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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石田 廣州李氏 家門과 近畿 南人의 提携

          이근호(Lee Geun-Ho)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14 한국학논집 Vol.0 No.57

          이 연구는 17세기 중반 이후 영남 남인과 근기 남인의 제휴 관계를 추적한 것으로, 칠곡 석전의 광주이씨 가문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석전 광주이씨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의 배경에는 한강 정구의 적전이라는 이윤우와 관계, 한강의 학맥을 잇는 허목과의 관계 및 안동김씨 김시양 가계, 전주이씨 이수광 가계, 사천목씨 목내선 가계를 비롯해 허적이나 윤휴 등 당대 남인계의 대표적인 가문들과 혼인 등이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원정 등은 이를 배경으로 출사 이전부터 사림 사회에서 신망이 있었고 출사 이후에는 영남의 사론을 주도하며, 현종 15년 갑인예송에서 서인 세력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도신징의 의례 관련 상소나 숙종 즉위 직후 송시열을 전면적으로 공격한 곽세건의 상소 제출 과정에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원정은 또한 조정의 여론을 움직이는데도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하였는데, 윤휴는 이 점을 의식해 남인이 정치적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이원정에게 자파의 입장을 대변해 주기를 권고하기도 하였다. 당대 실록 기사에 나타나는 각종 비판 기사는 반대로 이들의 정치적 비중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이원정의 정치적 역할은 이후 아들인 이담명에게로 이어져, 이담명 역시 남인 정권하에서 조정의 주론자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원정이나 이담명 등은 집권 세력인 남인의 정국 운영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주이씨와 근기 남인의 제휴 관계는 비단 정치권력의 획득이나 운영에 그치지 않고 국정 운영 방향성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서 신 교환 등을 통해 각종 정책 결정과 집행 등을 공유하였다. 광주이씨의 경우 효종조 이래 숙종 전반기까지 남인 세력 내 중심적인 위치에서 활약하였다. 이는 구심점을 찾지 못하던 한강 학맥이 안동권에 대신해서 퇴계 학맥의 중심적인 위치로 부상하게 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학파 내부의 문제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겠으나 일단 한강 학맥의 부상에는 광주이씨 이원정 가문의 역할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하겠다. 이원정 등은 중앙 정치에서 정쟁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이런 이유로 환국 뒤에는 반대 세력으로부터 철저하게 응징이 이루어져 피해가 막심하였다. 더 이상의 정치적 재기가 쉽지 않았다. 광주이씨 이원정가문의 정치적 위축은 점차 영남 사림 내에서 한강 학맥의 위상이 약화되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이원정 가문의 활동은 가문적인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일시적이나마 한강 학맥 전체를 확산시키는데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This study was conducted to trace the political alliance between Seokjeon Gwangju Lee's family and Geungi namin, focusing on Seokjeon Gwangju Lee's family. Relationships with many people and marriage with main family of Geungi Namin were based on political and social activity of Seokjeon Gwangju Lee. For example, Lee Youn Yoo(李潤雨) who was the main disciple of Hangang(寒岡) Jeong-Gu(鄭逑), Heo Mok(許穆) who inherited Hangang's academy line, An dong Kim's family Kim Si Yang(金時讓) pedigree, Sa cheon mok's family Mok Nae Seon(睦來善) pedigree and Heo Jeok(許積), Yoon Hu(尹?). Lee Won Jeong(李元禎) was early trustworthy before going into government service owing to these based relationship. After going into governmental activity, he took lead Sa non(士論) of Young-nam(嶺南) and intervened appeal related to ritual of Do Sin Jing(都愼徵) which crucially struck Seoin(西人). He was also involved in Gwak Sae Gun(郭世楗)'s appeal submission which attacked Song Si Yeol(宋時烈) right after the accession of SukJong(肅宗). In addition, he served a important role in treating the public opinion at court. Recognizing this point, Yoon Hu encouraged him to represent opinion of party on his own when Namin was in a political crisis. Lots of critical article revealed at Sillok(實錄) paper were cases to demonstrate their political importance at that time. Lee Won Jeong's political role was passed down to his son Lee Dam Myung(李聃命), he also took lead discussion in Namin government. Their role was crucial to setting the direction of government management. Political alliance between Gwangju Lee's family and Geungi Namin went beyond the acquisition of political power and management. Based on agreement on direction of administration, they share various excution and decision through letter exchange. Lee Won Jeong's activity could be shown same line with the rise of Hangang in Thaegae(退溪) academy line instead of Andong(安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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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전반 京華士族의 人的關係綱

