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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남원대도소의 9월봉기론과 김개남군의 해산배경

          신영우 동학학회 2014 동학학보 Vol.0 No.33

          Kim Gaenam is the one of the top ranked leaders of the Donghak PeasantArmy. Namwon, Jeolla Province were the base of the Kim Gaenam. The studyabout him had been done scarcely compared to the other leader like JunBongjun. There are relatively rare data about him. Kim Gaenam, the leader of the Namwon Headquarters insisted to the armeduprising since September, 1894. He thought that if the decision of uprisingshould not depend on the result of the First Sino-Japanese War. He said that itis difficult to reconvene a disbanded military during the harvest season. The troops commanded by Kim Gaenam were violent. To kill a governmentofficial was a taboo for the Koreans, but the troops of Kim Gaenam fearlessnesskilled several bureaucrats. The biggest problem to inhabitants of Namwon wasrecklessly getting the expenses of the war. Furthermore, the Kim gaenam troopswas violent to residents of the marching area when they walking down a grainand money. Military spending was obviously needed, but it brang the lost of thesupport of its people. The troops commanded by Kim Gaenam was defeated while attackingCheongju. They had to rolled back and was dissolved. Since then, they weredisappeared from the history. 김개남은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김개남은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거느리고 전라도 남원에거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그 위세는 마치 왕을 스스로 칭하고 있는 것처럼 대단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이루어져 있지 않다. 김개남에 관한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개남이 거느린 남원대도소는 유일하게 9월부터 무장봉기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다른 지도자들과 차별이 되는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조기봉기론이었다. 김개남은 농민으로 이루어진 동학농민군이 일단 해산하면 다시 모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청일전쟁의 결과를 보고 재봉기를 결정하는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봉준 등 다른 지도자는 이에 대해 반대하였고 그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다. 재봉기한 이후에도 김개남 군은 전봉준 군에 합세하지 않았다. 전봉준 군이 공주 우금치를 공격할 때에도 청주를 점령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김개남군은 청주에서 패배하고 후퇴 하였다. 그 후 역사에 그들의 활동은 다시나오지 않는다. 김개남 군은 난폭하였다. 정부 관료도 함부로 죽였고, 남원 지역 주민들에게 전쟁 경비 마련을 위한 곡식과 돈을 거둘 때도 난폭하였다. 행군할 때 지나가는 마을에서도 거칠게 행동했다. 그 결과 인심을 잃게 되었고, 해산한 뒤 재기를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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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의의

