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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대상으로서의 단종과 열린 미래 - 단종국장을 중심으로 -

        심승구 인문콘텐츠학회 2017 인문콘텐츠 Vol.0 No.47

        What is Yeongwol really to us? Nostalgic memory is said to not age. Yeongwol is a place of memories where the clear souls of those who keep their dismissal and death in their knees and keep their good will stand everywhere. So it is hard to disappear from the memory of those who live on the earth. The open past as an object of memory is the present meaning of Yeongwol. History is not only an object of scientific recognition to us, but more than anything else. Because history is an object of memory, it is not something that has been completed but an open one that is always open. The fact that past past is not complete and open means that it is possible and necessary to be saved. After discontinuance and slaughtering have been reintroduced after Sukjongdae, the reality of being reappeared beyond the tide to the chief director is a good example of the salvation of history together with the past. The point to be reminded of the discontinuity is in the value and meaning contained in the Confucian ritual, rather than in the procedure or contents of the outwardly revealed Confucian consciousness. Not only do they remember the death of the endangered people in history, and the loyalty of more than three hundred people, but their spirit of conscience and practice is in finding the validity and presentness of today and today. Hannah Arendt says, "The totalitarian power does not disappear because the whole nation disappears." There are many problems of monitoring, violence and oppression of the naked lives of citizens who are legitimately practiced in today's democratic countries. It is the reason why we should constantly watch over whether there is unjust and civilized life around us due to unjust power. The legacy of cultural heritage is rich and colorful. But it also serves as a mirror for us to look at reality in reality, and is also used as an ideology for maintaining the system by being embroidered by power. Yeongwol's tangible and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is no exception. The reason why famous politicians in the past often visited Yeongwol endangered species, which is the longevity of loyalty, is irrelevant. Traditionally, cultural heritage is only meaningful as long as it gives useful guidance to the lives of those who live in the present. Here, the problem of the subject who enjoys culture is raised. It is a historical fact that the cultural heritage is not the exclusive property of the power of domination, but has functioned as the booty of the power at that time. In this respect, it is very important to unravel the cultural heritage in relation to the ruling power and return it to a large number of ordinary people. This is why cultural heritage is not the abstract nation as a whole, but the powerless and marginalized people should be the subjects. It is an intangible heritage. that should never be missed in the discontinued cultural festival that honors discontinuance and loyalists. There is Yeongwol, the future city that is open there. 우리에게 강원도 ‘영월’이란 진정 무엇일까? 그리운 기억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한다. 영월은 비운의 단종과 죽음을 무릎 쓰고 절의를 지킨 이들의 맑은 넋이 곳곳에서려있는 기억의 터이다. 그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어렵다. 기억의 대상으로서의 열린 과거가 바로 영월이 우리에게 주는 현재적 의미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기억의 대상이다. 기억의 대상이기에 역사는 흘러가 버린 완결된 어떤 것이 아니라 늘 열려있는미완의 것이다. 지나간 과거가 완결되지 않고 열려있다는 것은 그것이 구제될 가능성과 필요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단종과 사육신 등이 숙종대 이후 복권되어 제자리를찾은 뒤, 최근에 와서 제향을 넘어 국장까지 재현되는 현실은 열린 과거와 함께역사의 구원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단종제향을 통해 되새겨야 할 점은 겉으로 드러난 유교의식의 절차나 내용에 있기보다는 그 속에 담긴 가치와 의미에 있다. 즉 역사 속에 단종의 죽음과 삼백여명의충절을 추모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의리 정신과 실천이 오늘날에도 아니 오늘날에 대해 지니는 유효성과 현재성을 찾는데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전체적인 국가가 사라진다고 해서 전체주의적인 권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고설파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적법하게 행해지는 시민의 벌거벗은 삶에 대한감시, 폭력, 억압의 문제가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부당한 권력으로 인해 주변에억울하고 원통한 삶이 있는지를 끊임없이 예의주시해야 할 이유이다. 단종의 원통한 죽음과 그를 지켜내려던 수많은 의인들의 절개는 영월지역과 지역민에게 소중하고도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겨 주었다. 우리는 인식과 실천, 역사와현재 사이의 긴장을 해체해 버린 채,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을 박제화된 지식으로 환원해서는 곤란하다. 지금부터 250년 전 연암 박지원은 한 살 아래 친동생 같던이희천이 불온서적 소지 혐의로 처형되자, “나라 사랑이란 임금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아닌 힘없는 백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이 같은 연암의 깨달음은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충절(忠節)에 대한 많은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문화유산이라는 전승된 재화는 풍요롭고 다채롭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냉철하게 바라보는 환등기로 작용하기도 하고, 권력에 의해 치장되어 체제유지를위한 이데올로기로 이용되기도 한다. 영월의 유·무형 문화유산도 예외가 아니다. 과거 유명 정치인들이 충절의 고장인 영월 단종제를 자주 찾았던 이유가 이와 무관치않다. 전승된 문화유산이란 궁극적으로 현재를 사는 이들의 삶에 유용한 지침을 주는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문화를 향유하는 주체의 문제가 제기된다. 문화유산이 지배 권력의 전유물이 아님에도, 그때그때 지배 권력의 전리품으로 기능해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유산을 지배 권력과의 관계에서 풀어내어다수 일반 사람에게 돌려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문화유산이 추상적인 국민 전체가아니라 힘없고 소외받은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향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종과 충신들을 기리는 단종문화제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정신이자 무형자산이다. 그곳에 열린 미래도시 영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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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중 독산성 전투와 그 역사적 의의- 전술적․전략적 가치를 중심으로 -

