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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8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7 No.1

          이 글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를 통하여 식민지 시대의 이 땅에 파종된 무정부주의의 모습을 천착(穿鑿)하고자 한다. 그가 기초한 『조선혁명선언』과 그 주체인 조선의열단의 노선, 그리고 1927년을 전후하여 그가 마지막 의지처로 생각했던 동방아나키스트연맹에서의 언행과 저작을 통하여 일제 치하에서의 한국 무정부주의의 현실과 이상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에는 당시 식민지지배 아래서의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상적 습합(習合)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사상은 당시 한국에 유입된 양계초(梁啓超)의 영웅주의, 크로포트킨(Count Kropotkin)의 민중주의적 연민과 상호부조론, 고도쿠 슈스이(幸德秋水)의 폭력혁명론, 이석증(李石曾)의 생물학적 진화론 등을 융합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식민지 시대의 무정부주의가 매우 정치(精緻)하고 논리적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학통으로 보면 고토쿠 슈스이를 잇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신채호의 폭력혁명론은 그의 사상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업장(業障)처럼 따라 다니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좌절된 후 최후의 방법으로 폭력 또는 테러리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잘못된 일도 아니고 비난 받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 투쟁에 대하여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이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이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어떻게 연계되어 있고 어떻게 다른가에 대하여는 당사자인 신채호도 혼동하고 있고 후세의 평가도 각기 다르다. 신채호도 계급 투쟁이나 평등과 같은 사회주의적 입장을 밝힌 바 있고, 당시 무정부주의자들은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계급 철폐를 주창하는 등 사회주의적 요소를 표방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무정부주의가 사회주의와 혼재ㆍ혼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식민지시대의 한국의 무정부주의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거부와 혐오감이 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 정확히 권력이나 또는 정치(정부ㆍ국가)에 대한 거부나 혐오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신채호를 비롯한 한국의 무정부주의는 정통 논리로부터 다소 빗겨 서 있었다. This paper was written to depict the reality and idea of Korean anarchism under the Japanese rule through Shin Chae-ho's writings such as the Declaration of Korean Revolution, his political line presented at the Korean Gallant Party(Chosun Uiyuldan), and his dialogues and activities at the East Anarchist Union. Shin Chae-ho's anarchism shows the ideological fusion as a means of independence movement. So as to say, he accepted and reconstructed the heroism of Liang Chi-chao, populist sympathy and mutual assistance theory of Count Kropotkin, theory of violent revolution of Kotoku Shushui and biological evolutionism of Lee si-zheng. In this respect, anarchism under the colonial rule, especially in case of Shin Chae-ho, was neither accurate nor logical. While evaluating Shin Chae-ho's theory of violent revolution, which was connected with Kotoku Shusui, it was a karma given to him. When all kinds of ways to win their independence under the colonial rule were frustrated, violence or terrorism as a last resort was not immoral. In spite of that, Korean historiography was not favorable to his theory of violent struggle. How was Shin Chae-ho's anarchism connected with socialism or communism? Not only Shin himself but also scholars of his ideology were confused in understanding them. Shin had urged such a socialist concept as class struggle and equality, and anarchists at that time often refused private property system and class discrimination. It means that anarchism of the time was mingled with and misused as socialism. Considering the above facts, Korean anarchism under the Japanese colonial seizure was essentially not composed of reluctance to the power such as government or state but to the Japanese imperialism. In this respect, anarchism of Shin Chae-ho was slightly deviated from the orthodox anarc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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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에서의 향약(鄕約)과 향속(鄕俗)의 연구 -관습법의 존재 양식을 찾아서-

          신복룡 ( Bok Ryong Shin ) 건국대학교 법학연구소 2010 一鑑法學 Vol.0 No.18

