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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군(河東郡) 치소(治所) 이동(移動)과 정안봉산성(鄭晏峯山城)

        심봉근 ( Sim Bong-geun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8 石堂論叢 Vol.0 No.70

        하동 정안봉산성의 정안과 관계 규명을 위한 시굴조사에서 정안의 생몰시기보다 선행하는 신라시대 초축의 석성이 발견되었다. 필자는 문헌상에 나타나는 하동군 치소 이동과정과 시굴조사 결과를 분석하여 정안봉산성의 축조배경은 물론 정안과의 관계를 파악하여 보았다. 먼저 문헌자료에 나타난 하동군의 조선시대 치소 이동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양경산 아래에 석축성을 쌓아 읍성으로 삼았으며 세종 7년(1425년) 섬강변의 두곡으로 이설한다. 인조 10년(1632년) 괴질이 만연하여 두곡에서 현종 2년(1661년) 횡포로 이설하고 숙종 5년 (1679년) 다시 두곡으로 환원한다. 숙종 29년(1703년) 진답면 우령으로 이설하였다가 이듬해인 숙종 30년(1704) 두곡으로 환원하고 부로 승격된다. 영조 6년(1730년)에는 나동으로 이설하였다가 영조 21년(1745년) 항촌으로 다시 이설한다. 고종 32년(1895년) 현에서 군으로 개편된다. 이를 정리하면 양경산하→ 두곡→ 횡포→ 두곡→ 우령→ 두곡→ 나동→ 항촌으로 된다. 다음 신라와 고려시대 치소에 대해서는 유적과 유물을 통한 고고학적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하여 보았다. 하동군의 경우 삼국시대에 가야, 백제, 신라 등 그 영역 구분이 어려우나 신라통일 이전에 가야 또는 백제가 관방성 축조 가능성은 배제 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하동군이나 다사군 또는 한다사군편제가 시작되는 신문왕과 경덕왕 대에는 관방성을 겸한 치소성 축조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인접한 악양면 고소성의 경우 시굴조사에서 축조수법과 출토유물의 특징이 소다사 또는 악양현 치소와 관련된것으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한다사군 또는 하동군의 치소와 관련된 성곽도 군내 어느 곳에 축조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하동군내 성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는 고대 산성이 고소성, 귀성, 정안봉산성, 원동산성, 소란산성, 두우산성, 금오산성, 이명산성 등 8개소이다. 고대산성가운데는 치소성과 관방성이 포함되고, 축조시기 또한 신라, 고려 등 다른 특징의 것이 혼재해 있다고 생각된다. 그 중 정안봉산성은 신라 하동군의 군사상 거점지로서 관방을 겸한 치소성으로 축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남해안과 이격된 내륙지역이면서 당시 하동군의 중심부에 해당하고 해발 448m 고지에 바른층쌓기 축조수법을 가진 석축성이라는 것이 특징으로서 신라시대로 편년하는 우리나라 남부지역 신라성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시대까지 치소로서 이용된 것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른 지역의 경우 나말여초에 축조된 치소성 대부분이 산정에서 평지로 이동된 단계이므로 하동군은 예외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안이 생존한 고려시대 치소성은 우선 위치상으로 평지성이나 평산성, 아니면 무성곽의 평지에 있어야하고 석성보다는 토성이라는 점을 참고삼아야 할 것이다. 결국 정안봉산성과 정안과의 관련은 고려시대 하동군 치소와 관계없이 정안이 낙향하여 정안봉산성내에 한때 머물렀을 가능성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정안봉산성 시굴조사에서 고려시대에도 수개축이 이루어진 사실이 확인되고 있어서 고려해 본다는 의미이다. A preliminary excavation, carried out in order to investigate the connection between Jeongan and Jeongan-bong mountain fortress, discovered a stone fortress of the Silla dynasty that preceded Jeongan's lifetime. This essay goes through the construction background of the fortress as well as its connection to Jeongan by analyzing the movement tracts of Hadong County's local administration in the historical records and the result of the preliminary excavation. In addition, this essay examines local administrations in the Silla and the Gorye dynasties with archeological methods using relics and artifacts at the time. In the case of Hadong County, it is difficult to distinguish which country built the fortress. However, there is a possibility that the fortification was a work of either the Gaya or the Baekje dynasty. According to the The Chronicles of the Three States, the organization of the Handasa County(an old name for Hadong County) started in the period of King Sinmun and King Kyungdeok of the Silla. In addition, a preliminary excavation in Goso fortress in Akyan near Hadong County confirmed th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construction method and excavated artifacts were related to the local administration in Akyang. Therefore, there is a high possibility that the existence of the local administration and its fortress somewhere around Hadong County. According to the surface investigation into fortresses within Hadong County, it is assumed that eight ancient mountain fortresses were built within this area in the period between the Three Kingdoms and the Gorye. These fortresses had mixture characteristics of various periods and functioned as a local administrative fortress and a fortification. Therefore, Jeongan-bong mountain fortress was built for the purpose of a military base functioning as a local administration as well as a fortification. However, there were two the characteristics of a local administrative fortress built in between the end of the Unified Silla and the early Gorye dynasty. First, it was a period when most local administrative fortresses had been moved from the mountain to the plain or plateau. Second, they were earthen fortresses rather than stone fortresses.