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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123 : 기계호흡기 유지 환자에서 횡격막 위축 : 흉부 CT를 이용한 평가

        김호철,김완철,임수진,이승준,유지,정이영,배경수,전경녀,이종덕,황영실 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 2013 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 추계학술대회 초록집 Vol.116 No.0

        서론: 중환자실 환자는 기계호흡기 유지, 영양결핍, 이화작용, 근수축의 억제 등으로 인해 횡격막 위축이 생길 수 있으며 기계호흡기 이탈의 방해 요인이 될 수 있다. 이전 연구에서 기계호흡기를 유지하는 뇌사자의 횡격막은 위축이 생기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본 연구는 중환자실 환자에서 기계환기를 유지하는 동안 횡격막의 위축 여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방법: 내과 중환자실에서 기계호흡기를 유지하는 동안 흉부 CT 를 2번 이상 시행한 환자를 대상으로 횡격막의 두께를 측정하여 그 변화를 관찰하였다. 횡격막 두께의 측정은 CT 영상에서 삼차원 영상처리 프로그램(Rapidia 2.8; Infinitt, Seoul, Korea)를 이용하여 복강동맥이 분지하는 축상면에서 척추관의 전면을 지나는 가상의 선을 그리고 양측 횡경막과 만나는 점을 정한 다음 커서를 이용하여 횡격막의 두께를 축상면과 관상면에서 각각 측정하였다. 결과: 총 13명(남:여=8:5, 평균나이=67.8±7.5세)의 환자에서 시행한 28번의 흉부 CT를 분석하였다. CT를 시행한 시간 간격은 16.6±14.6 일이었다. 입원한 원인질환으로 폐렴이 10명으로 가장 많았고 입원시 APACHE II, SAPS 점수는 각각 18±10.5, 8.8±3.9이었다. 첫 번째 흉부 CT에서 좌, 우측 횡격막의 두께는 각각 0.37±0.05, 0.38±0.07 mm이었으나 두 번째 흉부 CT에서는 좌, 우측 횡격막의 두께가 각각 0.33±0.05, 0.34±0.05 mm로 의미있게 감소하였다(p<0.01). 좌, 우 횡격막 두께의 합은 첫 번째 및 두 번째 흉부 CT에서 각각 0.75±0.11 0.67±0.09 mm로 의미있게 두 번째 흉부 CT의 횡격막의 두께가 감소하였다(p<0.01). 첫 번째 및 두 번째 흉부 CT 시행 시 체중은 각각 61.2±12.2, 61.7±12.8 kg, 체질량지수는 각각 19.8±1.9, 21±0.3으로 의미 있는 변화는 없었다. 결론: 기계환기를 유지하는 중환자에서 횡격막의 위축이 생기는 것을 흉부 CT를 통해 확인하였다.

