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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眞興王 征服地域考(津田左右吉)

        이부오 신라사학회 2010 新羅史學報 Vol.0 No.18

        신라사학회에서는 신라사의 골격을 세웠던 초기 연구자 중 한 사람인 츠다 소오키치[津田左右吉]의 논문들을 차례로 번역해 소개해 왔다.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滿鐵 동경지사에 1908년 설립된 滿鮮地理歷史調査室에 들어가 한국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서 그는 한국 상고~고려 부분을 담당해 1913년에 ≪滿鮮歷史地理≫1・2[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펴냈다. 그 1권에 실린 글 중의 하나가 이번에 소개하는 <진흥왕 정복지역고>이다. ≪신라사학보≫ 제16집[2009.8]에 소개했던 <나・제 경계고>가 백제와의 영토경쟁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 글은 고구려 방면으로의 진출을 주로 다루고 있다. 본고의 핵심은 진흥왕대에 신라가 함경도 남부를 확보했다는 견해를 부정한 데 있다. 당시 신라가 확보한 ‘고현 안쪽, 죽령 바깥’은 임진강 상류~한강 상류 일대라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제사지 四鎭條에서 비열홀군의 熊谷岳이 춘천 서남방이라는 데 적지 않은 근거를 두고 있다. 진흥왕 17년에 설치된 비열홀주도 이를 고려해 춘천 부근으로 비정되었다. 동해안 방면에서 진흥왕대의 신라는 하슬라[강릉] 정도까지만 진출했고, 진흥왕이 함경도 남부를 차지했다고 기록한 황초령비는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이러한 주장은 今西龍에 의해 부정되었고[<신라 진흥왕 巡狩管境碑考> ≪고고학잡지≫, 제12권 제1호, 1921 : 이부오・하시모토 시게루 옮김, ≪今西龍의 신라사 연구≫, 서경문화사, 2008, 341~343쪽], 오늘날에는 이 비의 가치를 의심하는 견해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글은 한일병합 이후 대륙침략을 기획하던 일제의 정책 하에서 신라사를 바라보았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라사 연구의 흐름을 조망하는 데 일정한 도움이 될 것이다. 이하에서 본문의 ‘( )’는 츠다가 보충한 세주이고, ‘[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역자의 간단한 설명이다. 각주에서 별도의 표시가 없는 것은 원본의 尾註이고, ‘역’이라 한 것은 譯註이다. 역자는 ≪진전좌우길전집≫ 제11권[岩波書店, 1964]에 실린 것을 원본으로 삼았다.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유역을 백제로부터 빼앗은 뒤 70여 년만에 그 땅은 신라의 소유가 되었다. 그 구역에 관해서는 역사상의 기록이 분명하지 않아 의문이 적지 않으므로 여기서 약간의 연구를 시도하려 한다.

      • KCI등재후보
      • 제1차~제7차 교육과정기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고대 영토사 인식의 변화

        李富五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0 한국고대사탐구 Vol.4 No.-

        본고는 교육과정 시행 이후 고대 영토사 인식에 대한 국사교과서 서술의 변화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교과서 서술의 개선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1956년부터 검정제로 발행된 제1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에서는 민족적 과업을 강조하는 교육정책으로 인해 민족주의적 영토사 인식이 강조되었다. 이와 함께 실증주의가 국가별로 차별적으로 적용되었고, 식민사학적 흔적도 남아 있었다. 1968년부터 발행된 제2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는 이러한 문제를 안은 채 민족주의적 영토사 인식을 좀 더 강화한 반면, 실증주의적 인식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여기에는 교육정책에 대한 군사정부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이에 따라 교과서들의 영토사 인식은 순치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1974년 국정제가 실시되면서 국민적 일체감을 조성하려는 정책적 의도에 따라 국사교과서는 민족적 긍지를 유난히 강조했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적 영토사 인식을 더욱 크게 강조하여 일부 내용에서 다소 비약을 가하기도 했다 제 . 5차 제7차 교육과정 교과서에서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는 정책적 의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국가정체성의 확보를 위해 민족주의적 영토사 인식을 여전히 유지할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더욱 심화시켜 왔다. 실증주의적 인식은 여전히 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교육과정기 국사교과서의 영토사 인식 변화는 주로 정치적 의도에 따라 교육정책이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고대 영토사에 대한 연구성과는 세부내용을 수정하는 데 머물렀다. 이는 교육적 정당성과 학문적 타당성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적절하지 않은 방향이었다. 앞으로 교과서에서는 학문적 근거를 담보하지 않은 민족주의적 영토사 인식을 지양하는 한편, 실증주의적 요소를 국가별로 고르게 적용해야한다.