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confirm the connection between Jeongan-bong mountain fortress and a local administrative fortress of Hadong County in the Gorye dynasty. Rather, judging from the evidences of reconstructions during the Gorye dynasty, it is good possibility that Jeongan had once used to live in the Jeongan-bong mountain fortress after his retirement. Of eight mountain fortresses, Jeongan-bong mountain fortress was built for the purpose of a military base functioning as a local administration as well as a fortification. The construction date of this fortress went back to the Silla dynasty because its construction method called range works contained similarities suggest possibilities to estimate its foundation, dating back to the Silla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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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지역(釜山地域) 고대성지(古代城址)의 성격검토(性格檢討)와 과제(課題)

        심봉근 ( Sim Bong-geun ) (재)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동아시아문물연구소 2017 文物硏究 Vol.- No.31

        부산지역에는 盃山城을 비롯해서 機張山城, 望美洞城, 校里城 등 신라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축조되어 사용된 고대성지가 남아있는데 時空間的으로 三國史記地理志에 나타나는 東萊郡, 機張縣의 중심지와 일치하여 그 성격이 郡縣의 治所城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여 보았다. 부산의 지리적 자연환경은 군사적으로 海防을 위한 요충지에 해당되어 신라는 神文王代에 郡縣制度 수립과 더불어 이곳에 축성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연제구 배산성과 기장군 기장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산성은 야산정상부에 테뫼식 또는 포곡식 형태로 장방형 석재를 이용해서 바른층쌓기의 체성을 축조하고 내부에 호안석축의 우물지, 집수정, 건물지 등의 부속유구를 갖춘 구조이며 6세기 후반이후에 유행하는 단각고배류의 유물이 수습되어 7세기대에 축조 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신라시대 축조의 昌寧 火旺山城, 巨濟 屯德岐城, 固城 巨流山城, 咸安 城山城, 南海 古縣山城, 金海 盆山城 등 경남지역 산성들과 특징을 같이하고 있으며 대부분 신라 郡縣의 治所城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배산성과 기장산성 역시 동래군과 기장현의 치소성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경남지역의 신라 산성들이 뒷날 성 아래 산록이나 계곡부에 별도의 성곽이나 도시를 배치하고 있다는 최근의 조사 사례를 참고하면 부산의 배산성과 망미동성 그리고 기장산성과 교리성의 관계도 마찬가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망미동성과 교리성은 토성이지만 내부에서 수습된 초기 유물들이 산성에서 출토된 것과 대차가 없다는 조사보고서를 인용하면 같은 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신식이 많다는 점은 간과해서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들 성곽은 신라시대 군현성(치소성)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부산에서 당시 치소의 위치구분은 신라가 통일은 되었지만 변경지역에 대한 경계(왜)를 목적으로 처음 關防城 성격이 강한 군현성을 산 위에 축조하였으나 뒷날 양국관계가 소강상태로 전환됨에 따라 평지로 이동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There are ancient castles built in the eras from Silla to Goryeo such as Bae Mountain Fortress (盃山城), Gijang Mountain Fortress (機張山 城), Mang-Mi-Dong Fortress (望美洞城) and Gyo-Ri Fortress (校里城) in Busan; as they are in accordance with the center of Dongrae-gun (東萊 郡) and Gijang-hyun (機張縣) in Samguksagi Jiriji (三國史記地理志) from a spatial and temporal perspective (時空間的), this study assumed that the characteristics had something to do with Chi-So Fortresses (治 所城) of gun and hyun (郡縣). During the Silla Dynasty, Busan was considered a strategic city for marine defense (海防). It is presumed that gun and hyun system (郡縣制 度) was established and fortresses were started to be built during the period of King Shinmun (神文王代) in the city: Bae Mountain Fortress in Yeonje-gun and Gijang Mountain Fortress in Gijang-gun. These were constructed at the top of mountains in Temoe type or Pogok type and in coursed