      • KCI등재

        청소년기 생애목표 프로파일의 종단적 변화 및 예측요인 검증

        유지(Yooji Chung),이은주(Eunju Lee) 한국교육심리학회 2018 敎育心理硏究 Vol.32 No.1

        본 연구는 생애목표의 프로파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전환하면서 변화 가능한지 또는 안정적인지 알아보고, 개인의 발달적(자아정체감), 동기적(성취가치), 심리정서적(삶의 만족도) 특성이 이러한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는데 목적이 있었다. 한국아동청소년패널조사(KCYPS)의 3차(중3)와 5차(고2) 자료를 활용하여 잠재프로파일분석을 실시한 결과, 두 시점에서 공통적으로 4가지 유형(고목표형, 관계지향 평균형, 성공외면 평균형, 저목표형)으로 분류되었다. 잠재전이분석을 통해 생애목표 프로파일의 종단적 전이확률을 살펴본 결과, 각 프로파일별로 12%(저목표형)에서 56%(성공외면 평균형)의 학생들이 2년 후에도 동일한 유형을 유지하였다. 잠재전이에 대한 예측변인의 효과를 살펴본 결과, 자아정체감이 낮을수록 고목표형을 유지하기 보다는 다른 유형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았으며, 성취가치가 낮을수록 고목표형 및 성공외면 평균형에서 저목표형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삶의 만족도가 높을수록 고목표형에서 관계지향 평균형으로 전이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삶의 만족도의 상대적 수준이 높더라도 그 수준이 하락할 경우 생애목표의 변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침을 시사한다. The present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longitudinal transition of adolescents’ life-goal profiles and the predictive effects of developmental(self-identity), motivational(attainment value), and psycho-emotional(life satisfaction) traits in such changes. The samples were 2040 adolescents at grade 9 and they were examined in 2 years whey they were at grade 11. The data was a part of wave 3 and 5 of the nationally representative longitudinal data of Korean Children and Youth Panel Survey(KCYPS). A latent profile analysis identified four distinct profiles of life-goals for students at grade 9 as well as at grade 11; high goals, relationship-oriented average goals, success-neglected average goals, and low goals. Applying a latent transition analysis, it was found that almost half the students remained the same profile in two years (about 54%), whereas others made transition to different profiles. The students with higher self-identity, higher attainment value, and higher life satisfaction were more likely to move to the more adaptive life-goal profiles such as high goals and relationship-oriented average goals.

      • KCI등재

        최흥효<SUB>崔興孝</SUB>와 15세기 서단<SUB>書壇</SUB>

        유지복(柳志福) 한국국학진흥원 2016 국학연구 Vol.0 No.31

        이 연구의 주요 대상인물은 15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최흥효崔興孝(1370년경~1452년 이후)이다. 그는 초서에 뛰어나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행서와 함께 동시에 칭송되었던 명가이다. 이 논문은 원元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가 저변에 확대되기 이전인 15세기 초반의 서단에 주목하여 당시의 전환기적 특징이 어떠한 양상을 띠는지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이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최흥효이다. 여말선초 및 15세기 서단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고려 말에 유입된 원대 서풍 중 유독 송설체에만 집중되어왔다. 심지어 당시에 병존하던 여러 서풍을 송설체로 귀결시키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왔다. 이 연구에서는 우리나라의 역대 법첩 및 국왕문서인 왕지王旨와 교지敎旨를 분석해 15세기 초반에 조맹부 뿐만 아니라 선우추鮮于樞와 강리노노康里巎巎의 원대 서풍도 널리 통용되었음을 밝혔다. 특히 분방함과 자유로운 기상이 표출된 최흥효의 초서는 전래의 서풍을 기반으로 강리노노의 서풍을 폭넓게 수용하였음을 밝혔다. 과거에 진晉의 유익庾翼과 왕희지王羲之가 서로 비견되었던 일화처럼 최흥효의 글씨는 종종 안평대군의 글씨와 비교되곤 하였다. 심지어 전혀 관계가 없는 유익의 서풍을 최흥효와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안평대군이 구사한 송설체를 왕희지의 전형典型에 등치시키고자 한 의도로, 송설체를 고수하던 주류 서단의 배타적 인식이 드러난 결과였다. The major subject of this study is Choi Heunghyo (崔興孝, c. 1370 ~ d. after 1452), a prominent Korean calligrapher in the early 15<SUP>th</SUP> Century. With his outstanding cursive style, he was praised as the great calligrapher along side of Yi Yong (李瑢) the Grand Prince Anpyeong, the representative of the semi cursive style. Focusing on the calligraphy world during the early 15<SUP>th</SUP>century, when the calligraphy style of Zhao Mengfu (趙孟頫) of Yuan dynasty, known as pain-snow calligraphy style, was not yet widely disseminated in Korea, this thesis aims to examine the feature of the transition period in Korean calligraphy history. The transitional phenomenon epitomized in Choi Heunghyo’s works. The earlier studies on the calligraphy world in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periods and in the 15<SUP>th </SUP>century focused on the pine-snow calligraphy style in particular among the various calligraphy styles which were introduced from the Yuan dynasty during the late Goryeo period. And these studies made a generalization error to ascribe varied styles of those times to the pine-snow calligraphy style only. Analyzing Korean model calligraphy albums of all time as well as royal orders (王旨) and royal instructions (敎旨), this study illuminates that in the early 15<SUP>th</SUP> century, when not only Zhao Mengfu’s style but also Yuan dynasty calligraphy styles of Xian Yushu (鮮于樞) and Kangli Naonao(康里巎巎) were in wide currency in Korea. Especially this study revealed that Choi Heunghyo’s cursive writing as the expression of his far-outness and free vigor was broadly influenced by the style of Kangli Naonao on the base of traditional styles. Like the old story that the two Jin (晉) dynasty calligraphers Yu Yi (庾翼) and Wang Xizhi (王羲之) was used to be compared with each other, Choi’s handwriting often compared with that of Grand Prince Anpyeong. And even Choi Heunghyo was mentioned in relation to Yu Yi, who has no connection whatever with Choi. It is regarded as the result of exclusive understanding in the mainstream of Korean calligraphy world which persists in pine-snow calligraphy style which is followed by the attempt to place the Grand Prince Anpyeong’s writings with good command of pine-snow calligraphy style on the equivalence of typical model of Wang Xizhi’s style.

