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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郑梦周与朱子理学东传

        육진혜(,振慧) 포은학회 2013 포은학연구 Vol.12 No.-

        포은 정몽주는 한국의 유학사상 매우 특수하고 중요한 인물이다. 정몽주는 주자학을 조선에 도입한 첫 사람은 아니지만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고 있다. 정몽주는 죽을 때까지 이씨 왕조에 굴하지 않았지만 이씨 왕조는 정몽주에게 지고지상의 영예를 수여하였다. 정몽주는 후세에게 유학이론저작을 남기지 않았지만 후세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한국의 유학은 주자이학의 도입을 기준으로 전후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주자학이 도입되기 전의 한국유학은 한당유학으로 고려 초, 중기에 이르기까지 유학자들은 정치적으로는 유가를 수행했지만은 사상적으로는 유교, 불교, 도교를 모두 수행하였다. 특히 불교를 숭상하면서 유가 경서에 대한 연구는 미약하였다. 주자학의 도입으로 고려 및 한국 전체 사상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정몽주 이전에 많은 고려학자들 즉 안향(安珦), 백신정(白颐正), 이제현(李齐贤), 이곡(李榖) 등 주자학자들도 주자학을 고려로 도입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의 동국 정통 지위의 확립은 이색, 정몽주 등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 이색은 주로 '기화' 및 '수양' 등 면에서 주자학을 해석하고 전개하였으며 정몽주는 성리학적 면에서 주자학을 계승하고 발전하였다. 포은은 의리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배운 것을 실제에 응용하도록 강조하였다. 포은은 유가학설을 적극적으로 창도하면서 정주이학 교육을 추진하였다. 포은은 사서인으로 하여금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가묘를 세우고 조상에 제사하도록 했으며 사회적으로 유가예속을 널리 보급하여 불교의 문화습속을 대체하도록 하였다. 포은은 유가의 충효의리를 강조하면서 유교강상으로 몰락해가는 고려 말을 만회하려고 하였다. 포은은 공민왕16년(1367)에 성균박사에 임명되었다. 포은은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의하면서 가장 먼저 주희의 "사서집주"을 해석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해석이 잘 되었는지 의심했었는데 그뒤 호병문(胡炳文, 호는 云峰) 의 '사서통(四书通)'이 고려에 들어온 후 참조해보니 포은이 주희의 성리학 사상에 대한 이해가 호씨와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을 보고 모두 포은의 이론에 탄복했다.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였지만 피살된 후 모든 가산을 몰수당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문헌들은 대부분 파괴되고 실전되어 시문 300여수와 문집 20여 편 밖에 없다. 포은에 대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문집이나 포은의 시문을 통해 포은의 주자이학에 대한 이해, 공맹 사상에 대한 발양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포은은 "사서"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유학의 도통을 전개하였다. 