          [1] The Koreans, having not gone beyond the age of feudalism and with no local autonomous experience, lacked the opportunity to train themselves in civic consciousness, Because of this, Local Convention (hyangy ak) in the age of the Chosun Dynasty was a significant mechanism in sustaining social order and the public good by playing the role of conventional law. [2] Local Convention, which was composed of four principles, (1) the mutual encouragement of virtues, (2) the mutual control of personal faults, (3) the mutual exchange of social courtesy and (4) mutual assist ance in hardship, was a type of autonomous regulation at the local civic level apart from governmental powers. It contributed to the evolution and development of local communities and was passed down as a means of solving social conflict that could not be governed by the official authority. It also was imbued with the meaning of local autonomy. [3] At the beginning stage of Local Convention in the early sixteenth century, the ruling class of the Chosun Dynasty wished to cultivate the people they governed by Confucian doctrine through Local Convention. For this purpose, Lee Hwang and Lee Yool-gok led its establishment. When, however, the local gentry attempted to form a potential group and grew as a resisting organization, the ruling class began to regret its support and looked for ways to suppress the growing resistance, In some respects, abusive activities of the gentry was responsible for this reaction. [4] As Local Convention was an idea, local customs such as doorae (cooper ative farming), poomasy (exchange of farming labor), folk festivals and gyee (mutual assistance unions) were the fruits of these ideas. In pre-modern society, with a rudimentary monetary system and lack of a social safety net, the Local Convention gave vitality to the enhance ment of the local identity and a sense of common solidarity in rural society. The Local Convention was in essence civilian regulation based on the Confucian spirit to give mutual assistance. Its core value was common and mutual exist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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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실학자들의 토지 인식

          신복룡(Bok-Ryong Shin) 건국대학교 부동산도시연구원 2010 부동산 도시연구 Vol.3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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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는 조선조의 실학자들의 사상 중에서 그들이 토지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실학자들의 토지 인식에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전체 사상을 토지만으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토지는 그들의 핵심적 가치 중의 하나였으며,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통하지 않고서는 실학의 전체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논지에 이 논문은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같은 농경사회에서 토지는 사회경제사뿐만 아니라 정치사의 중요한 추동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왕조 변혁에 대한 수많은 명분과 논리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늘 누가 토지를 소유하느냐의 문제가 깔려 있었고, 훈구와 개혁파의 논쟁의 이면에도 토지는 중요한 가치였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1] 실학은 조선조의 시대정신을 읽는 하나의 도구였다. 실학자들은 멀리 이이(李珥)의 양민책(養民策)에 머리를 향하고, 전쟁의 참화와 이로 인한 민생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면서 경기 일원에서 살던 남인(南人) 유파의 몰락한 지식인들(marginal men)이 북학에 영향을 받아 전후 복구와 후생을 유념하면서 구상한 사상 체계였다. 이런 점에서 실학은 한국사에서 근대성(modernity)의 시발이었다. [2] 토지라는 시좌(視座)에 국한하여 본다면, 실학들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으로부터 추호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농경사회에서 토지는 영혼과 같은 것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조의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에 따른 사대부의 토지제도의 불합리함을 입증하는 데 노력을 경주했다. 그들의 토지 인식은 기본적으로 사유제를 거부하는 공유제였다. [3] 실학자들이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가장 우려한 부분은 토지 겸병에 따른 사대부의 지주화현상이었다. 토지겸병은 경작자의 빈곤을 초래하는 중요한 이유로서 그 자체로도 공의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균형 있는 분배를 저애하였다. 그들은 토지 겸병을 막는 방법으로서 토지상한제를 구상했다. [4] 전기 실학자들이 주로 토지제도의 모순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개혁에 몰두했던 데 비하여 후기 실학자들은 토지 생산성의 증대를 고민했는데, 이는 북학(北學)을 통한 자연과학의 도입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농지의 개발과 농기구의 발명, 그리고 낮은 세율에 유념하였으며, 종래의 미곡납(米穀納)에 대신하여 화폐납(貨幣納)을 주장함으로써 상업자본의 도래를 촉진했다. [5] 실학파들은 역사, 지리, 강역학(彊域學), 토지제도, 과거제도, 천문, 역학(曆學), 의술 등을 광범하게 천착하던 조선조의 백과전서파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광범위한 학문 영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실로 강조하고자 했던 본질은 농업생산성을 통한 백성들의 삶의 질의 향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조선조의 중농주의자들이었다. [1] Pragmatism (shilhak) is a tool through which the Zeitgeist of the Chosun Dynasty can be reviewed in the modern age. The Korean Pragmatists, heading toward a policy of the cultivation of the people by Lee Yoolgok, were marginalized men of the Southern Party (Namin) who were sympathetic to the