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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말∼7세기 고구려 지배세력의 대외인식과 대외정책
윤성환 한국고전번역원 2011 民族文化 Vol.- No.37
그동안 고대국가 지배세력의 대외관계 인식에 관한 연구는 관련 사료 부족 등의 이유로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국가의 대외정책 결정과정에서 지배세력의 대외관계 인식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한다면, 이를 간과해 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6세기 말∼7세기는 삼국, 더 나아가 사실상 동아시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격변기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이 글에서는 6세기 말∼7세기 격변기의 국제질서를 주도했던 고구려의 대외관계 인식을 검토하였다. 영양왕이 즉위한 무렵,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溫達은 이른바 故土回復論을 제기하였다. 그 내용은 지역적으로는 한강 유역, 대상 국가로는 신라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통해 빼앗긴 옛 고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고토회복론은 뒷날 淵蓋蘇文에게까지 이어진 것으로, 당시 고구려 지배세력이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런데 온달에 의해 제기된 초기 고토회복론에선 고토회복의 대상으로 백제는 거론되지 않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5세기 이래 고구려와 백제는 상호 적대적 인식을 거듭해왔고, 또 현전 기록상 적어도 607년 무렵까지는 고구려가 여전히 백제를 신라와 함께 잠재적 위협 세력으로 간주한 것이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왜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는데, 아마도 이는 온달이 고토회복론을 제기하며 출정에 나선 시기에 주목해볼 때 당시 고구려의 대수정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수의 중원 통일 직후 수 문제가 보낸 璽書에 대한 대응으로, 고구려는 수와의 타협안을 모색했고, 이런 속에서 일찍이 수 중심의 국제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백제에 대한 공격론을 자제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연개소문의 고토회복론은 온달의 그것과는 역사적 근거를 달리하는 것으로서, 특히 그는 고구려 서·북방에서의 대외적 위기와 신라에 대한 고토 회복론이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對隋戰爭을 거치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비공식적 접촉을 통해서나마 점차 개선되어간 반면 신라와의 관계는 연개소문의 언급에서 확인되듯 적어도 악화된 것으로 보인 다. 이런 역사적 배경 역시 연개소문의 대신라관계 인식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되며, 그가 집권한 뒤 김춘추의 우호 제의를 사실상 거부한 것 역시 이같은 대외관계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다음으로, 6세기 말∼7세기 고구려의 對隋·對唐關係 인식을 살펴보았다. 580년대 초반, 고구려는 요서지역을 둘러싸고 수와 대립을 겪으면서 점차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고구려는 585년 南朝의 陳에 사절을 파견하고 있다. 이때의 遣陳使 파견은 5세기 대의 외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추진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후 수와의 갈등이 첨예화되는 가운데에도 더 이상 진과의 외교를 추구하지 않은 것은 아마 이때에 이르러 진의 國勢를 정확히 인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수에 대해 더욱 적극적 인 군사적, 외교적 대응 조처를 강구하는 가운데 수의 중원통일을 접했다. 아 울러 수 문제의 경고성 새서도 고구려에 보내졌다. 기왕의 지적처럼 5세기 이래의 국제질서가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 지배세력의 위기의식은 고양 되었으나, 일단 영양왕이 즉위하여 수와의 타협을 모색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수의 ‘祥瑞’를 축하하고, “고(구)려왕”으로의 改封을 요청했다. 이는 이제 고구려가 수의 중원통일을 현실로 수용하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5세기 대의 외교적 경험이 아닌 바로 580년대 대수관계에서의 외교적 경험과 인식을 대수정책 결정 과정에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수와의 1차 전쟁을 거치며, 고구려는 수의 세력 팽창과 확장이라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더욱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수대의 경험은 당이 건국된 이후 고구려의 대당정책에도 일정하게 반영되어 나타났다. 영류왕 대 고구려는 외형상으로는 당에 대해 온건화평책을 추구했으나 이면적으로는 당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백제·신라의 대당통교를 차단하고, 당의 세력 팽창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는데, 이는 고 구려 지배세력이 수대의 경험을 통해 중국 통일 왕조의 대외적 팽창에 관한 속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처럼 고구려의 대 수·대당관계 인식과 정책 결정은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 그 주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Historically, foreign relations realization of governing power is important in the foreign relations history study. by the way, in relation to ancient history of Korea studying about this subject is not active. Hereupon this study tried general approach about the foreign relations realization