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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承政院日記》 改修 연구

          오항녕(Oh Hang nyeong)(吳恒寧)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6 泰東古典硏究 Vol.22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본고에서는 불에 탄 《승정원일기》의 개수작업에 대한 기록인 《개수일기등록(改修日記謄錄)》과 《일기청개수등록(日記廳改修謄錄)》을 통하여 그 개수과정을 살펴보았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화재(火災)로 인해 소실된 뒤, 다시 소실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남은 자료인 《개수일기등록》은 영조 22년부터 이듬해까지 계속된 개수과정에 대한 기록이며, 《일기청개수등록》은 고종 27년(1890)에 있었던 개수 작업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소실된 기록을 복원하자는 발의에서부터 완성까지, 등장하는 인물이나 그들의 작업 내용과 근무 일수, 개수과정의 세부적인 논의, 각각의 규정, 소용되는 물품 등에 대한 정보가 고스란히 실려 있는 것이 이들 등록이었다. 특히 서울과 지방의 관청은 물론 개인의 문집도 아울러 수집하여 부족한 자료를 보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나아가 본고에서는, 《승정원일기》의 개수가 사료비판의 관점에서 보면 예사롭지 않은 문제를 제기한다고 보았다. 학계에서 명시적, 암묵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견해와는 달리, 적어도 개수된 《승정원일기》 는 실제 내용에 있어서 타다 남은 기록을 모았거나, 다른 자료에서 베껴서 다시 만든 제2의 《승정원일기》라는 점에서 전혀 1차 자료 로 볼 수 없다. 원래 주서가 편찬해놓은 《승정원일기》의 경우에도 자료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사료비판의 여지는 남아 있다. 이런 점은 기록학의 이론을 통해 차후 보완해야할 것이다. In this article, I studied the restoration of the burned Secretary s Diary by examining two records that recorded the procedure of the restoration. The one is the Registry of the restoration of the Secretary s Diary that was concerned to the restoration in the Youngjo s reign(22th years. 1746) and the other is the Registry of the restoration office of the Secretary s Diary that was concerned to the restoration in the Kojong s reign(27th years. 1890). In these registries, we can find the whole procedure of the suggestion and the processes of the restoration. And these registries showed the business itself, the days of services, rules and guidelines, materials and things being consumed in relation with the restoration. Especially I arranged the books and records that used in reconstructing the burned Secretary s Diary. Furthermore, I suggested a problem of text-critic(Quellenskunde). In the academic society of Korea, the Secretary s Diary has been regarded as a primary source in historical research. However, can we regarded the restored Secretary s Diary as a primary source? And is the Secretary s Diary itself also a primary source? It will be an another step to text-critic that need the help of archival studies or diploma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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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광역시 기록관리의 현실과 과제

          오항녕(Oh, Hang-Nyeong)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4 인천학연구 Vol.3 No.-

          This study focused on the records and archives management of the local government in general and Incheon Metropolitan City in particular. At first, I outlined the meaning of local archives management in the Public Records Management Act that was enacted in 2000. Secondly, I introduced a few advanced cases of foreign archives management system. Thirdly, I examined the reality of the records and archives management of the Incheon Metropolitan City. And finally, I sought for the vision and strategy that promote the preservation of regional history and memories and the development of the democratic administration. Incheon Metropolitan City has had the same problems the public sector has in records and archives management in Korea. The indifference on the archives management of the high-level officers, the absence of the professional archivists and records managers, the weakness of the records and archives management system that control and preserve the local history and the administrative experiences, the exclusion of civilian participation, etc. Furthermore, Incheon Metropolitan City as a local government has not any claim to the records that was produced by itself, According to the new Public Records Management Act, Incheon Metropolitan City has to transfer the records to National Archives, and even the records of districts( Gu or Dong ) which are under control of the city in administrative hierarchy to National Archives directly without the archival consideration with the city. From the view of the National Archives, the city without Archives is same as districts that is forced to operate the records center. However, the implementation of the General Records Schedule opens the way to the scientific and systematic Management of records. Corresponding to the civilian movement for the information freedom, the records and archives management becomes the keyword and the most effective method that will lead us to the administrative accountability and transparency. In this context, I suggested the Policy-Network to promote the movement. The Policy-Network , including the local government officers, NGOs, and scholars, will test the reality of their own local management system on records, design the proper model for it. By doing so, we will be able to overcome the current subordination of the local government to the central government and ultimately remain the memory of our own on the basis of democratic govern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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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치주의와 대칭적 경세론에서 본 《경연일기(經筵日記)》

