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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과 광해군, 최후의 장면

          신병주 ( Shin Byung-ju ) 한국문학치료학회 2018 문학치료연구 Vol.48 No.-

          먼저 두 왕은 왕위에 오른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연산군은 적장자 프리미엄 속에서 왕위에 올랐고, 광해군은 후궁의 두 번째 아들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라는 정치적 변수 속에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이 된 후 독재 군주로 가는 과정 또한 달랐다. 연산군은 왕권이 신권에 휘둘리는 상황을 참지 못했고, 능상(凌上)에 대해 강한 피해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추종하는 소수 측근 세력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정치 세력을 반대파로 만들어 갔다. 광해군은 왕위 계승의 적통에 있던 이복동생 영창대군에 대한 지나친 견제와 이어지는 살해, 그리고 왕통에 대한 집착으로 시작된 교하 천도와 무리한 궁궐 조성 사업이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대북의 소수 측근 세력만이 광해군 정권의 지지자였다는 점에서는 친인척 일부와 임사홍 등 일부 측근 세력만이 연산군의 독재에 추종했다는 점과 공통점을 보인다. 장녹수, 전비 등 기생 출신들에게 권력과 금력을 부여한 점은 광해군이 말년에 상궁 김개시에게 정치적으로 크게 의존한 점과 유사하다. 유배된 후 두 왕의 모습은 큰 차이를 보였다. 연산군은 교동도에 유배된 후 불과 2개월 만에 생을 마감했지만, 광해군은 가족들의 자결과 같은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유배 후 18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최후를 맞았다.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행적과 최후의 장면에서는 오늘날 정치사와 오버랩 되는 정면들이 많다. 역사가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들을 역사 속에서 거듭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These two individuals showed a completely different path to their own enthronements. Yeonsan-gun was the eldest son, so there was no problem in his becoming the king. On the other hand, Gwang'hae-gun was the second son of a royal concubine, and was only able to ascend to the throne in an extraordinary situation that was the Japanese invasion upon the Korean peninsula. The two kings also differed from each other in terms of how they became despots. Yeonsan-gun was very much frustrated with the contemporary situation in which the King had to defer to either the initiatives or judgements of his own vassals, and had no intention to put up with his own subordinates' insubordination and defiance. As a result, with the exception of his most trusted cronies, he made virtually every political group his own enemy and opposition. Meanwhile, Gwang'hae-gun was most mindful of the very existence of his half-brother Yeongchang, who was ironically the more legitimate choice as a candidate for the throne. His murder of that brother did not quell his own sense of rivalry, and his subsequent policies -such as the Capital transfer to the Gyoha region and a difficult construction process for the new palace- eventually angered the general population. These two kings indeed shared a trait, which was the very narrow nature of their own advisory groups. Only a handful of royal relatives and cronies such as Im Sa-hong served Yeonsan-gun, while a relatively small number of officials from the Daebuk School (“Northerners,” not in geographical term) stood by the side of the Gwang'hae-gun administration. And the similarities do not end just there. While Yeonsan-gun provided his own concubines such as Jang Nok-su and Jeon Bi with power and money, Gwang'hae-gun also hugely relied upon Court lady Kim Gaeshi, and utilized her political capital. Their lives after they were expelled from the throne, however, were very different. Yeonsan-gun was relocated to Gyodong-do and died only two months later, while Gwang'hae-gun survived his own family members who met their demise by taking their own lives, and lived eighteen more years until he died on the Jeju-do island. Nonetheless, the last moments of their lives do remind us the political incidents of today. History does inspire us not to repeat past mistakes and wrong de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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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홍의 지역적 기반과 정치활동 : 선조 시대를 중심으로

