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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 식민지기 동래지역 기영회의 사회활동과 경제기반

          손숙경 ( Son Suk-kyung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7 石堂論叢 Vol.0 No.68

          이 연구는 한말 식민지기 동래 지역 노년 연령집단인 기영회의 사회활동 및 이를 뒷받침한 경제 기반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연구에서는 특히 기영회의 경제 기반에 중점을 두었다. 기영회가 학교 설립 및 운영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정에 대한 구체적인 실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기영회의 사회활동과 경제기반과의 상관관계에 주목한 이 연구는 식민지기 노년연령조직인 기영회의 역할과 위상을 밝히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기영회는 현재 동래고등학교의 전신인 동명학교를 설립하고 이후 공립학교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동래지역사회에서 근대 엘리트를 배출하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기영회는 숭의계를 조직하여 지역사회의 의례를 조직화하면서 식민지기에도 계속해서 제사에 필요한 재물은 물론 제사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한편 한말 식민지기 `청년`은 그 시대를 담당할 새로운 지식인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과거 전통의 상징인 기영회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한말 식민지기 `청년`이라는 근대의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여 기영회는 청년 단체인 속영회를 조직하였다. 이렇듯 기영회가 교육사업과 또 다른 사회활동을 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기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기영회 조직의 재정구조와 운영을 잘 보여주는 『기영회정일기』를 통해 근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기영회의 경제적 출자를 알 수 있다. 기영회의 주된 수입은 토지에서 마련되었고, 지출은 기영회의 활동과 연관되어 다양하게 나타났다. 기영회는 지역사회의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경제적으로 후원하였으며, 지역사회 의례는 별도의 재정을 마련하여 주관하고 뒷받침하였다. 이 같은 재정 기반은 지역사회 노년 연령집단의 권위 확보로 이어졌고 이것은 식민지기 이들 집단이 전통을 창출하는 데 중요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 이후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여 기영회가 지역사회에 중심으로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식민지기 지역 엘리트들의 동향을 전근대와의 상관 관계 속에서 자리매김하는 새로운 시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research aims to reveal social activies of Guyyoungheoi, which is Dongnae County`s old aged group and economical foundation that support these activities. In this study, I especially gave attention to economical foundation of Guyyoungheoi. This is because even though Guyyoungheoi carried out massive project such as founding and running school, there was no revealed concrete finance. This financial foundation connected to authority secure of old aged group, which was important for them to create tradition in colonial era. So study focusing on correlation between Guyyoungheoi`s social activities and economical foundation will contribute to revealing Guyyoungheoi`s role and status in colonial era. As you know, Guyyoungheoi founded Dongmyuong school, which is now Dongnae high school, and switched to public school. This gave foundation of elite produce to Dongnae county society. Also Guyyoungheoi organized Sungeuigae(崇義契), which organized rituals of local society so that they could actively intervene to ancenstral rites. Although in 1920, numerous financial and social organization was established, none of them could replaced activities and position of Guyyoungheoi in local society. Meanwhile, Guyyoungheoi organized Sokyoungheoi to respond to new change of modern for Youth. Guyyounghoi would surely be target of criticism because colonial Youth meant leading intellectual that take on the era. Guyyounghoi show respond toward this change by organizing Sokyoughoi. The reason why Guyyounghoi was able to continue educational service and other activities is their ecological foundation. If we look at financial structure and operation of Guyyounghoi, income was mainly founded by land, and outcome was used in various way related to Guyyounghoi`s activities. Also, Guyyounghoi actively involved in and financially supported local events. And local ritual could be authorized by local resident because of special finance. Due to an ageing society, attention toward to old age was increased. In this side, research about sociocultural role of old aged group possibly provide new prospect in discourses about aging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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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중인 역관의 동래 파견과 川寧 玄氏 현덕윤 역관 家系의 분화, 그리고 중인 金範禹 후손들의 밀양 이주