          오항녕 ( Hang Nyeong Oh ) (사)율곡연구원(구 사단법인 율곡학회) 2014 율곡학연구 Vol.28 No.-

          본고에서는 율곡의 『경연일기』를 중심으로, 『경연일기』가 갖는 제도사, 사상사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연일기』라는 자료가 탄생한 배경을 제도사적으로 살펴보는 것이고, 『경연일기』의 내용에서 율곡 이이가 이해하는 경세론과 권력의 특징을 대칭성 모델로 해석해보자는 취지이다. 『경연일기』는 ‘經筵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日記’로, 조선 문치주의의 산물인 史官 시스템의 결과였다. 즉 홍문관 관원이 사관을 겸하면서 작성하게 되어 있는 기록이 경연일기였다. 물론 율곡은 홍문관 관원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직을 거쳤다. 하지만 홍문관 이외의 관직도 모두 兼春秋의 관직이었다. 즉 『경연일기』는 바로 조선 문치주의의 한 축을 이루었던 사관제도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런 이해는 자칫 율곡의 자질로 환원시켜버릴 수 있는 『경연일기』의 산출 배경을 좀 더 역사적 지평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본고의 두 번째 관심은 율곡이 『경연일기』에서 전하고자 했던 사상과 경세론이었다. 하나는 上下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 즉 정치권력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 권력을 통해서 해당 사회의 삶을 어떻게 조직, 경영할 것인가를 다루는 경세론의 측면이다. 修身에서 治國으로의 확장은 儒家의 공통적인 관심이지만, 조선의 경우 그 특징적인 변화는 율곡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보인다. 요순시대를 모범으로 한 이상 경세론과 권력에 의해 행사되는 정책 역시 專制가 아닌 損上益下, 不與民爭利라는 王道政治의 원리로 수렴할 것을 요구받는다. 비대칭적 위계 속에 존재하는 국가권력의 정점에 있는 왕권이, 학문과 토론을 통해 쌓은 經世의 구체성 속에서는 다시 聖人의 가치로 구현할 것을 율곡 이이는 요구하였다. 이러한 대칭성의 논리 속에서 사림은 소통을 통해서 국왕을 믿고 백성을 교화하며, 백성들은 민생안정을 통해서 국왕과 사림을 믿는 것이다. I studied the Diary of Royal Lecture (the DRL) of Yulgok YiYi On the Perspective of the Literati and the Symmetry of Governance. The literati of governance means that the birth of the DRL was examined by the institutional approach and the Symmetry of governance means that the logic of the DRL was examined by the political and anthropological perspective. The DRL was producted on the basis of the literati of governance Troica, the Royal Lecture, the Censorate and the Court Diarist. First of all, YiYi wrote the DRL as a royal lecturer. Secondly, he wrote the DRL as the part-time court diarist such as a censorate, a diplomat, etc., I suggested in this article. YiYi was always a officer of the Office for Annals Compilation during the period which was included in the DRL This means the DRL was a cultural product of the system rather the work of a genius. My second concern was the logics of the symmetry of governance that were founded in the DRL. Especially I focused on the right execution of the political power and the possession and distribution of the wealth and power. The extension from the cultivation of the self to the ruling the state was the common these of the confucian scholars. However the characteristic change of it in Joseon society was happened in the DRL. On the basis of the Yo-Soon model who were considered as the chiefdom of the primitive communities, YiYi emphasized the sage-learning of the king that transformed the asymmetry of political power, the king-subject relation, into the literati governance. In the possession and distribution of the national wealth, YiYi insisted the non-competition policy between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This idea also was adopted to the tax system so radical that the king and the rulers had a duty to take the rich and to give to the poor. In this symmetry, the literati believe in the king and cultivate the people on the one hand, the people give the legitimacy to the king and his 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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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세 중신(重臣)의 심양(瀋陽) 구류와 교유 ― 김상헌(金尙憲)·최명길(崔鳴吉)·이경여(李敬輿)의 경험

          오항녕 ( Oh Hang-nyeong ),최옥형 ( Cui Yu-heng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9 大東文化硏究 Vol.0 No.105