          신병주(Shin Byung-Ju) 부산경남사학회 2011 역사와 경계 Vol.81 No.-

          정인홍에게 있어서 경상우도, 좁게는 합천이라는 지역적 기반은 그가 정치인으로 성장하는데 큰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경상우도 학문의 영수인 조식의 수제자가 되고, 이 지역을 기반으로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 갔다. 임진왜란 때 고령의 나이에도 의병장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데는 지역에 닦아놓은 기반이 큰 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대 정파인 서인 세력에 의해서는 호강(豪 强)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선조 시대 정인홍의 정치 활동에서 두드러진 것은 선조 시대 당쟁의 시대에 돌입하면서 동인에서 북인으로 이어지는 정파의 핵심 당인으로 활약한 점을 들 수 있다. 정인홍의 당인으로서의 면모는 1689년 기축옥사로 말미암아 남명학파가 탄압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해 적극적인 변무 활동을 했다. 1692년 임진왜란 시에는 의병의 거의를 최초로 모의하는 등 의병장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의병 활동 이후에도 이들 의병을 자신의 휘하에 거느리는 정치력을 보였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 후반의 정국에서는 대사헌에 임명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섰다. 특히 광해군의 적극적인 후원자로 부상하면서 정치적 입지도 커졌다. 정인홍의 입지 강화에는 합천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라는 지역적 기반이 큰 작용을 하였는데, 서인 세력에 의해 영남 제일의 호강으로 표현될 정도였다. 이러한 기반 강화에는 경상우도 학문의 영수인 조식의 수문이라는 점과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 합천의 부음정을 중심 공간으로 한 제자 규합 등이 큰 역할을 하였다. 정인홍은 광해군대 대북 정권의 핵심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광해군대 활약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정인홍은 합천이라는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선조 시대 정국에도 주요한 정치적 족적을 남겼다. 선조 시대 정인홍의 정치 활동을 이해하면서 광해군대 북인 정권 시대 그의 위상을 파악하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Jeong, In-Hong's local background, which was the Hapcheon area of the Gyeongsang'wu-do province, helped him become a major player inside the Joseon central government. He was one of the top pupils of Jo Shik, who was the intellectual master of students in the Gyeongsang'wu-do province. With a background like that, Jeong, In-Hong was able to secure a stable economic and social status. When the war with the Japanese broke out in 1692, he was still able to serve as a righteous militia leader even when he was very old, and that was also because of his local background. Yet his political enemies, like the members of the Westerners party, blamed him for wielding too much power. His political career during King Seonjo's reign was to serve as a crucial member of the Easterners party, and later, he became a crucial part of the Northerners party as well. As part of the party, he actively defended the Nam'myeong school members who were on the verge of being imprisoned by the Gichuk-year purge in 1689. And in 1692 when the war broke out with the Japanese, he discussed the organization of a righteous militia for the first time, and he kept them under his command even after the war was over. After the 1690s war with the Japanese, and during the latter half period of King Seonjo's reign, Jeong, In-Hong was appointed to the seat of Dae'saheon and thus secured a position at the center of power. He became one of the most staunch supporters of King Gwang'hae-gun, and in the process his political status was significantly strengthened. His local background, being a person from the Hapcheon area of the Gyeongsang'wu-do province greatly contributed to his success. The Westerners party called him the most powerful one in the entire Yeongnam region. His success was made possible by many things. He was the student of Jo Shik, who was the master of the Gyeongsang'wu-do's provincial activities of intellect. He served as a righteous militia leader during the war, and he organized many people as his students at the Bu'eum-jeong in Hapcheon. Because Jeong, In-Hong was the central and symbolic figure of the Grand Northerners party during King Gwang'hae-gun's reign, people usually remember him as a politician whose career took off under the Gwang'hae-gun regime. Yet he was a politician from Hapcheon, and he was able to play an important political role not only during Gwang'hae-gun's reign but also during King Seonjo's region before. His such background should be took into consideration in order to have a more balanced understanding of his status as a politician during the Joseon dynasty's latter half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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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오대산 사고와 사고본의 가치 : 오대산(五臺山) 사고본(史庫本) 실록의 특징과 학술적 가치