          손숙경(Son, Suk-Kyung) 부산경남사학회 2016 역사와 경계 Vol.100 No.-

          이 연구는 천령 현씨의 잘 알려진 역관 가계 구성원 중 일부가 조선후기 동래왜관에 파견된 것을 계기로 자신들이 속한 중인 계급들의 전형적인 세거지인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밀양으로 이주한 사실에 주목하여 이들의 이주와 사회 분화 그리고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으로 인하여 밀양으로 유배 온 김범우의 후손들이 밀양으로 이주한 사실도 주목하였는데, 이 역시 중인 가계의 사회 분화의 특성을 분명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사의 중요 논쟁과도 연관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김범우만이 아니라 이들 천령 현씨 중인 역관 가문 중에서도 19세기 이후 천주교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이 다시 배출되었으므로 두 가계의 밀양 이주와 정착에서 천주교 신앙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조선후기 이후 동래에는 대일 외교를 담당하는 역관을 파견하여 일정 기간 체류하고 임기를 마치면 중앙으로 돌아오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천령 현씨도 이러한 역관을 다수 배출한 중인 가문인데, 밀양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천령 현씨들은 바로 일본어 역관으로 명성이 알려진 현덕윤 직계 후손들 중 일부에 해당한다. 현덕윤의 후손 중에는 이렇듯 밀양으로 이주하면서 기술관 직책을 더 이상 배출하지 못한 반면 한양에 세거한 다른 후손들은 기술관 직책을 계속 세습하면서 현덕윤의 후손 가계 사이에는 사회 분화가 일어난 셈이다. 밀양으로 이주한 천령 현씨는 현덕윤의 손자로서 잘 알려진 역관 현상정과 두번째 배우자 고령 신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후손들이다. 고령 신씨는 중인 출신은 아니지만 한양 출신으로 천령 현씨와 비슷한 사회 지위에 있는 武任 가문 출신이다. 고령 신씨는 현상정이 동래에 파견될 때 그를 따라 동래에 거주하였다가 아들과 더불어 밀양으로 이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비슷한 시기에 김범우의 후손들도 김범우의 밀양 이주를 계기로 밀양에 정착하면서 두 가계는 외지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과거의 연망을 계속 유지한 것으로 믿어진다. 종래 중인에 대한 연구들은 대부분 기술관의 세습 양상에 주목하였을 뿐 다른 길을 선택한 이들과 그 의미는 주목하지 않았는데, 이 연구는 바로 이러한 중인 계급의 사회 분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특히 이들이 밀양으로 유배 온 김범우를 따라 밀양에 거주한 김범우의 후손이 있는 지역을 선택한 사실도 중요하다. 이것을 통하여 직역 및 혼인을 통한 중인들 사이의 연망은 물론 동래에 파견된 역관들의 살아 있는 또 다른 모습도 드러냈다. 나아가 중인 계급 사이에 작동하는 사회 문화적 연망이 한양과는 멀리 떨어진 밀양에 이주한 부류들 사이에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중인 계급 내부의 사회 분화에도 불구하고 중인 계급의 경계가 공고했음을 시사한다. 이렇듯 천령 현씨 역관 가문의 사회적 분화를 중앙이 아닌 지방 사회에서의 전개 양상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지역 이주 및 정착 과정에서 천주교를 매개로 한 친족 사이의 연망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에 주목한 이 연구는 친족 구조와 사회 분화, 천주교 수용과 그 지역전개 사이의 복잡한 상관관계를 분명하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set out to examine the meaning, focusing on the fact that some descendents of Cheon Ryeong Hyeon family, who were accredited to Whae Gwan(東萊倭館) as Yeok-Gwan(Official Interpreters), moved to Miryang, not Hanyang(漢陽, the seoul city), which had been a place most official interpreters liked to live and be active. Correlation with another Chungin (中人) family, who introduced Catholicism is also underlined in this study. This is because the introduction of Catholicism is one of important issues in Korean Catholic Church. Cheon Ryeong Hyeon family is well known as family which had produced many of Chungin Yeok-Gwan. Moreover, worthy members, contributed to the advancement of Korean Catholic Church after the 19th century, belonged to this family. This study casts a long shadow dealing with the differentiation of Cheon Ryeong Hyeon family, on the level of local community, not on the central community. It also pay attention to the network among relatives through Catholicism. It can explains why another relatives migrate and settle down in local area. Therefore I expect this study contribute to reveal correlation of the structure of kin groups with the introduction and development of Catholicism in Korea. Some people of Cheon Ryeong Hyeon family, lived in Dongnae, later immigrated to Miryang, were descendents of Hyeon Deok-Yoon(玄德潤), who was strongly mentioned as an official interpreter for Japanese. They were Hyeon Sang-Jung(玄商禎)"s descendents with his second wife. Hyeon Sang-Jung was grandson of Hyeon Deok-Yoon, and he married a woman who was a member of Ko Ryeong Shin(高靈申氏)"s family. Considering her local background from Hangyang, not Dongnae, her family was assumed to be even with his husband in social position, living in Hangyang. She may have come to Dongnae, as his husband, Hyeon Sang-Jung, started to serve in Dongnae as an interpreter. But she and her descendents didn"t return to Hanyang after completion of her husband"s work in Dongnae, and rather moved to Miryang. This is an extraordinary example. Because previous studies on Chungin have paid little attention to the pattern of hereditary succession of people who were out of center, instead focused on Technocrats(技術官). And that"s where this study brings to focus on social differentiation of these marginal groups. Their choice to settle on Miryang where the descendents of his family had lived after Kim Beom-Woo(金範禹)"s death due to the Catholic Faith is remarkable. It shows not only the network among Chungin family through occupation and marriage but also their vivid life in local area, especially served in Dongnae, with deta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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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양 일원 천주교 관련 기록물과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제언