        심승구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논총 Vol.37 No.-

        The doksanseong battle is very significant victory during the Imjin war. The war led by General Kwon Yul had a decisive contribution to recapture Seoul. Specifically it was where General Gwon Yul stationed twenty throusand soldiers from Jeolla-do against the Japanese soliders in the 26th year of King Seonjo (1593) and mowed down a great number of enemies and prevented the fortress from the dominance from the enemies. He was used as a strategy to defend the fort instead of fighting the enemy. By high terrain, he stopped the enemy attacks. Yet he occasionally used the tactic of surprise attack at night. Then the Japanese army did not fight properly fell while stepping down. The Japanese soliders were eventually abandoned to attack the castle. Eventually they both resigned in five days. This battle taught a a great lesson to the government of Joson. The fact that it must be keeping the high fortress. It is the secret to get the win against Japan, Thus, the Joseon government has strengthened the defense system to keeping the high fortress in the country. It was repaired in the 16th and 20th year of King Jeongjo, again in 1792and 1796. It was 3,240 meters round and had 4 gates, but lack of water in the fortress had been considered as a great demerit. 1592년 12월 말에 수원의 독산성 전투는 순찰사 권율이 왜군의 대규모 공략을차단하여 거둔 매우 의미있는 승리였다. 독산성에서의 전투는 조선군과 왜군 사이5일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당시 권율 휘하에 약 4천 여명의 병사가 왜장 우키다휘하 약 2만 여명의 병력 가운데 일부를 상대로 독산성을 지켜낸 전투였다. 독산성 전투는 치열한 공방전이 아니라는 점에서 전투로서의 성격이 약했던 것이라고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철저히 조선 고유의 전술인 堅壁淸野에 의한 籠城戰을견지하면서 기습전, 그리고 주변 산세를 이용한 의병들의 후방지원 작전에 의해거둔 귀중한 승리였다. 이미 용인전투에 큰 승리를 거두었던 왜군은 3진으로 나누어 독산성 함락 작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을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기대와 달리 농성에 의한 지구전과 기습전, 후방 교란작전에 의해 농락당하면서왜군은 산성 위의 조선군을 상대로 조총 한번 제대로 못한 채, 도리어 기습작전에의해 왜군의 전력만을 크게 손실 당한 채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독산성 전투의 승리는 우선, 수원-안산-양천-행주로 이어지는 육로와 수원-안산-부평-김포로 이어지는 서해안의 해로가 열려 행재소와 직접적인 왕래가 가능하였다. 또한 독산성이 지켜짐으로써, 당시 한수 이남부터 호남까지 민심이 크게안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수원-양천-행주로 연결되는 성책을 확보함으로써, 경기 서남부의 조선군 거점이 마련되는 동시에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한성의 왜군을 압박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독산성 전투 이후에 곧이어 전개된 행주대첩은 단순히 행주산성 주변에서의 승리만이 아니라 권율장군에 의해 추진된독산성의 승리와 거점 확보에 따른 경험과 자신감이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행주대첩의 이면에는 바로 이 같은 권율 장군의 독산성 승리를 통한 전술적, 전략적 경험과 교훈이 밑바탕에 깔린 것이었다. 결국 독산성 전투는 임진년 7월 이치 전투 이후 5개월 만에 거둔 육전에서의승리로서, 용인전투의 패배를 설욕하는 전투인 동시에 한성 탈환의 시발점이 된전투였다. 무엇보다도 독산성 전투는 한수이남의 서로(西路)를 확보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의 3대 대첩으로 평가받는 행주대첩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전투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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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무예의 정체성 탐구 : 고구려 무예를 중심으로 Focused on Goguryo martial arts