          신병주 ( Byung Ju Shin ) 동국사학회 2014 동국사학 Vol.57 No.-

          오대산 사고본 실록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 까지는 완성본 직전의 교정쇄본이며, 『선조실록』 이후로는 다른 지방 사고의 실록처럼 완성본을 보관하였다. 교정쇄본을 오대산에 보관한 것은 선조대에 실록을 한꺼번에 제작하는 과정에서 많은 종이들이 필요하였고 비용 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선조실록』 이후 오대산에 실록을 보관한 상황과 실록의 고출, 사각의 수리, 포쇄 등의 도서 점검 상태는 實錄形止案에 모두 기록되어 있어서 사고에서 실록을 비롯한 서책들의 구체적인 보관 상태를 확인할 수가 있다. 오대산 사고본 실록은 일제시대인 1913년 도쿄대에 반출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이 유실되고 74책이 남았다. 오대산 사고본은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50책과 『선조실록』 15책이 남아 있다. 오대산 사고본 실록의 특징은 조선전기 실록인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이 교정쇄본이라는 점이다. 주요 교정 사례는 글자의 바꿈, 글자의 추가, 글자 붙임, 띄어쓰기, 글자 뒤바꿈, 글자 경사 바로잡기 등이다. 잘못된 글자에 대해서는 붉은 글씨로 쓰거나, x, O, --- 등으로 표시한 것이 나타난다. 교정 사례를 통해 당시에 사용되었던 교정부호라든가 교정의 방식 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비슷한 글씨의 착각, 같은 음을 가진 한자의 착각 등 당시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양상을 볼 수 있었고, 중국 황제 연호를 잘못 쓴 것 등에서 활자공들은 기계적인 작업만 했음을 추론할 수가 있었다. 2006년 47책의 오대산본 실록이 일본에서 반환되어 실록의 실물 확인이 가능해지고 교정쇄본의 특징도 밝혀지게 되었다. 향후에는 오대산 사고본 실록과 다른 사고본 실록의 실물을 꼼꼼하게 비교해 보는 연구가 요청된다.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stored at the Odae-san Archives have two types of versions. From the Annals of king Taejo's reign through the Annals of king Myeongjong's reign are in fact ‘proofread versions' which were only awaiting the final evaluation session, while the Annals from king Seonjo's reign and then the annals of later kings were completed versions that were officially published, same as the Annals stored in other regions' archives. Reason for preserving proofread versions instead of the final versions was because the task of creating new copies of the entir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reign of king Sonjo heavily costed for the government and it also required a large volumnes of paper. The entire process of storing the printed Annals at Odae-san mountain, including the copying process, renovation of the storage facility, and condition of the materials at the time of storage were all recorded in the “Shillok Hyeongji-an” record. We can see in exactly what kind of manner they were stored and preserved.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Kept in the Odae-san storage facility were stolen and illegally shipped out of the country, and landed in the Tokyo University in Japan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They were almost obliterated during the Gwandong Earthquake(that 생략) occurred in 1923. Surviving documents in the catastrophe were only 74 volumes, of which 9 volumes were from the Annals of king Seonjong's region, 50 volumes were from the Annals of king Jungjong's reign, and 15 volumes were from the Annals of king Seonjo's reign. The first two groups of surviving volumes were the aforementioned ‘proofread version.' Wrong letters were replaced with right ones, while some new ones were added. Portions needing corrections were highlighted in red, or checked with x or O, which show us how proofreading procedures were at the time. The most usual types of mistake made by the people of the time are evident, and in some cases the era-title for a specific Chinese emperor is mis-recorded, suggesting that the copying task was mostly undertaken by technicians. In the future, they should be further compared with Annals stored at other fac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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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일기 자료 『쇄미록(鎖尾錄)』연구