masonry with rectangular stones; inside them are affiliated structures including well areas for revetment, collecting wells and building sites. They are assumed to be made in the 7th century since the excavation of relics of cups with short legs, which were popular after the late 6th century. Given that they share the same characteristics as mountain fortresses in Gyeongsangnam-do from the Silla Dynasty such as Hwa-Wang Mountain Fortress (昌寧 火旺山城) in Changnyeong, Dun-Deok-Gi Fortress (巨濟 屯德岐城) in Geoje, Georyu Mountain Fortress (固城 巨流山城) in Goseong, Sung Mountain Fortress (咸安 城 山城) in Haman, Gohyun Mountain Fortress (南海 古縣山城) in Namhae, Bun Mountain Fortress (金海 盆山城) in Gimhae, etc., and most cognize them as Chi-So fortresses (治所城) in gun and hyun (郡縣) in the Silla Dynasty, Bae Mountain Fortress and Gijang Mountain Fortress can also be considered Chi-So Fortresses of Dongrae-gun and Gijang-hyun. Moreover, based on the recent study that mountain fortresses from the Silla Dynasty located in Gyeongsangnam-do formed separated castles or cities at the foot of the mountains or valleys, their relationships between Bae Mountain Fortress and Mangmi-dong Fortress and Gijang Mountain Fortress and Gyori Fortress in Busan can be considered the same. Although Mangmi-dong Fortress and Gyori Fortress are fortresses, relics excavated inside them at the beginning showed little difference from those discovered in mountain fortresses; which implies that they were built in the same era of the Silla Dynasty. Certainly, it should not be overlooked that a lot of relics uncovered from fortresses continued to the Goryeo Dynasty. Thus, they are considered to have typical features of gun and hyun fortresses (Chi-So Fortresses) in the Silla Dynasty. At that time in Busan, as for classification of locations for Chi-So, gun and hyun fortresses with distinct characteristics of Gwan-Bang Fortress (關防城) were constructed to protect changed regions against Japan despite the unification of Silla; later, a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came to a state of lull, they are considered to have been moved to flat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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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남해군의 관방성과 목장성

        심봉근 ( Sim Bong-geun ) 동아문화재단 2020 文物硏究 Vol.- No.37

        남해군내에는 조선시대에 축조된 읍성을 비롯한 관방성, 목장성, 왜성 등 다양한 목적의 성곽이 분포하고 있다. 여기에서 논의하는 관방성과 목장성은 조선시대 남해군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자료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 가운데 관방성은 남해군의 지리적 환경이 왜구와 근접되게 대면하고, 사방이 노출된 상태를 적으로부터 방어할 목적으로 축조한 성이다. 관방성의 축조는 수군의 육지근무가 가능하게 된 성종대 부터로 특히,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남쪽 앵강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새로운 성을 축조하지 않고, 기존의 평산현 고성, 난포현고성, 성고개 고성 등 전대에 축조된 치소성이나 기타 미상의 기존시설을 이용하였다. 이후 성고개, 우고개 등과 같이 구릉이나 야산 산록부에 성곽을 직접 축조하였다. 중종조에는 삼포왜란을 계기로 남해안 지역에 보다 적극적인 방어태세를 갖추면서 곡포, 상주포, 평산포 등 남쪽 해안선 근접지역에 진보를 이설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후 왜구 출몰이 소강상태를 이루자 영조대에는 남해안 수군진보가 대부분 혁파되어, 남해군도 평산포진, 미조항진, 적량진만 조선 말기까지 남게 되었다. 노량진성과 호포진성의 경우는 관방성 역할이 예상되지만, 현재로서는 해창과 조창이 위치하는 나루터 감시를 목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남면 당항리 고진성은 문헌상에 보이는 우고개보성이며, 난포현 치소에서 시작하여 우고개보를 거처 곡포보로 이설한 것으로 파악된다. 주목되는 것은 성고개보인데 문헌상으로는 조선시대에 보를 설치하면서 ‘성고개'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을 감안하면, 그 이전에 이미 성이 위치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내 지표조사에서도 전대의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적갈색토기편이 다수 수습되어 미상의 기존 성곽을 조선시대에 다시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목장성은 이동면 난음리 난곡사 뒷뜰에 위치한 석비를 근거로 목장성인 남해장성(금산목장성)을 관방성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1678년 작성된 경상도 남해현과 진주목 목장지도를 포함하여, 각종 문헌사료와 성의 규모와 형태, 위치 등 고고학적 제 특징이 금산목장성으로 파악된다. 