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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천사우연원록 (德川師友淵源錄)』의 성립

          오이환(Oh Yi?hwan)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한국학 Vol.34 No.1

          『덕천사우연원록』은 1950년대 말에 하우선이 덕천서원 외임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그가 주필이 되어 편찬한 남명학파의 새로운 인물지이다. 인조 연간에 박인에 의해 편찬된 『산해사우연원록』에는 누락된 인물이 있는 데다 개인의 능력으로서는 관계 자료의 수집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미비점들을 보완코자 한 것이다. 이 사우록의 가장 큰 특징은 종래의 것이 종유인과 문인으로만 구성된 것에 비해, 그 첫머리에 조식의 “도통원류”를 설정하고, 일반적인 사우록에서는 볼 수 없는 사숙인을 포함시킨 점이다. 종유인과 문인의 경우에도 대폭적인 추가와 배열 순서의 개편이 행해졌다. 이런 점이 그 수록 범위 및 문인의 배열 순서를 둘러싸고서 조식의 주요 문인인 정인홍ㆍ김우옹ㆍ정구ㆍ오건의 후예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우옹의 남명학파 내 위상과 관련한 주장은 김우옹ㆍ정구의 후예 사이에서 벌어진 청ㆍ회 시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재연된 것은 덕산의 조식 후예들이 허목이 지은 「덕산비」에서의 조식폄하가 조식 행장에 근거한 것이라고 인식하여, 그 글을 지은 김우옹을 비판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과정에서 회연서당 측은 덕천서원에 가담하여, 강좌 지방의 유론을 동원해 정구 도통설로써 김우옹 후예 측의 주장을 제압할 뿐 아니라, 정구를 문인의 첫머리에 배열하고자 시도했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The Dukcheon sawoo yeonon rok was a new biographical directory of Nammyong School which was compiled by Woo Seon Ha while he was the director of Dukcheon Seowon in late 1950s. As the Sanhae sawoo yeonon rok, which had been compiled by In Park during King Injo period, couldn't include the whole members of the school and there also had been a limitation in the extent of the relevant materials a single person could collect, the new directory was to make up for these weak points. The main peculiarity of this directory, compared to the former ones that have been only composed of friends and disciples, is that it puts four persons in the beginning as the origin of Shik Jo's learning and includes the people in later periods who were influenced by Jo. Even in the case of the friends and disciples there was a drastic addition and a change of arrangement. These aspects provided a momentum for the conflicts among the descendants of Jo's main disciples, In Hong Jeong, Woo Ong Kim, Gu Jeong, Geon Oh, concerning the range and order of compilation. The assertion on Woo Ong Kim's position within Nammyong school has an indispensable relation with the Chong?Hoe dispute among the descend? ants of Woo Ong Kim and Gu Jeong. But the problem has come to the fore again as Jo's descendents living in Duksan criticized Woo Ong Kim because they perceived the Duksanbi epigraph composed by Mok Heo as disparaging Shik Jo and being based upon necrology written by Kim. The members of Hoeyeon Seodang joined the process with Dukcheon Seowon and, mobilizing the Confucians of Gangzwa district, not only gained supremacy over the arguments of Woo Ong Kim's descendants but also tried to put Gu Jeong on the first among Jo's disciples, which couldn't be achieved in the end.

        • 투고논문 : 광해군 초기의 정인홍

          오이환 ( Yi Hwan Oh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7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41 No.-