      • KCI등재후보

        新羅 征討 地理考(津田左右吉)

        이부오,장익수 신라사학회 2009 新羅史學報 Vol.0 No.17

        신라사의 기본사료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해 전문적인 분석을 처음 시도한 연구자는 츠다 소오키치(津田左右吉)였다. 우리는 그 최종판이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연구≫, 洛陽堂, 1919)의 번연문을 ≪新羅史學報≫제15집 (2009.4)에 실었다. 그런데 이 글은 1913년 <新羅征討地理考>(≪滿鮮歷史地理≫ 1,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그가 표명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에 우리는 신라본기에 대한 일본인 학자들의 논의를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新羅征討地理考>에 대한 소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본고에서 츠다는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11년~소지마립간 32년에 기재된 왜의 침공 기사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이를 통해 그는 天平寶字 3년(759) 즉 경덕왕 18년경 일본의 신라 정벌 계획을 토대로 만들어진 전설에 의거해 역사가들이 해당 기사들을 構成해 낸 것이라고 보았다. 이 주장이 왜의 신라 침공을 부정하는 데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을 통해 임나일본부의 기초가 공고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왜의 침공이 모두 가야 방면으로부터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는데, 그 주된 근거는 당시 가야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한다고 본 데 있었다. 그의 신라본기 비판론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신라본기 기사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일본인 연구자들의 인식을 파악하는 데는 이 글의 비중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하에서 본문의 ‘( )’는 츠다가 보충한 세주이고, ‘(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역자의 간단한 설명이다. 각주에서는 ‘**’만 저자의 원주이고, 나머지는 역주이다.

      • KCI등재후보

        ≪三國史記≫ 新羅本紀에 대하여(津田左右吉)

        이부오,장익수 신라사학회 2009 新羅史學報 Vol.0 No.15

        신라사학회에서는 신라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외국 논문을 번역해 게재함으로써 연구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아 왔다. 그 일환으로 먼저 근대적 방법론으로 신라사 연구를 전문적인 영역으로 개척한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新羅史硏究≫를 선정하고 여기에 실린 논문들을 한 편씩 번역해 ≪신라사학보≫ 제2집[2004.12]부터 제12집[2008.4]까지 게재했다. 2008년 5월에는 그 완역본이 출간됨으로써 하나의 완결을 보게 되었다[≪이마니시 류의 신라사 연구≫, 서경문화사]. 그런데 신라사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인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본격적으로 분석한 사람은 츠다 소오키치[津田左右吉]였다. 일찍이 근대적 역사학이 개척되던 19세기 말부터 일본인 학자들이 신라사를 다뤘으나, 이는 사료 정리나 언어학적 접근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마니시는 ≪삼국사기≫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신라사를 체계화했으나 신라본기를 전문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이를 전문적으로 분석해 가치를 평가한 사람은 바로 츠다였다. 동경제국대학 사학과에서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의 지도를 받은 그는 滿鐵 동경지사에 1908년 설립된 滿鮮地理歷史調査室에 들어가 한국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한국 상고~고려 부분을 담당해 1913년 ≪滿鮮歷史地理≫1․2[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펴냈다. 제1권의 <新羅征討地理考>에서 그는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해 신라본기에 실린 倭의 신라 침공 기사를 다루면서 신라본기 초기기사가 허구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작업을 신라본기 전체로 확장한 결과물이 이번에 소개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이다. 이 글은 1919년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연구≫[洛陽堂 : ≪津田左右吉全集≫ 별권제1, 1966, 岩波書店]에 실렸다가 1924년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연구≫[岩波書店]에도 실린 것이다. 역자는 1963년에 간행된 ≪津田左右吉全集≫ 제2권의 부록으로 실린 것을 모본으로 삼았다. 본고에서 그는 엄밀한 실증주의를 기준으로 접근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신라 上代 기사를 거의 허구라고 평가했다. 이 기사들은 대부분 중국의 사서 등을 참조해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는 신라본기 기사들 간의 비교 분석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중국 사료에서의 확인 여부가 신빙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단계에서 본고의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연구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라본기 초기기사에 대한 수용을 둘러싸고 격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논쟁이 수면 아래로 들어간 듯하지만, 이것이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津田左右吉이 들춰낸 문제의식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신라사 연구자들이 안고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고는, 긍정적인 측면에서든 부정적인 측면에서든, 신라사 연구의 일차적인 길잡이가 될 것이다.