      • 루터, 쯔빙글리, 캘빈의 성찬론에 관한 이해 : 급진 정통주의 신학적 관점에서 On the Perspective of Radical Orthodoxy

        유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01 현대와 신학 Vol.26 No.-

        20세기 들어 한국 교회가 놀라운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면, 과연 그러한 성장이 한국 교회의 질적 성숙을 수반하였는가? 한국 교회가 "교회의 교회다움"을 잃지 않고, 다시 말해 한국 교회가 한국의 정치 사회 상황에 종속되지 아니하고 기독교 복음의 전달을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에 실제적 공헌을 하였는가? 사회적 정황에 관심을 갖되 교회의 사회적관심 실현을 사회적 정황보다는 기독교 복음의 안목에서 바라보고 추구하는 신앙적 순수성을 한국 교회는 견지하였는가?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 나는 한국 교회가 한편으로는 신앙적 순수성 유지의 명분 하에 세속 한국사회로의 개입 거부를 주장하면서, 오히려 잘못된 한국 사회의 불의한 억압 구조를 지지하는 비정치적 정치주의(non-political politicism)를,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개혁을 위한 세속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해방투쟁 선도를 내세우는 두 가지 비본질적 교회의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러한 한국 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루터와 쯔빙글리, 그리고 캘빈의 성찬론을 고려하면서, 급진 정통주의 신학적 교회의 사명을 제시하고자 한다. 과거 20세기 후반 대다수 보수 한국 교회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표방하며 결과적으로 억압적 독재 정치를 지지하고 이 땅의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두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에게 성찬은 루터의 공재설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교회에서 우리가 받는 성찬 떡에만 임하지, 교회 이상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 안에만 존재하기에 교회의 인도자이지 세상의 인도자가 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세상을 향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교훈은 아무런 정치적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지난 197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 신학계를 주도한 민중 신학을 신봉하는 일부 소수 한국 교회들은 한국 사회의 억압구조 타파를 위해 교회를 세속 사회의 흐름에 종속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그들에게 성찬은 쯔빙글리의 상징설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 전 유대 땅 나사렛에 태어난 청년이기 이전에 세상의 모든 억압 상황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피억압자들과 함께 고통받고 투쟁하는 상징이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존재하기보다 세상에 상징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복음은 교회의 안목이 아니라 세상의 안목으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세상적 안목의 그리스도와 복음이해는 교회의 신학적 적대주의(theological antagonism)를 낳고, 세상의 변화를 하나님 은혜에 의탁하기보다는 인간의 폭력에 의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제 분단 상황 속 한국 교회는 위의 두 가지 유형을 극복하는 새로운 교회의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분단된 이 땅에 그리스도가 임하되 내세로의 구원자로 추상화되거나, 또는 한낱 현세의 억압 구조를 타파하는 투쟁적 전사(Warrior)로 상징되는 신학적 오류를 피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가 예배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예배자들의 심령에 임하며, 그들에게 세상 속 하나님 나라 실현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미덕을 심어주는 영혼의 양식임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는 한국 교회 안에 단지 임하는 것도 아니고 상징되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예배를 통해 늘 새로이 다가와 분단 한국 사회의 의롭고 평화로운 통일의 비전을 주는, 살아있는 우리 영혼의 "살과 피"이다. 한국 교회는 분단 한국의 세상을 향한 관심을 갖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를 통하여 분단 한국의 통일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는, 즉 먼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각자의 미덕을 함양하고자 하는 결단을 통해 분단 한국의 상처를 치유하는, 교회의 교회다움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캘빈의 주장처럼 우리 영혼과 삶의 떡이자 포도주이다. 그의 살과 피는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삶을 정화시키는 영혼의 양식이다. 그의 살과 피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에 임할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리스도께 의지함은 교회의 예배로부터 출발한다. 성찬은 늘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정의와 평화의 비전을 제시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증하는 영적 축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고 소망하는 참 예배를 통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미덕을 함양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한다(We live in the world, but do not live of the world).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은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현실 참여적 정치 투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정의롭고 평화로운 한반도통일을 향한 관심을 내세적 신념으로 대치시키거나, 또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기초한 해방 투쟁으로 실현하려 한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우리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기독교인은 세상 속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의 건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에 관한 관심은 인간적인 능력과 수단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적인 능력과 수단에 의지해 세상을 바꾸려 할 때,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를 절대 보편화하는 오류와, 그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의 사용마저 불사하는 죄악의 수렁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변화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이 분단의 역사적 상황에 처한 한국 사회를 위해 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늘 새롭게 고백하고 찬미하는 "송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양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늘 새롭고 다양한 진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는 통일 한국 역사의 성취를 위해 오직 기도하는 일이다.