          본고는 대북정권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인홍의 생애와 사상을 광해군 시기에 한정하여 조명해 보고자 하는 연구의 첫 단계로서, 대북정권이 성립하기 전인 광해군 즉위년의 임해군 역모 사건으로부터 그 3년의 晦退辨斥 시기까지 4년간을 다룬다. 간행된 ??來庵集??의 저본을 비롯한 근년에 발견된 고문서들을 주된 자료로 삼아 편년 형식으로 재구성해 본 것이다. 광해군 시기 전체에 걸쳐 왕실 내부의 인물이 관련된 역모사건에 대해 남인과 서인은 천륜의 명분을 중시하는 全恩論을 주장한 반면, 북인은 군신의 명분을 우선시하는 討逆論으로 기울었다. 이는 성리학적 명분론의 문제로서 예학논쟁의 성격을 지닌 당쟁이었다. 전은과 토역의 논쟁은 마침내 明에 대한 事大 의리와 함께 인조반정의 양대 명분 중 하나로 되었다. 임해군의 逆獄에서 전은론자들의 주장은 억울하게 형을 받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며 임해군은 선조의 여러 왕자 중에서도 광해군과 어머니를 같이 한 유일한 형제이므로 義와 恩을 아울러 극진히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임해군에 대해 전은론을 주장한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옥사가 성립된 후에 전은을 입에 담는 자는 역적을 비호하는 사심이 있는 것이 아니면 임금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적을 토벌하는 것은 신하의 公義요, 은혜를 펴는 것은 임금의 私情이기 때문이다. 광해군 3년 3월에 우찬성 정인홍은 사직차를 올려, 자신의 스승인 조식?성운의 학문과 인격이 이황에 의해 부당하게 왜곡 폄하된 점을 해명하면서, 지난해 문묘에 종사된 조선조의 5현 중 이언적과 이황, 그 중에서도 주로 이황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들이 첫 상소를 하고, 뒤이어 조정의 전?현직 관료와 지방 유생들이 계속 의견을 개진하며 정인홍을 성토하였다. 광해군은 계속적인 성토의 움직임을 이와 같은 기회를 틈타 정인홍을 숙청하기 위한 정쟁으로 간주하였다. 8월 성균관에 걸려 있었던 정인홍의 유적 삭제에 대한 방이 왕명에 의해 철거됨을 계기로 하여 마침내 晦?退 비판으로 말미암은 소란은 수습되었다. This is the first step of a study, which set limits to the Guanghae-gun period, to elucidate the life and thought of Jeong In-hong who was the spiritual prop of the Daebuk regime. It covers the period from the conspiracy of Imhae-gun which occurred in 1608, the year of Guanghae-gun’s enthronement to the critique on Yi Eun-jeog and Yi Hwang in 1611. Through the whole Guanghae-gun period, Seoin and Namin parties asserted benevolence stressing on the moral obligations of man’s natural relations, whereas Bugin party asserted punishment which put priority on the moral obligations between sovereign and subject. It was the matter of Neo-Confucian moral obligations and a party strife with the character of dispute on decorum. At last, the dispute on benevolence and punishment became one of the two main causes of Injo coup and could be considered as a former step of the dispute on decorum in latter Yi dynasty. In the case of Imhae-gun’s conspiracy, the persons who asserted benevolence emphasized to protect the innocent and apply full grace and justice to Imhae-gun who was the only maternal brother of Guanghae-gun among the many princes of King Seonjo. Jeong In-hong criticized severely the ministers who asserted benevolence on Imhae-gun. According to him, when the treason case was materialized, the persons who talked about benevolence were going to protect the criminal with selfish motives or took no notice of king. Because it is common duty of the subjects to liquidate the traitor and it is the personal sympathy of the sovereign to give grace to him. In March of the third year of Guanghae-gun’s rule, Jeong In-hong submitted his resignation to the king, explicating the fact that his teacher Jo Shik’s and Seong Oon’s learning and personality had been unjustly distorted and devalued by Yi Hwang, he sharply criticized Yi Eon-Jeog and Yi Hwang, mainly Yi Hwang, among the five sages who were decided last year to be co-worshipped with Confucius in Munmyo service. Soon after his resignation was submitted, the students of Seonggyunguan presented the first memorial to the king and the court officials of past and present chairs and the Confucians of provinces continued to censure Jeong In-hong. Guanghae-gun considered these movements of continual denounce as a political strife to purge Jeong In-hong and took advantage of this opportunity. When the expurgation notice of Jeong’s name from the roster of Seonggyunguan was removed by king’s order on August 12, the turmoil due to the critique on Yi Eun-jeog and Yi Hwang was settled at last.