          손숙경 ( Son Suk-kyung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8 石堂論叢 Vol.0 No.70

          이 연구는 언양 지역 천주교 관련 기록물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한 방안으로써, 언양 성당을 중심으로 천주교 기록물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할 것을 제언한 것이다. 현재까지 언양 지역 천주교와 관련하여 수합한 각종 기록물들을 쉽게 접근하여 활용하려는 구도에서 이 연구는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언양과 그 일원인 밀양, 동래 지역의 천주교 관련기록물의 1차 정리 작업인 자료집 간행을 기반으로 이것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전환하려는 작업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 연구에서는 언양 지역 천주교 기록물이 조사 수집 보존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이어 고문서와 고문헌 등 각종 기록물의 가치와 의미를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기록물들이 언양 지역 천주교 수용 시기와 수용형태 등과 관련한 구전 내용의 비정과 이 지역의 천주교 수용과 수용자들의 모습과 형태를 밝힐 수 있는 소중한 기록물임을 드러내었다. 나아가 오프 라인에서 확인될 수 있는 이러한 기록물을 온라인 서비스 제공이 기본이 되는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예산 지원 및 인력보충에 대한 문제도 제언하였다. 이러한 언양 지역 천주교 관련 기록물은 단지 천주교 신앙인의 역사만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과 근대를 보여주는 ‘공공기록물(public records)'로서 무엇보다 소중하다. 따라서 이미 간행된 종이 인쇄본 형태의 자료집을 바탕으로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언양 성당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전통시대와 근현대의 기존 자료들에 대한 아카이브 구축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천주교 관련 기억의 장소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연구를 계기로 언양 지역 천주교 관련 기록물을 ‘공공기록물'로서 그 소중함을 인식하고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자를 비롯한 ‘언양성당', 그리고 언양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천주교 관련 기록물의 아카이브 구축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가 시작되기를 바란다. This study is a suggestion to build up digital archive of Catholic records, centrically Unyang church, for one way to preserve and use records about Unyang' Catholic records. Up to now, this research launched to make using records related to Unyang's Catholic easy. So, we started to discuss works for conversing source book of Unyang, Milyang and Dongnae's Catholic researches into digital archive. To do such a work, in this study we observed the process of collecting and preserving Unyang Catholic records, and then we examined means and value of various records, such as old documents. So, we suggested the needs of building archive by revealing that this kinds of records are valuable for revealing shape of this local's Catholic embrace by comparing records and oral tradition of shape of Unyang's Catholic embrace. Furthermore we suggest budget support and man power supply for building digital archive, which is base of providing these records through online service. These Catholic records of Unyang is not just important as history of Catholic believers, but also important for public records which show tradition and modern of Korea. And we have to make Unyang Church the place of memory by identifying needs to build archive related to original records of tradition and modern-comtemporary era. And we hope spreading other discussions about local Catholic by using this. Taking this opportunity, We want people to identify the importance of Unyang's Catholic records as a ‘public records' and we look for start of discussion for building archive based on Unyang Church and Unyang local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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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2년 언양 향교의 儒案 작성과 새로운 구성원들