          이근호(Lee, Geun-Ho)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0 서울학연구 Vol.- No.38

          That this writing records interchange person of Jeonjuissi(全州李氏) Deokcheongunpa(德泉君派) Lee yougan(李惟侃) and Lee Kyung-gic(李景稷) at early part of 17th century that through asalysis of ?Segurok? this time to make clear Gyeonghwasajok′(京華士族)s human network make. Jeonjuissi Deokcheongunpa Lee yougan and Lee Kyung-gic pedigree that handle in eagle accounted for important weight within Seoin(西人) forces since Injobanjeong(仁祖反正). ?Segurok?that attanges warm reception and records their interchange person. Leegwangyun(李匡尹) made in dimension for influence ostentation of pedigree that is cowered middle of 18th century moment propel by one of work which praise statue. 404 people, of persons who these communicate were recorded to ?Segurok?. Recorede reason or background which about 70% among more than thos is communicated.With if typify this ① relative affinity relation, is classified with② neighbors ③ school ties ④ government office life ⑤ other back. Truth that is observed through this refers Gyeonghwasajok′s school ties this time, very various school ties existed, and mutual interchange is achieved. Only, it need to be true that Hwadamhakpa(花潭學派) exists many, and watch Minsun(閔純) order especially among Hwadamhakpa to be observed especially doing this way. Is not limited in faction which interchange personal relationships is specific politicallyand, social intercourse truth with military officer who interchange of civil officials with only servant is not os noted including existence named Makha(幕下) by communicating person. Like this, as well as these communicated in usual life through formed human network, when go out in the local office or go condemnation of a criminal to exile because is placed to unhappiness politically, visited each other and recognize or meet. Usual interchange was connected by interdependent relation, and exchanged gift when is difficult. Also, formed relation that played the role of such as insurance in political emergency, and does together intent politically. Solidified oneself binding by forming Ginohoe(耆老會) or Ginogye(耆老契) connection various Gyehoes(契會) socially. Such wide human network that is seen in Leeyougan pedigree that is not soft human network image that can set by characteristic that appear from hardening four legs at early part of 17th century dwindling think. This special quality estimates that would not is limited only to human network, and affected changelessly in politics or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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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 말~숙종 초 洪宇遠의 정치 활동