        • KCI등재

          『진양지(晋陽誌)』의 출판

          오이환 ( Yi Hwan Oh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1 동방학지 Vol.0 No.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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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양지』는 광해군 14년부터 인조 10년까지 이르는 시기에 성여신·하증·박민·조겸·정승훈·하협에 의해 공동 집필된 경상도 진주목의 읍지로서, 성립 이후 필사본의 형태로 보관되어 내려오다가 3세기 후에 이르러 비로소 출판된 것이다. 보관되어 오는 과정에서 내용상 어느 정도 변화가 진행되었으므로 그 정본을 확정하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이러한 문제점은 출판에 즈음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1920년에 출판에 관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당시까지 여러 문중에 전해 내려오던 필사본들을 취합해 보니 모두 일곱 종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대조하여 정본을 만드는 책임은 하증의 후손인 하우식에게 맡겨졌다. 교정 작업이 끝난 다음, 하겸진의 검토를 거쳐 1922년에 활자본 4권 3책으로서 출판되었다. 이렇게 하여 출판된 原誌는 공편자들이 생존해 있었던 17세기 초까지의 사실만을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시기를 다루는 부분의 편집과 출판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먼저 1927년에 진양지속수가 간행되었다. 원지 간행의 주체는 이 책의 출판 허가를 취소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1932년에 『진양속지』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속지의 간행에 즈음하여 원지를 거듭 인쇄하였는데, 이 때 반질된 원지에는 20여 군데에 걸쳐 임의로 첨삭을 가한 부분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는 인쇄한 후에 하수일 후손 집에 맡겨 보관해 두었던 동안에 그 집안사람인 하용수가 사사로이 고친 것이었다. 1964년 6월에 진주통지가 발행되었다. 진주통지는 당대를 중심으로 하여 과거 시대까지를 포괄하여 한글로 서술한 것이다. 기존의 진양지 및 진양속지는 자료의 섭취에 이용할 뿐 그것을 계승하지는 않고 독립된 체제를 갖춘 점에서 진양지속수의 경우와 유사하다. 이에 대항하여 1964년 7월에 「晋陽續誌發刊趣旨文」이 나왔다. 속지증보는 그로부터 3, 4년 후에 연활자본 진양지 4책으로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속지증보에 수록된 인물은 고종 초년부터 1962년까지로 하였다. Jinyang-ji is the local topography of Jinju which was compiled by Seong Yeo-Sin, Ha Jeung, Park Min, Jo Gyeum, Jeong Seung-Hoon, and Ha Hyop between 1622 and 1632. It was preserved as a manuscript from the time of its materialization until its publication after the third century. The original text has become difficult to ascertain, as its contents have been altered somewhat during preservation; this problem became evident when it was published. The decision for publication was made in 1920. Seven copies were found when they collected manuscripts which had been preserved in various families. The responsibility to make the official copy was entrusted to Ha Woo-Shik, the descendant of Ha Jeung. After corrections was completed through examination by Ha Gyeum-Jin, the book was published in 1922 as a typography in 4 juan 3 books. As the original published text dealt only with facts prior to the early 17th century, during the time of the coeditors, the editions and publication of the periods thereafter were needed. As a result, Jinyangji-soksoo was published first in 1927. However, the main group that had published the original text tried to cancel the publication approval of this book; after these attempts proved to be futile, they finally published Jinyang-sokji in 1932. When Jinyang-sokji was published, they re-printed the original text. During the re-printing process, they found that there were over 20 sections which were amended arbitrarily in the original text. These amendments had been carried out in private after printing by Ha Yong-Soo, who was of the same family as a descendant of Ha Soo-Il during the time that the book had been preserved in their house. In June of 1964, Jinju-tongji was published. Jinju-tongji was written in Hangul, centering on the present age and covering up to the past time. It was similar to the Jinyangji-soksoo in that it not only adopted materials from Jinyang-ji and Jinyang-sokji without succeeding them, but also had the independent system. In contrast, "The Purport of the Publication of Jinyang-sokji" appeared in July of 1964. Finally, Sokji-jeungbo was published three or four years later as Jinyang-ji in four books of typography. Sokji-jeungbo recorded the characters from the early Gojong period until 1962.