of Koguryo(高句麗) governing power between the late 6th and 7th centuries. The late 6th century, one´s native place restoration argument which is proposed by Koguryo governing power is the slogan including whole governing power. Also, that is included realization about relations with Baekje (百濟) and Shilla(新羅). The content is that Han River(漢江) basin loss by Shilla will be able to aggravate a foreign crisis especially of northwest. Therefore Shilla become an target of force attack. This foreign relations realization based on one´s native place restoration argument matched up to foreign south policy the influence. Above all, a margin is made Combining with Baekje. Eventually, foreign relations realization based on one´s native place restoration argument was a result of new grope faithful in reality under new circumstances change. Next, look around the realization and understand about relations with Sui (隋) of Koguryo. In the early years of the Sul establishment of a country, the foreign relations realization about Sui which Koguryo governing power had based on historic experience since 5th century with relations with China(南北 朝). The reason why critical consciousness of Koguryo governing power reached the peak is collapsed international environment of 5th century. But, war since between the two countries, critical consciousness of Koguryo governing power is caused by reality that extensive expansion of Sui. Also, a view of the world that is traditional thing of Koguryo people haven´t changed. Meanwhile, the realization about relations with Tang(唐) of Koguryo based on historic experience of Sui a period. In conclusion, the foreign relations realization of Koguryo governing power between the late 6th and 7th centuries is created by the reality of the age and historic experience.
밀키트 선택속성이 중국 1인 가구 소비자들의 지각된 가치, 소비자 만족 및 재구매의도에 미치는 영향
윤성환 국민대학교 중국인문사회연구소 2022 중국지식네트워크 Vol.20 No.-
본 연구에서는 중국 1인 가구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밀키트 선택속성(편리성, 건강성, 품질, 가격, 다양성)이 지각된 가치, 소비자 만족 및 재구매의도에 미치는 구조적인 영향 관계 파악을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다. 변수들 간의 관계는 기존 선행연구들에 근거하여 가설화하였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대도시인 북경(北京), 상해(上海), 광주(廣州)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1인 가구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하여 제반 가설을 검증하였다. 실증분석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을 도출하였다. 첫째, 밀키트 선택속성 요인 중 건강성을 제외한 편리성, 품질, 가격 및 다양성이 지각된 가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지각된 가치는 소비자 만족에, 소비자 만족은 재구매의도에 각각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밀키트 선택속성 요인 중 품질과 가격을 제외한 편리성, 건강성, 다양성이 재구매의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향후 중국 밀키트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한국 식품업체들에 대하여 중국 현지에서의 바람직한 마케팅전략 수립을 위한 실무적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윤성환 동북아역사재단 2013 東北亞歷史論叢 Vol.- No.39
The reign of King Yeongnyu (榮留王) has received little attention in studies of Koguryo history. This monarch’s policy toward Tang(唐)China has been understood as a moderate policy. Thus, King Yeongnyu has been considered a moderate toward Tang. On the other hand,YeonGaesomun (淵蓋蘇文) has been seen as a hard-liner toward Tang. Such views have passed over the dynamics of King Yeongnyu’s policy toward Tang. King Yeongnyu sent envoys to China in 618. This was a rapid diplomatic response. There also were frequent missions dispatched to gather information about the situation in China. At this time, Tang appointed Tudiji (突地稽), who was of an anti-Koguryo disposition, as the administrator (總管) of Yanzhou (燕州). In this way, the ruling group in Tang remained alert and checked Koguryo. This awareness regarding Koguryo among Tang’s ruling group had taken root during the Sui (隋) period. However, China continued to consider this an unstable situation, and pursued a stable relationship. Koguryo acted similarly, too. King Yeongnyu pushed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冊封-朝貢) between Koguryo and Tang in 623. In this way,King Yeongnyu pushed a policy toward Tang based upon the strategic importance of Koguryo. Thus, King Yeongnyu was not a moderate toward Tang, and his policy toward that country expressed caution. 