        심승구 한국체육사학회 2004 체육사학회지 Vol.- No.13

        A martial art of Goguryo made itself foothold on continuing buildup of the national strength through compiling their martial art culture with the race all over Manchuria and the Korean Peninsula in along with the growth of the ancient nation. Especially, in the characteristic of martial art culture throughout Goguryo, it makes a syntheses of martial art culture of nomadic tribes with priority given to a archery and horsemanship and an Infantry martial art culture of an Agricultural people in the Korean Peninsula. In this respect, I concluded it's alike Chinese martial art and simultaneously having the different features from the chinese one in some aspects. At the same time, the most important thing given into the history of Korean martial art is that is became the basis on contributing in the way of succeeding in development on the Korean martial art since t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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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조포사와 진관사-조포사의 변천과 진관사 두부를 중심으로-

        심승구 비교민속학회 2019 비교민속학 Vol.0 No.70

        동아시아 음식을 대표하는 두부가 언제 출현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北宋의 陶穀(903~970)이 쓴 『清異錄』에 나타난 두부의 기록은 문헌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된다. 우리나라에서 두부가 전래된 시기는 고려 말이다. 이색의 『목은집』에 따르면, 1365년(공민왕 14)에 과거를 치룬 뒤 두부를 먹었다는 기록이 처음 확인된다. 그 뒤 두부는 육식을 금하던 사찰에서 주로 만들어졌고, 이는 왕실과 민가로 퍼져 나가는 배경이 되었다. 그 결과 ‘절’하면 으레 두부를 만드는 곳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두부를 ‘豆泡’ 또는 ‘泡’라고 불렀다. 사찰을 16세기 이후 造泡寺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조포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였다. 조선왕조는 종래 ‘능침사’ 외에 ‘능침조포사’라는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사찰이 국가 관리아래 놓인 국역의 주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조포사에게 능침 제향의 부담과 수호, 그리고 산림보호를 맡기는 대신, 그 외에 과도한 수탈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럼에도 왕실의 보호가 약해진 상황에서, 사찰에 부과된 각종 국역과 과도한 僧役은 일반 사찰은 물론 조포사의 피폐와 몰락의 주요한 원인으로 대두되었다. 18세기 말 정조는 능침 수호와 관리를 위한 사찰 개혁의 일환으로 조포사 정비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각지의 사찰들은 스스로 조포사에 속하려고 하였다. 능침을 수호하는 조포사에 소속됨으로써, 중앙이나 지방의 과도한 부세 부담을 줄이고 수탈을 막고자 한 것이다. 조포사 屬寺의 잇따른 출현은 단순히 왕릉 관리를 위해 국가가 사찰을 늘이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사찰의 부담을 경감 시키려는 지방 사찰 스스로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조선후기 조포사의 등장은 公으로의 전환이라는 과제가 실린 사찰 정비의 일환이자 능침의 수호와 관리를 통해 왕실 귄위를 회복하려는 18세기 개혁정치의 산물이었다. The time when tofu was introduced in Korea was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According to “The Wooden House”, a record of test takers eating tofu at a meal is confirmed for the first time since the past took place in 1365 (the 14th year of King Gongmin). This fact is noteworthy in that it is the most advanced record related to tofu. Like the phrase “the most important and the most difficult” at the time, tofu making was both the most precious and difficult food to make. As a most precious food, they made tofu during a royal or ancestral rite, or during a state visit. Then, it was customary for an expert named Packaging to manufacture tofu to be provided by a nearby temple. However, it was not until the late Joseon Dynasty that the temple was called Joposa in earnest. In particular, by the end of the 18th century, Joposa was the term used to build the new temple and the Junggeon of the temple. The purpose of the temple was to make it clear that the temple was the subject of the national anthem under the control of the state by giving it the name “Sungnim Joposa”, which is different from the previous one. Today, Joposa seems to be an excessive and unjust name for suppressing Buddhism in a Confucian society. However, by making it clear that it was a royal tomb inspection, the intention was to reduce the excessive amount of labor imposed on the temple. In a Confucian country where filial piety was considered the best ideal, the royal court could not neglect its eulogy. Instead of leaving the burden, protection, and forest protection of the tomb to the temple, the government wanted to prevent excessive exploitation given to the temple. Just like the Great East and the Equal Equilibrium Act, which was created to overcome the chaos and realize equal taxation, temples could not be an exception within the social system where all social members share roles equally. The temple wanted to belong to the temple. By belonging to the Joposa Temple, which protects the royal tomb, he wanted to reduce the burden of excessive wealth in the central or local areas and prevent exploitation. The successive appearances of the Joposa Soksa Temple were based on the local temple’s own request to ease the burden of the temple, rather than simply on the state’s intention to increase the number of temples to manage the royal tombs. In the end, the temple had its limits in Confucian society, but it was a product of 18th century temple reform with an epochal task of transitioning to public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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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장애의 분류와 사회적 처우