        • KCI등재

          일제시기의 덕천서원

          오이환(Oh Yi-Hwan) 한국동양철학회 2009 동양철학 Vol.0 No.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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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1년에 덕천서원이 훼철된 이후, 그 터는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잡초 속에 방치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이후 국유지로 편입되고, 또한 그 부지의 중앙을 종단하는 도로의 예정선이 결정되어 유허조차 더 이상 보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1916년에 河載華 등 유림은 그 터에다 덕천서원 강당이었던 경의당의 옛 이름을 사용한 건물을 중건할 것을 결의하고, 이듬해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경의당 중건의 중심인물인 하재화는 傍祖인 河沆을 포함한 5현을 뒤이어 건립될 사우에 배향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본손 측의 입장은 曺植 도학의 정통성은 吳健과 鄭逑가 계승하였으므로, 제건된 서원에는 훼철 이전의 崔永慶을 대신하여 이 두 사람을 배향해야 하며, 만약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조식만을 獨享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본손 측이 독향을 고집하는 이유는 최영경의 배향이 鄭仁弘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구의 뜻을 받들어 조식의 도학을 尊衛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최영경의 배향이 덕천서원 훼철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조씨 문중의 피해의식이 깔려 있었다. 1926년 초에 조씨 문중은 許穆이 지은 조식 신도비, 즉 德山碑를 절단하여 파묻는 사태를 일으켜 또 한 차례 큰 물의를 야기하였다. 덕천서원 부지 및 건물의 소유권 문제와 더불어 덕산비의 원상회복을 둘러싼 남인 계열 유림과 조씨 문중 사이의 분쟁은 결국 만4년에 걸친 법정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분규가 말미에 이르러 조씨 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된 데에는 당시 大東斯文會 회장이었던 魚允迪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1812에 용암서원묘정비로서 건립되었던 송시열이 찬한 조식 신도비문은 그 후 1903년 趙性家의 발론으로 진주 인근에 거주하는 서인계 유림이 본손 측과 상의하려, 1909년 무렵 덕산의 조식 묘도에 신도비로서 세워지게 되었다. 덕산비 사건의 직접적 계기는 의령의 二宜享에서 1905년 가을에 중간된 허목의 문집 『記言』에서 원래 別集에 들어있었던 「答學者」가 당시 편집에 참여했던 유림의 지적에 의해 일단 삭제되었다가 후일 그 문중 인사인 許巑에 의해 슬그머니 다시 포함하여 간행 시판된 데 있었다. 조씨 문중의 지도자 曺庸相이 생전에 주력했던 사업 중에는 선대의 계보를 바로잡는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창녕조씨의 私譜 간행은 1596년의 丙申譜가 처음이며, 그 후 1693년의 癸西譜가 두 번째인데, 문제는 이 계유보에서부터 종전의 南平曺氏가 昌寧曺氏侍中公派로 칭하며 대동보에 참여하게 된 점에 있다. 그러면 결국 조식은 동성동본의 부인을 맞이한 셈이 되는 것이다. 조용상은 譜所에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어 김해의 남평조씨를 대동보에 포함시키지 않을 것을 규약 속에 명시토록 요구하였으나 그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주도 하에 曺彦香의 두 아들 植과 桓의 자손은 1915년에 별도로 『昌寧曺氏文貞忠順衛公派譜』(乙卯派譜)를 간행하여, 대동보로부터 독립한 파보를 성립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진주 일대는 한국 공자교운동의 중심이 된 곳이다. 오늘날 국내의 공자교운동은 李炳憲이 1922~23년에 걸쳐 세운 培山書堂이 그 중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보다 앞서 1917년 道統祠에 대해 중국 曲阜에 있는 孔敎總會의 總理인 孔祥霖 명의로 孔敎支會의 허가가 주어진 것이 최초였다. 도통사의 발단은 1909년에 진주의 順興安氏 재실인 硯山齋에서 고려 말에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安珦의 『晦軒實記』를 重刊한 데서 비롯한다. 그 후 1917년 봄에 安孝鎭 등을 곡부의 關理로 파견하여 도통사 유림대표의 서신을 전달하였고, 그들은 궐리에 머물던 동안 도통사에 조선 공교지회를 설립하는 데 대한 허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1918년 무렵 도산서원 원장이 통문을 보내어, 도통사 측이 공자를 봉안하면서 주자와 안자만을 배향한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였고, 이어서 세 가지 조목으로 따졌다. 이는 영남에서 전통적 권위를 유지해 온 도산서원을 제쳐두고서 공교지회의 권위를 빌어 갑자기 대두한 도통사 측에 대해 견제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이 통문은 1920년 4월 이병헌이 배산서당 설립 건으로 궐리를 방문했을 때 이황 종손인 李忠鎬의 서신과 함께 전달되었고, 궐리 측의 답신 형태로 도산통문에 대한 전폭적인 공감을 표명하는 회답을 받아 돌아왔다. 그리하면 결국 도통사의 공교지회로서의 지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그 지위는 이충호를 대표자로 하여 1919년 정월부터 건설 작업이 시작된 배산서당으로 교체되었다. 도산서원이 도통사를 비판한 통문에는 이병헌이 처음부터 깊이 관여해 있었다. 