또 진주에서 뒷날 남해로 편입된 창선지역도 상죽리, 진동리 등지에서 점마장과 같은 목장 흔적을 확인할 수 있지만, 성은 축조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관계문헌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창선면은 섬 전체가 목장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창선도내에 위치하는 지족해변성에 대한 성격 규명은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종합하면 조선시대 남해군 내의 관방성은 전략상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에 대비한 주민보호가 주목적이었으므로 왜구의 성쇠에 따라 위치 이동이나 혁파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목장성은 금산목장과 같이 광활한 지역의 경우 경계지역에 성을 축조하여 방목으로 발생하는 농민의 피해를 최소화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창선과 같은 작은 도서지역에는 성곽은 축조하지 않고 섬 전체를 목장으로 이용한 것을 알 수 있다. Fortresses(seong), including Eup-seong, Gwanbang-seong, and Mokjang-seong, which were used for various purposed during the Joseon Dynasty(1392-1910), are located in Namhae-gun. Gwanbang-seong and Mokjang-seong to be discussed here are one of the materials to understand the identity of Namhae-gun during the Joseon Dynasty. Gwanbang-seong is a fortress designed for the defense against enemies such as Japanese invaders as the region is geographically adjacent to Japan and exposed in all directions. The fortress was firstly constructed from the reign of Seongjong(r. 1469-1494), when the naval forces were able to perform shore duty. The construction was particularly centered on southern Aenggang-man(bay), where the Japanese invaders often infested. In the early of the Joseon Dynasty, instead of building new fortresses, the old fort, Chiso-seong; existing fortresses located in Pyeongsan-hyeon, Nanpo-hyeon, and Seong-gogae; and other unidentified fortifications were reused. Newly built forts during the Joseon Dynasty were positioned on the base of a mountain and a hill like Seong-gogae and U-gogae. Sampowaeran riot(1510) led to taking an aggressive defensive posture and moving and rebuilding strongholds along the southern shorelines including Gok-po, Sangju-po, and Pyeongsan-po,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r. 1506-1544). Most of the naval fortresses located along the south coast were, however, faded away by the reign of King Yeongjo(r. 1724-1776) as the Japanese invasions had decreased after the Jeongyuwaeran war(1597-1598). By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only a few military positions, including Pyeongsanpo-jin, Mijohang-jin, and Jeokryang-jin, remained in Namhae-gun. Noryangjin-seong and Hopojin-seong might have played a role as Gwanbang-seong. However, so far as is now known, they were constructed to watch over ferries where granaries (haechang and jochang) were. Nammyeon Danghang-ri Gojin-seong refers to U-gogae-boseong in literature. It was first built as a Chiso in Nanpo-hyeon, moved to U-gogae, and then to Gok-po. The Seong-gogae-bo is a noteworthy case in terms of using the place name ‘Seong-gogae' to call a fort(bo), which indicates that the region already had a fortress. Moreover, blue-gray stoneware pottery sherds and reddish-brown pottery sherds unearthed within the fortress through the surface survey show that the unidentified existing fortress was reutilized during the Joseon Dynasty. Based on a stele located in backyard of Nangoksa shrine, Naneum-ri, Idong-myeon, Namhaejang-seong (Geumsan ‘Mokjang-seong') is known as Gwanbang-seong. However, considering various historical records, including maps of pastures in Jinju-mok and Namhae-hyeon in Gyeongsang-do, created in 1678; and the archaeological features of the site such as its size, form, and location, it is understood as the Geumsan Mokjang-seong. The vestiges of farms like horse pasture(jeommajang) are also found in Sangjuk-ri and Jindong-ri in Changseon, where was incorporated as part of Namhae from Jinju. Nonetheless, it is understood that a barrier (seong) was not built, as seen through related literature. It is, therefore, estimated that the entire island of Changseon-myeon was the farm. Further research will need to be carried out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Jijok-haebyeon-seong located