          손숙경(Son, Suk-Kyung) 부산경남사학회 2018 역사와 경계 Vol.108 No.-

          이 연구는 19세기 언양 지역의 새로운 향교 유안에 주목하여 향반사회의 변화와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 연구는 다음 두 가지 점에 주목하여 이루어졌다. 먼저 종래의 향반에 속하지 못했던 부류들이 언양의 향반사회에 진입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언양 지역사회의 상층부에 진입하려한 이들의 존재형태와 동향을 밝히고 이것이 언양 향반사회에 초래한 변화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19세기 이후 언양 향교의 유안에 새로 들어온 구성원들을 분석하여 향교 유안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1802년 언양 향교에서는 유안을 작성하면서 그 배경을 서문에 밝히고 이어 42명의 유생들의 명단을 수록하였다. 이 유안이 작성된 배경은 경순왕의 후손으로 유업을 잃지 않았는데도 향교나 서원의 유안에 입록되지 못한 사람에 대해 국가에서 입록하도록 조처하여 입록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향교의 유안에 입록된 구성원들은 현재 확인한 바로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유안 등재에 앞장 선 경주 김씨 가문과 같이 향리 직책을 역임한 동종 계파가 존재하는 부류이다. 다른 하나는 언양의 유명 사족들과 연관되지만 그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부류들이었다. 대대로 향리 직책을 역임한 동종 계파가 있는 부류인 경주 김씨 가문 중 한 계열은 향리 직책을 맡지 않았고 유안에 성명을 세 사람이나 등재하여 향리 가문의 배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들은 언양 향교 유안 입록 자격과 관련하여 경순왕의 후손임을 내세워 경순왕의 후손에 대한 국가의 우대조처를 적극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한편 지역사회의 경제적 균질화도 새로운 부류들이 유안에 입록하여 양반사회에 편입해 나가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양반 가문들과 새로운 부류들의 구분은 여전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안에 등재된 구성원들은 언양의 중요 가문들과 거주지와 성관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들 가문 출신이거나 이들 가문들과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이들 가문들의 족보에서 찾아지지 않는 것은 중요가문들의 주변에 위치해 있는 부류들로 여겨진다. 이들은 유안 등재를 통해 향반사회로 진입을 시도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원래 향반 집단에 속하지 않았던 부류들이 국가의 정책 및 이념에 상응하여 향반 사회에 편입해 나가는 동향에 주목한 이 연구는 지역사회의 새로운 변화의 또 다른 층위를 밝히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research reveals changes of local elite society and it's meaning by focusing on the new Written Rosters of Yusaeng(Yuan) of Unyang in 19century. This research was performed with two following points. First point is how non-involved class kind actually involved in the local elite society of Unyang. The second is revealing trend and being of people who tried to be a upper class of Unyang and about what changes these things caused in Unyang local elite society. This research studied the characteristic of Written Rosters of Yusaeng Of County School by analysing new components of Written Rosters who joined after 19 century for successful research. In 1802 Writing Written Rosers of Yusaeng, Unyang County School reveals the reason why they rewrote it adding new Yusaeng in preface followed by 42 name of new Yusaeng. The reason why this Written Roster of Yusaeng was written is to let descendents of Kyungsoon King who were not able to be listed in Wrtten Roster of Yusaeng of County School or private school even though they did not lose confucianism work listed on the list. As far as identified, components listed in the list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wo group. One is group that have local clerk family similar to Kyungju Kim Clan, the leader of families tried to be listed in the list. The other one was a group unclearly related with famous elites of Unyang. Families of Unyang tried to be listed on the Written Roster of Yusaeng could be part of local elite society in Unyang under the understanding composition of state and local society. Above all, this research which focused on new group and its trend can contribute to finding the other layer of new changes of local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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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중반 동래 지역 기영회 결성과 그 역사적 의미