      • KCI등재후보
      • KCI등재

        底本 수용의 맥락을 통해 본 ≪三國史記≫ 新羅本紀 초기 기사의 이해 방향

        이부오(李富五) 신라사학회 2011 新羅史學報 Vol.0 No.21

        본고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기사에 나타난 정합성과 상충성을 분석함으로써 모순의 현상이 보여주는 규칙성을 밝히고 이에 대한 이해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초기기사를 서술한 첫 번째 기준은 왕위의 명분이었고, 두 번째 기준은 왕호, 세 번째 기준은 왕위계보였다. 기년문제는 이보다 우선순위가 낮았다. 이상을 정리하기 위해 초기기사의 찬자는 主 자료와 보조자료를 적절히 활용했다. 그 중에서도 기년에 대한 판단은 치밀하지 못했다. 따라서 기년 문제는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복수의 저본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초래된 것이다. 사로국의 건국기년은 저본들에서 B.C. 2세기 말(古本 B-①형), B.C. 57년(고본 A형 및 古記), A.D. 1세기 중반(고본 B-②형) 등으로 전해지다가 (고본 A) 내지 古記의 B.C. 57년설이 초기기사에 수용되었다. 이러한 기년관의 출현은 김대문이 활동한 7세기 말~8세기 초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초기 기사에 대한 왕대인식의 적어도 일부는 《국사》에도 연원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기년을 달리하는 원전은 별도로 전해지다가 신라본기나 그 저본에 선별적으로 반영되었다. 이 원전들에서 신라의 건국기년은 B.C. 2세기 말~A.D. 1세기 중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사로국의 건국 시기를 파악할 때 유효한 범위로 존중되어야 한다. 김씨ㆍ박씨ㆍ석씨 집단의 일부 계보에서 세대간 시기차가 불합리한 것은 타 집단 계보나 후대의 세대별 평균 시기차와 비교할 때 수용이 불가능하다. 이는 왕위를 차지한 쪽의 계보를 기준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왕위로부터 멀어진 계보의 일부 세대가 누락되거나 착오를 일으킨 결과이다. 실제로는 구도-미추 사이에 2세대 이상, 말구ㆍ미추-내물 사이에는 1세대 이상이 누락되었다. 석씨집단의 `탈해-구추-벌휴` 사이에도 1세대 가량이 누락되었다. 구도 이전의 계보도 실제보다 짧게 정리되었다. 알지의 탄생 기사는 생물학적 출생이 아니라 김씨집단의 유력화 과정을 반영한다. 왕위계보에 대한 저본별 異記, 그리고 누락과 착오는 적어도 7세기 후반부터 발생했다.

      • KCI등재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9년 六部 기사의 역사적 배경 -지명 語素의 맥락을 중심으로-