misery of the people after the War with Japan (1592-1598) and the War with the Manchurian Ching Dynasty (1627, 1636-1637). These individuals agonized about how to recover from these disasters and were influenced by Yenching science (bookhak or, science from the North). In this respect, the age of shilhak was a period of modernity in Korean history. [2] From the point of view of land, the Korean pragmatists held to the theory that “farmers should have land.” In an agricultural society, they knew, land is a spiritual thing. They tried to prove that the land system in the Chosun Dynasty, which permitted high-level bureaucrats to be granted wide areas land by the royal house, was unreasonable. Their basic tenet was the denial of a private land-ownership system; they believed instead that land should be public property. [3] The pragmatists were seriously concerned that the high-level bureaucrats would become landlords through a latifundium system. A latifundium system could not be justified as it was a cause of mass poverty and kept the country from achieving a balanced distribution of wealth. The Pragmatists searched for a way to limit the ceiling of land ownership. [4] The pragmatists of the former age in the 17th century devoted themselves to the eradication and reformation of the conflicts in the land system. In comparison, the pragmatists of the latter age in the 18th century were interested in the promotion of land productivity that was brought about as a result of the introduction of natural science from the Yenching science. They remained conscious of the need to invent agricultural tools, develop farm land and ease the tax system. They also contributed to the introduction of commercial capital by promoting taxation in hard currency instead of a crop tax system. [5] Korean pragmatists were a kind of Encyclopaedists, who studied history, geography, territorial problems, the land system, the examination of civil service, astronomy, the calendar and medicine. In spite of their broad interests in the sciences, what they really wanted was to better the life of the people through the growth of agricultural productivity. In this point, they were essentially the physiocrats of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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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전쟁의 한 단면 : 그것은 어떻게 대한제국의 망국과 연관되었나?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20 한국정치외교사논총 Vol.42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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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 Russo-Japanese War was crash between two countries, Russia, who wanted to launch to Pacific Ocean, and Japan, who wanted to construct bridgehead on the land to swallow the Korean peninsula. Contrary to the Sino-Japanese War, that was a war of Japan, who wanted to escape from the hard time of early capitalism, Russo-Japanese War was a struggle between two countries to obtain the territorial ground on the Korean peninsula. So as to say, Russo-Japanese War was a reluctant and unprepared war for Russia against Japanese sunrising attack on the third land on Korea. [2] A half of the Russo-Japanese War was diplomatic struggle rather than of bayonets. That War was victory of Japanese diplomacy. While the Russia was timid under the feudalism, Japanese under the leadership of count Ito Hirobumi, leading Mutsu Munemitsu, Minister of Foreign Affairs, Kurino Shinichiro, Cosul General in Washington, Komura Jutaro, Viceminister of Foreign Afaires, and Minister of Justice concurrently Plenipotentiary Extraordinary Ambassador, Kaneko Kentaro, were superior to those of Russia in capacity and loyalty, Some of them were Member of “The Japan Club of Harvard University” under the auspices of Theodore Roosevelt. They were core group in Japanese diplomatic circle. [3] The reason of defeat of Russia army derived form the corruption in the Tsar Palace. The War was fighting between the corrupted Romanov Dynasty and Japanese patriotic militia. In spite of many pleads of “better life of the people,” corruption of royal family obstinately oppressed the mass as heritage, under which they lost their willingness morale to fight against Japan. [4] Russo-Japanese War was broken out in the innocent Korea for which was irresponsible. What is worse was that it influenced upon the ruin of Chosun Dynasty(Korea). Korea was really