 비판이 있어서, 남명학이 충실히 계승되기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것이 사실이다. 태안박씨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므로, 凌虛의 來庵 師事에 대한 왜곡성 언급이 문집에 실리게 되었던 것이며, 西溪가 密庵 李栽의 문인이 되어 퇴계학파의 학통을 깊이 접하게 되었던 것이며, 눌암은 더욱 그 범위를 넓혀 기호 지방 남인 계열의 대표적 학자인 順庵 安鼎福을 사사하면서 안동 지방의 川沙 金宗德과 立齋 鄭宗魯 등을 사사하여 '南州第一人' 이란 칭송을 듣기까지 하였던 것이다.그러므로, 전반적으로는 서계 이후에 태안박씨는 학문적인 면에서 그 계통이 퇴계학파의 범주에 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명학파의 범주에서 이 문중 인물을 논의한 것은, 이 강우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과 관련이 있다. 강우 지역의 인물들은 그 조상이 대체로 남명의 문인이거나 再傳門人으로서, 이미 혈연적으로 남명의 私淑人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學問이나 黨色의 측면에서 퇴계학파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하더라도 남명학파적 성향은 여전히 마음 밑바닥에 自在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門中만의 현상이 아니므로 앞으로 꾸준히 연구하면 강우 지역 남명학파의 모습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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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ffect of Hydrogen Charging on the Mechanical Properties of 304 Stainless Steels

          이상필,황승국,이진경,손인수,배동수 한국동력기계공학회 2015 한국동력기계공학회지 Vol.19 No.5

          The effects of hydrogen charging on the mechanical properties of 304 stainless steels were investigated in conjunction with the detailed examinations of their fracture modes. The dependence of the absorbed impact energy and the surface hardness of the 304 stainless steels on the hydrogen charging time was characterized. The tensile properties of the 304 stainless steels by the variation of cross-head speed were also evaluated at the room temperature. The hydrogen charging was performed by an electrolysis method for all specimens of the 304 stainless steels. The mechanical properties of the 304 stainless steels exhibited the sensitivity of embrittlement due to a hydrogen charging. The correlation between mechanical properties and fracture surfaces was discu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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