          신병주(Byung Ju Shin) 조선시대사학회 2012 朝鮮時代史學報 Vol.60 No.-

          『쇄미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희문의 철저한 기록정신이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거의 매일의 일기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피난 생활을 비롯하여 조정에서 들은 전황과 의병의 활약상, 각종 제사와 딸과의 친분, 질병과 치료, 여가 생활 등 다양한 내용들을 모두 담았다. 이러한 기록들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상황과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쇄미록』은 조선중기 생활사의 보고(寶庫)이며, 기록자 오희문은 전문 사관(史官)못지 않은 역사 기록자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 있다. 『쇄미록』에는 오희문의 관직에 대한 집념, 가문의 영광을 위한 모색, 외가와의 인연, 아들에 대한 기대, 딸과의 친분, 꿈속에 등장하는 가족 등 오희문 개인의 생각을 보여주는 내용들도 다수 기록되어 있다. 한 개인의 모습을 통하여 당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도 유용한 자료가 됨을 『쇄미록』은 잘 보여주고 있다. 본 연구에서 필자는 『쇄미록』에 나타난 오희문의 삶과 생각을 따라가 보았다. 『쇄미록』에 대해서는 일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쇄미록』은 그 자료적 가치와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아직도 정치사, 경제사, 생활사, 문화사 등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가 되어야 할 내용이 많다. 『쇄미록』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면 조선중기 사대부들의 삶과 생각이 보다 구체화될 것으로 믿는다. From Swaemirok, we can see Oh Hui-mun`s dedication to meticulous documentation, of all the things surrounding him and the affairs that he was involved with. He continued such recording even during the time of war, creating entries in his journals for almost every day. The life of a refugee as he experienced it himself, the news he heard from the government, the brave resistances waged by the righteous militia units, household activities including the preparation for ancestral memorial services, contracting diseases and having them cured, and the leisure life he was able to pursue, are all in this Swaemirok, which vividly shows us what were the lives of peopl who were struck by the battle with the Japanese in the 1592 like. It is an enormously valuable source of information for studies of life history regarding the Joseon dynasty`s middle period, and Oh Hui-mun`s achievement is nothing short of those of the professional historians or historiographers. In this Swaemirok, Oh Hui-mun`s pursuit of a career as a governmental official, his determination to achieve glory for his house, his relationship with his mother`s house, as well as his hopes for his own son and his affection for his daughter, and even the memories of family members who passed away and only used to appear in his dreams, are all described in details. By reading his journals, we can literally peer and see into his own thoughts, We can examine the lives of the people through his unique personality and observation, This study tried to follow Oh Hui-mun`s life and his thoughts, yet there are still many areas in this journal that would have to be further explored, in terms of politics, economy, life history and culture, Extensive analysis of this Swaemirokin the future, would help us find for details of the lives and thoughts of the Scholar-officials of the mid-Joseon period in ge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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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실 의궤 분류의 현황과 개선 방안

          신병주(Byung Ju Shin) 조선시대사학회 2011 朝鮮時代史學報 Vol.57 No.-

          본 연구에서는 의궤 분류의 현황을 점검해 보고, 현재의 분류 방식 중 상당수가 의궤의 내용과 특징을 밝히는데 미흡한 점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의궤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왕실의 일생``과 ``왕실의 활동``을 주요 범주로 하는 의궤 분류의 방안을 제시하고, 이에 해당하는 주요 의궤들에 대해 소개하였다. 또한 의궤의 분류에서 주목되는 어람용 의궤의 분류와 활자본 의궤의 문제에 대해서도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필자는 五禮에 근거한 의궤 분류 방식을 지양하고, 의궤를 왕실의 일생과 주요 활동이라는 범주 하에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즉 왕실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 주요 활동을 중심으로 의궤를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다시 시기별(왕대별)로 하거나, 지위별(왕, 왕세자, 왕세손)로 분류하여 의궤에 기록된 행사가 어느 시대에 어떤 지위에서 시행하였는가를 파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기의 제작, 사신의 영접, 친경, 대보단의 설치, 궁궐 건축, 어진의 제작, 노비 추쇄도감의 설치 등 왕별로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의궤들은 시대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부분이 많다. 광해군대에 제작된 『화기도감의궤』나 효종대에 제작된 『노비추쇄도감의궤』, 정조대의 『원행을묘정리의궤』 등이 주요한 예이다. 의궤는 이미 여러 연구나 자료조사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일상적인 왕실 의례가 중심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특수적인 성격에서 제작된 의궤들을 파악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들 의궤들을 통하여 역대 왕실에서 추진한 역점사업 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궤에 대한 적절한 분류와 해설은 의궤 연구의 수준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In this article, the current categorization system of the Ewi`gwe manuals are examined. As a result of such examination, it seems clear that there are many things to be desired with the previous categorization system, in terms of displaying the contents correctly and clarifying the characteristics of each of the individual Ewi`gwe materials. Also suggested in this article is a new categorization method that would assort all the materials into two groups: ``The Life of the Royal family members`` and ``The Activities of the Royal family members.`` It is suggested so in order to secure a more precise understanding of all the Ewi`gwe materials we have today. Prime examples that could be assorted by this new system are introduced here in this article as well. Also, the issue of properly assorting Ewi`gwe manuals meant for the "Kings` eyes only" and Ewi`gwe manuals published by the method of ``printing,`` are discussed in this article as well. I myself is personally against the original classification system based upon the principle of assorting Ewi`gwe materials with the O`Rye/五禮("Five Codes") structure. It seems appropriate to assort the Ewi`gwe materials with the lives and actions of the royal family, chronicling the lives and deaths of the royal family members and then categorizing them with major events and issues. Then the materials should be re-categorized by the kings` reigns and the ranks of the major figures(kings, crown-princes, sons of crown-princes, etc.) involved with specific projects described in the individual manuals, so that the viewers could easily understand when all these rituals and ceremonies and projects were held or undertaken, and at which level of the royal family those events were arranged and implemented. Ewi`gwe manuals showing us particular projects or events, such as creation of fire weapons, welcoming foreign dignitaries, kings` own occasion of agricultural cultivating, the foundation of the Daebo-dan altar, construction of palaces, creation of royal portraits of the kings, and opening of governmental offices in charge of tracing Nobi servants at large, help us understand the nature of governance showed by particular kings.『Hwa`gi Do`gam Ewi`gwe』published during Gwang`hae-gun`s reign or『Nobi Chuswae Do`gam Ewi`gwe』published during Hyojong`s reign or『Weonhaeng Eulmyo Jeong`ri Ewi`gwe』published during Jeongjo`s reign, are primary examples. In studying Ewi`gwe manuals, the lives of the royal family members should be put at the center for sure, as they have been in various studies or researches in the past, yet understanding correctly the nature of Ewi`gwe manuals that were created out of special occasions are important as well. They can show us what kind of tasks and projects were favored and handled by particular kings and governments. Proper categorization and introduction of those materials, should facilitate the task of enhancing the overall level of Ewi`gwe studies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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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 장만(張晩), 그 시대와 활동