irresponsible for the War. No. At that time Korea was in charge of its own country. Whether was it neutrality or participation in the war on a certain side, Russia or Japan, but King Gojong hesitated and high officials counted their own interests. For them, the destiny of his country was not important. In this respect, the ruin of Korea on account of war between Japan and Russia was Korea’s diplomatic fault. Whether of participation on a side or neutrality was not important. What was really necessary was royal resolve and unified decision of Royal Court. But They were not capable neither wise nor patriotic. The first mistake was King’s escape to Russian Consulate after the Murder of Queen(1895). [5] Why do we have to reflect the past tragic war? That is because the historical stage of the Russo-Japanese war in 1890-1900s was nothing changed in spite of a century’s lag-time. In the long history, a century is not enough to change or improve history fundamentally, so we have to reconsider the historical lesson form the war, reflecting upon this age. After 120 years, Russo-Japanese war has not ended, but suspended. The War is present progressive up to now. [1] 러일전쟁은 태평양의 진출을 노리는 러시아와 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한국을 필요로 하는 일본의 이해가 충돌함으로써 벌어진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이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영토의 점유를 중요하게 여겼던 일본의 전쟁인 것과는 달리, 러일전쟁은 영토를 목표로 삼는 제국주의의 충돌이 아니라 영향권을 확장하려는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성격이 달랐다. 따라서 러일전쟁은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두보로서의 한국을 침탈하려는 일본의 기습 공격에 대한 러시아의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다. [2] 러일전쟁에서 전쟁의 절반은 외교였다. 이 전쟁은 일본 외교의 승리였다. 러시아가 아직 탈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정점으로 하여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 주미공사 구리노 신이치로, 외무성 부대신 고무라 주타로,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의 법부대신이자 견미(遣美) 특사였던 카네코 겐타로와 같은 미국 유학 출신 외교관들, 특히 하버드대학교일본유학생회(The Japan Club of Harvard University)의 역량이 크게 작용했다. [3] 러시아의 패인은 부패한 왕조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러일전쟁은 부패한 차르 왕조와 애국주의로 무장한 신흥 일본의 결전이었다. 많은 혁명과 개혁 세력이 등장하여 공익(公益)을 내세우면서 “더 좋은 삶”을 약속했지만, 부패는 늘 유산처럼 민중을 짓눌렀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에게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염치없는 일이다. 부패에 대한 반응은 분노가 아니라 체념이다. 부패한 관리에 지친 민중들은 조국을 위해 싸울 전의나 사기를 잃게했다. [4] 내 나라에서 벌어진 제3국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국이 멸망한 것은 한국 외교의 책임이었다. 중립이든 참전이든 멈칫거림이 없는 결단이 필요했으나 조선의 왕실은 그렇지 못했다. 문제는 아관파천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의 문제는 한국의 멸망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 무렵이 되어서는 어느 쪽이 이기든 한국은 승자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의 운명이 그 지경에 이르도록 지배계급은 왜 지혜롭게 망국에 대처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5]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무대가 되는 1890-190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비록 1세기가 넘은 시차에도 불구하고 크게 바뀐 것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시대의 4국 관계를 보면 러시아·중국·일본에게 주는 한국의 의미가 한국에 주는 그들의 의미를 능가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국제 관계의 비극성도 한국에게만 일방적으로 부과되었다. 우리는 이제 다시 그 시대를 반추함으로써 지금 우리의 위상에 대한 교훈을 찾아야 한다. 러일전쟁의 유산과 교훈은 12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다. 그런 점에서 러일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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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주리론자(主理論者)들의 정치적 고뇌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정치사상학회 2010 정치사상연구 Vol.16 No.1

          [1] 인간은 삶을 이어가면서 얼마나 이성적일 수 있을까? 인간의 삶에서 이성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일까? 이 문제는 동서양의 선학들이 늘 고민하던 문제였다. 서양사에서는 이성에 눈뜬 이 시기를 계몽시대라 하여 근대의 기점으로 삼는데, 문예부흥은 바로 이성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양 사회에서는 이성을 이(理)로 표현하면서 가장 먼저 이에 대하여 고민한 인물은 맹자(孟子)였고, 조선왕조에서 이를 완성한 사람은 이황이었다. 인간의 삶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이성을 중요 가치로 생각했던 주리론자들은 이상주의적 당위(Sollen)에 몰두했다. 그런점에서 그들은 주기론자들이 존재(Sein)에 몰두한 현실주의(realism)와 다르다. 그들은 당위가 존재에 앞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이기론이 갖는 정치학적인 의미는 결국 그들이 인간의 삶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로 확대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즉 인간의 삶을 이성이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때 인간을 다스리는 원리는 교화(敎化, edification)가 된다. 