그간 古代 韓中 朝貢冊封關係를 둘러싸고 한중일 삼국 간에는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대체로 중일학계가 조공책봉관계의 현실적 규제력을 강조했던 반면, 한국학계는 그것의 형식(명분)성을 강조하거나 被冊封國의 독자세력권을 공인받는 절차로 이해하였다. 이런 속에서 이 글은 고대 한중 조공책봉관계의 성격을 다른 차원에서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그 사례로 623년 12월, 고구려의 영류왕이 당에 먼저 조공책봉관계 수립을 요청한 사실에 주목하고 그것의 함의와 맥락을 살펴보았다. 이 사례는 당 건국이후 당과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던 ‘예외적 상태’에서 고구려가 먼저 당에 책봉을 요청한 점, 그리고 그 직후 역시 또 다른 피책봉국이었던 백제·신라의 대당통교를 차단한 사실 등에서 기왕의 설명만으로 충족될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고구려는 5세기 초 동북아 지역에 독자적 질서를 구축한 뒤부터 조공책봉관계를 對中外交의 ‘도구적 수단’으로 여겨왔고, 그런 점에서 조공책봉관계에 내재된 ‘德化論的 君臣關係’의 질서를 內面化하지 않았다. 특히 對隋戰爭은 고구려 집권층이 조공책봉관계가 지닌 허구성을 명료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영류왕대 對唐 조공책봉관계의 수립은 종래 구사된 현상 분석적 차원의 ‘名實論’적 접근이나 인식론적 차원의 ‘獨自勢力圈論’과는 다른 접근법이 요구되었다. 618년에 건국된 당은 그 직후 주변국 군장들을 책봉하지 못할 정도로 內憂外患에 시달렸다. 특히 이 시기는 東突厥의 ‘極盛時代’로서 당 조정은 돌궐을 대등관계를 의미하는 ‘敵國禮’로 대했다. 안으로는 군웅이 할거하는 속에서 돌궐의 변화무쌍한 침략과 타협, 그리고 물자요구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초기 당의 대고구려정책은 이런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동시에 당은 隋代 對高句麗關係의 경험과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런 사정이 중첩되어 당 초기 대고구려정책은 두 潮流를 띠게 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고구려를 경계,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와의 안정적, 평화적 관계를 추구하는 정책이었다. 특히 전자의 양상은 618년∼621년까지 두드러졌다. 고구려와 접경한 隋代의 遼西郡인 燕州에 總管府를 설치하고 反高句麗的 인물인 突地稽를 총관으로 임명한 점, 연주총관부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한 점, 당 고조가 新羅使의 방문에 특별히 우대하고 答訪使를 파견한 사실 등은 그 사례이다. 그러나 621년 이후 돌궐의 침입이 가중되고 산동의 群雄 柳黑達이 세를 떨치면서 당의 대고구려 견제책은 한계에 봉착했다. 무엇보다 대외적 안정과 평화가 절실해졌고, 이런 수세적 맥락에서 外的 변수인 고구려에 대해서도 정책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의 표현이 622년 당 고조가 고구려에 보낸 국서였다. 여기서 당 고조는 역사적으로 고유한 고구려의 요동 통치사실을 존중하고 상호 평화적 관계에 입각한 강토 보전을 제안했다. 더불어 쌍무적 포로 교환을 제안, 실천했다. 당 고조의 ‘夷狄과의 평화공존론’은 명분과 실제의 차이라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명료한 인식인 동시에 對民안정시책이자 隋 왕조와의 차별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당의 정책기조는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었다. 한편, 고구려는 당 건국 이후 지속적인 使行을 통해 당이 처한 상황에 대한 면밀한 정보 수집과 함께 당의 대 ...
정렬 격자 기반의 효율적인 셀단위 적응 격자 알고리즘 개발 연구
윤성환,김종암 한국항공우주학회 2011 한국항공우주학회 학술발표회 논문집 Vol.2011 No.11
정렬 격자 기반의 효율적인 적응 격자 기법으로서, 새로운 형태의 셀단위 적응 격자 세밀화 알고리즘을 개발하였다. 새로이 개발된 셀단위 세밀화 기법의 핵심 아이디어는 주로 중첩 격자 기법에서 사용되는 격자의 분류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분류된 격자 형태를 사용함으로써, 본 연구에서 개발한 셀단위 세밀화 알고리즘은 격자 시스템의 구조화된 인덱스를 유지하면서도 불필요한 격자점들의 세밀화를 막아 기존 기법에 비해 계산 시간 및 메모리 측면에서 효율적이다. 수치 실험을 통하여 제안된 기법의 정확성 및 효율성을 테스트해 보았으며, 적응 격자 기법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에 비해 정확성과 효율성이 월등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As an efficient AMR method on structured grids, a new cell-by-cell refinement algorithm is developed. Key idea of the new cell-by-cell refinement is to use categorized cell types which are originated from overset mesh technique. Thanks to categorized cell types, present method provides efficient cell-by-cell refinement algorithm, while preserving structured index of grid system. Through numerical test cases, the performance of present algorithm is investigated and comparison of accuracy and efficiency shows that present method is much more accurate and efficient than the case without AMR method.
