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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생애와 사상 (2)-대명의리론과 상수학을 중심으로-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1 한국학연구 Vol.- No.60

        在以朱子学为中心的17世纪中叶朝鲜王朝思想界, 李端相先导了以象数学为标志的新学问, 他被看作为开启了传承为洛论和北学的西人内部的开放性、进步性学风的人物。 可是, 自从走上仕途以来, 他同意宋时烈等根据朱子学主张对清朝复仇的山林的意见。 1664年围绕着金万均的出任官职问题展开争论,李端相支持宋时烈的对清朝复仇合理性的主张, 与徐必远、金佐明等朋友绝交, 退隐到杨洲东岗。 接着, 1666年发生了国王向淸使跪着谢罪并交罚银的事件, 1667年汉人林寅观等人漂流到济州岛, 朝鲜王朝把他们押解到清朝, 李端相写了海槎诗, 批判了丢弃对明朝义理的朝廷的行为。 隐居于东岗之后, 李端相通过在元会运世的长久岁月中沿着气数的运行考察历史兴亡更替的邵雍的象数学, 诊断自身当下的明清交替的现实。 这一点, 与宋时烈根据孟子的一治一乱说把清朝治理的当下现实认定为暂时的混乱期, 通过保存中华文明期许回复治世的中华主义世界观并无二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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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대설화(幄對說話)와 효종의 비밀 편지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8 한국학연구 Vol.0 No.50

        ≪显宗改修实录≫和≪肃宗实录≫所记录的<幄对说话>以及孝宗赐给宋时烈的四封密信, 是反映北伐论的实际状况以及两人关系的资料, 值得关注。1659年3月11日, 孝宗和宋时烈交谈的记录便是<幄对说话>。两人虽然在北伐的大原则上观点相同, 但在具体方法上各持己见。由此, 两人为了设定北伐的整体方向并共享对眼前现实的理解而进行了对话, 史官记录对话。 对话之后, 孝宗赐給宋时烈三封密信。密信则反映对朝廷悬案的解决方案、对辅佐北伐之大臣的评价和两人紧密地商议民心动向的情况。还有, 孝宗通过王世子传递的所谓<密勿之教>, 提示了关于北伐具体方法的十条意见。主要内容是军事制度改编、军事力量的确保以及作为支撑的保护良民和确保财政的方案。 <幄对说话>和密信, 后世被公开的经过则与显宗~肃宗年间的宋时烈的政治上的变位有密切的关系。1665年史官李世长把<幄对说话>收录于史草, 但庚申政治变局以后才能载于≪显宗改修实录≫。另外, <密勿之教>则甲戌政治变局之后才传递于肃宗, 肃宗在己亥礼颂之后, 根据<密勿之教>洗脱了加给宋时烈的不忠和逆心嫌疑。最终, 孝宗密信在恢复宋时烈的政治合法性方面, 成为具有决定性的根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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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再造藩邦’에서 ‘非禮不動’으로: 바위에 새겨진 명나라에 대한 두 가지 기억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연구 Vol.0 No.28

        명・청교체 이후에도 조선왕조의 유교 지식인들은 명나라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현실적 패자인 청나라에 대한 관심보다, 명나라로 상징되는 중화의 실체에 대한 고민이 그들에게는 더 근원적 의미를 지닌 문제였다. 중화라는 이상세계를 희구하였던 그들에게 명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중원 지배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명나라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기억 역시 점차 변화해 갔다. 임란 때 원군을 파견하여 ‘再造藩邦’의 특수한 은혜를 베풀어 준 명나라에 대한 추념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다. 대신 중화와 이적의 분별이라는 유학의 보편적 담론의 토대 위에서, 중화문명의 수호자를 상징하는 이념적 표상으로서 명나라에 대한 기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숭정제의 유묵인 ‘非禮不動’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중화문명의 계승에 관한 선택적 계보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현실왕조로서 명나라의 실체는 점차 허구화되는 가운데, 중화문명의 계승자라는 이념적 상징성이 부각되었다. 조선 지식인들의 이러한 기억 만들기는 명나라에 대한 단순한 숭배의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보편 문명으로서 중화에 대한 염원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혈통・지역・왕조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중화에 대한 개념 조작 위에서, 조선왕조를 중화문명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사상적 작업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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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7~1637년 조선의 遼民 대책과 토벌론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2 한국학연구 Vol.- No.66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이후 청천강 이북에서 벌어진 東江鎭과 遼民의 작폐는 호란이전보다 한층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毛文龍은 가도 인근 해안을 넘어 내륙까지 진출하여군사를 주둔시켰고, 요민들은 피난한 조선인들의 땅을 차지하고 눌러앉으려 하였다. 