          신영우 동학학회 2006 동학학보 Vol.10 No.2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은 지역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경상도 북부지역의 전개과정을 전라도와 비교하면 시기에 따라 다른 형태가 뚜렷이 드러난다. 전라도에서는 동학 교단과 일정한 거리를 둔 남접의 지도자들이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독자 세력을 확보하였다. 경상도 북부지역의 동학조직은 동학 교단의 지침 아래 활동하였다. 하지만 6월 말 이후 경상도 북부지역의 동학 조직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앞서서 무장활동을 서둘렀고, 8월에 들어오면 무장봉기에 나서고 있었다. 이 지역의 동학 조직이 무장봉기를 일찍 준비하게 된 까닭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경계 때문이었다. 청과의 전쟁을 위해 육군 대부대를 도보로 북상시킨 일본군은 경상도 요지에 병참부를 설치했는데 이 병참부가 공세의 대상이 되었다.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이 2차봉기를 전후해서 무장활동을 격화시킨 군현은 예천·경·상주·선산·김산·안의·거창·의흥·성주 등지였다. 모두 일본군 병참부가 가까이 있던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에서 활동한 조직은 관동포(예천·문경 일대), 충경포(상주·선산·김산 일대), 상공포(상주·예천 일대), 선산포(선산·김산 일대), 영동포(김산·개령 일대)의 5개 대접주 조직이었다. 경상도 북부의 각 군현에서 1894년에 동학 조직이 활동하는 모습은 시기에 따라 확연히 구분이 된다. 편의에 따라 4시기로 나누면, 제1기는 3월에서 7월 초까지 동학 조직이 표면에 드러나서 활동을 펼치던 시기이다. 제2기는 7월 초에서 8월 하순까지 일본군과 대적하기 위해 무장을 강화하던 시기이다. 제3기는 8월 하순에서 9월 하순까지 무장봉기와 기포령에 의해 읍내 점거를 시도했던 시기이다. 제4기는 9월 말 이후 일본군·관군·민보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진압, 추적을 받던 시기이다. 일본군과 충돌한 것도 경상도 북부지역이 가장 먼저였다. 예천의 동학 조직이 산양에서 집결하여 일본군 병참부 공격을 준비하자 태봉병참부의 일본군 다께우찌 대위가 병정 2명과 함께 정탐하러 왔다가 발각되어 피살당하였다. 청과 전쟁을 위해 수많은 일본군이 북상하는 것을 보게 된 이 지역의 동학교도들이 무장 활동을 시작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가장 먼저 예천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9월 18일 동학 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은 경상도 북부지역의 동학 농민군이 일제 봉기하는 신호였다. 9월 22일 상주·선산 등 대읍이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관아의 무기는 모두 탈취되었다. 관아 건물은 동학농민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그러나 경상도 북부지역의 동학농민군은 민보군과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급속히 위축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격화된 지역을 순회하는 남영병에 맞서서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제4기는 9월 하순 상주와 선산 같은 주요 군현에서 물러난 동학 농민군이 외촌에 흩어져 있다가 민보군과 관아의 추적을 받아 체포 되거나 영동과 황간에 집결한 북접농민군 대군에 합류하여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여한 시기이다. 체포를 모면한 동학농민군 가담자들은 산골 깊숙한 지역으로 피신하거나 충청도 등 외지로 피난하여 숨어 있었다. 군현에 따라 동학에 입도했거나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사람들에게 호된 보복을 하기도 하였다.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여러 문제를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첫째 영남 북서부에서도 사교로 탄압받았던 동학이 유교를 대신해서 세력을 확산해간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는 아직 양반 가문의 향촌사회 지배력이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었지만, 향리들의 힘이 관아의 실무를 장악한 것을 배경으로 점차 양반층을 압도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던 사실이다. 셋째는 일본과의 전쟁을 앞두고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을 해치는 분열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군과 양반층 또는 민보군은 서로 합세할 여건을 갖지 못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양반층에게 합세를 요구하면서 부농과 지주에게 과거의 원한을 보복함으로서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고, 이 지역의 양반층은 국왕이 경복궁 안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인신이 장악된 상태에서 동학농민군과 적대하고 일본군을 끌어 들여서 동학농민군을 학살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예천과 김산의 민보군과 양반들이 의병을 결성해서 활동하지만 경군과 남영병과 제대로 전투조차 벌이지 못하고 패산하였다. 1894년에 힘을 합하지 못했던 동학농민군과 반일 양반세력은 결국 일본군과 친일 관료들이 장악한 관군에 의해 각각 격파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내부 갈등에서 발판을 마련하여 조선 국가와의 전면 전쟁이 없이 침략을 감행하였다. The development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differs in each province. In Gyeongbuk province, the Donghak Peasant Army operated in accordance with the order of the Donghak. Hence the army submitted to local authorities and militia activity was restrained. However, when invaded by Japanese military, they were first to arm against Japanese and tried to drive them out. The armories and supply depots of Japanese army in Gyeongbuk province were targeted. And this campaign of securing munitions and supplies brought a backlash from the aristocracy, ``Yangban``, and wealthy landlords, ``Jiju``. Consequently the Donghak Peasant Army fought the Home Guard sent by the aristocracy and wealthy landlords and later the Japanese army. As a result the peasant army was defeate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Gyeongbuk province highlighted several facts. First, the Donghak had strong influence over the peasant instead of Confucianism. Second, as for ``Yaecheon`` and ``SangJu``, the power of petty officials (``Hyangni``) who are in charge of practical affairs of the local government office has grown significantly. Third, the revolution also manifested clear division among Korean societies even prior to the imminent war against Japanese. While they wanted to combine forces against Japanese army, as the peasants pursed old personal grudges against the aristocracy and wealthy landlords the peasant army lost the opportunity to join the forces. Furthermore the aristocracy in Gyeongbuk province who are socio-economically in opposition to the peasant slaughtered the peasant army in collusion with Japanese even as the Japanese army in ``Gyeongbokgung`` palace took the King as a hos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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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영남의 동학농민군과 동남부 일대의 상황