        심승구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논총 Vol.38 No.-

        When we often tell the history, we've been talking about normal people regardless of whether heros or the public. Today, it is recommended that the country should have about 10% of people with disabilities in the UN. Although there are some differences when compared with this figure, we has understand a history without about 10% of historical figures until now. Actually in the studied history books until now, it is difficult to find historical description considering Disabled. This is reason why balanced historiography that considering Disabled is needed in the study of history. In the Joseon Dynasty, there are three types of disability. The most severe disability called ‘독질’-'Docjil', such as epidemic, insanity, blind person, ect-. The second disability called ‘폐질’-'Pyejil', such as idiot, dwarf, hunchback,person with a limp, one-armed person, mute, etc-. The third disability called ‘간질’-'Ganjil', people without two fingers and two toes, etc-. This classification is made protection for Disabled by the government. All Disabled that covered three types called ‘불성인’'Bulsungin'. It came from Neo-confusion. 몸은 사회적 규칙들이 각인되는 장이다. 따라서 몸은 하나의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역사와 더불어 사회적 맥락 안에서 유동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몸이란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탈 역사적이고 통 문화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상대적이고 역사적인 실체다. 모든 사람은 몸을 갖고 태어난다. 따라서 몸은 ‘나’이자 곧 ‘너’이며, 나는 ‘내몸’이고 너는 ‘네 몸’ 이다. 그런데 어떤 몸은 사회적 성원권을 부여받은 반면에어떤 몸은 존재함에도 사회적으로 부재하였다. 명명되어지는 몸은 공식적인 성원권을 갖는 사회적 인격체이지만, 여성ㆍ노약자ㆍ아이ㆍ천민ㆍ소수자 등은 이름없는 몸으로서 사회적 인격을 제대로 부여받지 못하였다. 어느 시대이든지 몸의 역사성은 바로 당대 사회의 지배적인 담론과 깊숙이 맞물려 있다.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서 이름 없는 몸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식되고 존재해왔는지 궁금하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몸이 장애를 가진 몸이다. 장애를 가진 몸은 사회적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름 없는 몸으로서 가장 소외된 존재이자 소수자였다. 오늘날 장애인이라 부르는 이들은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으로 사고나 질환으로 인해 몸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하거나 능치 못한 몸을 가진 사람이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人形, 즉 사람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을 ‘不成人’ 이라고 하였다. 흔히 얼마 전까지 우리가 부르던 장애인을 불구자라고 부른것은 개항 이후에 등장한 용어로 짐작된다. ‘자연의 몸’ 이면서도 동시에 ‘불가피한 몸’으로 사는 불성인들은 사회적 생산을담당키 어려운 존재가 됨으로써 늘 보호와 규휼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환과고독과 疲癃殘疾 등의 불성인은 국왕이 仁政을 베풀 때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될 대상이자, 산천초목과 같은 자연물과의 경계에 서 있는 마지막 백성이었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말할 때, 영웅(위인)이든 민중이든 정상인을 대상으로 한역사만을 이야기 해 왔다. 현재도 그러하듯이 과거 역시도 장애인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몸이 함께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국가의장애인구는 약 10%가 될 것을 권장하고 있다고 한다.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전통시대에도 장애인 수가 이 수준을 준해서 본다면, 그동안 우리는 대략 10% 내외의역사적 실존인물을 배제한 채 역사를 이해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 그 동안연구된 역사서에 장애인을 고려한 기술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역사 연구에서 장애를 고려하는 균형 잡힌 역사서술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조선시대 격방의 체육사적 고찰 : Concentrated on the Origin of Korean Golf History 한국 골프史의 起源과 관련하여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1998 敎養敎育硏究所 論文集 Vol.- No.3