배산서당은 1923년 9월 궐리에서 모사해 온 聖像 및 道東祠의 위패 봉안식이 끝나자마자 서당 안에서 이병헌 Since Dukcheon-Seowon was abolished in 1871, the site was left uncared for near half century overgrown with weeds. After the land census by the colonial government, it was incorporated to the government assets, and it could not be preserved even as a site because a road was planned to be set up across the center of it. With this as a momentum, the Confucians, leaded by Ha Jae-Hwa, decided in 1916 to reconstruct Gyeonguidang which had been the half of former Dukcheon-Seowon, and the completion was celebrated in next year. Ha suggested to hold memorial service for five disciples, including his ancestor Ha Hang, according to their master Cho Shik in the shrine which would be constructed soon after. But Cho's descendants asserted either to serve Oh Geun and Cheong Gu instead of Choi Yong-Gyeong the former co-worshiper or Cho Shik only. They said that although Choi had been selected to be served by the will of Cheong In-Hong, Cho's real legitimacy was succeeded by the two above. But in the background of their assertion, there lied a paranoia that Choi's service had been the indirect causes of Dukcheon-Seowon's abolishment. In early 1926, the Cho's descendants gave rise to the enormous public criticism once more by cutting and burying up Duksanbi, the monument at the entrance of Cho Shik's tomb written by Heo Mok. The dispute for the ownership of Dukcheon-Seowon and restoration of Duksanbi between the Namin group Confucians and Cho's descendants was finally developed into the trial that lasted for 4 years. Eo Yoon-jeok's help was decisive for the case finally turn to be affirmative for the Cho. The direct momentum for the Dukansbi case was that "An answer for the Scholars" which was originally included in the Gieon, a collection of Heo Mok's works, was eliminated for a while by the criticism of the editors of new edition but afterwards secretly included again and sold out. Among the tasks that Cho Yong-Sang, the leader of the Cho, devoted himself through his life was the problem to correct the genealogy of his ancestors. The publication of the genealogy table of the Cho was in 1596, and that of second edition in 1693. The problem was that the Cho of Nampyeong began to be included in the genealogical table of the Cho of Changnyeong from the second edition. For the result of it, Cho Shik could be misunderstood as married to a woman of the same clan. Cho Yong_Sang asked several times to the editors of the genealogical table to eliminate the Nampyeongs from the table, but it couldn't be realized. Since then by this initiative, the descendants of Cho Eon-Hyong, Cho Shik's father, finally materialized in 1915 a sect table which was independent from the whole genealogical table. Jinju and it's vicinity was the place that became the center of the religious movement of Korean Confucianism. Although it is nowadays considered that the religious movement of Confucianism was started in Baesan-Seodang, Founded by Lee Byeong-Hon, there was the earlier movement that in 1917 the status of the Korean branch of religious Confucianism was conferred to Dotongsa from the secretary Kong Xiang-Lin in Qufu China. But in 1918, The head of Dosan-Seowon sent the circular that criticized Dotongsa in several aspects. It was to check Dotongsa which appeared suddenly with the authority of the branch to leave out Dosan-Seowon which had hold the traditional authority in Yeongnam district. The circular was delivered to Jueli by Lee Byeong-Hon when he visited there in April 1920 with the letter of Lee Choong-Ho the eldest grandson of the main family of Lee Hwang. And he returned with the reply of Jueli that expressed full sympathy to the Lee Choong-Ho's assertion. Thus the status of Dotongsa as the branch of the religious Confucianism brought to an end and it was substituted to Baesan-Seodang which had begun to be construct from the January of 1919 with Lee Choong-Ho as it's key person. Lee Byeong-Hon had involved in, from the beginning, the circular o

