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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선신(金善臣)의 생애(生涯)와 그의 저작(著作)에 관한 일고(一考)

        신로사 ( Ro Sa Shin ) 동방한문학회 2008 東方漢文學 Vol.0 No.36

        본고는 조선 후기 문인 김선신의 생애와 그의 작품에 관한 고찰이다. 김선신은 해외 경험이 드물었던 19세기 초 중국과 일본을 모두 경험하였고, 나아가 양국의 문인들과 학문적, 문학적으로 교류를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선신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1811년 통신사를 연구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김선신의 생애와 저작을 고찰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김선신은 1805년 瀋陽에 다녀왔는데, 연행을 다녀온 형 김선민과 벗 이의성을 통해 유득공으로부터 중국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1811년에는 文才를 인정받아 통신사의 正使 書記가 되었다. 대마도에 가서 저명한 일본 학자들과 만나 필담을 나누고 序文을 써주는 등 교류를 하였다. 古賀精里와는 같은 주자학자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고 宋學·漢學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1822년에는 金魯敬의 군관으로 그의 아들이자 벗인 金命喜와 함께 燕行에 참가하여, 이들과 함께 吳崇梁·曹江·葉志詵·李璋煜 등 중국 문인들과 교분을 맺었다. 김선신은 연행이후에도 이들과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김선신이 이들 중국문인들과 漢學·宋學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김선신의 경우를 통해서 한·중·일 삼국 문인들의 知的·學問的 교류의 일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국내 문인들 중에서는 김정희 김명희 형제 그리고 김려와 김선 형제와 매우 절친했다. 이외에 신재식, 이명오, 조면호 등의 인물과도 교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희를 일본에 소개하거나 김정희에게 일본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 등 김선신이 당대의 문인들과 일정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김선신이 남긴 작품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통해서 1811년 통신사와 당시 문인 교류를 알 수 있다. 『청산도유록』은 1811년 통신사를 연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博對馬島賦」는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조선 문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 문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졌다. 김선신에 대한 연구는 조선문인들 사이의 교류뿐만 아니라, 그 당시 조선과 일본, 조선과 중국 문인들 사이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biography and works of Gim Seonsin, a literatus who lived in Joseon. Gim Seonsin went to China and Japan in early nineteen-century, furthermore he made an exchange with literati of China and Japan about scholarship and literature. At this present, Gim Seonsin is little-known. The paper principally traces Gim Seonsin`s biography, this is basic research for the diplomatic mission (Tongsinsa) which Joseon sent to Japan in 1811. Gim Seonsin`s family was very poor and lowly, Gim Seonmin who is Gim Seonsin`s older brother and his father were Jinsa. Especially, Gim Seonmin went to China a year ago than Gim Seonsin. Gim Seonsin maybe gained from information of China. Gim Seonmin was very inportant to Gim Seonsin, because Gim Seonmin collected Gim Seonsin`s works. The important thing of Gim Seonsin`s life was the network it was the relationship between other literatus. Gim Seonsin was closed to Gim Jeonghui, Gim Myeonghui brothers, Gim Ryeo, Gim Seon brothers, and Sin Jaesik, I Myeongo, Jo Myeonho. The academic world of Korea, however, overlooked the relationships between Gim Seonsin and them. Cheongsandoyurok which is the work about the 1811`s Tongsinsa, it were read by Chinese as well as Korean. This was also evaluated with a literary work. It is necessary to the research into Tongsinsa in 1811 and the literature.

      • KCI등재

        김세렴(金世濂)의 『해차록(海蹉錄)』에 관한 연구 -「문견잡록(聞見雜錄)」을 중심으로-

        신로사 ( Ro Sa Shin ) 한국한문학회 2014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56

        본고에서는 1636년 통신사의 부사였던 김세렴이 쓴 사행 기록인 『 海蹉錄 』을 통해서 김세렴이 지닌 대일 인식의 특징을 살펴보고 아울러 .海.錄. 중의 聞見雜錄을 통 해 김세렴의 저술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해 보았다. 김세렴은 許筠그리고 柳 馨遠의 집안과 혼인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張維ㆍ李植ㆍ申翊聖등의 문인들과도 친 분이 두터웠다. 이러한 관계는 그의 대일 인식을 형성하는데 작용하였을 것이다. 김세 렴은 일본의 문화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야만시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동시 대의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후 18세기 문화교류가 활발했던 시기에 볼 수 있는 인식과 유사한 면모를 보여준다. 1636년 통신사를 통해 저술된『해사록 』의 가치와 그 의의를 확인하는 작업은 문견 잡록 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다른 사행기록과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해사록 』중에서도 문견잡록 에 주목한 이유는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 그것이 김 세렴의 저술 중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문견잡록 을 분석 한 결과 그는 이전의 사행기록을 참고하고 인용하되, 여기에 자신의 견문과 함께 여러자료들을 참조하여 고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수 있었다. 요컨대 김세렴은 이전에축적된 일본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한 위에 자신의 견문과 고증을 더함으로써 정확 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남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작성된 김세렴의 사행기록은 동시대 및 후대의 많은 문인들에게 영 향을 끼쳤다. 교유가 있었던 趙絅이나 許穆, .日本傳.을 남긴 洪汝河외에도 한 세기 가 지난 이후의 安鼎福이나 趙., .萬機要覽. 더 나아가 근세에 이르기까지 김세렴의 기록은 지속적으로 인용되고 읽혀왔다. 이는 그의 저술이 사실적이고 객관적이었다는 점에 대한 반증일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변화하는 동아시아의 형세 속에서 조일 관계 의 참고자료로써 이용되어왔던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Gim Seryeom(金世濂)``s understanding and the significance of Haesalog(海蹉錄), it is the record of the 1636 Korean Embassy to Japan(通信使; Tongsinsa). The 1636 Tongsinsa is important with regard to Joseon Dynasty``s foreign policy toward Japan. Because Joseon government dispatched a delegation after Yanagawa incident(柳川 事件: 調興事件) which fabricated a sovereign´s message. This paper traces Gim Seryeom``s life and a network of friends, they had an influenced on each other. Gim Seryeom did not count Japan as an uncivilized country, but rather he appreciated them. This kind of view was different from a contemporary. Gim Seryeom left two types of documents after 1636 Tongsinsa, one is daily recording, Haesalog, another poetry, Sasanglog(蹉上錄). This paper focused on Mungyeonjablog(聞見雜錄) in Haesalog. Mungyeonjablog is miscellaneous records of Japan such as customs, nature, history. The description is relatively precise and accurate. He analyzed past Tongsinsa records and ascertained whether these were correct. Finally he edited some of documents and added his own thoughts. Gim Seryeom``s Mungyeonjablog subsequently influenced many people, for instance, Jo Gyeong (趙絅), Heo Mok(許穆) and An Jeongbok(安鼎福).