        There was a ball bitting play named "Kyukbang(擊棒)" in the Chosun Dynasty. It has been introduced by the envoy dispatched from Koryo(高麗) to Mongol(元) in the end of Koryo Dynasty and played for the first time. People started to use the term, Kyukbang since King Sejong(世宗). Before that Kyukbang was called "Kyukgoo(擊毬)" or "Tagoo(打毬)" which was designated for a ball bitting play. Thereafter people called it Kyukbang to differentiate from "Kyukgoo", a kind of polo. In time of king Sejo(世祖) it was also called "Banghee(棒戱)". Kyukang which started as a court play of the king was so popular entertainment that even civilians could enjoy playing. People continued to play it until the end of 15th century when Confucianism(儒敎思想) has settled down and disappeared after that.

      • 새 무형문화재법과 전통적기예·무예 조사방향

        심승구 국립무형유산원 2016 무형유산 Vol.0 No.1

        This article was written to suggest the direction for a comprehensive nationwide survey of skills and martial arts according to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Law which came into effect in 2016. The new law significantly expanded the definition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previously confined to 'artistic talents and skills' into the 'traditional knowledge and daily customs'. As a result, the skills and martial arts field which have been broken or vulnerable to transmission came under attention. Some suggestions to prepare before the next nationwide comprehensive research into the traditional skills and martial arts aspects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are as follows. First, set concepts and categories for the traditional skills and martial arts as an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Second, after defining the concepts and categories, the present-condition research must take precedence over the events that were cataloged, up to the present among the skills and martial arts, as intangible cultural heritages, such as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State-Designated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City/Province-Designated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and National Reserve List. Third, there is a need for comprehensive research studies to extract new items in the field of skills and martial arts. Fourth, if there are some items which have been already included in other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sector in the skills and martial arts, there is a need for discussion on how to handle the issue. Lastly, in the case of skills and martial arts, there seems to be a need to examine the way in which we designate Modern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besides designating the existing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in order to protect and transmit them because there are lots of events which were restored and reproduced in modern times. 이 글은 2016년부터 시행된 무형문화재법에 따라 기예와 무예의 전국적 종합조사를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새 무형문화재법은 종래 ‘예능과 기능’에 국한된 무형문화재를 ‘전통지식과 생활관습’ 등으로 전승영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그 결과 그동안 단절되었거나 전승취약 종목에 해당하는 기예와 무예의분야가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기예는 종래에 없던 새로운 분야로 설정된 것이다. 향후 기예와 무예의한국무형유산종합조사에 앞서 준비해야할 과제를 몇 가지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형유산으로서 기예와 무예의 개념과 범주를 설정하는 일이다. 이 같은 작업은 해당 분야의 대상과범위를 조사하고 설정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가 될뿐 아니라 사업 전체의 체계성과 적합성을 담보하는 조건이 되리라 여겨진다. 둘째, 개념과 범주가 정해지면, 현재까지 기예와 무예 가운데 무형문화재(인류무형문화유산, 국가무형문화재, 시·도무형문화재, 국가예비목록)로 지정되거나 목록화되어 있는 종목의 현황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같은 작업은 현재 기예와 무예 항목의 유형과 특징을 파악하여 향후 조사의 방향을 가늠하는데 일정하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셋째, 기예와 무예 분야의 새로운 항목 추출을 위한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그동안 기예와 무예 분야는 전승이 단절된 대표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현행 무형문화재 지정에서 큰 비중을 갖지 못하였다. 하지만, 새 무형문화재법에 따라 조사 분야로 설정된 만큼, 이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조사가 선행되어야하리라 여겨진다. 넷째, 기예와 무예의 항목이 이미 타 무형문화재 분야에 포함되어 있을 경우, 그 처리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예컨대 남사당놀이의 경우, 줄타기나 버나돌리기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이 경우 줄타기와 버나돌리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종합연희의 경우에 포함된 기예 종목과 개별 종목(예, 버나 돌리기나 줄타기 등)사이의 구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상의 작업은 마지막으로 무형유산으로서 기예·무예의 조사 방향과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향후 한국무형유산종합조사 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하는데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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