또한 그들은 조선의 관리와 군인들을 공격하고 사신 일행까지 습격하는 등 조선의 공권력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모문룡은 조선인들까지 동강진에 편입함으로써, 청천강 이북 일대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두고자 하였다. 1629년 모문룡이 요동경략 袁崇煥에 의해 처형된 뒤, 명 조정은 가도의 일부 병력 및요민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동강진의 내분이 지속되면서 그동안 요민들에게 의식을 공급하고작폐를 단속하던 최소한의 기능조차 마비되자, 절박한 처지에 내몰린 요민들은 동강진의 통제에서 벗어나 내륙을 횡행하며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요민의 登州 송환을 기본 방침으로 고수하던 조선 조정에서는 두가지 방책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동강진과 요민을 무력으로 제어하려는 토벌론과 청천강 이북의 통치를 잠시 유보하자는 청북포기론이었다. 특히 1630년 劉興治의 반란 이후 요민을대하는 조선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조선 조정은 요민들이 명을 배신하고 후금과 내통할가능성을 명분으로 삼아, 가도에 대한 식량 지원을 중단하고 군사를 보내 가도를 공격했다. 그러나 명 조정은 여전히 동강진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했고, 요민의 작폐는 계속되었다. 또한 후금은 동강진의 내분을 틈타 가도를 공격하며 재침을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 조선은 청북의 방어체제를 완비하지 못한 채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1637년 청에 항복한 직후 수군을 파견해 가도 공격에 동참하여 요민을 토벌하고, 남한산성에서 맺은 약조에따라 요민을 수색하여 청으로 송환하기 시작했다. 이제 명나라 백성으로 조선이 보살펴야 할요민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체포하여 북송해야 할 청의 백성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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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크리트구조 내구성 설계기준에 만족하는 30~40MPa 이상의 순환골재 콘크리트 제조를 위한 실험적 연구

        우경섭,김정호 한국건축시공학회 2024 한국건축시공학회지 Vol.24 No.6

        South Korea to strengthen the safety of building structures, the durability design standards for concrete structures were recently revised to design compressive strength of 30MPa or more when exposed to the outside and subjected to rain. As such, the Korean government has recently increased the compressive strength of concrete to ensure the safety of building structures. However, the compressive strength of recycled aggregate concrete is limited to 27MPa or less when applied to building structures, and the scope of application of recycled aggregate concrete is greatly reduced when applying the revised Concrete Structure Durability Design Standards and temperature correction strength, so even the application of recycled aggregate concrete in the construction field will be very limited and difficult. Therefore, for the wider application of recycled aggregate concrete, first of all, it is necessary to develop a technology to produce stable 30-40MPa recycled aggregate concrete. Therefore, this study analyzes the physical, mechanical, and durability properties of 30MPa and 40MPa recycled coarse aggregate substitution rates by development the chemical admixture used in recycled aggregate concrete and using it to provide basic data for the production of high quality and high durable recycled aggregate concrete and promote the widespread utilization of recycled aggregate. 우리나라는 건축물 구조체의 안전성 강화를 위해 콘크리트구조 내구성 설계기준(KDS 14 20 40)을 개정하여 외부에 노출 되어 비를 맞을 경우 압축강도를 30MPa 이상으로 설계하도록 개정하였다. 이렇듯 최근 한국 정부는 건축물 구조체의 안전 을 위해 콘크리트 압축강도를 상향시키고 있다. 그러나 순환골재 콘크리트는 과거 기준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으로 건축물 구조체에 적용 시 압축강도를 27MPa 이하로 한정하고 있으며 개정된 콘크리트구조 내구성 설계기준(KDS 14 20 40) 적용 시 순환골재 콘크리트의 적용 범위는 크게 감소되어 고품질 순환골재 콘크리트가 제조되어도 건축 분야에서의 순 환골재 콘크리트 적용이 매우 제한적이고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순환골재 콘크리트의 많은 활용을 위해서는 우선 안정적인 30~40MPa 범위의 순환골재 콘크리트 생산 기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순환골재 콘크리트의 품질 개선 및 강 도 증진을 위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고 품질편차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콘크리트구조 내구성 설계기 준(KDS 14 20 40)에 만족하는 품질편차가 없는 고품질 순환골재 콘크리트 제조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고 순환골재의 많은 활용을 도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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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 두만강 지역의 유학자들-김노규(金魯奎)와 김정규(金鼎奎)를 중심으로-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 한국학연구 Vol.0 No.32