within Changseon-do island. In conclusion, Gwanbang-seong was fortresses, tactically constructed within Namhae-gun during the Joseon Dynasty, to protect residents from Japanese raiders infested the southern coast. The fortresses were, therefore, lost their function and moved their locations following the rise and fall of Japanese invaders. Mokjang-seong was built around boundary areas, especially of large farms like Geumsan Mokjang, to help farmers damaged from grazing stock. A fortress was not constructed in a small island like Changseon, but instead, the whole area was used as a fa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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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성(倭城)과 증성(甑城) 명칭고(名稱考)

        심봉근 ( Sim Bong-geun ) (재)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동아시아문물연구소 2018 文物硏究 Vol.- No.3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에 왜군 주도로 국내에 축조한 성곽을 우리는 보통왜성倭城이라 명칭하고 드물게 증성甑城 또는 증산성甑山城이라고도 한다. 사실 왜성이란 왜의 성이라는 의미로서 일본에서는 당시의 성을 전국성戰國城 또는 근대성近代城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증성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시루와 닮았다는 의미로 붙인 것이라는 정도로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있다. 최근 필자는 부산이라는 지명이 증산에서 유래되었다는 기존의 사실들이 잘 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바 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수집과정에서 놀랍게도 증산 또는 증산성이 위치하는 곳이 대부분 왜성이 위치하는 곳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문헌상에 나타나는 왜성과 증성관계 자료를 분석하고 왜성이라는 명칭 사용의 보편성과 증성의 의미를 새롭게 파악하였다. 아울러 왜성과 일본 근세성곽의 원류에 대해서도 검토하여 보았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왜성이란 명칭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에 왜군 주도로 우리나라 국내에 축조한 성곽에 대해서 왜성倭城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조선실록 등 조선시대 공식문헌에서 왜성이라는 단어를 대부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구분되는 것은 동일시기에 일본국내에 일본인이 축조한 성곽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성이라 명창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왜성이라는 명칭은 조선 조정에서 왜인들 주도로 국내에서 축조한 성이라는 의미에서 주로 사용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 다음은 증성 또는 증산성이라는 명칭이다. 이 명칭은 성의 형태가 시루를 닮았거나 아니면 시루를 닮은 산에 성이 위치하여 붙인 명칭으로 우리들은 이해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문헌상 증산이나 증성이라는 명칭이 임진왜란을 경계로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부해서 의미를 달리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부산의 대증현, 양산과 거제의 증산과 같이 이전에 기록된 명칭은 대부분 시루산 또는 시루산성과 같이 산의 형태를 보고 명명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자로 풀이해서 기록하는 과정에서 증산이나 증산성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것은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울산증성, 서생포증성, 부산증성, 사천증성, 양산증산성 등은 임진, 정유 양란 때 축조한 왜성에 대한 별칭으로 사용된 듯하다. 증성 또는 증산성이 왜성의 형태를 보고 명칭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지만 필자가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이 일본에서 성을 시로しろ라고 훈독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하겠다. 당시 왜인들이 왜성을 시로しろ 또는 오시로おしろ라 부르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로しろ를 시루라고 명침하는 과정에서 한자 ‘甑'으로 표기한 것에 연유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증성은 성성이라는 의미가 되며 마치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역전앞 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마지막 왜성의 기원이 되는 일본 근대성곽의 시작 문제이다. 일본 고유의 것으로 설명하는 연구자가 대부분이다. 전국시대 말 일본성곽은 산성에서 평산성으로 입지가 바뀌어 지고 석축, 해자, 토루, 천수각 등 성의 내외 구조에 있어서 다곽식의 새로운 변혁이 나타난다. 성내는 철포 이용이 용이한 보병적 전투기능과 하늘에 맞닿는 오중칠탑의 종교기능 건물 그리고 성주의 거관 등 복합된 특수구조와 기능이 요구되면서 화려하고 장대해 진다. 가장 먼저 축조된 노부나가의 아즈치성은 1576년에 시작하여 1579년에 완공된다. 하비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한지 20년후의 일이다. 현재 알려진 아즈치성의 조감도는 유럽지역 15세기-16세기 성곽들과 매우 닮고 있다. 