          청나라 수도 瀋陽에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 잡혀 온 포로와 인질, 분주히 오가는 사신들이 머물렀다. 침략과 패배를 겪은 조선인에게는 특수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었다. 본고에서는 심양에 억류되었던 조선의 세 重臣인 김상헌, 최명길, 이경여를 중심으로 심양살이의 실제와 의미를 살펴보았다. 특히 ‘척화(=항전)와 주화’의 당사자들이 심양에서 같은 곳에 구금되어 서로 이해하고, 그 경험이 이어지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심양은 치욕과 분노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은 서로의 마음만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전후의 노선을 ‘經權’의 관점에서 풀었던 김상헌과 최명길은 심양 구금 생활을 통해 오해를 풀고 정당성을 얻었다. 여기에 이경여도 간여하면서, 현실 대응이 달랐을 뿐 명분과 지향은 같았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심양의 경험은 이후 송시열, 남구만, 이민서, 김수항, 김수증 등 세 중신의 후손이자, 조선의 정치-사상계의 주역들에게 전해졌다. 김상헌은 의리의 표상을 굳건히 하였고, 최명길은 한켠의 의심을 씻고 나라를 구한 공을 인정받았으며, 이경여는 온후함으로 이들 사이의 지렛대가 되었고 復讐雪恥의 또 다른 기둥으로 떠올랐다. 심양의 영향은 이들 중신 집안의 혼인과 교유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己巳士禍와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심양의 경험과 기억은 파탄났다.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이 김수항의 賜死를 주도했던 오시수 등을 천거하여 등용한 일이었다.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 김창흡은 최석정에게 절교 편지를 보냈다. 이 절교는 20여 년 뒤 최명길의 손자 최석항이 앞장서서 김상헌의 증손자 김창집 등과 이경여의 손자 이건명, 이이명 등을 무고하게 죽이는 신임사화에서 더 악화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Shenyang, the capital of Qing China, was the place of the captives, hostages, and envoys of Choson after the Qing Invasion in 1636. For the people of Choson who defeated Shenyang was also the place of complex sentiments with indignity and dishonor. I studied the life and reconciliation of the three persons of Choson who did a leading role at the dispute during the Namhan-fortress resistance and were interned in Shenyang one by one. Kim Sang-heon, Choi Myeong-gil and Yi Kyeong-yeo were transferred and imprisoned with different reasons and times each other. For them Shenyang was the place of rage and resentment and the chance to reflect the idea of the others because of the time of unable. The conflict between the cause and response could resolve in this time. The experience of Shenyang prison transferred and reminded Song Si-yeol, Nam Gu-man, Yi Min-seo, Kim Su-hang who were their descendants and followers with positive memories strengthening the representative of Kim Sang-heon of the cause in the resistance 1636, recognizing the merit of the negotiation of Choi Myeong-gil, endowing the new face to Yi Kyeong-yeo. The experience appeared in marriages and relationship among them. However the favorable relationship was ruined in the course of the calamity of literati in 1689. After the restoration of 1694 Choi Seok-jeong, a grandson of Choi Myeong-gil, recommended Oh Si-su, Yi Seo-wu etc. who insisted the death penalty on Kim Su-hang, a grandson of Kim Sang-heon, and Yi Sa-myeong, a grandson of Yi Kyeong-yeo in 1689. Kim Chang-hyeop and Kim Chang-heop sent a letter breaking off friendship. The break in 1698 resulted in the disastrous false accusation and oppression of the Soron to the Noron in 1721~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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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정치활동과 경세론(經世論)