윤성환,유보현 경기대학교 부설 산업디자인연구소 2012 조형논총 Vol.- No.9
편의시설의 발전과 각종 혜택 속에서 오늘날 도시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도시는 발전하고 있다. 대중교통은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동의 편의를 제공하고, 정보통신산업의 발달로 어디에서나 인터넷에 접속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의 질은 계속적으로 좋아지고, 복지지원의 혜택은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좀 더 넓어지고 확장되었다. 도시 내 녹지공간, 문화예술공간의 확대로 여가를 보낼 공간들이 늘어났다. 우리가 이런 편의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래전에 형성된 도시의 재성장 노력에 의해서이다. 도시는 형성된 이후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성장하고, 쇠퇴하고, 재생한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도시재생(都市再生,Urban Regeneration)라고 하며,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거쳐서 등장한 새로운 도시 재활성화 방법이다. 초창기의 도시환경정비를 통한 도시재성장방안은 물리적 환경의 정비로 문화·사회·경제·환경적 개선을 유도하며 진행되었다. 도시재생은 기존의 물리적인 환경개선을 통한 방법의 한계에 대한 보완적 개념으로, 내용적 프로그램을 병행하여 시행되는 방식으로 공장에서 결과물을 생산해내는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과 의미를 부여하여 지속적으로 재생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도시재생은 더 이상의 파괴와 개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존의 자원의 재활용을 통하여 자연환경과의 공존을 이루고 활력을불어넣는 방식이다. 단순히 물리적 환경개선 뿐만 아니라, 문화·사회·경제·환경적 개선 및 정비를통하여 구성원들과 자연환경의 공존, 새로운 경제적 활력과 경쟁력 확보를 통하여 재성장하는 것으로 모든 재생 요소들은 서로 연결되어 시너지효과를 발생한다. 이러한 전반적인 도시재생은 물리적 환경 개선, 즉 공간의 재활용 및 효율성 증대가 중심축이다. 따라서 기존 도시재생의 사례조사 및 분석을 통하여 도시재생을 위한 공간디자인 중점 가치와 목적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도시재생의 물리적·문화적·사회적·경제적·환경적 분야는 공간에 그대로 투영되어 역사성, 장소생, 공공성, 경제성, 환경성으로 실현된다. 물리적 도시재생은 기존의 노후·쇠퇴한 공간의 재이용을 통하여 도시 이미지제고와 경쟁력 강화,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용도변경을 통한 산업시설대의 유물에서 문화 예술공간으로의 변화, 녹지조성 등 친환경적 정비 등 다른 네 가지 범위의 도시재생의 출발점이 된다. 새로 재생된 공간은 이미 기존 건축·시설·구조물의 보존 및 재이용으로 역사성을 갖는다. 이 역사성은 지역 경제 재생과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도시의 이미지 제고에 도움을 준다. 또한 재생된 공간의 용도변경은 공간 활용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면서 새로운 역할의 수행으로 시민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다. 이미 역사성을 갖고 있는 공간에 시민들의 체험 및 경험을 통하여 공간은 장소성을 띄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방문과 참여를 유도하여 공공성의 증대를 이끌어 낸다. 또한 공공재로서의 공공 공간의 등장과 효율적인 공간 활용은 경제적이고, 재활용을 통한 공간재생과 주인의식을 갖는 주민들의 적극적 참여로 인하여 지속 가능한 재생이 된다는 점에서는 환경적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성질들은 도시재생의 물리·문화·사회·경제·환경적 관점들이 공간디자인에서 내포해야 할 요소들이다. 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재생되는 도시의 기반이 되는 공간디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브랜드 이미지, 브랜드 신뢰, 브랜드 몰입, 고객만족 및 브랜드 충성도 간의 구조적 관계에 관한 연구 - 중국진출 한국 주요 브랜드를 대상으로-
윤성환 중국학연구회 2015 중국학연구 Vol.- No.73
The main purpose of this study is to grasp a structural relationship among perceived brand image, brand trust, brand commitment, customer satisfaction and brand loyalty of three Korean companies in China by Chinese Consumers. The empirical findings are as follows: First, Chinese consumers showed a favorable response to the efforts of three Korean companies of brand image and such brand image turn out to be positively influential on brand trust. Second, the brand trust as to three Korean companies displayed by Chinese consumers induces positive influences on customer satisfaction and brand commitment respectively. Third, brand commitment turn out to be positively influential on customer satisfaction, as well as customer satisfaction and brand commitment all turn out to be positively influential on brand loyalty. These outcomes show that it needs to consider raising brand image first of all in order to improve Chinese consumers’ loyalty on Korean brand. Therefore the Korean companies should make various efforts to raise brand image at corporate level.