        • KCI등재

          남명의 (南冥) 유도사상 (儒道思想) 비교연구

          오이환(Yi Hwan Oh) 철학연구회 1997 哲學硏究 Vol.41 No.-

          본고는 퇴계 이후 지적되어 온 남명 사상에 있어서의 이단적 요소, 그 중에서도 특히 도가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퇴계의 남명 비판과 관련된 내용은 그 문인 錦溪 黃俊良과의 왕복 서신 및 『퇴계언행록』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퇴계는 남명과 그 친우인 대곡을 隱者의 무리로 간주하고, 이들은 老莊思想에 심취하여 성리학의 이론에 대한 조예는 깊지 못하다고 보고 있었다. 금계는 이것이 남명이 애독한 『周易參同契』와 같은 異書로부터 유래한다고 하는데, 이 책은 남명이 성리학적 易學 연구의 참고서로서 중시한 것이었다. 퇴계는 남명의 出仕를 거부하는 입장에 대해 왕명을 무시하는 교만한 태도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문장이 일반적 격식으로부터 벗어나 있음도 中庸을 중시하는 유가적 가치관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퇴계는 대체로 남명을 氣節이 남다른 인물로 볼 뿐 진정한 의미의 道學者로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으며, 특히 남명에 있어서의 『莊子』적 요소에 대해서는 크게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퇴계는 무엇을 근거로 이런 견해를 가지게 된 것인가? 이는 결국 남명이 표방하는 문자 가운데 道家의 책에서 유래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남명 자신의 기상 속에 세속을 경멸하는 초탈적 요소가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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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대관대(大觀臺) 연기(緣起) -이정(李楨)과 조식(曺植)의 관계를 중심으로-

          오이환 ( Yi Hwan Oh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1 남명학연구 Vol.31 No.-

          본고는 경남 사천에 있는 구암 이정의 유적지인 대관대의 연혁에 대한 문헌고증이다. 이는 이정과 조식의 말년 생애와 깊은 관련을 가지므로, 그 문제 또한 아울러 언급하였다. 오늘날 구계서원이 위치한 구암리 일대는 이정이 태어난 곳이자, 3대에 걸쳐 그의 집안이 세거해 온 곳이다. 대관대라는 명칭은 이정 자신이 지은 글에서는 보이지 않고, 문집에 실린 그의 글에는 그것이 모두 靜觀臺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정관대는 다만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아니고, 그의 서재 역할도 겸했다. 대관대란 후일 이황이 고쳐준 이름이다. 이정은 만년에 고향 땅에다 龜巖精舍를 짓고서, 벼슬을 사절하고 거기서 제자들과 더불어 강학하는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이에 앞서 조식과 더불어 지리산에 들어가 함께 살것을 약속한 바 있었고, 명종 16년(1561)에 산천재 곁에다 자기가 살 기와집을 지었다. 하종악 후처사건으로 말미암은 이정과 조식의 절교는 두 사람의 생애에 있어 가장 만년에 일어났던 일로서, 각자에게 준 심리적 타격은 큰 것이었다. 이정이 관직생활을 그만 둔 이후 지리산에 들어가 조식과 함께 만년을 보낼 생각을 실제로 갖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그가 고향 땅에 구암정사를 마련하게 된 것은 조식과의 관계가 끝난 이후였다. 오늘날의 구계서원은 곧 구암정사의 後身이다. 대관대 앞의 서당이란 구계서원이 훼철된 이후 그것을 대신하여 세워진 약소한 건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곳이 곧 구암정사의 옛터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넌센스이다. This is a bibliographical study on the history of Daegwan-dae, the relic of Lee Jeong in Sacheon, Gyeongsangnamdo province. As the place has deep relationships with the last years of Lee Jeong and Jo Shik, this paper also discusses this issue. The neighborhood of Guam-ri is the place where Lee was born and his family had lived for three generations. The name Daegwan-dae does not appear in Lee`s writings, but it always appears as Jeonggwan-dae in the collection of his works. Jeonggwan-dae was not only a pavilion to appreciate the scenery around but also served as Lee`s study. Daegwan-dae is the name that Lee Hwang changed it to for him later. It is said that Lee, in his last years, built Guam-jeongsa in his native place and spent the life of a scholar with his disciples, refusing the government posts. But before that, he had promised to Jo Shik to go into Mt. Jiri and live with Jo, and he actually built a tile-roofed house near Sancheon-jae in 1661. The breach of friendship between the two by the case of Ha Jongak`s second wife occurred in their latest years and its psychological shock was great for each. It is not clear that Lee really made up his mind to quit his official career and go into Mt. Giri to live with Jo, but it was, at least, after the end of the friendship with Jo that he arranged to build Guam-jeongsa on his native place. Gugae-seowon today is succeeding Guam-jeongsa. The so-called schoolhouse was a small structure which had been built instead of Gugae-seowon after its demolition. Therefore, it is a nonsense that it is to be considered today as the site of Guam-jeong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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