          이근호(Lee, Geun-Ho) 고려사학회 2017 한국사학보 Vol.- No.67

          이 글은 인조 말기~숙종 초기 홍우원의 정치적 생애를 추적한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홍우원이라는 한 개인의 생애를 복원한다는 의미를 넘어 그가 활동하였던 인조 말기~숙종 초기 정치사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홍우원은 조부 홍가신의 정치활동을 자산으로 하면서 동시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인적 연망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여 남인 내 핵심적 위치에서 활동하였다. 홍우원은 인조 말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후 정치 현장에서 내세운 것은 소신과 원칙이었다. 1654년에 제출하여 파장을 불러일으킨 상소 역시 그 일환이었다. 홍우원은 상소에서 인륜과 효종의 큰 덕에 호소하여 이전까지 논란이 되던 소현세자 아들 뿐 아니라 조귀인의 아들에 대해서 방면을 요청하였다. 특히 조 귀인의 아들 문제는 충분히 논란이 예상되는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이를 제기하였다. 홍우원은 현종대부터는 정치적으로 남인의 입장을 드러내면서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예의 적용을 잘못한 것을 문제 삼기도 하였다. 현종대에 특별히 중용되지 못한 이유이다. 그러나 남인이 현종 말기 이후 서서히 정국에 참여하고 숙종 즉위 이후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서 홍우원은 중용되어 지도자급 위치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숙종 즉위 초 ‘삼복의 변'과 관련해서 명성왕후의 정치 개입을 극렬 비판한 바 있다. 이는 남인 집권 초기 정치 기반의 구축 차원에서 시급한 사안으로, 당시 남인의 맹주인 삼복의 처벌을 차단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홍우원은 남인 내에서 윤휴와 허목 등에 비교될 정도의 정치적 비중을 가지고 각종 정책을 추진하는 등 남인 집권기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This study traces down the political life of Hong Wu-won from the late Injo to the early Suk-jong period. This work not only restores a political life of single individual, Hong Wu-won, but also is crucial part for investigating the political history from the late Injo to the early Suk-jong period during which Hong Wu-won actively worked in. Taking advantage of his grandfather"s political activity as assets, he played a key rule in Namin based on his human network. After he had started to work as public officer since the late Injo period, belief and rule was what he had sticked to. One of the episodes that show his values was the Sangso which he submitted at 1654 and eventually caused intense conflict. Specifically, Hong Wu-won requested an acquittal for son of Crown Prince So-hyeon and Cho Gwi-in"s son in that Sangso, appealing to humanism and Hyo-jong"s great virtue. Despite the fact that controversy for the problem of Cho Gwiin"s son was evidently expected, he started to raise objections in earnest. As he began revealing his political standpoint as Namin since Hyeonjong period, he also proposed issue of Song Si-Yeal, the leader of Seoin, making a wrong application of the "Ye". This is why he was not hired during the Hyeonjong period. However, as Namin gradually engaged in political situation after the late Hyeonjong and they took the lead directly after Sukjong ascended the throne, Hong Wu-won was assigned and worked as leader again. During the early Sukjong, he severely criticized Queen Myeongseong"s political intervention, related with Disturbance by Sambok. It was an urgent issue at the aspect of building political groundwork during Namin"s early years, also including intent of preventing Sambok, a leader of Namin, from being punished. Then after, Hong Wu-won got political significance nearly comparable to Yun-Hwo and Heo-Mok among Namin. Furthermore, He became a leading figure during Namin years, pushing ahead with various polic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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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성북 지역 陵・園・墓 조성과 그 의미

          이근호(Lee, Geun-ho) 북악사학회 2020 북악사론 Vol.12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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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조선 후기 도성 성북 지역(현재 서울시 성북구)에 능・원・묘가 조성되는 과정과 그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주지하듯이 조선은 건국 이후 陵墓 제도를 정비하여 운영하다가 조선 후기에 ‘園' 묘소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왕릉은 도성을 중심으로 반경 4km 밖, 40km 이내가 기준이 되었다. 왕자녀 묘는 지역적으로 대부분 경기 지역에 분포하였으며, 일부 특별한 인연과 경위가 있는 묘소만이 이 지역을 벗어나 조성되었다. 이런 가운데 성북 지역에는 18세기 이후 능・원・묘가 주로 조성되었다. 태종대에 천장된 정릉을 제외하고 의릉과 정조 연간에 원빈묘, 19세기에는 익종의 수릉과 순조 및 고종의 왕자녀 묘소가 조성되었다. 또한 특정 왕대의 왕자녀나 후궁의 묘소가 집중되고 있다. 순조의 자녀인 익종이나 명온공주, 덕온공주, 고종의 후궁과 대군, 공주의 묘가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이들 중 정조의 후궁인 원빈묘는 한성부 관내에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성북 지역에 조성된 능・원・묘를 통해 조선 후기 능・원・묘의 특별한 조성 과정 및 조성 양식을 추적할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process and meaning of the Royal family Tomb System in the Seongbuk area(currently Seongbuk-gu, Seoul) of the late Joseon Dynasty. As it is known, Joseon maintained and operated the system of tombs and graves after the founding of the country, and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established a won graveyard system. The royal tomb was built within a 4km radius and within a 40km radius around the city. The tombs of the king s children were mostly distributed locally in Gyeonggi, and only a few graves with special connections and circumstances were built outside the area. In the midst of this, royal tombs were built in the Seongbuk area after the 18th century. Except for Jeongneung, which was relocated to Taejongdae, Uirung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Inmyeongwon(WonBinmyo) during the year of King Jeongjo, and the King Ikjong s Suneung and some of the children of King Sunjo and King Gojong during the 19th century were built. Also, the graves of children or concubines of certain kings are concentrated. Along with King Ikjong, Princess Myeongon, and Princess Deokon, the children of King Sunjo, the tombs of King Gojong s concubines, princes and princesses were built intensively. Among them, Inmyeongwon (WonBinmyo), the concubine of King Jeongjo, was built inside the Hanseongbu. Through examining the royal tombs built around Seongbuk area, the special process and style of construction of royal tombs in the late Joseon Dynasty.