      • KCI등재

        전쟁(戰爭)과 무역(貿易) : 동북아 국제질서 재편에 나타난 후금(後金)과 조선의 관계

        유지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2021 韓中關係硏究 Vol.7 No.3

        명말청초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 변화의 중심에는 누르하치가 있었다. 누르하치가 1583년 기병한 이후 전개되는 약 6-70년간은 지속된 전쟁 속에서 만주(滿洲)세력의 굴 기(崛起)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주 굴기의 배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문제였다. 계속된 전쟁이라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르하치는 여진 통 일 과정에서 명조와는 이중적 태도 즉 전쟁과 조공을 유지하였고, 조선과는 평화 관계 유지를 통한 경제적 협력을 모색하였다. 이와 함께 누르하치는 안정적 경제 기반 확보 를 위해 요동점령에는 성공하였지만, 만한갈등에 직면하면서 안정적 농업생산물의 확 보에는 실패하였다. 그 뒤를 이은 홍타이지(皇太極)는 당시 후금이 당면한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 여 조선으로부터 물자 공급을 희망하였지만, 명조와 오랜 우방인 조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홍타이지는 무력을 통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묘호란(丁卯 胡亂)’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얻은 가장 중요한 것은 양국 간에 진행되 는 무역관계인데, 이 무역은 크게 사행무역과 변시무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형태의 무역활동은 후금 측의 강력한 필요에 따른 강압적 요구로 진행된 관계로 조선 측 입장 에서는 매우 소극적이고 피동적이었다. 사행무역은 1년에 2번 정식으로 파견되는 사신단을 수행하는 상단(商團)이 진행하 는 무역으로 양국 간 무역 중에 가장 활발하고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이에 비해 변시 무역은 양측이 합의 하에 시작하였지만, 여러 가지 장애 요인으로 제대로 진행된 경우 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여러 가지 한계를 나타낸 변시무역은 점차 유명무실해졌고, 사행무역도 종종 정해진 기일을 지키지 못하고 늦어지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후금 측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양국 간의 문제는 다시 무력을 통한 해결 시도로 이어져 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17세기 전반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의 재편과정에서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關係)’는 바로 ‘무역’을 통한 안정적 경제력 확보를 위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Nurhachi was at the center of the change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n Northeast Asia at the end of the Ming Dynasty. For about 6-70 years since Nurhachi joined the army in 1583, it can be summarized as the rise of Manchurian forces in the lasting war. And the most important thing in the background of Manchuria was the economic problem. In order to survive the fierce competition of continuous war, Nurhachi maintained a dual attitude with Ming Dynasty, that is, war and tribute, in the process of aftershock unification, and sought economic cooperation through maintaining peace relations with Joseon. At the same time, Nurhachi succeeded in occupying Liaodong to secure a stable economic foundation, but failed to secure stable agricultural products in the face of Manchurian-Chinese conflict. Hongtaji, which followed, hoped to supply supplies from Joseon to overcome the economic crisis facing Houjin at the time, but Ming Dynasty and his long-time ally, Joseon, did not help at all. So, in the end, Hongtaiji caused the First Manchu invasion of Korea to solve the problem through force. The most important thing obtained as a result of this war is trade between the two countries, which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he Diplomatic Corps Trade and the Regional Border Trade. These two types of trade activities were very passive from the standpoint of Joseon as they proceeded with coercive demands according to the strong needs of the Houjin side. The Diplomatic Corps Trade was carried out by the Merchants' group, which is officially dispatched to the envoy twice a year, and was maintained the most active and stable trade between the two countries. On the other hand, although the two sides began trading under agreement, there were only a few cases in which it proceeded properly due to various obstacles. The Regional Border Trade, which showed various limitations, gradually became nominal, and trade activities was often delayed due to failure to meet a set date, resulting in accumulation of complaints from Houjin. In this situation, the problem between the two countries eventually led to an attempt to resolve it through force, leading to the Manchu Invasion of Korea in 1636. In this regard, the most important “Relationship” that emerges in the process of reorganizing international relations in Northeast Asia in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can be said to be a “War” to secure stable economic power through “Trade.”

