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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천근 한국동서철학회 2011 동서철학연구 Vol.59 No.-
若沒有水, 不可生命存在, 不可生命存續, 不可生命生活. 漢字文化圈的傳統中, 水置在於其生存環境而且生活環境. 中於生存環境, 水卽是五行中的水氣. 五行出於陰陽二氣之中, 而且生成萬物萬化之變, 水氣置在於其中之一. 水氣顯現自己本身從於二種循環之過程中, 卽是小循環過程而且大循環過程. 例如小循環過程, 則是; ``水-蒸氣-雲-雨露而且雪霜-水``的現象中之變化樣相. 例如大循環過程, 則是; ``一元之氣-陰陽兩氣-五行中水氣-現象中之水的變化諸樣相-五行中水氣-陰陽兩氣-一元之氣``的宇宙範圍中之變化諸樣相. 在於前者中, 必然地從出於水終入於水, 卽是水之一元的循環過程. 在於後者中, 從出於水而且還元本源地中的一元之氣, 通過各種融合離散之路中, 終於現象地, 或出於水, 或出於餘他諸樣相之一, 卽是大自然之多元的循環過程. 一般地說, 如此兩種循環之中的水, 分爲兩個相, 第一卽是不可視的水氣, 第二卽是可視的水, 前者屬於存在領域, 後者屬於生活領域. 文化從出如此兩個領域, 但後者卽生活領域, 噴出豊富多樣的諸種文化樣相. 文化形成於生活之中, 故必然地反映這個生活主體的各種環境, 水亦包含其中主要的要素之一. 生活領域中之水, 卽是; 泉-川, 江, 河-海. 泉是飮用水的代表, 表象淸淨純潔地的自然性, 而且個人或小數集團生活出發的社會性. 我們民族誌中, 這種泉的代表是蘿井與閼英井, 這兩個泉牽引新羅史與我們民族史, 這是暗示我們民族誌中具有一種豊富的水之文化. 我們日常的生活之中, 泉是供給日日飮用的一酌水, 而且特別齋戒時用的一杯水, 這是我們生活中逢遇的最淨潔又最新鮮的具體物. 新年初日的晨時湧出的泉水, 又盡渴改新的泉中最初湧出的鮮水, 認爲更淨更鮮的水而且引入福慶之神聖的水, 村民競爭與爭鬪爲了第一著保有這種鮮聖水. 生成特別的問題而且緊要這個問題之解決時, 我們保有婦女精誠與祈禱之民俗, 這時用的一杯水叫謂井華水, 使用當日比較最新的湧泉水卽是其日晨時取的. 泉是代表新與鮮的水, 江或川是代表我們生活之中用的水. 我們經濟與文化生活特別不離江與川, 因爲傳統時代之經濟的財富出於江與川之邊的農地, 而且因爲傳統時代之日常生活進行於江與川之邊的自然環境中. 在於文化的觀點, 江與川是比較豊富地粉飾於神話與風水與儒敎. 神話之中的江與川, 就是龍或水神的居處. 龍宮在於海, 但我們民族誌中, 大海中龍王與龍宮之出現頻度比較少, 川與江中居的一個一個龍之出現頻度比較多. 我們民族誌中主要的水之文化, 約於三個形式, 就是代表川龍的水神文化, 而且代表山太極水太極的風水文化, 而且代表武夷九曲的朝鮮之士文化. 朝鮮兩班卽是朱子性理學者, 他們熱烈地希望完成了一樣同等與南宋時的朱子之自我, 朱子藏修於武夷九曲中的武夷精舍, 因故朝鮮之士熱烈希望享有娛遊深山幽穀之山水秀麗處而且結構小築以行修他們心身, 這就是朝鮮士之樓亭文化. 這樣豊富的山穀川江, 亦處處具有大小龍神的居處, 而且此種大小龍神是想了海中寶宮卽四海龍王的幕下. 東海龍王顯現於處容說話中, 南海龍王顯現於沈淸說話之中. 西海龍王與北海龍王的說話亦想像地中具有, 但其不顯於一種傳承的事話中. 我們民族誌中的大海保有兩種機能與役割, 其一是流入南方人之通路, 友一是流入南方文化之通路, 而且大陸民族與大陸民族之特徵具有的我們民族誌亦可能保有海洋文化與海洋民族的一面性.
