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 KCI등재

        晦峯 安圭容의 교육활동과 <<朱門旨訣>> 간행의 의의

        안동교 호남사학회 2014 역사학연구 Vol.56 No.-

        회봉 안규용(1873~1959)은 한말․일제시대에 도학을 이념으로 삼아 교육활동에 헌신했던 도학자이다. 그는 전통적 성리설에 뿌리를 두고 인간의 본성을 반드시 구현하고자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붕괴되어가던 유교적 질서와 가치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다. 안규용은 암울한 시기에 죽곡정사를 창건하여 많은 교육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많은 문인들에게 엄격한 학칙과 교육과정을 시행하여 도학 이념을 전수하고 선비정신을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황국식민화 교육정책이 광범위하게 시행되던 시기에 네 종류의 계몽서를 간행함으로써 전통적인 학문과 예법을 고수하여 민족의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했다. 특히 『주문지결』 간행은 기호 유학에서 중시되어 왔던 주자학 입문서를 학계에 널리 보급함으로써, 주자학의 학문방법 곧 ‘居敬窮理’와 ‘務實力行’이 학문의 기본 강령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成渾으로부터 전수 받은 가학의 연원을 밝히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KCI등재

        조선후기 호남실학에서 河百源 사상의 특징

        안동교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0 호남학 Vol.0 No.47

        이 글은 조선조 후기에 호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삼아 학문활동을 전개한 실학자들의 저술과 사상을 간략히 정리하고, 그러한 실학사상의 흐름 속에서 河百源(1781~1845) 사상이 갖는 특징을 밝히려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백원은 조선조 후기에 호남을 대표하는 실학자이며 국가를 경영할 풍부한 식견과 博學性을 지닌 유학자라는 평가를 받아왔으나, 아직까지 그의 실학이 호남의 실학자, 예컨대 柳馨遠(1622~73), 申景濬(1712~81), 魏伯珪(1727~98), 黃胤錫(1729~91)과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또한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를 객관적으로 검토한 사례는 없었다. 따라서 이 글은 하백원의 실학을 특정한 지역과 학술 범위 속에서 객관적으로 검증해보는 하나의 試論이다. 서술한 내용을 토대로 호남실학에서 하백원 실학사상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백원은 실학과 관련된 체계적이고 방대한 저술을 남기지 못했다. 『자승도해』는 수차의 내용과 제도를 알려주는 소중한 저술이지만, 지도・천문도・자명종 제작과 관련된 상세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둘째, 하백원의 실학에는 주자학이 철학적 배경으로 깔려있다. 그는 당시 주자학풍을 반성하여 현실과 이념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관념적 의리론자의 위선적 기만성을 부정하고, 실용적 효과에 근거하여 학문의 진실성과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했다. 셋째, 하백원의 실학은 이용후생적 색채가 농후하다. 수차의 설계, 지도와 자명종의 제작, 천문도의 작성 등이 이를 증명한다. 넷째, 선진 과학문물을 받아들여 생활에 유용한 과학적 기계를 고안하거나 제작함으로써 실용적 학문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표현하고,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과학적인 생활도구를 직접 만듦으로서 학문의 생활화・도구화를 적극 실천했던 점에서 하백원의 실학적 특징은 뚜렷이 드러난다. 이 점이 바로 하백원을 호남실학의 흐름에서 ‘실천적 이용후생학자’로 위치 지울 수 있는 근거를 부여한다.