          오항녕(Oh Hang-Nyeong) 고려사학회 2012 한국사학보 Vol.- No.46

          In 1616, a memorial of a young man shook the court of King Khang-Hae. He criticized the most powerful vassal Lee Yi-Chum for his autocracy. By the memorial all the court boiled with refutation and re-refutation. The young man was Yoon Sun-do from Haenam. This meaned the clash of the same party, Buk-in Party, and the omen of the decline of King Khang-Hae. As a result, Yoon went into exile during the reign of King Khang-Hae. Inspite of the exile, Yoon became the incarnation of the Righteous Public Opinion all his life. After the Reformation of King In jo, Yoon became a teacher of Prince Bonglim, later King Hyojong. But he did not attend on King Injo in the Invasion of Qing China, he was criticized with his lack of royalty. In the reign of King Hyojong Yoon was recommended as a partner and adviser of Hyojong who had an idea of relatives-centered policy-making leadership. However the outbreak of Yoon which denunciated the influential leader Won Du-pyo made it impossible. Yoon returned to the court in 1658 and claimed the reconstruction of the Jasan Academy which was built in memory of Jung Gae-Chung who was dead in relation to the conspiracy of Jung Yo-Lip. Doing this Yoon was speaking for the opinion of Honam literates and made the turning point of reunion of Buk-in Party in the name of Nam-in Party. In the first year of King Hyeonjong Yoon consisted that Jayeidaebi had the three-year mourning for King Hyojong, and disputed the one-year mourning that was assisted by Song Si-yeol. This dispute became worse by Yoon's insistance that the one-year mourning meaned the blasphemy against King Hyojong. This dispute concluded to the one-year mourning at that time, but after fourteen years the second dispute on the ritual was started on the base of Yoon's insistance. His opinion on the policy was pro-landowners. As a governer of town he insisted the old method and procedure for the measurement of land. The Current Issues dedicated to King Hyojong showed his attitude on reformation. His idea was similar to that of Song Si-yeol and Chusi. In this respect, it is difficult to jump to the conclusion that he was post Neo-confucia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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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동아시아 봉건 담론의 연속과 단절

          오항녕 ( Hang Nyeong Oh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1 사총 Vol.72 No.-

          After the immigration of western history in late 19th century, The traditional meaning of ``fengjian (封建)`` was changed with the word ``feudalism``. I studied this issue from two aspects, first, traditional disputes on ``fengjian``, and second, the appropriation of ``fengjian`` in modern western historiography. In ancient China the fengjian meaned the divided-ruling of the family in Chu(周) dynasty. The power of domination was given from the conference of the king(王) to the dukes(諸侯, 公). The fengjian of that age was very similar to the feudalism of middle age of western society. However the unification of Qin(秦) dynasty of China forced to convert the whole state system. Qin dynasty drove the policy of centralization. As a result, the fengjian became the subordinate under-system of the centralized government. As was the same case in Joseon dynasty. In the period of centralization, the fengjian functioned a role for self-governance mainly forced of the rural community. In this respect, the disputes around the fengjian contributed to the balance to restraint the central power. After the introduction of ``feudalism``, all thing around the fengjian was changed. The traditional disputes about the fengjian was absorbed in the traditional disputes into the vortex of ``feudalism``, so to speak, reconstructed in the frame of the universal history which was prevailed in 19th century and I called it a ``pseudo``-universal history, a fiction of several historians and a ideology of modern imperialism. Both, feudalism and fengjian, were translated same term ``fengjian`` since 19th century in East Asia despite the different historical context. This means that the discourse of the feudalism may be de-constructed by the concept of ``fe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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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순암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 순암안정복(順菴安鼎福)의 단대사편년체(斷代史編年體), 『열조통기(列朝通紀)』