          손숙경(Son Suk-Kyung) 부산경남사학회 2012 역사와 경계 Vol.83 No.-

          This study is to discuss the Gyeyoungheoi(耆英會), how it's established and what it means in history, which is a new organization consisted of military groups and clerk groups on Dongnae County in the mid-19th century. The organization means not just a combination between other two different groups but historic chance for their offsprings to step up to change their ways of Korean history as a turning point. The military groups desired for the economic stability through the combination named Gyeyoungheoi. Once was divided as an independent organizations. This orientation was necessary condition for clerks. In addition, it wasn't rare thing that clerk, military, local elite are in the same lineage in the Dongnae County : members are a confused mixture and in their close or distant family meaning they are connected. This could become a pivotal role to aggregate the combination. Since the mid-19th century when Gyeyoungheoi was established, the clerk family and military family started to take Chungkun(中軍) which local elites monopolized. This means a lot because dismiss of power mechanism and the start of Gyeyoungheoi happened simultaneously. The combination of Gyeyoungheoi is detailed in truth of assumption that two groups have sympathy or consciousness. 이 연구는 19세기 중반 동래 지역 武任출신의 퇴임자들과 吏胥집단의 퇴임자들이 결성한 기영회에 주목하여 그 성립 배경과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이 두 집단의 통합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두 이질적인 집단이 합치는 것을 넘어서서 이들의 후손들이 그 후 한국사의 새로운 변화를 만드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종래 분립된 두 조직이 기영회로 통합된 배경에는 무임들이 하나의 사회 집단을 형성하면서 이에 수반하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의 확충을 吏胥집단과의 제휴를 통하여 확보하려는 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같은 방향은 이서들의 이해에도 부합하였다. 특히 동래 지역은 같은 宗族안에 鄕班과 무임, 이서를 배출한 가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거나 혼효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은 양자의 통합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한편 기영회가 결성되는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양반들이 독점하여 온 中軍직책을 향리나 무임 가문들이 맡기 시작하였다. 군사 책임자인 중군이 향반이 아닌 2차 신분 집단으로 넘어갔다고 하는 의미는 작지 않다. 향반 주도의 지역사회 권력 체제의 해체와 기영회의 결성은 거의 동시에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19세기 중반 이후 동래 지역 기영회의 결성은 이질적인 두 집단 사이의 연대감이나 동류의식이 구체적으로 顯現된 사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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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부에서 배후지로

          손숙경(Son Suk Kyung)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6 동양한문학연구 Vol.44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이 연구는 기장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 방법과 내용을 논의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기존의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문제 중심의 거시적인 구도 위에서 기장 지역 연구에 대한 방향을 제안하려는 것이다. 기장 지역은 조선시대 독립된 군현이었으나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연안지역으로 문과급제자를 한명도 배출하지 못한 주변적인 지역에 속한다. 그럼에도 이 지역에서 식민지기 이후 김약수나 김두봉, 이하영과 같은 역사적 인물이 배출되었다. 나아가 철마의 해주 오씨, 남평 문씨 등 오랜 역사를 가진 가문이 근대 이후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같이 조선시대 두드러진 주변성과 근대 격동기 이후 중요 인물의 배출과 같은 새로운 변화를 기장 역사 문화의 단절과 지속성의 관계에 대한 논의의 중요구도로 설정하였다. 기장 지역에 대한 연구는 고고학적 자료와 관찬 자료를 편찬하여 사실을 축적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국가제도와 지역 속에서 여기에 대응하여 생활하고 역사를 만들어간 지역사회와 지역민의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들 것이다. 오래전부터 기장을 비롯하여 부산 경남 일원에 대한 조사 연구를 수행해온 필자를 포함함 고문서 조사 연구팀은 이러한 동향을 문제 삼아 왔다. 자료 발굴도 단순히 자료 수합이 아닌 중앙 중심의 역사 나아가 엘리트 중심의 한국사의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구도 위에서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기장과 같은 주변부 지역의 향반 가문들의 사회적 지위 유지는 외부와의 연망과 양반들의 조직, 통혼권과 같은 문화적 자산이 적지 않게 작용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기장 지역사회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의 동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근현대 이 후 이 지역에서 중요 인물이 배출된 것은 전근대 이전과 크게 대조된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에 속하는 기장 지역에서 근현대 한국을 만든 다수의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이렇듯 근대 이후 진출하는 양상은 개항 이후 부산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기장이 그 배후지로서 급격한 변화를 겪은 것과 관련이 있다. 이는 근대 문물의 수용으로 더 넓은 곳으로의 진출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근대 이후 중요한 인문들이 배출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기장의 역사는 전근대와 근현대를 아우르는 지평 위에서 그 실체를 재현할 수 있을 것이며 주변부에서 배후지로의 변화를 논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This study is to discuss what is an issue and how do we study on the history and culture of Gijang area. I would like to propose the future direction of area study around Gijang be studied with the big picture based on existing researches. Due to it's location as coastal area far from the capital city, Hanyang, which was independent county(郡), Gijang is known as the peripheral area where no one had not passed Monkwa-Examination. Nevertheless, throughout the colonial period, the important people in Korean history such as Kim yaksu(金若水), Kim dubong(金枓奉), Yi hayoung(李夏榮) came out in the perpheral area, Gijang. Many lineages like Haeju Oh Family(海州 吳氏), Nam-Pyoung Mun(南平 文氏) Family who were old family of Gijang had been also changed newly in modern society. Therefore I use remarkable marginality and new changes as a tool to discuss the relationship between continuation and discontinuation of historical culture of Gijang, which explains why many important people as politician appeared from this area throughout turbulent era, although Gijang had been paid little attention due to it's location during Choseon era. Researches on Gijang area so far have been limited on archeology and historiography of public records. They may make it invisible and trivial for the local community and its residents to cope with the government and find their own way. Therefore I think the approach for resolving some problems of korean history like stated-centered and elite-centered narratives is still required when discovering and using local data. On the other hand, the fact a few famous people in modern Korea came out from Gijang, known as the peripheral area, is connected to Busan's rapid growth and it's following change of Gijang from the periphery to the hinterland. It made local people go into the world through adoption of modern culture, and created the environment for the emergence of people who are historical important at the same time. Considering this aspect, the history of Gijang needs to be discussed with a wider perspectives covering pre-modern and modern Korea. That's why we will reveal the process of change to hinterland, and furthermore make it reproduction of the reality of Gijang.