      • KCI등재

        1643년 통신사행과 趙絅의 일본 인식에 관한 小考

        신로사(Shin, Ro-sa) 한국고전번역원 2013 民族文化 Vol.41 No.-

        본고는 1643년 癸未사행과 당시 副使로서 사행에 참여했던 趙絅을 초기 통신사의 성격과 함께 당시 조선의 대일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1643년 통신사는 사행단파견부터가 다른 사행과 달리 순조롭지 않았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당하였고, 중국의 움직임이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으며, 국내적으로는 기근과 질병이 만연한 상태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대외적 안정을 위하여 일본 幕府 將軍의 후계자 탄생축하라는 전례 없는 파견 요청을 수락하여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1643년 사행의 정사는 윤순지, 부사는 조경, 종사관은 신유였다. 본고는 1643년 통신사행의 개요와 함께 부사였던 조경의 사행록을 고찰한 것이다. 특히 그는 사행에 파견되기 전에 일본과 화친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는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일본에 가서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본고에서는 조경이 가지고 있던 일본 인식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조경은 일본과 화친할 것을 주장하기는 하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일본을 야만시하고 이적시하였다. 그가 일본과 화친할 것을 주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안위를 위한 외교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조경이라는 개인의 생각은 이와는 달랐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시대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는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관심은 許穆과 같은 동료문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paper examimes the Gyemi(癸未) Korean Embassy to Japan(通信使;Tongsinsa) in 1643 and Jo Gyeong(趙絅)’s the record of the 1643 Korean Embassy to Japan. This aims to study 17th century’s the Korean Embassy to Japan and their perception of Japan, especially Jo Gyeong(趙絅) who he was the bureaucrat. The 1643 Tongsinsa was different from the other Tongsinsa. Firstly, Joseon government had never dispatched a delegation the birth of successor to Tokugawa government(德川幕府). Furthermore the state of Joseon was very serious, Joseon suffered from the second Manchu invasion of korea in 1636(Byongjahoran) and plague. Nonetheless Joeson government decided to send a embassy because of national security. Jo Gyeong(趙絅) previously insisted on amity with Japan, it was unorthodox. Because Japan was thoughted implacable enemies since the two Japanese invasions of Korea. How, then, did he feel Japan after he went to Japan? This paper consider Jo Gyeong(趙絅)’s perception of Japan through his record, Dongsarok(東?錄). Jo Gyeong(趙絅) virtually scorned Japan as barbaric. The reason he insisted on amity with Japan was for national security. Himself could not accept Japan as a neighbour. However, it does not means he ignored Japan. He was rather interested in Japan, and he collected the information about Japan. And this influenced on his friends such as Heo mok(許穆).

      • KCI등재

        黃梓(황재)의 甲寅(갑인),庚午(경오) 연행록에 관한 고찰 -雍正(옹정),乾隆(건륭) 연간의 정세 인식을 중심으로-

        신로사 ( Ro Sa Shin ) 한국한문학회 2013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52

        This article examines yeonhaengnok which was written by Hwang Jae (黃梓). Hwang Jae went to Beijing in 1734(甲寅Gabinn) and 1750(庚午 Gyeongo), he wrote two books, Gabinn-yeonhaengnok (『甲寅燕行錄』)과 Gyeongo-yeonhaengnok(『庚午燕行錄』). These are among the collected works of Hwang Jae, Piruijaeyugo(『畢依齋遺稿』) which is possessed by Toyo Bunko(東洋文庫) in Tokyo. This paper principally traces Hwang Jae`s biography and deals with two yeonhaengnok. This paper aims to study Hwang Jae`s views on the situation of China during the Yongzheng and Qianlong Period. He was very interested in the emperor of china, so he compared the governing of Kangxi(康熙), Yongzheng(雍正) and Qianlong(乾隆) and evaluated them. Hwang Jae observed Han chinese, Manchu people and Mongols who were consisted of Qing. He had a very positive thought of Manch people, it was similar to his friend Kim Changeop(金昌業). It means Hwang Jae was influenced by Kim Changeop`s Yeonhaeng-ilgi『燕行日記』. On the other hand, he did not showed an interest in Western learning such as Catholic Church. There is a broad distinction between Hwang Jae and Hong Daeyong(洪大容). We can assume the views on the situation of China in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through Hwang Jae`s two yeonhaengn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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