          오항녕 ( Hang Nyeong Oh ) 한국실학학회 2013 한국실학연구 Vol.0 No.25

          본고에서는 안정복의 『열조통기』에 대해, 편년체 역사서의 전통, 특히 실록과의 연관 속에서 사학사적 의미를 살펴보았고, 『열조통기』의 광해군대, 현종대 기사의 특징을 사례연구로 검토했으며, 다시 『열조통기』를 편년체 저장기억의 특징 속에서 반추해보았다. 먼저 『열조통기』를 편년체라는 사학사의 전통 속에서 살펴보았다. 『열조통기』는 조선초기 강목체 논의를 거쳐 정착된 실록의 「시정기찬수범례」와 매우유사한 패턴으로 편찬되었다. 『국조보감』이 주요 참고 문헌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열조통기』가 간접적으로 실록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할수 있다. 그런데 실록과 같은 편년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사찬 역사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사(記事)의 범주가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졸기(卒記)나 제배의 형식은 실록과 거의 똑같고, 외교, 등과(登科) 현황, 상소 등도 내용만 줄였을 뿐 실록과 대동소이하다. 또한 『열조통기』 기사의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광해군대, 현종대를 사례로 검토하였다. 광해군 초기 임해군 옥사, 대명 관계의 왜곡, 대동법 시행의 좌절 등, 광해군대에 대한 안정복의 찬집은 중초본(中草本), 정초본(正草本)으로 남아 있는 『광해군일기』의 기록과 일치하거나 유사하였다. 광해군 3년 이후의 정세에 대해서 안정복은 다양한 자료를 통하여 상황을 전달해주었다. 대북(大北) 중심의 전횡을 비판하면서, 이이첨과 정인홍의 독단, 궁궐공사에 따른 민생파탄, 무원칙한 후금정책을 주요 의제도 다루었음도 살펴보았다. 현종대의 기사 역시 실록과 유사하게 나타났다. 현종대의 현안이었던 기해예송과 관련, 안정복은 남인 허목의 효종의 차장자설에 입각한 삼년복을 지지하였고, 윤선도의 종통-적통론에 대해서 논평은 없었지만 윤선도의 처신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남인 당론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국정 운영 및 대동법 같은 민생과 관련된 정책은 당색에 상관없이 수록함으로써, 내용은 비록 소략하더라도 기사의 질은 같은 남인 중심으로 편찬했던 『현종실록』보다 나은 측면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실록-일기라는 원시적, 초보적 기록 방식이 갖는 무정형성을 특정한 기억방식, 즉 문화적 집단적 기억과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당시 역사서로서의 수준이 높은 당론서가 출현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집단 기억은 강제적이고 폐쇄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저장기억은 그런 집단적 기능기억을 비판할 수 있는 역사서술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미 『동사강목』으로 역사가의 재능을 보여준 안정복이, 편년체 『열조통기』를 통해 후대에 남기려고 했던 메시지, 그것은 당론(黨論)이 아니라 당론을 지양(止揚)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저장기억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관찬 실록이 아닌 사찬 실록을 편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과제로 제시해보았다. In this article I tried to explain the structure and characteristics of the Yeoljo-Tongki, the history of Joseon Dynasty being compiled by Ahn Jung-Bok(Soonam). Soonam imitated the Veritable Records in compiling articles of the Tongki. The categories of the Tongki is similar to those of the Veritable Records. Between the Veritable Records and the Tongki, there was another history called the Kukjo-Pokam, the Great Mirror of Our Dynasty, which was compiled to refer to kingship in the government. So the categories and forms of the articles such as comment, diplomat, literati exam., opinions of subjects, etc., of the Tongki look like the Kukjo-Pokam. In order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Tongki, I chose two sample period of King Kwang-Hea and King Hyeon-Jong. First, the criminal case of the prince Imhea, the distortion of Joseon-China relationship and the failure of Tax reform of the Early Kwang-Hea reign in the Tongki were coincided with the records of the Diary of King Kwang-Hea. After the third year of Kwang-Hea, the Tongki dealed with arbitrariness of Yi I-Chum and Jung In-Hing, the excessive waste of finance in the palace constructions, the opportunism in foreign policies criticizing the Dae-Buk regime. The articles of the King Hyeon-Jong of the Tongki were also similar to the Veritable Records and Soonam supported the Nan-In Party who insisted the Three-year Mourning at the funeral of King Hyo-Jong. But by recording the Tax reform of Suh-In Party ect., the Tongki was more fair than the Veritable Records. I emphasiz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diary-form record as the primitive memories[the memories for preservation] by contrasting the cultural and collective memories that preserve particular records and remind them of their social identity.[the memories for function] In this respect the collective memories may be apt to be a closed history and the memories for preservation may complement the memories for function by providing various records from time to time. I think Soonam, as a historian, wanted to transfer the memories for preservation to sublate the risk of the memories for fun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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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논문 : 내상(內傷)과 외상(外傷)을 넘어 -인조시대 대내외 정책-