          신병주(Byung Ju Shin) 조선시대사학회 2013 朝鮮時代史學報 Vol.64 No.-

          장민 (1566, 1629) 은 실무적 능력, 특히 지방관으로서의 능럭과 변방 지 역 방어에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지방의 관찰사와 병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선조에서 인조에 이르는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특 히 국경 지역의 방어에 대한 문제가 국가의 최대 정점으로 떠오른 시기였다. 이 시기 장만은 함경도관찰사. 평안병사, 도체찰사 둥 북방의 최고 책임 자 임무를 맡으면서 북방의 정세를 세밀히 보고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웠 다. 특히 광해군 시기 15년간은 여진족이 세운 후금의 침입이 가시화되고 실제 후금과의 전투도 수행되던 시기로서. 이 시기에 장만은 광해군의 각별 한 신임을 받아 광해군의 국방 정책과 외교 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최고의 일선 실우자로 활약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북인에서 서인으로 바뀌었지만 장만은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도원수의 자리에 올라 국방 문제를 계속 책임졌다. 또한 1624년 이괄의 변을 진압하여 진무공신에 임명되고. 인조 시대 명과 후금 의 충돌이 교차하는 국경 지역의 방어에 최대한 헌신했다. 선조에서 인조 시대에 이르는 시기 장만은 조선의 국경 방어와 지방의 관찰사로 재임하면 서 백성들의 민원 해결에 힘을 쓴 실무 관료였다. 특히 위기의 시기에 국정 의 중심에 있었던 관료라는 점에서 그 비중이 결코 적지가 않다. In his time. Jang Man(1566-1629) was well known for his administrative leadership as a local official, and for the exceptional capability he displayed in maintaining local defense. With such practical skills duly recognized. he was assigned to many seats in and out of the capital, which included the seat of the Local Magistrate(Gwanchal-sa). and also the seat of the Defense Minister. The time from King Seonjo`s reign through King Injo`s reign was a time when the issue of dynastic defense was literally burnt into the minds of the Joseon people. The country was destroyed by the wars with the Japanese and the Manchurian Qing. The issue of border defense was a top priority for the Joseon government. And in this time, Jang Man served as the Ham`gyeong-do Provincial Magistrate, the Pyeong`an-do Provincial Military Commander-in-chief, and also the Supreme Circuit Inspection Offlcer(Chechal-sa). He was in command of military assets in the northern regions, and was in charge of defending the country in its northern perimeters. He filed detailed reports to the central government, and devised plans for dynastic defense. His service overlapped with the 15-year period which was also King Gwang`hae-gun`s reign. The invasion of the Jurchen Hu`geum forces was considered to be imminent, and in fact invasions began before long. He was one of the most trusted advisors and commanders of Gwang`hae-gun, and was in charge of establishing, as well as implementing, defense & diplomatic policies at the time. In 1623. with a political purge that dethroned Gwang`hae-gun and instead enthroned the new King Injo, the power of the regime went from the Northerners Party to the Westerners Party, but Jang Man, recognized for his singular talents, was promoted to the seat of Central Commander-in-chief, and continued overseeing defense matters and initiatives. In 1624, he was instrumental in subjugating the insurrection of Yi Gwal, and therefore was named as a Meritorious vassal for Subjugation. He continued serving the country when Ming and Qing were still fighting with each other in China and threatening the northern regions of the Korean peninsula. He also tended to the needs of the general public. He was a formidable official, who served the country when it was placed in a most distressful, crisis situation.