        • KCI등재후보

          사회사와 생활사의 조우

          손숙경 ( Suk Kyung Son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09 嶺南學 Vol.0 No.15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academic tendencies on life history paid great attention lately in history circles, relating to social history. I, therefore, would concentrate on the subjects rather than general tendencies of both circles and bring about discussions to those matters, relying upon the macroscopical structures. The active attentions and discussions over life history arose earlier in history circles. The studies have had close relations with the academic trends in Western, such as new cultural history, history of everyday life, microhistory and so forth. They have great interests in history on insignificant subjects which have been treated with disregard so far. Social history also do. Because of this feature, both may be considered to have continuance. Many of social history study of Korea has been subject to social economic history. To resolve the limits and the defects caused by, new social history should be needed, not diversion to life history. The attentions for new cultural history are also getting stronger against the problems caused by study of focusing on the structure which social history have been serving recently. But danger toward new cultual history, which must be considered as a determined goal to be accomplished by all cultural phenomenon just beyond focusing on the importance of culture, should be kept cautious. The concept of culture has meaningful fields never to be ignored for multiple approaches. New cultural history should be located as a viewpoint, recognizing all over the society through a culture. In this context, life history would try to proceed in so-called socioculture history, combining society and culture, though life history has put more emphasis on the importance of the culture against ignorance by social history. An inclination toward socioculture history may be reasonable for historical approaches and it will be accomplished after the study of life history overcome tendencies depending upon the discussion of macro theory. The achievements of life history study need to confront with defects of social history in Korea circles, and considering this aspect, I think sociocultural approaches, the encounter of social history and life history mentioned above, timely and appropriate on this study. But although these kinds of studies have paid more attentions to individual persons and particular time and space, it doesn`t mean to make light of our important critical discernment on history studies. Life history study would develop as a new viewpoint, containing new critical discernment, not as a new field through these concerns. 이 글은 최근 한국 역사학계의 중요 관심 주제로서 논의되고 있는 생활사 연구 동향을 종래 사회사에 대한 문제 의식과 결부하여 살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사회사와 생활사의 연구 동향을 문제 중심으로 보다 거시적인 구도 위에서 논의하였다. 한국의 생활사, 연구는 신문화사, 일상사, 미시사라는 서구학계의 동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출발하였는데,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사 연구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런 측면에서 사회사와 생활사는 일면 그 경계가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종래 한국의 사회사는 사실상 사회경제사에 예속되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사에 대한 한계와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 생활사로의 전환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사회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한편 사회사가 구조 중심의 역사서술을 지향함으로써 야기된 문제들에 대응하여 새로운 문화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도 여기에서는 문제로 삼았다. 특히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새로운 문화사로서 치환하려는 위험성을 경계하는 것이다 문화라는 개념은 역사 현실에서 다각적 접근을 위해 소홀히 할 수 없는 의미 있는 `차원`이다. 신문화사는 이러한 문화를 매개로 하여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각`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활사가 종래 사회사에서 간과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더라도 그 방향은 사회와 문화를 결합한 이른바 사회문화사를 지향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에서 생활사 연구는 한국 특유의 사회사의 연구들이 갖는 한계를 직시하여야 하며 이러한 면에서 사회사와 문화사의 조우를 기대하는 사회문화사적 관점이 한국학계의 생활사 등의 연구에 시의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함께 생활사 연구가 개별 인간이나 특정 시공간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역사 연구의 중요한 문제 의식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이 연구에서는 덧붙였다. 이러한 고민을 담을 때 생활사는 새로운 영역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전망, 즉 새로운 문제의식을 담은 성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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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량산(梁山)과 동래(東萊)지역의 동래정씨(東萊鄭氏) 족보 출간 작업과 그 방향