          오항녕 ( Hang Nyeong Oh ) 한국불교사연구소 2014 한국불교사연구 Vol.4 No.-

          인조대 인식은 광해군대 인식과 짝을 이룬다. 조금씩 사료에 근거하여 역사 현실에 가까운 논문이 제출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광해군 중립외교론의 위세는 강하고 그에 따라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인조대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근대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계해반정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결과가 실은 광해군 재평가, 광해군의 부활이었다. 일제 식민사관론자들이 조선후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식민지 합병을 합리화하기 위해 광해군을 띄운 것은 우연이 아니라 정확한 논리적 장치였다. 광해군대가 살기 힘들어 반정을 일으켰던 사람들에게는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선조 이후 해결해야할 민생과 재정, 사회적 문제들이 멈추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정도가 아니라 지속된 궁궐공사로 악화된 채 방치되었다. 잃어버린 15년의 시간이 남긴 무게는 단순히 지나가버린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실기(失機)의 업보까지 남겨주게 마련이었다. 조선 사회와 인민들은 광해군 15년 동안의 시간을 ‘잃어 버렸다.’ 민생회복, 사회통합, 재정확보, 군비확충, 문화발전 등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이 오히려 그 반대로 흘러갔다. 계해반정 이후 사람들은 다시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반정은 그들이 선택한 행위이기도 했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그러므로 선택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먼저 광해군 때 백성들에게 부당하게 또는 추가로 부과된 세금을 탕감하였다. 조정 관리들의 녹봉부터 반으로 줄였고, 공물도 삭감하였다. 공신들의 세곡도 줄였다. 중단된 대동법도 다시 시작하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남겨준 나라의 상황을 임진왜란의 충격과 마찬가지 비상사태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광해군대 잔여세력의 크고 작은 반란이 이어졌다. 인조 5년에는 후금의 침략을 받았다. 단순한 불안한 정세가 아니라 안팎으로 현실적인 위협들에 대처해야했다. 하지만 인조 14년 병자호란과, 이후 청나라의 북경 함락은 동아시아 질서를 뿌리째 흔들었음은 물론 조선에게 변화된 국제환경에 강압적 적응을 요구하였다. 동아시아의 평화의 유지라는 명분과, 문화선진국이자 넓은 땅과 인구를 가진 대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조선과 중국은 사대 관계를 맺어왔다. 임진왜란 당시 명이 원군을 보낸 일은 명분과 현실 모두 강화하였다. 이것이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인식되었다. 동시에 척화의리는 앞서 홍익한이 천자로 칭하려는 청의 의도와 조선의 입장에 대한 견해를 명료히 표현한 데서 확인하였듯이 조선의 자주성에 대한 침해를 거부하는 논리였다. 그러므로 소중화라는 문화적 자부심에 기초한 사대 외교는 당시의 국제질서에 대한 주체적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조선의 군사체계가 재편되는 때였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방군수포(防軍收布)로 표현되듯이 조선전기 병농일치체제에서 납포군화하는 추세와 함께 후금의 직접적인 국방상의 위협으로 인해 인조반정 이후 군정 개혁과 대안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전래의 호패법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고, 낙강 유생의 군역 충정이나 포의 징수, 사족에게도 군역을 지우는 호포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김장생 등의 문제제기는 균역(均役)을 통해서만이 군역 이탈을 방지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대안은 군역 불균 해소와 재원 충당 방법으로 효종대 이후 전개된 호포론(戶布論)에서 수렴되었다. Because of the historical modernism, the colonialistic approach prevailed in the study on the period of KwangHea-Injo since 1930`s, which was contrasted with the view of Joseon period. Especially the two war, Qing China invasions acctually, reinforced the negative valuation to the Injo period and his politicians. However, the colonialists` overestimation of KwangHea`s foreign policy and domestic care was the clever and distorted project for the rationalization of military annexation of Japan. Injo-revolution was occurred enevitablely for the financial collapse of KwangHea Regime. He only concerned with the palace construction all the time in his reign. Therefore the social and political problems to overcome the aftereffects of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remained in the aggravation. After Injo-revolution, Injo and his subjects cancellated the people`s tax forced bt the KwangHea. They reduced the salaries of the civil servants and the tributes. The year-prize of the vassal of merit was delayed for three-year. At the same time, the reformation of tax system started again. But the residues of KwangHea rebelled from time to time and Qing China invaded twice in decade. Joseon Dynasty faced the new situation and had to reform the traditional foreign policy. The inconsistency between the pride and the defeat demanded them to endure the insupportable change for a long time. There was a new policy in military service system after Injo-revolution. The idea of equal military service was suggested by some progressive intellectuals. They insisted the imposition of military service to Yang-ban in the form of cotton cloth. Inspite of the slow step of the reforms, the vision of the future was comparatively optimis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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