        • 기획논문 : 인조반정(仁祖反正)과 남명학파(南冥學派) ;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정치적 동향과 인조반정(仁祖反正)

          신병주 ( Byung Ju Shin ) 南冥學硏究院 2011 南冥學 Vol.16 No.-

          남명학파는 선조 후반부터 시작하여 광해군대를 정점으로 중앙 정계의 권력을 장악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기적 상황과 광해군의 즉위라는 시대적 상황이 소수파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남명학파는 광해군이라는 국왕의 신임을 철저히 바탕으로 한 정권이었기에 광해군에 대한 충성 또한 현저하였다. 광해군 초기에 벌어진 임해군의 옥사나 김직재의 옥사를 거쳐 영창대군의 蒸殺에 이르는 과정에서 남명학파의 영수 정인홍은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왕통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요인에 대해서는 철저히 뿌리를 뽑겠다는 정치 철학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왕통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廢母殺弟'라는 의리 명분상의 반발에 부닥쳤고, 결국 남인과 서인들이 타도 남명학파를 외치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남명학파의 학문적 뿌리에 대한 취약성은 영수 조식에 대한 文廟從祀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정인홍은 스승을 존숭하는 과정에서 이언적과 이황을 폄훼하는 논의를 주도했고, 이미 문묘에 종사된 이들을 黜享하려고 까지 하였다. 이러한 독선적인 성향은 많은 사류들이 등을 돌리는 단서를 제공하였고, 정인홍은 성균관 유생 명부인 『청금록』에서 삭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광해군대 중반 이후 북인은 서인과 남인의 지지기반을 상실한 채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은 처형을 당하였다. 이후 남명학파는 정치적으로 재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하였다. 남명학파는 퇴계학파, 율곡학파 등과 더불어 조선중기 정치, 사상계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학파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면서, 북인의 원류가 되는 남명학파의 정치적, 사상적 위치에 대한 평가는 축소되었다. Members of the Nam`myeong school have already seized control of the government in the latter half period of king Seonjo`s reign, and also throughout king Gwang`hae-gun`s reign. Admittedly they had been the minority faction inside the government, yet the national crisis caused by the wars with the Japanese in the 1590s, and the emergency nature of king Gwang`hae-gun`s enthronement, made possible for them to become a dominant faction over the others. The regime they formed was primarily based upon king Gwang`hae-gun`s explicit trust, so their loyalty to the king was quite severe as well. Punishing the king`s brother Im`hae-gun, or eliminating the Kim Jik-jae faction, or even killing off the king`s half brother Yeongchang Daegun in the early days of the king`s reign, were all led by the Nam`myeong members, and the leader Jeong In-hong played an important role in all of those incidents. His actions were based upon a belief -a political philosophy- that any disruptive element which could turn out to be harmful to the legitimacy of the king`s heritage should be destroyed. Yet such obsession eventually invited a criticism and resistance, which called the king a ``murderer`` of his brother, and a person who abandoned his duty to his mother(step mother actually). And it also created a cause for the Nam`in(the "Southerners") and Seo`in(the "Westerners") party members, to fight and expel the Nam`myeong regime. The inherent weakness of the Nam`myeong school members` academic achievements drove them to promote a movement which claimed that their master Jo Shik should be enshrined at the National Literary shrine("文廟從祀"). Yet in the process Jeong In-hong chose to ``degrade`` and criticise the achievements of Yi Eon-jeok and Yi Hwang, and even tried to remove the tablets of some of the honoraries who were already enshrined there. This turned out to be a very unpopular choice of action, and the Nam`myeong regime lost support from many Confucian scholars. Also in retaliation, the name of Jeong In-hong himself was scratched from the 『Cheong`geum-rok』 Manifest, which was a list of Confucian students of the Seong`gyun-gwan university. As a result, in the latter half of Gwang`hae-gun`s reign, the Buk`in(the "Northerners") lost support from the other parties(``south`` and ``west``), therefore was placed in a very lonely and precarious situation inside the government, and after Jeong In-hong was executed by the new regime that installed Injo as the replacement king in 1623, the Nam`myeong school itself was politically demolished beyond recovery. Nam`myeong school was one of the leading academic groups that engaged in political and philosophical discussion in the middl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along with the Twe`gye school and Yulgok school. Yet after the political party that was called the Northerners was politically defeated in 1623, people`s recognition and evaluation of the academic achievements of the Nam`myeong school in general, which was the mother group of that political faction, came to exhibit a considerable and harsh down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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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일기 자료에 나타난 꿈의 기록과 그 의미