윤천근 한국동서철학회 2010 동서철학연구 Vol.58 No.-
人間生於他的存在環境中, 這就是一定的自然環境. 自然自體置了客觀的領域, 而且無關我的實際生命活動. 自我必然地隨行他自身的生命活動, 故自我向這種存在環境, 表出一定關心, 生産一定關係, 這叫是‘自我的他者化之過程’. 通過這種他者化的過程, 一面自我受用他者變化一定他者化的自我, 一面他者變化分有自我性的他者, 結果形成了自我干涉他者的新種存在環境, 這是自我的世界觀. 自我的世界觀中的自然, 不是其自體的自然, 是自我的自然. 自我的自然, 因爲分有自我性, 終局看做了一定的具有人格性卽靈性的存在物, 而且登場自然神格的觀念. 韓國民族通過這種過程, 形成汎神論的世界觀. 韓國民族之長久的歷史過程中漸進形成的此種汎神論的世界, 具有一面水平的諸神觀, 又一面垂直的天神支配之相對優越的一神觀. 自然中的天保持一種比較優越的地位, 汎神論的體系中的天保持一種比較優越的權能, 當然兩者置於相互連繫的構造下. 觀於韓國民族之‘汎神論的構造上的優越一神觀’天是保有靈性的自然神格, 而且天是支配一切的主宰神格. 後者的側面, 看於檀君神話中的桓雄之支配力, 主官人間三百六十餘事, 這是保有絶對神格的 特徵, 但是沒有唯一神的性格. 前者的側面, 顯於朱蒙神話的構造, 柳花感化太陽光線而孕朱蒙, 這是保有自然中之天的屬性, 太陽代表天界的特徵, 這是顯示天神始端於自然的天而且蓄漸變化而形成一個絶對的神格之痕迹. 韓國人之天觀念, 爲形狀化從出這種兩側面之相互融和或綜合. 這種韓國人之天, 主管人間運命, 而且韓國人承認天神附與之自己運命. 這種運命論的前提下, 韓國人引出其精誠與不斷努力之情狀, 沒有墮落或降伏於巨大天的專橫與狂暴. 這是由何原因而可能麻? 我想, 因爲韓國人的天觀念造形於私的而且主觀的關係下, 於韓國人心性內面必然有了一定浪漫的期待感, 卽他保有‘我的天爲不與於我此種極端苛酷的運命’之內心, 故可能‘盡人事待天命’的處身.
윤천근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6 韓國學論集 Vol.40 No.-
관심만의 한국학, 또는 관심과 애정만의 한국학은 그들의 한국학이다. 애증의 지평 위에 서 있는 관심의 한국학, 또는 관심과 애정의 한국학, 그리고 일체화의 지평 위에 서 있는 관심의 한국학, 또는 관심과 애정의 한국학은 우리의 한국학이다. 미국사람이나 러시아 사람들이 하는 한국학, '그들의 한국학'의 경우, 우리 밖 타자인 그들은 그들 나름의 역사와 문화 등에서 길러진 의식의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관심, 또는 애정의 작용을 수행한다. 그들의 관심과 애정은 한국학 영역 속의 대상을 포착하며, 그들의 의식의 토대는 그들 나름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들의 한국학'에서 마련된 한국에 대한 학문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삶을 이끌어가는 지남으로 쓰여 지고, 그들의 삶을 위한 자료가 된다. '그들의 한국학'에서 마련된 학문은 이차적으로 우리의 삶을 위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들의 한국학'이 생산한 자료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한국학'에서 생산된 자료와 다를 수 있다. '우리의 한국학'은 한국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 삶을 살아가는 주체에 의해 한국이 대상으로 포착되고 학문으로 정리되어 한국적 삶의 현실을 이상으로 가꾸어 가는 자산으로 쓰여 지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의 학문은 우리의 삶으로 넘겨져서 한국을 가꾸어 가는 것으로 쓰여지고, 우리의 삶은 보다 절실하고 의미 있는 주제를 떠올려서 학문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게 '우리의 한국학'은 우리의 학문과 우리의 삶이 서로 교통하고 서로 감응하는 영역이라고 하겠다. 삶으로서의 한국학은 현재 한국의 역사 속에 놓여진다. 현재 한국은 우리의 현실생활이 영위되고 있는 곳이고, 우리의 투쟁과 노력이 투입되고 있는 곳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곳이다. 과거 한국, 그러니까 전통시대의 한국이나 미래의 한국은 현재한국과의 연장선상에서만 나름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삶으로서의 한국학의 성전은 현재 한국을 포위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문제점은 무수히 많고, 문제점을 들여다보는 시선은 다양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현재 한국을 포위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포착하고, 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투쟁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그 문제점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으로서의 한국학은 얼마나 건강하고 얼마나 적실한 것인지를 평가받을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한국학은 학문의 모습으로 한정되고, 전통 한국을 해명하는 것에 국한된다. 그것은 지식과 자료를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학이다. 한국적 삶의 현실은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을 우리 주변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일은 앞으로도 중단 없이 계속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수행하는 한국학의 전력이 여기에만 집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삶과 유리된 지식으로서의 한국학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삶은 언제 어디에서나 가장 중요한 현안문제이다. 삶을 떠나서는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가꾸어 나가는 효과적인 수단을 가질 수 없다. 이곳은 인간의 역사가 갖추고 있는 유일한 전장이다. 그런 삶을 떠나서 책상 위에 사로잡히고, 곰팡내 풍기는 책 속에만 파묻힌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하기 어렵다. 책상 위와 책 속은 삶의 전장에 공급할 무기들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중심은 삶의 전장이고, 책상 위와 책 속은 보조라는 점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의 한국학은 전통한국을 대상으로 삼는 것 이상으로 현재 한국을 들여다보는데 공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 한국이 갖고 있는 문제점으로 부터 투쟁과 응전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 한국이 학문으로 정리되고, 현대 한국의 삶이 그 학문과 유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전통을 들여다보는 것도 나름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선언될 수 있을 터이다. 