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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 1600년경 편찬 족보의 계보형태와 특성 -1606년 편찬 『진양하씨세보(晉陽河氏世譜), 만력본(萬曆本))』의 분석을 중심으로

        손병규 ( Byung Giu Son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2 大東文化硏究 Vol.77 No.-

        조선왕조시대의 족보는 신분제의 유동성에서 기인하고 신분적 배타성에 의거하여 동일계층의 사회집단을 결집하려는 의도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족보 편찬에는 네트워크의 개방성에 기인하여 편찬에 참가하는 가계가 끊임없이 확산되고 교체되는 변화를 겪는다. 말하자면 선별적이고 계층적인 집단화의 배타성과, 혼인과 더불어 무한히 확대되는 네트워크의 개방성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원리로 족보가 편찬되었다. 조선시대 족보의 계보형태와 기재사항이 부계혈연집단의 결집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600년경에 편찬된 족보들은 그 전과 후에 편찬된 족보들의 계보형태와 그 특성 이 갖는 연속성과 변화를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진양하씨세보(만력본)』에서 주목되는 것은 편자의 선조들 가운데 부계남성으로 시작하는 계보를 ``子派``, 부계여성의 배우자인 사위로부터 시작하는 계보를 ``女派``라 구분하여 기록할 뿐 아니라, ``外譜``라고 부르면서 부계남성의 배우자, 妻家의 계보를 수용했다는 점이다. 이전의 족보는 아들과 딸 양쪽으로 이어지는 계보형태를 띠어 ``子女譜``라 불린다. 이 족보는 기본적으로 이전의 ``자녀보`` 형태를 유지하지만, ``자파`` ``여파``와 같은 여러 개의 네트 워크를 설정하고 여기에 더해 편자의 직계선조의 처가쪽 혼인네트워크까지 끌어들여 각 네트워크를 혼인관계로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네트워크를 ``링크(link)``시키는 접점을 ``노드(node)``라고 한다. 사위로부터 이어지는 ``女派``의 계보나 처가의 계보인 ``外譜``를 서로 잇는 연결점, 즉 족보에서 네트워크 사이를 링크하는 노드는 夫婦이다. 이전의 족보는 딸과 그의 남편이 연결점의 역할을 했으며, 1600년경부터 그것에 더해 아들과 며느리가 연결점으로 등장했다. 족보편찬의 그러한 원리는 17세기 이후의 족보편찬에도 지속적으로 적용되었다. 부계남성의 계보로 단일화되는 경향이 있는 17세기 이후의 일반적인 족보에는 각부계남성들의 배우자측, 즉 妻父의 기록이 네트워크의 연결점으로 기능했다. The genealogy of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derived from the mobility of a caste system, was compiled in order to unite the social group that had the same status according to status exclusionism. However, on the other hand, the compilation of the genealogy was also derived from the openness of their network, which caused lineage inclusion that continuously spread and replaced existing networks. In other words, the genealogy was compiled by two different principles, the selective and hierarchical collectivization`s exclusion and the infinitely expanding network`s openness through marriage. Therefore, the pedigree` form and the items recorded not only had the effect of reinforcing the paternal descent group. The genealogies which were compiled around 1600 show the continuity and change in the same time, compared to the genealogy before and after that. In particular, among the compilation of ancestors in the Chinyang Hassi Genealogy (Mallyo edition) ``晉陽河氏世譜(萬曆本)``, the lineage started from paternal males was called Japa ``子派``, the lineage started from the son-in-law of paternal females was called Yopa ``女派``, and the spouse of the paternal males are called Oebo ``外譜``. The genealogies before this which includes both son and daughter`s lineage are called Janyobo ``子女譜``. This genealogy fundamentally not only maintains the form of previous Janyobo ``子女譜``, but also sets up several networks like Japa ``子派``, Yopa ``女派``, and even includes the marrige network of lineal ancestor`s wife, and link these networks with marriage. The point that links the different networks is called a node. Like the node link the Yopa ``女派``lineage which started from the son-in-law and the Oebo ``外譜``lineage of the wife, the node link the network in the genealogy is the couple. In the previous geneology, daughter and her husband works as node, and from 1600 son and his wife became the node too. The link through marriage makes the social network`s openness spread, even after the compilation of the genealogy, the lineages are included through Ch`urok ``追錄`` or Pyolbo ``別譜``. And the principle of genealogy is continuously applied after the 17th century. The genealogy which has an unification trend of paternal line after the 17th century, the record of paternal males` wife`s side functions as a node of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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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조선후기 실학자의 현실 인식과 사회경제개혁론; 정약용의 재정개혁론 -지방재정에 대한 현실인식을 중심으로-