          신병주(Byung Ju Shin) 조선시대사학회 2015 朝鮮時代史學報 Vol.74 No.-

          16세기 일기의 기록을 볼 때, 당대의 지식인들 역시 점복이나 꿈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음이 나타났다. 점복과 꿈에 대한 집착은 본 논문에서 다룬 인물인 장군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의병장 정경운의 『고대일록』, 관료이자 학자인 유희춘의 『미암일기』, 재야 선비오희문의 『쇄미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유교적 합리주의의 원칙을 지키는 사대부 역시 꿈이나 점복이 가져오는 예언적인 기능에 상당히 집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꿈은 주로 욕망과 소망, 무의식의 재현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과거에는 개인적 욕망의 발현보다는 길흉에 관한 일종의 예언이나 계시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많았다. 따라서 꿈의 내용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함께 앞으로의 바람을 보여주는 주요한 지표로 활용할 수 있다. 일기 자료에는 꿈과 연관된 관직, 유배, 득남 등 생활사에 관한 내용들이 연결성을 갖는 것도 주목되며, 꿈이라는 매개체로 자신의 바람과 신념 등이 나타난 경우가 많았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꿈에서도 첩에게서 아들을 바라는 것과, 『고대일록』에서 정경운이 스승 정인홍에 대해 열렬한 충성심을 보이는 사실을 찾을 수 있었다. 필자는 일기자료를 보다 폭넓게 활용하는 방안을 찾고자 하는 취지에서 꿈을 키워드로 한 본 연구를 수행하였다. 최근 일기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활발히 수행되고 있지만, 일기자료에 대한 연구는 문학 분야에서 주로 수행되고 있다. 일기 자료에 대한 역사학 분야의 체계적이고 미시적인 작업이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Examination of the 16th century journals reveal that the intellectuals of the era were considerably conscious of the power of fortune-telling or dreams. Obsessing over foretelling and dreams is a trait that was apparently shared by various historical figures such as Yi Sun-shin(『Nanjung Ilgi』), leader of a righteous militia Jeong Gyeong-wun(『Godae Illok』), a scholar/official named Yu Hi-chun(『Miam Ilgi』), and a local literary figure Oh Hi-mun(『Shwe'mi-rok』 ). We can see that the “Sa-Deabu” scholar-officials who pursued Confucian rationalism were also very much confident of the validity and prophetic qualities of dreams and foretelling. Today, dreams are interpreted as the representation of desire, hope, and subconscious ideas. But in the past, it was rather considered as a foretelling or prophesy about one's own fortune. So in present-day studies, the contents of a past figure's dream could be construed as that particular person's assessment of his or her own situation as well as his or her desire for the future. In journals, there are many references to governmental positions, life in exile, having a male baby and other things that are directly related to the everyday life of an ordinary person. And the dreams often describe one's hope and one's own conviction too. Described In 『Nanjung Ilgi』is Yi Sun-shin's hopes in a dream for a son from his concubine, while expressed in 『Godae Illok』is Jeong Gyeong-wun's fierce loyalty toward his teacher Jeong In-hong. In an effort to find a way that would allow us to consult journals more extensively, I suggest that dreams should be considered as a valid theme to be explored in the future. Recently there have been more studies than the past, but they are primarily being examined by scholars in the area of Korean literature. Historians should be able to examine them with a systematic approach and from a microscopic point of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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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백과사전의 저술과 『五洲衍文長箋散稿』