포은은 "대학" 과 "중용"을 통하여 유학을 파악하였으며 "논어"와 "맹자"를 통하여 신심을 닦고 교양을 쌓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포은이 "오경"에 대한 연구도 정주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포은은 "以默识心融为要, 以践履躬行为本"의 기본 사상으로 성리학 정신을 구현하였다. 포은은 성리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국안민하는 사공(事功)으로도 기여하였다. 포은은 절의, 대의의 정치인이자 고려의 입지를 위해서 유세를 했던 탁월한 외교관이기도 하다. 포은의 일생을 볼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충효절의 사상이다. 이 또한 포은의 정주이학사상이 밑바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은은 君臣父子(군신부자)의 논리관계를 가장 우선시하였고 효를 행하고 충을 다하는 것을 인도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사신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포은의 충효절의는 성리학을 연구한 결과이며 성리학의 승화이기도 하다. 포은이 한국 성리학에 미친 영향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주자이학의 전개로 불교에 대한 숭상을 바로잡았으며, 둘째, 주자이학을 창도함으로써 여말 학자들의 학문 방향을 바로잡았으며, 셋째, "默识心融"과 "践履躬行"를 하나로 통일하여 "义理派"적 정통유학지위를 확고하였다. 따라서 '有德有言, 名实相孚, 文道兼备'가 포은에 대한 가장 좋은 평가가 아닐까 싶다. 在韩国儒学史上, 郑梦周(圃隐)是一位地位非常特殊而重要的人物。他虽非朱子学引入朝鲜半岛第一人, 却被尊为"东方理学之祖";他誓死不仕李氏王朝, 李氏王朝却给予他至高无上的荣誉;他未留下传世的儒学理论著作, 当时及后世诸多名儒却对他敬仰备至。 韩国儒学以朱子理学传入为界, 分为前后两个阶段。朱子学传入前的韩国儒学为汉唐儒学, 及至高丽初、中期时, 儒者文士虽在政治上奉行儒家, 在思想上则儒、释、道三教兼修, 尤其崇尚佛教, 皆能通词章, 对经学却无深入研究。朱子学的输入, 不仅对高丽时代, 而且对韩国整个思想带来重大的转折与影响。在郑梦周之前, 已有不少丽朝学者接触到了朱子学, 安珦、白颐正、李齐贤、李榖等均在朱子学引入高丽方面, 做出了不可磨灭的贡献。但程朱性理学在东国正统地位的确立, 则要归功于李穑、郑梦周等人的努力, 其中李穑主要在"气化"和 "修养"等方面阐释与发展了朱子学, 郑梦周则是在性理学方面继承与发展了朱子学。 圃隐始终强调以义理思想为根本, 强调学以致用, 极力倡导儒家学说, 推行程朱理学教育, 并令士庶仿朱子家礼立庙奉祀祖先, 向社会推广儒家礼俗, 以取代佛教的文化习俗;他尤其重视儒家的忠孝义理, 力求以之扶持纲常, 挽救高丽末期的衰落之势。圃隐自恭愍王十六年(1367)兼成均馆学官后, 第二年拜成均司艺知制教, 恭愍二十年又拜宝文阁应教兼成均直讲, 年底再拜为成均司成, 而至辛禑元年(1375)时则拜为成均大司成。圃隐在成均馆讲授性理学, 是最早为朱熹≪四书集注≫作训解之人, 时人未知其训解正确与否, 心中尚有疑惑。及至胡炳文(号云峰)之≪四书通≫传来, 人们发现, 圃隐对朱熹理学思想之理解竟与胡氏完全吻合, 从而对圃隐钦佩不已。 郑梦周虽被尊奉为 "东方理学之祖", 但由于被杀害后没收家产, 所著文献大多遭毁失传, 仅留下诗文300 余首和书、铭、记等不足20篇, 这给后人开展圃隐研究带来不小的困难。然而尽管如此, 从别人的记述及先生本人的诗文中, 我们仍可感知圃隐对朱子理学的深切领悟、对孔孟思想的积极发扬, 以及对佛老之言的严厉批判。圃隐通过研究 "四书"来接受性理学并发扬儒学道统:从≪大学≫、≪中庸≫中把握了 "儒学为身心之学"的宗旨;从≪论语≫、≪孟子≫中获得了修身养性的方法。圃隐之研究 "五经", 同样是本于程朱思想。更为重要的是, 他 "以默识心融为要, 以践履躬行为本", 他用平时的身体力行, 来体现性理学精神。圃隐不仅在性理学上为时人所推崇, 而且其事功方面亦为人们所称道, 被誉为 "天人之学, 王佐之才。"考其一生, 可谓是屡建奇功:振文风, 立国礼, 整纪纲;革胡服而袭华制,立义仓以赈穷乏, 设水站以便漕运。他还以过人胆识和卓越的外交智慧, 数度挽救国运于危亡。而使圃隐先生的名字在韩国儒学史上彪炳千古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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