7세기 고구려의 대외정책 수립 체계와 대외 정책 결정 요인 : 『삼국사기』 所在 642년 평양회담 관련 기록 분석을 중심으로
윤성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한국전통문화연구소 2017 한국전통문화연구 Vol.20 No.-
이 글은 『삼국사기』 소재 642년 ‘평양회담’ 관련 기록에 주목하여 7세기 고구려의 대외정책 수립 체계와 대외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살펴본 글이다. 고구려 말기 대외정책 수립 체계는, 국왕·대대로(大對盧)·대로관(對盧官)과 같 은 정책 결정 주체들이 상호간 협의를 통해 결정하는 체계였다. 대로(관)와 대대로는 평소 대외정보(기밀)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바, 이들은 풍부한 국정운영 경험과 군사 운용 능력을 겸비한 인물들이었다. 대로(관)와 대대로는 사전에 수집한 대외정 보를 바탕으로 대외정책 현안에 대한 상호 논의를 거쳤고, 대대로는 그 내용을 국왕 에게 보고했다. 국왕은 대외정책의 최종결정권자로서 이들의 건의에 기초해 최종 결론을 확정했다. 따라서 대대로·대로관은 대외정책에 관한 국왕의 결정을 실무적 으로 뒷받침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 국왕의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한편, 왕권은 대외관계를 주도 하는 노력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왕권이 고구려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던바, 그러므로 왕권의 입장에서 대외정책은 정국주도권을 행사 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아울러 대외정책 결정과정의 주요 주체였던 대로관 과 대대로의 특성상, 이 시기 고구려 대외정책은 군사주의적 요소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점은 고구려 국가의 성격이 ‘전쟁국가’였던 점과 관련이 깊다. 한편, 이러한 대외정책 수립 체계를 바탕으로 대외정책의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 지 다음 몇 가지 요인들이 반영되고 있었다. 우선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고구려 집 권층의 상대국가에 대한 ‘인식’과, 고구려 특유의 ‘대국의식’에 입각한 관념이 신라와 같은 주변부 국가에 대한 정책 결정의 기저에서 작용하고 있었다면, 첩자를 통한 ‘정 보수집’ 및 당면한 대내외 정세, 곧 ‘시세에 따른 현실적 판단’은 보다 직접적 요인으 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이른바 ‘귀토지설’ 일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 고구려인 들은 외교에 있어 때로 사술을 마다하지 않았던 바, 이에는 수백 년 동안 다양한 외 부세력과 접촉했던 경험과 더불어 외교문제에 있어 ‘관념’과 ‘현실’을 조율해나간 고 구려인들의 감각이 반영되어 있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decision process of the foreign policy of Goguryeo(高 句麗) in the 7th century through the analysis of the records related to ‘Pyongyang Summit(平壤會談)’ in 642 to Samguksagi(三國史記). Through these records, the Goguryo people were very strategically engaged in diplomatic matters. This is evident in the so-called “Gwitojiseol(龜兎之說)” anecdote. The Goguryeo people sometimes scammed in diplomacy, reflecting the experience of hundreds of years of contact with various external forces, as well as the sense of the Gogurians who coordinated ‘ideas’ and ‘realities’ in diplomatic matters. On the other hand, the process of foreign policy making in Goguryeo in the 7th century seemed to have first come to an agreement and consensus among the aristocrats. In this way, the consensus among the nobles was transmitted to the king through the daedaero(大對盧), and the king seemed to have exercised formal authority. In this process, several factors were reflected in the final decision of foreign policy. The recognition of the Goguryeo ruling class based on the ‘historical experience’ and the ‘sense of power(大國意識)’ unique to Goguryeo were acting on the basis of policy decisions for peripheral countries like Silla(新羅), and information gathering, realistic judgment based on reality were the direct factors. In short, the determinants of Goguryeo‘s foreign policy in the 7th century are the historical experience of relations with other countries, and realistic judgments based on information gathering such as spy operations. And the sense of power seemed to have acted in the b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