          손숙경 ( Suk Kyung Son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6 大東文化硏究 Vol.0 No.94

          이 연구는 양산과 동래 지역에서 출간한 1674년 『東萊鄭氏族譜錄』과 1766년 『東萊鄭氏別譜』의 성격과 특징에 주목하여 조선후기 별보의 변화 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1674년 양산의 동래 정씨 鄕吏들이 주도가 되어 발간한 『족보록』은 1655년에 만든 대동보에 수록되지 못한 것에 대응하여 독자적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 『족보록』에는 중앙의 관직을 가진 위세 있는 동래 정씨 世系와 연결하지도 않고 이들을 수록하지도 않았다. 여기에는 자신들의 세계와 이어지는 인근 지역 정씨들의 세계를 모아 편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점은 입향조와 중시조 보다는 본관지와 그 인근에 세거한 지역적 연고성을 더 의식하였음을 보여주며 향리가계의 전통과 자부심을 드러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766년 동래지역에서 간행한 『별보』는 1716년 대동보에서 배제된 것에 대응하여 동래 정씨 武任집단들이 주도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 『별보』는 본향을 중심으로 동래, 양산, 기장 등에 세거한 경남 일원의 정씨들을 포함하여 이전과는 달리범위가 확대된 모습을 보여준다. 1766년의 『별보』는 원보에 올라있는 동래 정씨 세계를 먼저 수록하고 이어 동래 등지에 세거하는 동래 정씨의 세계를 수록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1674년 『족보록』이 양산 거주 동래 정씨 가계가 同宗양반들이 주도하는 족보에 배제되었을 때 독자적으로 족보를 만들려는 구도였다면 1766년의 별보는 중앙과 관계를 맺으려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변화를 보여준다. 이 두 족보의 기재방식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대부분의 족보에 기재되는 인물에 대한 정보와 달리 이름 위나 옆에 보통 호적대장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職役이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1766년 『별보』는 전형적인 족보의 기재 양식과 유사하다. 하지만 18세기 중반에 출간한 족보임에도 유교화가 진행되기 이전인 조선전기의 족보에서 발견되는 출생순서에 따라 각 인물을 기재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이렇듯 양반 중심의 족보에 世系를 수록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출간한 두 별보는 92년이 지나면서 대응 방식에 차이를 보여주었다. 양산과 동래에서 간행한 ‘별보'는 17세기 이후 종족 형성의 방향만이 아니라 한국사의 변방에 해당하는 지역의 친족의 실태와 정체성에 대하여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change``s trend and its meaning of Beolbo in later Choson, focused into the character and quality 1674``s Dongnae Jeong Family Chokbo (『東萊鄭氏族譜錄』) and 1766``s Dongnae Jeong Family Beol Bo in Yangsan and Dongnae county. In 1674 Chokporok(『族譜錄』)is independently published by the clerk of Dongnae Jeong lineage in Yangsan county, which is responded to the Daedongbo(『大同譜』) that excluded their lineage. Chokborok is not interrelated with the powerful family of Dongnae Jeong lineage that has the office of central government and does not included them. Its publication way is to collect the family of their own and the interrelated Jeong lineage in the near county. This action is to show the tradition and self pride of local official``s family, and to reveal more the local preemptive lived in local county of clan originate and the near county for generations than the progenitor and the middle progenitor. On the other hand, Beolbo(『別譜』) is published by the military(武任) of Dongnae Jeong lineage, and is responded to the Daedongbo that excluded their lineage. This Beolbo is including the Jeong lineage of whole Gyeongnam area that lived for generations in Dongnae, Yangsan and Gijang county with Dongnae as the center, and its scope is expended in contrast with the previous version. 1766``s Beolbo is first to insert the Dongnae Jeong lineage of the original genealogy to its content, and then enroll the Dongnae Jeong lineage that lived in the Dongnae country for generations. While the publication of 1674``s Chokborok is carried by the Dongnae Jeong lineage of Yangsan in their own line when their existence is excluded in the genealogy by the same lineage of Yangban``s elite, 1766``s Beolbo is to show the change toward the direction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with central Yangban. One of interesting facts in the recording manner of this two genealogy is to enroll the occupation in the above and close place of name, that is different with the most genealogy. Also, 1766``s Beolbo is similar with the typical genealogy in the manner of recording. But, though this Beolbo is published in the later 18th century, each person is enroll by the order of birth in this genealogy as in the genealogy of early Choson that is still processing in the spread of Confucianism. As mentioned above, this two genealogy that is published with poor result to enroll their lineage into the genealogy of Yangban``s elite is to show the pattern of respond in the passing of 92``s year. ``Beolbo`` that is published in the Dongnae and Yang san county is to provide not only the orientation of lineage``s formation after the 17``s century, but also the clue of the actual condition of the lineage and identification in the local area in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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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동래(東萊) 지역 무임(武任)집단의 조직과 운영