철포, 화약을 비롯한 천주교 등 서양문물의 일본전입 과정에서 근대성곽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왜성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The term Wae(Japanese) fortress generally indicates the fortresses constructed by the Japanese force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1592~1597). Rarely, it was called either Jeung fortress or Jeung mountain fortress. In fact, the term Wae fortress means the Japanese fortress. In the case of Japan, the fortress built at the time usually called the fortresses in the age of civil wars or the modern fortresses. Recently, the author refuted the existing argument that the name of Busan was derived from the Jeung mountain. In the process of collecting materials for proving the argument, the author found out the fact that the locations of the Jeung mountain and Jeung mountain fortress coincided with where most Japanese fortress located. Therefore, this essay analyzes the materials regarding the connection between Wae fortress and Jeung fortress. Then, it re-examines the generality of using the term Wae fortress and the meaning of Jeung fortress. Moreover, this essay also reviews the origins of Wae fortress and the modern Japanese fortress. The results are as follow. First, this essay goes over the term Wae fortress. This term generally indicates the fortress constructed in the Korean peninsula by the Japanese forces during periods of the Japanese invasion. According to the official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y distinguished the Wae fortresses from the Japanese fortresses located in Japan. As a result, it seems that the court of the Joseon dynasty defined the term Wae fortress as a fortress constructed in the Korean peninsula by the Japanese. Second, it is interesting that the meaning of Jeung fortress or Jeung mountain became different before and after the Japanese invasion. According to the records written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these terms were generally named after the cauldron-shaped of the mountain. Therefore, based on the its Chinese characters, the fortresses were called either Jeung fortress or Jeung mountain fortress. On the other hand, it seems that these terms were used as another name for the Wae fortresses during the period of the Japanese invasion. The word Jeung was originally from a Japanese word for a castle(shiro). Therefore, the Korean people started to use the word shiru(steamer), which had a similar pronunciation with the Japanese word shiro. Last, this essay also examines the beginning of the modern Japanese fortress that had been regarded as an origin of the Wae fortress. Many scholars also argue that the modern Japanese fortress represented the Japan's unique style. However, according to the aerial view of the Azuchi fortress-the first modern Japanese fortress, the styles of their construction were very similar to that of the European in the 15-16th centuries. As a result, the modern Japanese fortresses were influenced by an inflow of the Western culture into the Japan at the time. For this reason, the Wae fortresses constructed by the Japanese also has similar characteristics which the modern Japanese fortresses h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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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고성지역 청동기시대문화와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태동(胎動)

        심봉근 ( Sim Bong-geun ) 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2016 文物硏究 Vol.- No.29

        고성은 삼한시대 고자미동국의 중심지이며 그 태동기 문화는 고성지역 청동기 시대 후기와 삼한시대 초기의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만 확인이 가능하다. 그리고 태동기는 시기적으로 기원전 300년경 전후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 문화는 송국 리형 주거지 단계의 주거지, 지석묘, 환호, 마제석기 등이 주목되며 무선리와 율 대리 주거지와 환호, 함께 출토된 무문토기와 삼각형석도는 후기후반 자료로 평 가된다. 석관묘는 고성에서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묘제 중의 하나로서 가장 선행 하는 문화요소이고 마제석검은 청동기시대 해석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지만 전세 기간이나 재생해서 사용하는 경우 절대연대 추정에 장애가 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삼한시대 초창기를 대표하는 유물은 한국식동검과 다뉴경, 원형점토대구연토기, 흑색장경호 등이다. 