그들은 왕도 가르침의 대상이라고 생각했고, 왕학[王學: 聖學]을 완성하는 것이 자신들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주기론자들처럼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기질이라고 보았을 때는 수심(修心: cultivation)이 원리가 되지만 주리론은 계명(啓明)을 중시했다. [3] 주리론은 사대부의 학문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관학의 성격을 갖는 동시에 지배자의 덕목에 몰두했다. 이런 점에서 주리론자들은 신분 질서를 중요시하고 유교적 낙관주의에 기초한 철인왕을 기대하면서 자신들이 그러한 인물의 배출과 그러한 사회의 구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1] To what extent can human beings be reasonable in their lives? How important is reason in human life? Since ancient times, these were the main topics studied by scholars from both the West and the East. The period when these scholars first encountered this theme was called the age of Enlightenment, and the epoch of modernity; the Renaissance began with the finding of reason. In Oriental society, Mencius tackled the problem of reason (li) first, followed by Le Hwang in Korea. They believed that reason comprised four principles : charity, righteousness, courtesy, and wisdom. They were involved in these principles as idealistic Sollen. In this respect, they were different from the theorists of ether (gi), who engaged in realistic Sein. The theorists of reason believed that reason was prior to ether (emotion). [2] The political implication of the theory of reason is important, because this argument sparked a debate regarding what controls human beings: reason or ether? In the case where scholars believed that human beings are controlled by reason, the means of control is “edification.” On the other hand, if they believe that human beings are controlled by ether, the means of control is the “cultivation of mind.” Theorists of reason believed that monarchs should be taught as human beings, and that teaching monarchs ( sunghak) was their holy duty. When principles control human life, as theorists of reason believed, enlightenment is more important than cultivation. [3] The theory of reason was a science for ruling nobles, and thus, it was regarded as a governmental science and a set of virtues by the rulers. They emphasized the order of social status on the basis Confucian optimism. The theorists of reason expected to be ruled by a philosopher-king, and considered it their political role to develop, teach, and support him. They were steeped in ide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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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의(黨議)와 예송(禮訟)의 정치사상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10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9 No.1

          당쟁[당의]가 조선조 중후기의 정치 상황을 읽는 중요한 전거(典據)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은 대체로 부정적인 현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일제 식민지 사학에 의한 악의적인 과장과 무관하지 않다. 당의는 당시의 조선조 사회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언로(言路)였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 언로와 공론으로서의 당쟁이 탕평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졌을 때, 조정에서는 언로가 막혀 버리고 말았다. “조정에서 당의가 없어졌을 때 국가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당쟁의 핵심에 있었던 예송의 문제는 단순히 복식을 둘러싼 의미 없는 다툼이 아니라 시대적 가치의 표현이었다. 정치에서 임금과 신하라는 인륜의 가치가 우선인지, 아니면 부모와 자식이라는 천륜의 가치가 중요한지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예송의 핵심이었다. 정통 주자학의 위치에 섰던 송시열(宋時烈)은 부모 자식의 천륜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군주권을 강화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감지하고 있었던 윤휴(尹?)에게는 군주권이 더 소중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선악이나 한국사상사의 독자성을 둘러싼 자존심의 문제를 떠나서 주자(朱子)는 한국사상사에서 피해갈 수 없는 봉우리이다. 그것은 단순히 철학사나 유학사의 문제가 아니라 이기(理氣) 논쟁을 거쳐 위정척사 시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사상사의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다. 윤휴가 생각하기에 그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만이 알고 우리는 말도 해서는 안 되는가 싶었으며, 송시열은 주자의 논리로부터 벗어날 의지가 없었다. 탈주자의 논리는 탈중화의 단초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숭명과 배청은 한 뱃속에서 나온 쌍태아인듯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본질에서는 다르다. 