      • KCI등재

        일반논문 : 조선후기 호남실학에서 하백원(河百源)사상의 특징

        안동교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0 호남학 Vol.0 No.47

        이 글은 조선조 후기에 호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삼아 학문활동을 전개한 실학자들의 저술과 사상을 간략히 정리하고, 그러한 실학사상의 흐름 속에서 河百源(1781~1845) 사상이 갖는 특징을 밝히려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백원은 조선조 후기에 호남을 대표하는 실학자이며 국가를 경영할 풍부한 식견과 博學性을 지닌 유학자라는 평가를 받아왔으나, 아직까지 그의 실학이 호남의 실학자, 예컨대 柳馨遠(1622~73), 申景濬(1712~81), 魏伯珪(1727~98), 黃胤錫(1729~91)과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또한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를 객관적으로 검토한 사례는 없었다. 따라서 이 글은 하백원의 실학을 특정한 지역과 학술 범위 속에서 객관적으로 검증해보는 하나의 試論이다. 서술한 내용을 토대로 호남실학에서 하백원 실학사상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백원은 실학과 관련된 체계적이고 방대한 저술을 남기지 못했다. 『자승도해』는 수차의 내용과 제도를 알려주는 소중한 저술이지만, 지도ㆍ천문도ㆍ자명종 제작과 관련된 상세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둘째, 하백원의 실학에는 주자학이 철학적 배경으로 깔려있다. 그는 당시 주자학풍을 반성하여 현실과 이념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관념적 의리론자의 위선적 기만성을 부정하고, 실용적 효과에 근거하여 학문의 진실성과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했다. 셋째, 하백원의 실학은 이용후생적 색채가 농후하다. 수차의 설계, 지도와 자명종의 제작, 천문도의 작성 등이 이를 증명한다. 넷째, 선진 과학문물을 받아들여 생활에 유용한 과학적 기계를 고안하거나 제작함으로써 실용적 학문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표현하고,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과학적인 생활도구를 직접 만듦으로서 학문의 생활화ㆍ도구화를 적극 실천했던 점에서 하백원의 실학적 특징은 뚜렷이 드러난다. 이 점이 바로 하백원을 호남실학의 흐름에서 “실천적 이용후생학자”로 위치 지울 수 있는 근거를 부여한다. 這一篇文章是簡單地整理了關于朝鮮朝後期湖南地域爲中心展開的術活動的實學者之著述和思想, 而且在實學思想當中表明了河百源(1781~1845) 思想的特徵. 從歷史的角度來看, 河百源不僅是朝鮮朝後期湖南實學的代表學者, 而且是一位有豊富的識見和博學的儒學者. 但是到今日爲止, 我們還沒有客觀地檢討了他的實學思想和湖南實學者如柳馨遠(1622~73)ㆍ申景濬(1712~81)ㆍ魏伯珪(1727~98)ㆍ黃胤錫(1729~91)之間有什마樣的聯關性, 又他的實學思想中存在着什마樣的思想特色. 因此, 這一篇文章就是把河百源的實學放在特定的地域和學術範圍, 而試圖了客觀地檢討思想特徵. 在湖南實學當中, 整理河百源實學思想的特徵就是: 第一, 河百源沒有留下和實學有關的體系的而且放大的著述. 他的著作『自升圖解』雖然是關于水庫的內容和制度的寶貴的著作, 但是沒有關于地圖ㆍ天文圖ㆍ自鳴鐘的詳細的論議. 第二, 河百源的實學思想是以朱子學的哲學爲背景的. 他一邊對當時朱子學的學風反省, 而一邊不僅追求現實與觀念之和諧, 否定了義理學者的僞善的欺瞞性. 而且基于實用的效果, 論證了學問的眞實性和正當性. 第三, 河百源的實學思想里濃厚了利用厚生的色彩, 因爲設計水車, 制作地圖與科學機械, 制作天文圖等都是證明了這一觀念. 第四, 接受先進科學, 而制作可以利用生活當中的科學器物, 是對實用的學問的意圖, 不僅如此, 直接制作對日常生活有用的器物, 實踐學問的生活化ㆍ科學化, 而表現了河百源的學問之實學的特徵. 河百源的實學思想中的這一特徵, 在湖南實學當中, 給他“實踐的利用厚生學者”的位置.

      • KCI등재

        圭南 河百源의 학문관과 실학정신

        안동교 동양철학연구회 2005 東洋哲學硏究 Vol.41 No.-

        이 글은 圭南 河百源(1781-1845)의 학문관에 나타난 실학정신을 다각도로 탐색해 본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백원은 조선조 후기의 호남유학사에서 위백규 황윤석과 더불어 실학적 색채가 짙은 유학자로 평가를 받아왔는데, 그의 사상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학문 일반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체계적 해명을 시도한 부분이다. 하백원은 주자학적 학문체계가 왜곡렉?骸퓸?모순이 첨예화하던 시대에 유학적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발휘하여 학문의 본질과 목적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 방법적 전환을 모색함으로써 실천성과 실용성을 표방하는 실학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농업럭騙湯상업럭姸┠군사문제까지도 실용적인 측면에서 유학자의 학문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自升車룻쁑골ㅇ東國地圖 등 실생활에 유용한 과학적기기를 발명하거나 제작하여 '利用厚生'의 유학사상을 구현하고자 노력 했다. 하백원이 과학적 도구를 충분히 활용하여 생활의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성취하려고 했던 근본이유는 유학이 지향하는 도덕과 의리의 순수성을 확보렘피置狗졍?열망 때문이었다. 따라서 하백원의 실학정신 속에는 당시 홍대용레憫熾扁서유구 등의 북학사상과도 연결되는 지대가 놓여있다. 그는 결국 도덕과 의리의 실현을 위하여 생활의 실용성과 효용성을 증대시키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그의 '실학적 유학'이 지향하는 이념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고 본다. This paper aims at investigating in many-sides Ha Baik Won's Silhak Thought that revealed at his view of learning. In general, Ha Baik-Won has been considered as the confucius who spent his whole life in pursuit of the practical science with Wui Baik-Gyu, Hwang Yun-Seok in the history of Honam Confucinism at the late Lee Dynasty. The most noticeable in his Silhak Thought is that he critically reflects learning for learning's sake at that time and systematically shed light on it. Ha Baik-Won tried to correct Zhu-zj Philosophy extorted and degenerated by theoretical philosopher. He made an attempt to transform from theoretical philosophy to practical philosophy in learning. Therefore, He emphasized Silhak mind that represents praxis and practicality. He got ready to receive agriculture, industry, commerce, economy, military affairs etc as the constituent of Confucianism that a Confucian scholar pursues. By inventing scientific appliance-zishengju(自升車)·zimingzhong(自鳴鐘)·dongguoditu(東國地圖) etc., that make use in realities of life, he exerted to realize the society which provide people with comfortable circumstance. After all, he wanted to realize Confucinism that aims at iyonghousheng(利用厚生). Ha Baik Won wanted to realize morality and righteousness which Confucianism aims at. In addition, he developed scientific inventions which served people's convenience and wealth in the practical life. At this point, his Silhak mind is related to Bukhak Thought at that time. Ultimately, he want to augment utility and practicality in realities of life on the basis of human morality and social justice