        19세기 말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한 수많은 조선인들 중에는 상당수의 전통적 유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가장 먼저 두만강 너머로 이주했던 함경도 북단의 유교 지식인들은 대체로 중앙 학계에서 栗谷 李珥와 尤菴 宋時烈에 의해 정립된 서인-노론 학맥을 계승하고 있었다. 송시열의 제자 鶴巖 崔愼과 農巖 金昌協 등이 이 지역에서 강학을 시작한 이래 그 문하에서 함경도 출신 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하였는데, 19세기 말~20세기 초 이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인 鶴陰 金魯奎와 龍淵 金鼎奎 역시 송시열이 제시한 조선중화주의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생활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수’인 서구의 침략에 직면했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중국인들과 뒤섞여 거주하며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역사적 경험은 한반도의 협소한 시야에 갇혀있었던 전통적 중화주의의 폐쇄성을 일정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은 태생적 혈통 내지 지역보다는 유교문화에 대한 분발 여부가 화이분별의 주된 기준이라는 문화적 화이론의 기반 위에서, 조선이 중화문명의 계승자일 뿐 아니라 함경도 역시 문명의 중심지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화이의 可變性을 재확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이가 시대에 따라 지역적으로 순환한다는 주장을 전개하며, 자신들이 거주하던 두만강 유역을 중화문명 부흥의 새로운 공간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그 곳에서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요컨대, 김노규와 김정규 같은 한말 함경도의 유교 지식인들에게 두만강은 청과 조선, 중화와 이적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두만강 너머의 공간 또한 불우한 유랑의 땅이나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인식되지도 않았다. 지금의 함경북도 일원 및 연변 지역을 아우르는 새로운 중화세계의 건설, 그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20세기 초반 적지 않은 유학자들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연변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만들었던 사상적 배경을 이루었다. 19世紀末期, 越過豆滿江移居間島的衆多朝鮮人中也包括了相當一部分的傳統儒教知識分子。尤其是最早遷居的咸鏡道北端的儒學者們, 他們基本上繼承了中央學系中栗谷李珥和尤菴宋時烈代表的西人-老論學脈。宋時烈的弟子鶴巖崔愼和農巖金昌協等在咸鏡道講學之後, 其門下開始正式培養咸鏡道的儒學者。19世紀末到20世紀初期, 咸鏡道的著名儒學者――鶴陰金魯奎和龍淵金鼎奎繼承了宋時烈的朝鮮中華主義思想, 并以此來認識他們所處的豆滿江地區的生活世界。 在遭受“禽獸”西歐侵略的時代背景下, 再加上與當地混居的中國人共同抗日的歷史經歷, 使他們從一定程度上克服了局限于韓半島狹小視野下的傳統中華主義的封閉性。他們不按天生的血統和地區來區分華夷, 而是以儒教文化的發展程度爲標準, 即以文化的華夷論爲本, 提出朝鮮不是僅有的中華文明繼承者, 咸鏡道也可以蛻變成文明中心的可能性。他們不僅重新確認了華夷的可變性, 還提出華夷隨時代變化在地區間循環的主張, 並且將他們所在的豆滿江流域視爲中華文明復興的新空間, 爲建設豆滿江的儒教理想社會而努力。 總而言之, 對金魯奎和金鼎奎等韓末咸鏡道的儒學者來說, 豆滿江並非淸朝和朝鮮, 中華和夷狄的分界線。而且, 將這片地區視作顛沛流離之地, 或獨立運動根據地的認識還未能成形。他們的夢想是以豆滿江下流的慶源爲中心, 在現今咸鏡北道一帶和延邊地區上建設起新的中華世界。正是在這種思想背景下, 20世紀初期有不少的儒學者跨越豆滿江而遷居延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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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에서 집단전기학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4 한국학연구 Vol.- No.74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는 지난 2007년 이래 해외 각 지역에서 수행되는 한국학의 다양한 맥락을 탐색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 학술사의 재구성을 위한 지식인 집단에 대한 총합적 연구’라는 목표 아래 집단전기학(Collective Biography)이라는 방법론에 착목하게 되었다. 20세기 초반 서양 학계에서 정립된 집단전기학은 개인들의 전기적 약전(略傳)을 수집하고 이를 나열하는 작업 및 그러한 전기 자료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특정 집단의 역사성을 포착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은 일부 엘리트들의 관념적 지향을 사회 변동의 추동력으로 간주하던 전통적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보다 많은 사람들의 현실적 관계에 대한 통계와 분석에 기반하여 사회적 연결망과 