숭명은 멀리 우리에게 주자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뿌리를 두고 모화의 틀 안에서 국가의 장래를 생각했고, 배청은 병자호란의 굴욕에 대한 설치(雪恥)에 뿌리를 둔 정서적이고도 전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결과로 나온 북벌의 논리에 대한 후세의 평가에는 다소 과장된 느낌이 있다. It is true that the political parties and their disputes during the Chosun Dynasty in the mid-Seventeenth Century formed an important spectrum through which the political situation during that period can be explored; however, generally speaking, they have been distorted by the historical perspective of Japanese colonialism. The political disputes (dangjaeng or dangui) during this era can be perceived as political discussions or communications in the royal court. However, such political discussions were forbidden in keeping with the "impartiality policy" (tangpyung) ; as Baron de Montesquieu revealed, "the misfortune of a republic was when the political intrigue was at an end." Disputes on the royal mourning dress, a core subject of dangjaeng, was not merely a meaningless dispute but a value-expression of age. What did the death of the king mean to his mother (grandmother) : the death of the king or the death of a son (grandson)? If it signified the death of the king, the king's mother (grandmother) had to wear a long-term mourning dress (for a duration of three years) ; on the other hand, when it meant the death of a son (grandson), the mother had to wear a short-term mourning dress (for a year or nine months). Which relationship is more important and valuable: a parent-son relationship as a natural relation destined by heaven, or a king-subject relationship as a human relation regulated by morals? Song Shi-yul, the leader of the Elder Party (noron) and an orthodox Confucianist, interpreted it as a natural relation (short-term mourning). He believed that the king's mother (grandmother) can not be his subject. However, Yoon Hyoo, the leader of the Southern Party (namin) and a monarchist, interpreted it as a human relation (long-term mourning). He believed that even though she is the king's mother (grandmother), she is also his subject. In the history of Korean political thought, apart from the distinction between "good" and "bad" as an ideology and its uniqueness or originality, the doctrine of Chu Tzu was regarded as a high mountain peak that the Koreans had to conquer. It was not only an important theory in Korean philosophical history but also a main theme in the reason-or-ether (li-kiron) debate related to Confucian patriotism in the modem state. Yoon Hyo doubted how Chu Tzu could alone know, understand, and interpret so many truths. However, Song Shi-yul was convinced that not single a word of Chu Tzu should be omitted or changed. Yoon's deviation from Chu Tzu's thoughts was of great significance in that it marked the beginning of the deviation from Sino-centrism. Even though Sino-centrism and the anti-Ching (Manchurian) Dynasty attitude appear to be twin fetuses, they actually differed in terms of their origins. Sino-centrism put forward the question of who Chu Tzu is to the Koreans, and it implied respect for China's extensive cultural heritage. However, the anti-Ching Dynasty attitude originated from the revengeful emotions of the Koreans toward the Ching who invaded Korea in 1627 and 1636~1637. Further, the "theory of the conquest of the northern areas" (bookbullon) has been exaggerated by historians from the later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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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사에서 중화주의의 형성과 맥락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16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15 No.1

          [1] 이 글은 선악의 문제를 떠나서 한국사상사의 중요한 인자를 이루고 있는 중화사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고 이어져내려 왔는가를 살펴보고자 쓴 것이다. [2] 역사적으로 보면 중화사상은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정치(精緻)한 문명, 그리고 주변 국가를 압도하는 국력에 대한 한국인의 경도에서 비롯되었다. 신라시대의 중화인식은 국제관계의 측면이 강하고, 고려시대의 그것은 화하문명에 대한 숭모의 뜻이 있고, 조선 개국에 담긴 중화는 이성계의 주변부 인식과 관련이 있으며, 조선중기의 그것에는 임진왜란 이후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의미가 강하다. [3] 한국사상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중화사상은 부끄럽지만 덮어둘 수만은 없는 백내장(白內障)이었으며 계층이나 시대를 초월하는 한국의 적층(積層)문화였다. 한국사상사에서의 중화주의나 사대의 문제는 김부식(金富軾)이나 화서(華西)학파에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중화는 사대의 중핵(core)이었고 사대는 중화의 과육(果肉)이었다. 한국사에서 개명 문화의 시기 이전에 중화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인이나 지식인은 많지 않았다. [4] 중화사상이 한국사상사를 관통하고 있는 한 줄기였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마치 그것이 한국 사상이 주류였다든가 기본 가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는 도전과 응전이 있었듯이 중화주의가 있었고 그에 도전하는 반중화나 탈중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사에서의 중화의 뿌리를 찾는 노력에 못지않게 탈중화의 맥락에 대한 천착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 글은 균형 잡힌 작업이 아니다. 