      • KCI등재

        石灘 李愼儀의 학문과 정치활동

        안동교 호남사학회 2010 역사학연구 Vol.39 No.-

        이 글은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 李愼儀(1551-1627, 石灘)의 학문과 정치활동을 밝히기 위해 쓴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신의는 누구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았는지, 학문과정에서 어떤 가치와 신념을 얻었는지를 추적하고, 나아가 내면화한 학문적 가치와 신념이 절의정신을 통해 정치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조명해본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지식의 탐구와 善의 실천은 일치해야 한다는 그의 소박한 논리에 주목하였다. 이신의는 청년시절에 확고한 의지로 학문의 길, 경전을 통한 성현의 길을 선택한 이후, 서경덕의 高弟 閔純(1519-91, 杏村)의 문하에서 체계적으로 경학과 성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민순에게서 학문의 本源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함양할 것인가에 대해 절실히 사색해보라는 주문을 받은 뒤, 敬공부에 기초하여 道理를 탐구하고 자각함으로써 주체적인 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지금은 자료가 대부분 유실되어 그의 학문이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편적인 언설들이나 箚錄과 같은 자료들을 통해 매우 치열하게 공부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이신의는 도리의 탐구를 통해 현실에서 義理에 위배되지 않는 합리적인 인간상을 추구했는데, 그에게 의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상황 속에서 국가와 사회의 윤리를 강인하게 정립해가는 실천적 의리 곧 節義였다. 실제로 선조․광해군의 혼란한 시대에 자신의 절의를 憂國愛民의 마음과 正論直筆의 정신으로 관철시킨 태도에서 학자의 실천적 표상을 보게 된다.

      • KCI등재

        연구논문 :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의 학문과 정치활동

        안동교 호남사학회(구-전남사학회) 2010 역사학연구 Vol.39 No.-

        이 글은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 李愼儀(1551-1627, 石灘)의 학문과 정치활동을 밝히기 위해 쓴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신의는 누구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았는지, 학문과정에서 어떤 가치와 신념을 얻었는지를 추적하고, 나아가 내면화한 학문적 가치와 신념이 절의정신을 통해 정치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조명해본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지식의 탐구와 善의 실천은 일치해야 한다는 그의 소박한 논리에 주목하였다. 이신의는 청년시절에 확고한 의지로 학문의 길, 경전을 통한 성현의 길을 선택한 이후, 서경덕의 高弟 閔純(1519-91, 杏村)의 문하에서 체계적으로 경학과 성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민순에게서 학문의 本源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함양할 것인가에 대해 절실히 사색해보라는 주문을 받은 뒤, 敬공부에 기초하여 道理를 탐구하고 자각함으로써 주체적인 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지금은 자료가 대부분 유실되어 그의 학문이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편적인 언설들이나 箚錄과 같은 자료들을 통해 매우 치열하게 공부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이신의는 도리의 탐구를 통해 현실에서 義理에 위배되지 않는 합리적인 인간상을 추구했는데, 그에게 의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상황 속에서 국가와 사회의 윤리를 강인하게 정립해가는 실천적 의리 곧 節義였다. 실제로 선조?광해군의 혼란한 시대에 자신의 절의를 憂國愛民의 마음과 正論直筆의 정신으로 관철시킨 태도에서 학자의 실천적 표상을 보게 된다. 本論文是硏究關於朝鮮中期儒學者李愼儀(1551-1627,石灘)的學問與政治活動, 在這裏談到他收到誰的學問思想、他的學問價値與學問信條是什磨,還談到在政治現實里如何具現他的學問思想和節義精神。爲了硏究這些問題筆者注目到了他的平凡的觀点,就是探求知識與實現善是必要一致的。李愼儀靑年時節具有堅定强的意志,而選擇了學問之路及以經典來學習聖賢之路,就在徐敬德的高徒閔純(1519-91,杏村)的門下體系地學習了經典和性理學。閔純向他問深思學問的本源是什磨、如何涵養這本源,其後他以學習"敬"的基礎下,不但探求道理,而且覺悟道理,就走向了具有主體的儒學者之路。現在有關他的資料大部分都流失了,因此不能知道他的學問理論水平是즘磨樣,但是通過一些短的言說和箚錄等資料,可以看到他留下的學問痕跡。進而他通過探求道理,而追求了與現實生活一致的合理的人間像。對他來說義理是在不斷變化的現實生活裏起到一種紐帶國家和社會倫理的作用,就是節義。實際上宣祖、光海君的混亂時期,他把自己的節義貫徹到了在憂國愛民的心情與正論直筆的精神上,在此可以看到學者的實踐表象。

      • KCI등재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