          손숙경 ( Suk Kyung Son ) 한국사회사학회 2007 사회와 역사 Vol.0 No.74

          이 연구는 조선후기 ``전문적인 군대``를 구성하고 이끌어간 변경지역 무임집단 조직의 구성과 운영 질서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동래 지역을 사례로 선정하였다. 동래 지역에는 다양한 종류의 전문적인 군대인 무청(武廳)이 존재하였다. 이 부대를 이끌어가는 전문적인 직임자를 ``무임(武任)``이라고 불렀다. 이들 무임들은 각각 직급, 신분, 역할이 모두 달랐으며, 상급과 하급으로 양분될 수 있다. 동래는 조선시대 변경 지역임과 동시에 왜관이 설치되어 군사적 중요성도 있어 독자적인 군대가 설치된다. 그리하여 동래 지역 군대는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도록 편제되어 상급 행정 기관이나 군사기관의 통제로부터 상대적인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재역 군대의 최고 지휘관인 중군(中軍)을 향반들이 선임하는 둥 무임집단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였다. 동래 지역 향반들은 양무당(養武堂)을 조직하여 무임집단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는 구심점으로 삼았다. 무임집단의 형성과 더불어 19세기 이후에는 향반 출신이 아닌 무임들의 퇴임자들로 구성된 세검당(洗劍堂)이 무임집단을 통제하고 감독하는 사실상의 기구로 등장하였다. 새로 무임집단을 대표하는 기구로서 등장한 세검당은 국가에서 정한 규율과는 별도로 무임집단을 끌어 나갔다. 이후 무임집단과 이서 잡단은 조직을 합쳐 기영회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무임집단을 통제하였다. 이렇듯 동래 지역 무임집단들은 집단 내부에서 조직을 만들어 무임들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해 나갔다. 그렇지만 제도적으로는 언제나 국가의 통제하에 있었다. 동래 지역은 예속과 자율이라는 상충되는 두 가지 원리를 적절히 배합하면서 자신들의 내부 질서를 유지해나갔다. 이는 변경 지역사회 무임 집단의 하나의 뚜렷한 특성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다. This study is to discuss the substance, organization of military groups in the frontier district that had constructed and led ‘professional army' during the late Chosun Dynasty. As we can find the materials suitable for this study, Dongnae(東萊) is selected for this study. There existed Military Council(武廳) that performed the military works as the professional army in Dongnae. People, who took complete charge of army as the upper ranked, were called military(武任). They were all different in the rank, class and function each. They could be divided into two groups, upper and lower grade division. Dongnae is the frontier district close to Japan, and Japan House(倭館, Waegwan) is to be set. And the military in this area was arranged to correspond with importance of the frontier post. This military was able to carry out its duty independently without any regulations by upper ranks and organization of military groups and it showed its had relative autonomy. Hyangban(鄕班, local elites) in Dongnae controled the military in the recruit of Chungkun(中軍), the prime leader in local army, for the people of this area. They had made the new organization, Yangmudang(養武堂), to get controlling power for the military groups and to be their central axis. To correspond the form of the military groups, Saegomdang(洗劍堂) where retired militaries(武任) not local elites were its essentials had been organized and become new apparatus for the substantial management in 19th centuries. As a new representative organization, it lead the military groups by separate regulations which was different from government`s. Later Gyeyounghei(耆英會) was made as a new organization, which based on the combination of military groups and clerk groups. And it controled the military. Inside the groups, this military groups made the organization to control the military and success it. But they were under the control of central government officially. The confronted principal of subordination and autonomy mixed appropriately to continue the inside order of these groups. And this can be identified with the distinguished quality in the local area of military grou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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