        이부오 신라사학회 2022 新羅史學報 Vol.- No.55

        This thesis was written to reveal the historical reality reflected in the 6-Bu, which appears in the 9th year of Yuri-Esageum in the Samguk sagi through the analysis of the land name. In Bonpea-Bu, ‘Bonpea’ meant a central role or the main space. In the Subbi-Bu, that is, Sapi, ‘sa’ represents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the region, and ‘pi’ described the space. In the term ‘Hangi-Bu’, ‘Hangi’ meant a wide field. The above are place names that show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Eeuprak(邑落). In Tak-Bu, ‘tak’ meant supremacy or the center. In Satak-Bu, ‘sa’ meant ‘new’ and ‘high’. Satak meant ‘tak’ of the space where Servol was born. ‘Moryang’ in Moryang-Bu is an abbreviation of ‘Modanbeol’s Tak’. Modanbeol meant a field in a valley located along the road. In the space of the 6-Bu, a unique place name existed from the period of Euprak. These names left traces on the endings of beol(伐), ki(岐), and pa(波). Satak-Bu’s space also had a unique place name, and after it was transformed into the first Guk-eup(國邑) of Saro-guk, it was called ‘Seobol’. After the 6-Bu was organized, this place was called Satak-Bu considering the existing name and relationship with Tak-Bu. The vicinity of Wolseong(月城) was called ‘Tak’ after it was turned into Guk-eup, and this became the name of this Bu. Modanbeol-Bu was called Modanbeol-Tak on Jungjung-ri Silla-stele as a result of the alliance with the ruling forces of Tak-Bu and Satak-Bu during the Maripgan period. The name 6-Takpyeong(啄評) was the result of spreading the superiority of the ruling powers of Silla to 6-Bu after 527 and before 557. In the late Esageum period, the organization of the 6-Bu recognized the superiority of the capital and the distinction between Bu at the same time. Saro-State tried to reveal its superiority over the local powers by organizing the Gukeup and Euprak into 6-Bu. Esageum exercised control over the 6-Bu on behalf of the the ruling powers of the Tak-Bu and Satak-Bu. Instead of maintaining autonomy, the Kanji(干支) of each Bu cooperated in the work of Esageum. During the Maripgan period, the character of the autonomous unit of the Bu became pale and the character of the administrative unit got clear. 6-Bu, recorded in the 9th year of Yuri Esageum, summarizes the beginning of these changes and those after the Junggo(中古) Ages as the events of the first Esageum period. 본고는 신라 6부명의 어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삼국사기 유리이사금 9년 6부 기사에 반영된 역사적 실상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작성되었다. 본피부에서 ‘본피’는 중심역할이나 주된 공간을 의미했을 것이다. 습비부 즉 사피부에서 ‘사’는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피’는 공간을 나타냈다. 한기부에서 한기는 넓은 벌판을 의미했다. 이상은 고유한 읍락의 특징을 표현한 지명들이다. 탁부에서 ‘탁’은 최고 내지 중심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탁부에서 ‘사’는 새롭다는 의미 외에 ‘높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사탁은 서벌 즉 소벌이 탄생했던 공간의 탁을 의미했다. 모량부에서 모량은 ‘모단벌의 탁’을 줄인 말이다. 모단벌은 길목에 위치한 골짜기의 벌판을 의미했다. 6부의 공간에는 원래 읍락 단계부터 고유한 지명이 존재했다. 그 지명어미가 모단벌의 伐, 한지의 岐(只), 본파의 波 등에 흔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본파’는 사로국의 탄생 이전에 유력한 세력이었음을 반영한다. 사탁부 일대는 사로국 최초의 국읍으로 부상하면서 기존 고유지명이 ‘서벌’로 바뀌었다. 사탁부는 6부가 편성될 당시 기존 지명 및 탁부와의 관계를 반영한 명칭이다. 월성 일대는 서벌을 대신해 국읍으로 부상하면서 기존 고유지명이 탁으로 변해 이것이 부명으로 정착되었다. 모단벌부는 마립간기에 탁부・사탁부의 지배세력과 연합한 결과, 중성리비에서 모단벌탁을 칭했다. 6부를 ‘탁평’으로 칭한 것은 탁으로 상징되는 신라 지배세력의 우월성을 527년 이후 557년 이전에 6부로 확산시킨 결과로 보인다. 6부의 편성은 지역에 대한 왕경의 우월성과 부 사이의 차별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조치였다. 그 시기는 이사금대 후기로 추정된다. 사로국은 국읍인 탁과 주요 읍락을 6부로 편성함으로써 지역세력에 대한 지배세력의 우월성을 드러내려 했다. 이사금은 탁부와 사탁부의 지배세력을 대표하여 6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다. 각 부의 干支는 기존 자치권을 유지하는 대신 이사금이 주도하는 6부의 업무에 협조했다. 마립간기를 거치면서 부의 자치단위적 성격은 점차 약화되고 행정단위적 성격은 강화되어 갔다. 유리이사금 9년 6부 기사는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과 중고기 이후의 변화를 첫 번째 이사금대로 집약 정리한 것이다.