      • KCI등재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출품작을 통해서 본 1960년대 한국사진의 모더니즘과 주관적 사진의 수용

        유지의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구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20 한국근현대미술사학 Vol.39 No.-

        Until the early 1980s, art photography activities in Korea have been centered on photography groups and photography competitions. Among them, the photography section of the National Art Exhibition, which started from the 13th in 1964, existed as the most prestigious competition for art photographers in the 1960s and 1970s. Nonetheless, the National Art Exhibition has rarely been the subject of attention in the devaluation of photography competitions and the discourse on photography history focused on realism. However, various photographic styles were competing in the National Art Exhibition. This article considers the distribution of the entries in the Natioanl Art Exhibition as a indicator of the topography of Korean art photography in the 1960s, and focuses particularly on the modernist works, which shows the abstraction or patternization of images or the photographic experiments such as reduction of tone-values to black and white, montages, negative prints, line-tone process, blurred images of movement using time-exposure. The tendency corresponds with ‘Subjective Photography’, the 1950s international modernist photography movement which started in Germany. Subjective photography paid attention to the photographic experiments of the 1920’s avant-garde artists such as László Moholy-Nagy, Herbert Bayer and Man Ray, which was discontinued during the Nazi regime and the World War II, and aimed at “humanised and individualised photography” contrast to applied and documentary photography based on the objective representation. It opposed to the conception limiting the properties of photographic medium to objectivity and realism, pursuing the aesthetic autonomy in photography through practicing the various experiments of photographic techniques. This article examines the reception of subjective photography in the korean modernist photography. Subjective photography, introduced to Korean photographers via Japan in the late 1950’s, provided the formal and theoretical basis for the 1960’s korean modernist photography as opposed to the realist photography, which insisted strictly ‘straight’ photography based on the conception of realism as the essence of photography. 198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예술사진 활동은 사진단체와 공모전 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중에서도 1964년 제13회부터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사진부문은 1960~1970년대 한국사진에서 신인 사진가들의 가장 권위 있는 등용문으로서 존재했다. 그동안 국전은 공모전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가치절하와 리얼리즘 위주의 담론 속에서 거의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 국전의 출품작에서는 당대에 존재하던 다양한 사진들이 경쟁하고 있었다. 본고는 이러한 국전 출품작의 분포를 1960년대 한국 예술사진의 지형을 보여주는 공식적인 지표로서 파악하고, 그 속에서 한국사진의 한 축을 이루었던 ‘조형적’ 경향 이라 불렸던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에 주목한다. 특히 이들 작품 중에는 당대 미술에서의 추상의 경향과 연동하는 화면의 추상화 및 패턴화를 비롯해, 흔들린 화면이나 장노출에 의한 운동감, 시간성의 표현, 중간톤의 생략과 강한 흑백의 대비에 의한 구성, 몽타주, 네거티브/포지티브의 전도, 라인톤프로세스 등과 같은 실험적인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형식적 경향은 바로 1940년대 말 독일에서 시작되어 1950년대 유럽 예술사진의 주요한 흐름이 된 ‘주관적 사진(Subjektive Fotografie)’에서 부각된 형식적 특징과 일치한다. 주관적 사진은 모홀리 나기, 헤르베르트 바이어, 만 레이 등 1920년대 아방가르드의 사진적 실험을 전후에 다시 주목하면서, 사진의 기계적 기록성과 객관성에 기대어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해온 응용사진 및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안으로 사진가의 주관성, 창조성의 표현을 지향했다. 특히 사진매체의 속성을 객관적 재현으로 한정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사진매체의 다양한 기법적 실험을 통해 사진 이미지의 자율성을 추구했다. 한국 사진계에는 일본을 통해 1950년대 후반에 소개되었고, 1960년대에 부상하는 모더니즘 사진에 있어 단순히 형식이나 스타일 차원의 수용에 그치지 않고, 담론적으로도 중요한 배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기록성만을 사진의 본질로 삼았던 당시 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서의 핵심적인 논리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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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도로터널 화재시 열부력이 제연용 제트팬 댓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해석적 연구