그러므로 탈중화에 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1] This article was written to depict the origins and context of the Sino-centric tradition in the Korean political thoughts, regardless it was stain or not. [2] Historically speaking, Sino-centrism in Korea have originated from the respect for and devotion to the long history, graceful civilization, and dominant power over neighboring states. In Silla age, inclination to China(Tang) was forced by international dynamics, in Goryu age, her intelligentsias were envious to Chinese literary culture, and at the foundation of Chosun Dynasty was based on the inferiority complex of Lee Sung-gye(Taejo) as a marginal man and borderland garrison. In the middle age of Chosun Dynasty Confucian scholars were thankful and felt heavy burden to China(Myung) for their military assistance to rebuild the state during the war with Japan(1592-1598). [2] Sino-centrism in Korea, even though shameful, was an important requisite in traditional society. It was, as to say, a kind of cataract, which can not be hidden, and an accumulated heritage regardless of class and age. It was not only misconception of Kim Boo-shik or Hwa-suh(Lee Hang-ro) School. The Sino-centrism was core of vassal state and vassal state was fruit of Sino-centrism. In the Korean history before the 19th Enlightenment age, there were few politicians and scholars free from Sino-centric bondage. [3] But even if it is true that the Sino-centrism was a stem that constituted the Korean political thought, it does not mean that it was main stream or basic value of Korean thought. As there were challenge and response, there were persistent resistance against Sino-centrism. Therefore there were no following deep and considerate research on anti/ or De-sino-centrism, this article is not relevant one. So I frankly confess that this article is neither perfect nor complete one but a half of it, until I finish my counter part article.

        • KCI등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통해서 본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

          신복룡 ( Bok Ryong Shin ) 건국대학교 법학연구소 2010 一鑑法學 Vol.0 No.17

          [1] The founders of the Chosun Dynasty in the early fifteenth century felt it very necessary to promulgate a new statecraft law to make up for the misconducts of the former Dynasty Goryu, to deal with the difficult ies encountered in the process of state-building, and to justify their new regime that was marred by allegations of being a treasonous government. Except for the criminal law, which could be substituted by the Law of Ming China (Daemyungryool), they enacted the Gyunggook-Daejun (State craft Law) that contained the rules for six departments. [2] The founders of the Chosun Dynasty wanted to build a moral kingdo m with foundations in Confucianism. For such purposes, they comparative ly succeeded in confining the people into laws through the Gyunggook-Daejun, but they failed to maintain the political activeness and vitality as seen in the court of King Sejong. Many clauses of prohibition in Gyunggo ok-Daejun lacked the institutional devise for a strong leadership that was necessary to push the active political reform in the initial stage of state-building. This was because the founders were devoted to "political stability" rather than reform and development. [3] When the founders assumed political stability as a prior value, it was inevitable for them to indulge in minimizing social mobility. Therefore, they had no intention to eradicate the "wall" or "fence" between the classes. In this respect, the Confucian state was "a politics of compartment." It has been popular to argue that Gyunggook-Daejun was a kind of administrative law at best, but strictly speaking It was "a status law." [4] Lexocracy by the Gyunggook-Daejun had its own limits. When their ideals to establish a moral state based on Confucianism deviated from their original intention, the founders found that such a state could not be established only by law. Not all variables and interpretations of political affairs could be defined by law. Purge of scholars (sahwa), politic al struggles among factions (dangjaeng), and disputes on the mourning ceremony (yesong) could not be categorized by the clauses of law. They did not forecast political flexibility and neither did they deal with the diverse political situation; eventually, the politics of the Chosun Dynasty were essentially that of "rule by man" rather than "rule by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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