          신영우 동학학회 2014 동학학보 Vol.0 No.30

          In 1894, North-West, South-West of Gyeongsangdo occupied by the Donghak Peasant Army who against Joseon Dynasty. The Donghak Peasant Army of Gyeongsangdo had a firm grip on the northwest area near Chungcheongdo and Jeonrado. At the end of October, the principal cities like Sangju(尙州) and Seonsan(善山 ) was occupied by Donghak Peasant Army. It was threatened the supply base of Japanese army at Nakdong(洛東) and hapyeong(海平). Japan began military intervention. Japanese army set up the quartermaster corps in 11 districts of Gyeongsangdo. Even though the Donghak Peasant Army awarded of the Japanese martial power, they targeted on the blocking Japanese military telegraph which was the only way to attack. The Japanese army counterattacked the Donghak Peasant Army. Minbogun(民堡軍) which organized by Joseon Dynasty organized and Namyoungbyeong(南營兵) which detached under Japanese coercion were also attacked the Donghak Peasant Army. The battle resulted in the defeat of the Donghak peasant army. On the other hand, Younghae(寧海) where is on the southeast area of Gyeongsangdo, faced a different situation by the peasants' uprising. It was not intervened by the Donghak. Since 1871 when Shin-Mi trouble occured, the Donghak couldn’t rebuild. The reason of the peasants’ uprising was same as the Donghak peasant army, misgovernment. 1894년 충청도와 전라도에 접경한 경상도 북서부와 남서부의 상주 선산 용궁 성주 하동 등에서는 읍내가 점거되었다. 10월 하순 동학농민군이 상주 선산을 점거하자 일본군이 즉각 개입하였다. 군사상의 필요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부산 삼랑진 물금 밀양 대구 청도 다부원 해평 낙동 태봉 문경의 11개 지역에 병참부를 설치하고 군용전선을 깔았다. 경상도의 동학농민군은 병참로를 따라 행군해간 일본군의 위력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대일전쟁을 준비하였다. 처음에는 전선을 단절하거나 전신주를 쓰러뜨려 전신망 차단이 목표였다. 일본군 후방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유일한 공격 방법이었다. 일본군은 이런 공세에 반응해서 동학 조직의 견제를 시작했는데 동학농민군의 무장봉기 이후에는 직접 반격을 가하거나, 조선정부에 강요해서 남영병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일본군 공격으로 동학농민군은 번번이 패배하고, 여러 군현에서 민보군을 결성하여 근거지를 수색하자 경상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곧 세력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군의 전신망과 병참망은 11월 초 이후에는 더 이상 위협을 받지 않았다. 경상도의 동남부 군현에서는 이와 달리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동학의 포접 조직과 인맥으로 구성된 동학농민군은 동학 세력이 미약하거나 존재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나타날 수 없었다. 영해를 비롯한 인근 군현은 1871년 신미년의 병란 이후 동학 조직이 재건되지 못했을 수 있다. 동학농민군의 봉기 원인인 폐정은 1894년에 여러 군현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의 요인이었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지 않은 군현에서도 농민항쟁이 일어나 10월 초에 60여 군현이 소란했다고 한다. 1894년은 연이은 흉작으로 농민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경상도 71개 군현 중 37개 군현이 혹심한 흉년으로 고통을 받았다. 영해와 영천 등지의 농민항쟁은 경상도 북서부와 남서부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를 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중하는 주도자는 원악도로 정배를 보낸 동시에 불법을 자행한 지방관과 향리도 엄벌을 내려 수습하였다. 농민항쟁은 부산의 일본영사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고 있었다. 농민항쟁은 관치질서 유지를 위해 수습되어야 했다. 일본군이 내정을 간섭하던 시기에도 정부로서는 동학농민군과 마찬가지로 지방관의 폐정에 항거하던 농민항쟁도 용납할 수 없었다. 동학농민군의 봉기나 농민항쟁의 원인을 제거하는 책임은 감사에게 있었다. 경상감사는 지방관들의 착복과 공금 유용 사실을 조사해서 정부에 보고하였다. 민씨정권의 문란한 국정 운영이 지방 군현에서 나타난 사례가 지방관의 불법행위였고, 그것이 항쟁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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