        유지,신현준,Yoo, Ji-Oh,Shin, Hyun-Jun 한국터널지하공간학회 2013 한국터널지하공간학회논문집 Vol.15 No.3

        현재 도로터널에는 화재시 임계풍속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트팬을 설치하고 있으며, 제트팬 댓수는 임계풍속을 유지하기 위한 유동저항, 자연풍에 의한 환기저항, 열부력에 의한 환기저항을 고려하여 산정한다. 그러나, 국내의 경우, 제트팬 댓수 산정시 열부력은 고려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열부력이 제트팬 댓수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기 위해서 터널연장(500, 750, 1000, 1500, 2000, 3500 m) 및 경사도(-1.0, -1.5, -2.0%)를 변수로 하여 화재성장곡선에 따른 비정상상태의 수치 시뮬레이션을 수행하였으며, 열기류의 평균온도 및 열부력에 의한 압력손실을 검토하여 열부력이 제트팬 댓수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화재로 인한 열부력을 고려하는 경우에 제트팬 댓수의 증가가 필요하며, 특히, 설계화재강도를 100 MW로 하는 경우에는 본 해석조건의 모든 범위에서 열부력에 의한 압력손실이 차량저항에 의한 압력손실의 최대치보다 증가하며, 현행설계기준을 적용하는 경우보다. 최소 2~11대의 제트팬 대수의 증가가 필요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따라서 제연용 제트팬 용량 산정시 열부력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Jet fans are installed in road tunnels in order to maintain critical velocity when fire occurs. Generally the number of jet fans against fire are calculated by considering critical velocity and flow resistance by wall friction, vehicle drag force, thermal buoyance force and natural wind. In domestic case, thermal buoyance force is not considered in estimating the number of jet fans. So, in this study, we investigated the pressure loss due to the thermal buoyance force induced by tunnel air temperature rise and the impact of thermal buoyance force on the number of jet fans by the numerical fire simulation for the tunnel length(500, 750, 1000, 1500, 2000, 3500m) and grade (-1.0, -1.5, -2.0%). Considering the thermal buoyance force, number of jet fans have to be increased. Especially in the case of 100MW of heat release rate, the pressure loss due to thermal buoyance force exceed the maximum pressure loss due to vehicle drag resistance, so it is analyzed that number of 2~11 jet fans are needed additionally than current design criteria. Thus, in case of estimating the number of jet fans, it must be considered of thermal buoyance force induced tunnel air temperature rise by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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