      • KCI등재후보

        羅・濟 경계고(津田左右吉)

        이부오,장익수 신라사학회 2009 新羅史學報 Vol.0 No.16

        신라사학회에서는 신라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외국 논문을 번역해 게재함으로써 연구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신라사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인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본격적으로 분석한 사람은 츠다 소오키치[津田左右吉]였다. 이마니시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신라사를 체계화했다면, 이를 전문적으로 분석해 가치를 평가한 사람은 바로 츠다였다. 동경제국대학 사학과에서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의 지도를 받은 그는 滿鐵 동경지사에 1908년 설립된 滿鮮地理歷史調査室에 들어가 한국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서 그는 한국 상고~고려 부분을 담당해 1913년에 ≪滿鮮歷史地理≫1・2[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펴냈다. 그 1권에 실린 글 중의 하나가 우리가 이번에 소개하는 <나・제 경계고>이다. 지난 번에 소개한 저자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연구≫, 洛陽堂, 1919 : ≪津田左右吉全集≫ 별권제1, 岩波書店, 1966]가 신라본기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전체적으로 정리했다면, 이번에 소개하는 글은 신라본기에 대한 그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던 영토적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1964년에 간행된 ≪津田左右吉全集≫ 제11권에 수록된 것을 모본으로 삼았다. 이하에서 ‘( )’는 츠다가 보충한 세주이고 ‘[ ]’는 역자들의 간단한 보충설명이다. 新羅・百濟 두 나라의 경계를 살펴볼 수 있는 사료로는 유일하게 ≪三國史記≫가 있다. 그러나 이 책 上代의 기술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많으므로 이 기술을 통해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될 수 있는 시대의 경우에도, 역사상에 기록된 지명의 대다수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아서 그 소재를 아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반도의 남부를 둘로 나눠 각각 한쪽을 가졌던 양국의 강역을 살피는 것은 실로 가망이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백제본기에서는 近肖古王 후기 이후의 기재는 대략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동시대의 신라본기에는 역시 믿을 수 없는 기사가 많은 듯하다. 이것은 중국문화가 신라로 들어온 시기가 백제보다 늦고, 백제에 이미 기록이 존재했을 때 신라에서는 역시 아직 史籍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전설에 후세 사람들의 潤色・虛構가 가해질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삼국사기≫가 그 재료를 주로 신라의 사적에서 취했다고 본다면, 신라본기에서 비교적 후세까지 이렇게 황당무계한 기사가 있는 것은 이유가 없지도 않은 것이다. 신라본기의 영토 관련 기사에 과장의 흔적이 많은 것 같아도, 이는 ≪삼국사기≫의 편자가 신라의 사적을 맹종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신라・백제 두 나라의 교섭에 관해서는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린 예가 많지만, 그것은 두 나라의 사료에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한쪽에 존재하는 사료에 다른 한쪽도 근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료가 신라의 사적일 수 있다는 것은, 백제의 기록이 나라의 멸망과 함께 많이 흩어지고 없어진 반면 신라의 사적은 여전히 고려에 남겨졌다고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의 사적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무엇보다도 허구의 기사가 많다. 이 때문에 신라・백제의 강역을 파악하는 어려움...

      • KCI등재후보

        일제강점기 신라사 사료비판론의 전개-≪三國史記≫ 新羅本紀 초기기사를 중심으로-

        이부오 신라사학회 2009 新羅史學報 Vol.0 No.17

        新羅本紀 초기기사에 대한 근대적 연구는 1890년대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고대 사서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신빙성을 낮게 평가하고, 신빙 가능한 시점을 탈해왕대~법흥왕대 이후로 다양하게 설정했다. 러・일전쟁 이후 滿鮮史가 강조되면서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비교대상으로서 중국 사료가 강조되었다. ≪三國志≫ 韓傳을 기준으로 신라의 건국시기는 2・3세기 이후로 설명되었다. 특히 前秦에 대한 사신 파견을 근거로 신라의 왕통이 4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초기 왕대에 대해서는 혁거세대~흘해대의 16왕에 대한 조작설이 제기되었고, 실제 시기를 수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대외교섭 기사는 거의 무시된 반면, 任那日本府가 가야지역을 장악해 신라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日本書紀≫의 기록은 중시되었다. 이러한 사료비판론은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문제점을 드러냄으로써 합리적 해석의 단서를 제공했다. 그러나 신라본기 초기기사에 대해서는 엄격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중국・일본 사료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편향적 태도를 보였다. 이는 근대적 사료비판론의 외형을 갖추면서도 이를 위한 구성요건을 결여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태도는 최근까지 한국인 학자들의 연구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왔다. 신라상고사의 복원을 위해서는 이를 극복하는 한편, 신라본기 초기기사에서 드러나는 모순점에 대해 체계적 분석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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