          申炳周(Shin, Byung-ju) 진단학회 2014 진단학보 Vol.- No.121

          『지봉유설』, 『유원총보』, 『성호사설』,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중심으로, 조선후기에 백과사전이 저술되게 된 배경 및 구성 항목과 주요 내용을 검토하여 보았다. 전체적으로 이들 백과사전에는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 보려고 한 지식인들의 학문과 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각 저술 마다 저자의 개성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저술의 저자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중국 사행과 직, 간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수광과 김육은 직접 사행을 다녀왔고, 이익은 사행을 다녀 온 아버지 이하진이 구입한 다수의 서책을 접할 수가 있었다. 이규경은 조부인 이덕무가 사행을 다녀오고 규장각에서 일한 경험 덕분에 다양한 책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명나라와 청나라를 통해 수입된 서책의 정보와 이들 나라의 축적된 지식이 백과사전의 저술에 영향력을 주었던 것이다. 국내 백과사전 또한 이후의 저술에 많은 참고가 되었다. 『지봉유설』의 우리문화를 바탕으로 한 고증적이고 博學 경향은 『성호사설』이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들 저술은 『지봉유설』을 확대 개편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유원총보』는 중국 백과사전인 『사문유취』의 체제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점이 아쉽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박학과 고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사회제도에 대한 항목을 다수 수록하여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을 혼용한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 백과사전에는 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國富와 民生에 도움이 된다면 여러 학문에 대해 개방성을 보이는 학풍이 잘 나타나 있다. 백과서전의 유행은 조선후기 사상계를 주자성리학 중심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해야 될 것이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Examined in this article are encyclopedic texts such as Jibongyuseol, Yuwonchongbo, Seonghosaseol and Ojuyeonmunjangjeonsango, in order to determine simply why there were so many encyclopedic writings published during the latter half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Also examined are the internal structure of those writings and their primary contents. Displayed in these encyclopedic texts are the academic expertise and philosophy of the intellectuals of the time who wanted to employ newest information in their efforts to solve current day problems. Also, each of the above texts present the author's own style and knowledge. Yet they share a connection between the contents of their own and the fact that the authors either recently visited China or were in contact with people who did. Yi Su-gwang and Kim Yuk visited China and returned from it themselves, while Yi Ik was in contact with various books which his father Yi Ha-jin purchased in China when he visited the country as an official government emissary. Yi Gyu-gyeong was able to encounter several books thanks to his grandfather Yi Deok-mu who had earlier visited China and also had the opportunity to work at Gyujanggak. In other words, the information inside books imported from Ming and Qing dynasties had huge influence upon the encyclopedic writings published in Joseon at the time. And domestic encyclopedias created under those influence in turn influenced other domestic encyclopedias that were yet to come as well. The meticulous nature and also a wide variety of information contained inside Jibongyuseol were both hugely helpful and influential to the authoring of Seonghosaseol and Ojuyeonmunjangjeonsango. These two particular texts are often evaluated as an enlarged version of Jibongyuseol. Yuwonchongb is modeled after a Chinese encyclopedia entitled Samunyu'chwi and lacks an original touch. On the other hand, Ojuyeonmunjangjeonsango is based upon vast knowledge and historical research, and also contain information regarding social institutions. In a sense it is a combination of Jibongyuseol and Seonghosaseol. The encyclopedias published in the Joseon dynasty's latter half period did not pursue only Neo-Confucianism but also other trends of academism if the authors deemed such trends and knowledge potentially helpful in enlarging the wealth of the country and also enhancing the level of life for the general population in the process. Their circulation during the said period is the very reason that the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s latter half period should be examined from a complex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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