우리의 한국학은 문제투성이의 지금의 한국적 삶의 현실과 조금 더 이상으로 다가가 있는 미래의 한국적 삶의 현실 사이에 있다. 한국적 삶을 변혁하고 개혁하는 것이 한국학의 책무이고, 한국적 삶을 변혁하고 개혁하기 위해서는 한국학의 중심이 현재의 한국적 삶의 현실을 가꾸어 가는 데 놓여 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한국적 삶의 현실은 방치되고 있다. 우리는 이 삶을 가꾸어 가는 노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운명을 고민하는 현대 한국인의 삶으로서의 한국학은 생활철학의 모습을 갖추기를 요청받고 있다고 하겠다. 집단적으로 각성된 생활문화가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여 줄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기를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 자본주의의 새로운 문법 역시 이러한 점과 연계되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될 필요가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응전하기 위해서는 현대 한국의 갈등구조 역시 빠르게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An American, or Russian can study about Korea with an interest or love. But they can not over the limit like that. It is only our function to over that limit and advance in upper stage. We, a Korean, can study about Korea by complex consciousness like mixed with love and hatred, or absorption for history and culture of ourself. Koreanology is to study about Korea. In that case, Korea, a term, exactly mean the Korea of modern. But the Korea can not divided like a bread. The Korea is spreaded in whole territory of time. The past is a property of the present, and the future is a dream of the present. Therefore we must concentrate in modern, because the Koreanology is to make the Korea of the present more ideally. In the Koreanology, the ideal is not a ideal of itself, it is the ideal in the history of Korea. The Korea have it's own history, culture, wisdom, and dream. If we want to advance more idealistic, we must introduce the past of the Korea in the present of the Korea, and we must rooted the future of the Korea in the present of the Korea. In the Koreanology, we limited usually our endeavor to study the Korea of past scholastically. It is important, but it is not the main and unique field, but a side and assistance area. The prosecution of studies have not it's own aim, it must pass it's results to the life of Korean of those days. Life is only one which get it's own aim. If something can't have any connection to the life of Korean, it haven't any meaning affirmatively, in the realm of the Korea. This is general in the whole area of humanbeing, and it is same in the Koreanology. in that point of view, the Koreanology must have two area at least, that is, the one is to persuit of learning, the other is to struggle in the life of everyone of Korea of present, the former is to produce the stuff of the latter, the latter is to produce the result of the former, anyone who have conceive about Korea include a foreigner take part in former stage, but in the case of the latter, only a Korean take part in that actual process. In the present day, all of the Korean must endeavor with one's best, and must introduce the history of Korea to more evolved situation. I say, it is the Koreanology. Therefore, in the realm of the Koreanology, the whole capability of us must focused to struggle against to the problem of Korean's society. In these point, the studies about Korea of past, present, future, and the practice of our century, and the efforts of our lifes in everyday, must coincide in one trend, and leaded to product something which requested by the history of Korea or humanbeing in present 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