고성에서는 고성읍 성내리와 송학리 수 혈에서 삼각형점토대토기와 함께 일본에서 중기로 편년하는 야요이식토기기가 출토되어 원형점토대토기 보다는 한 단계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고성에서는 고자미동국 초창기에 해당하는 원형점토대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이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이 하나의 극복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의 자료 증가를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청동기시대 무선리의 송국리 단계와 삼한시 대 성내리 삼각형점토대구연토기 사이에는 원형점토대토기 존속기간 정도의 일 정 공백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접한 사천 방지리에서는 원형점토대토기 단계, 원형점토대와 삼각형점토대토기 중복단계 그리고 삼각형점토대구연토기 단계로 시기 구분이 가능한 복합생활유적이 최근 발견되었다. 고자미동국의 태동 기에도 방지리유적과 마찬가지 단계를 거친 해당유적이 위치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중심지도 청동기시대 율대리에서 삼한시대에는 성내리나 송학리가 있는 현 재의 고성읍내로 옮긴 것으로 짐작된다. 하이면 석지리 출토 동검과 하일면 송천 리 솔섬 석관묘와 철검, 무문토기, 회백색 연질 주머니호는 삼한시대 전기에 외곽 지역에도 청동기시대에 이어서 재지주민들이 정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자료이다. 그리고 고성읍 동외동패총에서 수습된 청동기와 토기 등 국제성을 가 진 유물은 신문화 충격에 대한 흡수나 기온변화에 따른 재지주민들의 대응책을 반영한 결과물로 해석된다. and its culture during the quickening period can be identified only through archaeological materials during the late Bronze Age and early Samhan Period in Goseong Area. And the quickening period is estimated to be around 300 BC in time. In the Bronze Age Culture, polished stone tools, dolmens, moat, residence of the Songgok-ri type residence stage are highlighted and Museon-ri and residence, moat, patternless earthenware and triangular stone blade excavated together are evaluated as late materials. As one of types of tombs used in the earliest time in Goseong, a stone-coffin tomb is a preceding cultural element and a stone dagger is the material to help interpret the Bronze Age but its disadvantage is to present an obstacle to estimating absolute age when used through recycling or during Jeonse Period. As everyone knows, artifacts that represent the early Samhan Period include Korean type dagger and geometric-design bronze mirror, round clay stripe double-rimed pottery, long-necked pottery etc. In Goseong, Yayoi-style pottery chronicled as the first half of mid-term in Japan with triangulated clay-stripe pottery in Goseong-eup Seongnae-ri and Songhak-ri pit, indicating those are one stage later than round clay-stripe pottery. Therefore, no remains where round clay-stripe pottery corresponding to the early days of Gojamidongguk is excavated in Goseong have been identified so far and it may be one of the challenges to overcome. There is no choice but to wait for future growth of data but it can be seen that there is a certain gap as long as round clay-stripe pottery duration between Songguk-ri stage of Bronze Age Museon-ri and Seongnae-ri triangulated clay-stripe double-rimed pottery during the Samhan Period. In adjacent Sacheon Bangjiri, complex life remains were discovered recently and periods can be classified into round clay-stripe pottery stage, round clay-stripe and triangulated clay-stripe pottery duplicate stage and triangulated clay-stripe double-rimed pottery stage. The remains passing through the same stage as Bangjiri ruins are determined to be located also in the quickening period of Gojamidongguk. Also, the center is guessed to have been moved from Yuldae-ri during the Bronze Age to current Goseong-eup where there is Songhak-ri or Seongnae-ri during the Samhan Period. Bronze daggers excavated in Hai-myeon Seokji-ri and light gray soft pocket-shaped jars, patternless earthenware, iron swords and stone coffin tombs in Hail-myeon Songcheon-ri Solseom are the materials telling that local residents also settled in rural areas in the early Samhan Period following the Bronze Age. And remains with the internationality such as bronzeware and earthenware collected in Goseong-eup Dongoe-dong shell mound are interpreted as the result reflecting the response of local residents according to temperature change or absorption of the new culture sh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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