        • 국제학술회의 참관기 - 파킨슨씨병 국제 심포지엄

          이근호,Lee,,Geun-Ho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1997 과학과 기술 Vol.30 No.7

          파킨슨씨병의 병인과 진단기술, 최신 치료방법의 연구결과 발표 및 최신 정보교환을 목적으로 지난 3월23일부터 4일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12차 파킨슨씨병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필자를 비롯해 10여명이 참석하여 5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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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전반 宋時烈 文廟 從祀 논란의 정치적 의의

          이근호(Lee, Geun-Ho) 고려사학회 2016 한국사학보 Vol.- No.62

          이 연구는 숙종 말년 이후에 제기되어 1756년(영조 32) 2월에 결정된 송시열의 문묘 종사 논란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추적한 것이다. 지금까지 老論과 少論의 정치적 향배 속에서 해당 논의를 추적하던 것에 대해 肅宗이나 英祖등 국왕의 정치적 의도를 함께 고려하면서 살펴보았다. 숙종대 후반에 제기된 문묘 종사 요청 상소는 노론 주도의 정국 상황에서 제출된 것이다. 노론의 정치적, 학문적 우위 속에서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제기되고, 또 朴世采와 함께 종사하자는 논의가 대두함으로써 士林공론의 분열이 있었다. 또한 특정 당파의 일방적 우위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肅宗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면서 결정될 수 없었다. 이후 문묘 종사는 논의는 1721년(경종 1) 少論주도의 정국, 그리고 1727년(영조 3) 국왕 주도의 蕩平하에서 간간이 제기되다가 1735년(영조 11) 이후에는 급증하였다. 점차 송시열의 문묘 종사 논의에 대한 사림의 논의가 상당히 파급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嶺南南人들 일부가 중앙 정치에 진출하는 분위기에 편승, 이에 대한 반대 논의가 있었다. 또한 영조는 유생들의 논의를 “文華”라 지칭하면서 실질을 준수하라며 결정을 유보하였다. 문묘 종사 논의는 1754년(영조 30) 이후에 다시 급증하였다. 당시가 송시열이 정치적으로 복권되지 60주년이 되는 상황에서 추진된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송시열을 복권시킨 숙종에 대한 왕실의 존숭 분위기가 전제되었다. 1756년 2월 송시열과 함께 송준길에 대한 문묘 종사가 결정되었다. 그 이유를 英祖는 사림의 논의가 일치되었기 때문이고, 때가 되었기 때문이며,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公議가 일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 약 40여년간 논의가 지속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국왕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종사가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노론 학통과 정치 의리가 정통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조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즉 君師를 강조하는 국왕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묘 종사 논의를 비단 노론과 소론 사이의 정치 행위에 발생한 산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재고가 필요하다. This study investigates the political meaning of Enshrinement of Confucian Scholars by Song Si-Yeol, which had been brought up after late period of Sukjong(肅宗) and was finally decided at February 1756(Yeong jo 32). Having examined in terms of political attitude of Noron(老論) and Soron(少論), this study also takes a look at the political intention of king such as Sukjong or Yeongjo(英祖). An appeal about Enshrinement of Confucian Scholars was brought up in Sukjong"s regin in which political situation at that time was taken lead by Noron. It was for them to prove their political, academical superiority. On the other hand, opposing opinion was raised. With the rise of voice asserting enshrinement with Park Se-Chae(朴世采), there was separation between Sarim"s united opinion. Also, as the political intention had been mirrored, trying not to allow a biased superiority of a certain political party, it could not be determined. This controversy had been brought up during political situation lead by Soron after 1721(Kyungjong 1) and was raised occasionally under Tangpyeong(蕩平) taken lead by king in 1727(Yeongjo 3). Suddenly after the 1735(Yeong jo 11), the dispute was surged. It means that Sarim were actively discussing about Enshrinement of Confucian Scholars by Song Si-Yeol and its consequence gradually spread throughout the nation. Though a part of YoungnamNamin(嶺南南人) participated in central politics, there were objection about this situation. Furthermore, Yeongjo referred confucian scholar"s argument as "Munhwa(文華)". Eventually, he put off the decision, mentioning they should perform their own duty. A dispute was rapidly increased after 1754(Yeongjo 30) again. At that time, it was pushed to commemorate for 60th anniversary of Song Si-Yeol"s political reinstatement. However, in the background, there were movement atmosphere in royal family about Sukjong who made Song Si-Yeol reinstated. This controversy was finally determined on February 1756. This is because, as Yeongjo said, Sarim"s argument coincided, the time was ripe and the opportunity came at that time. Naturally, there was also strong objection, but general opinion reached to agreement. The reason it must have been continued for almost 40 years comes from the king"s political intention It means that Noron"s academic root and their own political logic was acknowledged as legitimacy". In this part, Yeongjo"s purpose worked strongly. That is, it could have been done because of king"s political intent emphasizing Gunsa(君師). In this aspect, the controversy about Enshrinement of Confucian Scholars was not merely the result of political behavior between Noron and Soron. This kind of perspective should be exam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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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8세기 단종복위운동 관련 六宗英의 신원 과정