이동성을 분석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 역사학계를 돌이켜 보면 집단전기학이라는 용어는 대단히 생소하지만, 그러한 문제의식과 방법론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기록의 나라’라 칭해지는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풍부하고 다양한 종류의 집단전기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 자료들은 첫째, 인명록과 같이 특정 범주에 속하는 인물군 전체의 정보를 망라하려 시도한 인물지(人物志), 둘째, 편찬자의 주관적 판단 아래 특정한 이념 및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들을 추려내어 수록한 인물전(人物傳)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 근대 이후 성립된 위인전집류 또한 수록 인물의 선정 과정 및 그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 편찬자의 역사관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서 및 인명록 등을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집단전기학과는 또 다른 차원의 집단전기학을 구성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자료들은 학술적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지기 어려운 지역 혹은 시대, 예컨대 해방 이후 북한학계 등을 들여다보기 위한 접근 방식의 하나로 활용될 수 있다. 그 예로서 2011년 간행된 『조선력사인물』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사회주의 역사 서술의 출발점인 계급성에 더하여 자주성으로 규정되는 민족 담론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주체사상 성립 이후 북한 역사학이 직면하고 있는 고민이 여러 인물들의 전기를 통해 표출되고 있다. 최근 서양 학계의 집단전기학 연구는 컴퓨터를 활용한 인물 자료의 전산화 작업에 기반하여, 지배층 위주의 사례 연구에서 일반 대중을 포괄하는 계량적 분석으로 이행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한국에서의 집단전기학 역시 디지털 인문학과의 결합을 통해 20세기 이후의 서구중심적 근대주의와 같은 지배적 담론 및 이데올로기의 계보 아래 구성되어 온 기존 역사 서술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론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This article was written as part of the “Prosopography of Overseas Korean Studies for Deepening and Diffusing East Asian Koreanology” project, currently being carried out by the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t Inha University. Since 2007, the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as been exploring various contexts of Korean studies conducted overseas. In the process, the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as focused on the methodology of collective biography under the goal of “comprehensive research on intellectual groups for the reconstruction of East Asian scholarly history.” Collective biography, which was established in Western academia in the early 20th century, involves the collection and listing of biographical sketches of individuals, and analyzing these biographical materials to capture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a particular group. This methodology moves away from traditional historical narratives that regarded the ideological orientations of a few elites as the driving force of social change. Instead, it has the advantage of being able to analyze social networks and mobility based on statistics and analysis of the practical relationships of a broader range of people. Although the term “collective biography” is relatively unfamiliar in Korean historiography, this awareness of the issue and the methodology itself are not entirely absent. Even in the Joseon Dynasty, which is often referred to as a “country of records,” there is a wealth of diverse collective biographical materials. These materials can be categorized into two types: first, the “Inmulji” (人物志), which attempts to comprehensively cover the information of all individuals belonging to a certain category, similar to a directory; and second, the “Inmuljeon” (人物傳), which selects and records individuals based on certain ideologies and criteria