          이근호(Lee, Geun-Ho) 백산학회 2014 白山學報 Vol.- No.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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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癸酉靖難 또는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해서 화를 당한 六宗英의 신원 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육종영의 신원 과정은 이들이 화를 당한 근원인 端宗의 복권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단종 복위 이전 육종영의 신원과 관련된 논의는 成宗 연간에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성종 연간에는 주로 和義君이나 漢南君 측의 인물들에 의해서 解配나 토지 환수 등이 논의되었다. 성종은 육종영의 신원 문제를 한명회나 정창손 등 공신 세력의 견제 차원에서 활용하였다. 이후 中宗 연간에는 錦城大君 자손의 석방을 비롯해 화의군의 복관, 후손들의 璿源錄 등재 등이 이루어졌다. 이는 한때 정치를 주도했던 士林 세력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의 실현 차원에서 추진한 결과였다. 육종영의 신원은 이후 肅宗 때 단종이 추복되면서 본격화되어 순차적으로 永豊君이나 금성대군, 安平大君 등의 복관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英祖 연간에는 안평대군을 비롯해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등에게 諡號가 내려졌다. 정조 연간에는 이를 이어 각종 추념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그 사업의 백미는 역시 莊陵의 配食壇에 배향된 사실이라 하겠다. 이를 통해 육종영은 국가적 추숭 대상자로 여겨졌다. 한편 이 같은 숙종대 이후 관련자들의 신원이나 추숭 과정은 결국 새롭게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확립하려는 국왕의 정치적 의도와도 관련된다. This paper tracks the amnesty of Yukjongyoung(6 royal clansmans) that was suffered misfortune, because of Gyeyujeongnan(癸酉靖難) or Danjong rehabilitation movement. The Amnesty of Yukjongyoung had no choice but to closely related with the restoration of Danjong, which is the fundamental reason for their misfortune. Before Danjong was restored, discussion about them had begun to be suggested at Seong-jong(成宗). At that time, Release and land redemption were usually being discussed by the people belonged to Hwauigun(和義君) and Hannamgun(漢南君). After then, including the release for descendant of Geumseongdaegun(錦城大君), Restoration of Hwauigun and Seonwonnok(璿源錄) registration of descendant were accomplished. It was the result that Salim(士林), who once lead the politics, realized the political ideal that they pursued. The amnesty of Yukjongyoung had been begun in earnest at Sukjong(肅宗), when Danjong was restored, and then Yeongpunggun(永豊君), Geumseongdaegun and Anpyeongdaegun(安平大君) was successively restored. At Youngjo(英祖), Siho(諡號) was went to Geumseongdaegun, Hwauigun, Hannamgunp, Youngpunggun including Anpyeongdaegun. Then, at Jungjo(正祖), followed by this, several honor event for them had been done. Of course, the heart of it was oriented to the Baesikdan(配食壇) of Jangneung(莊陵). Through this fact, Yukjongyoung was recognized as the honored people at nation. By the way, the amnesty or honor process like this, after Sukjong, were also related with the king's political intent that tried to establish fidelity between king and vas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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