according to the subjective judgment of the compiler. Meanwhile, the biographies of great figures compiled in the modern era also offer a different dimension of collective biography. Through the process of selecting individuals and evaluating them, these compilations reveal the historical perspective of the compiler, providing a contrast to the typical collective biography that is based on raw data such as documents and directories. These materials can serve as a primary approach to regions or periods that have not been sufficiently examined or are difficult to research, such as North Korean studies after 1945. For example, an analysis of the contents of The Historical Figures of Korea published in 2011 reveals the unresolved dilemmas faced by North Korean historiography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Juche ideology, where it was necessary to combine the discourse of nationalism, defined by autonomy, with the class-based perspective that is the starting point of socialist historical narratives. Recently, Western academic research on collective biography has transitioned from case studies focused on the ruling class to quantitative analyses encompassing the general public, based on the computerization of biographical data. In this context, collective biography in Korea, when combined with digital history, is expected to be an effective methodology for supplementing the limitations of existing historical narratives that have been structured under dominant discourses and ideologies, such as Western-centric modernity in the 20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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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대명유민(大明遺民)의 망복지의(罔僕之義)-제남(濟南) 왕씨(王氏) 가문의 사례-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한국학연구 Vol.0 No.36

        17세기 중반 병자호란과 명청교체를 전후하여,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에는 대규모 이민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명나라 멸망에 즈음하여 수십 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조선왕조로 귀화해 왔는데, 그들은 조선 사회에 동화해 가는 과정에서도 ‘大明遺民’으로서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명나라 멸망 이후 이제 조선왕조가 중화문명의 적통을 계승하였다는 이른바 ‘朝鮮中華主義’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명나라의 백성이었던 귀화 한인들은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我國’이라 부르면서도 皇明世臣의 후예임을 여전히 자부하던 그들은 비록 겉으로는 자신들이 치발을 면하고 중화의 의관을 보전함이 모두 ‘아국’의 크나큰 은혜라고 표현하였지만, 조선의 풍속과는 또다른 명나라의 예법을 정체성의 근원으로 삼는 이중적 심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온 세상이 오랑캐 땅으로 변해버린 상황 속에서 명나라 황제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식을 담은 ‘罔僕之義’라는 표현 속에는 大報壇 守直官으로서의 자부심과 동시에 그것밖에 할 수 없었던 사회적 차별에 대한 비판 의식, 더 나아가 자신들의 실제 처지를 伯夷와 叔弟에 견주며 조선에서도 출사하지 않은 절의로 포장하려는 절박한 의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이 고집했던 永曆 연호는 바로 조선중화주의라는 보편적 세계관 속에서 차별받던 소수자로서 귀화 한인들의 모호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对于朝鲜知识分子来说, 来自明朝的汉人似乎不是特别受欢迎的对象。朝鲜中华主义者因为在明朝灭亡之后, 由朝鲜继承了中华传统而自豪。作为‘原‘中华的明朝遗民的出现不能不引发他们的纠结苦恼。 在这样的社会氛围中, 入籍朝鲜的汉人们自然形成一种特殊复杂的身份认同。他们称朝鲜为“我国”, 但仍以皇明世臣的后裔为荣。虽然他们表面上声称免遭剃发和能够保持中华的衣冠是受“我国”的恩惠, 但将和朝鲜风俗不同的明朝礼法作为身份认同的根基, 表现出双重的心态。“罔仆之义”表达了在全世界都变为夷狄之地的情况下继承明朝皇帝的正统性的意识。其中, 不仅体现了作为大报坛守直官的自豪感, 同时也包含着对限制自己仕途的社会歧视的批判, 甚至将自己的境遇和伯夷、叔齐相比, 用誓不在朝鲜出仕的气节来掩饰自己迫不得已的心态。他们坚持使用永历年号, 这年号便象征了在朝鲜中华主义的普遍世界观中受双重歧视的归化汉人的复杂的身份认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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