        손병규 ( Byung Giu Son ) 한국실학학회 2014 한국실학연구 Vol.0 No.27

        茶山 丁若鏞의 재정개혁론을 지방재정에 대한 현실인식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 정약용의 『經世遺表』에서 제시된 井田法은 王土思想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토지징수의 원리를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 『牧民心書』에는 그러한 재정 원리가 재정징수의 현장에서 실현될 수 있는 재정운영 원칙들이 제시되어 있다. 정약용은 징수와 상납, 재원의 관리, 자체경비의 충당이라는 지방의 재정업무가 재정의 중앙집권화 과정에 대응하여 수행될 것을 제안한다. 또한 그와 동시에 지방의 독자적인 재정업무 수행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조선왕조의 재정이 정규의 재정부분에서 집권적으로 파악되고 비정규의 재정부분에서 자율성을 인정하는 ‘이원적 체제’에 의거하여 운영되고 있음을 간파한 때문이다. 19세기 초에 정약용이 제시한 재정개혁론은 왕토사상에 기초한 국초의 재정이념에 담긴 혁신성을 재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18세기 이후 재정의 중앙집권화가 실현되는 역사적 경험에 의거하며, 조선왕조 재정의 특징인 ‘節用’의 절약적 재정이 이원적 재정체제 위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현실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This paper examine the theory on financial reform fo Jeong Yak-yong from the point of view of reality recognition of local government finance. He presented the idea of Well-field system in the Gyeongseyupyo(經世遺表). This is based on the principle of centralized land collection. The financial principles, the Mokminsimseo(牧民心書) presents the method of operation so that it could be implemented in the field of taxation. He suggested that it is run fiscal management of the local government- such as tax collection and payment, management of financial resources, voluntary appropriation of expenses-so as to correspond to the process of centralization of finance. Also he presented a method of self-regulating fiscal management of local government. Because he had penetrated about the dual system of finance of the Joseon Dynasty. This dual system means centralized in the official sector and autonomous in the informal sector. Fiscal reform theory, he claimed in the 19th century, was one that revived the innovation embedded in the financial ideology of founders of the Dynasty. Since the 18th century, fiscal centraliztion was realized in the Joseon Dynasty. This is because he believed fiscal saving, which is a feature of the financial system of the Joseon Dynasty, could be realized within the dual system of fin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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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논문(批評論文) : 조선왕조 재정과 시장의 관계 재론;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 경제체제론의 접근』(이헌창 편, 2010)에 대한 비평

        손병규 ( Byung Giu Son ) 경제사학회 2012 經濟史學 Vol.52 No.-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연구 성과물인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 경제체제론의 접근』은 조선왕조의 재정시스템을 군주제라는 특성에 기반을 둔 국가재분배의 경제체제로 이해한다. ``국가재분배``란 국가 단위로 재원이 총괄적으로 파악되고, 중앙정부의 인지 하에 일괄적으로 징수·축적되며, 공공업무의 수행이나 농업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기관으로부터 민에 이르기까지 재원이 ``재분배``되는 이념에 근거한 경제활동이다. 전제국가에서 재원의 재분배를 목적으로 하는 정부의 경제활동, 즉 ``재정``과 그리고 소득재분배의 기능을 갖는 ``시장``은 경제를 통합하는 2대 분배기구이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그 양대 분배기구의 상호관계를 중앙재정과 서울시장에서 밝힌 것이다. 이 일련의 연구가 가지는 연구사적 의의는 조선왕조 경제체제를 단지 세계사 발전단계의 일반론에 대입시켜서 이해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 연구들은 조선왕조 경제체제의 자체적인 운영원리를 발견하고 그 역사적 변화를 추적하였다. 그럼으로써 근현대사회의 경제체제와 관련된 특성을 제안하기도 한다. 조선왕조의 재정시스템은 정규의 재정부분을 중앙집권화하면서도 개별 분산적인 비정규의 재정부분과 役制의 운영이 병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연구들은 그러한 특성을 각 재정부문, 그리고 그 시장과의 관계에서 분석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중앙집권화되어 공식화한 중앙재정에 편중되고, 비정규의 재정부분과 오래된 재정운영 방식의 병존상황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특성을 밝히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시장경제통합으로 전환``된다는 근대 이행의 구조적 파악으로 단순화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 경제체제를 생각할 때, 역제를 포함하여 비정규적 재원부분의 자율적이고 융통성 있는 운영이 집권적 재정운영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점, 그렇지만 국가가 시장의 물류를 지속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그러한 경제체제를 유지하였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State Finance and the Market in Late Choson Korea: An Economic Systems Theory Approach", studied by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tries to understand the state finance system of Choson Dynasty as a monarchy`s state redistribution-centered economic system. ``State redistribution" is an economic activity that all the financial sources are comprehensively inspected, unitarily collected, and redistributed by the state for guaranteeing the implementation of public affairs and agricultural reproduction. In this mechanism, ``finance`` and ``market`` are the two major institutions of redistribution. This book ultimately aims at analyzing a relationship between these two institutions of redistribution through in-depth studies of central finance and Seoul Market. This book`s contribution to the literature goes beyond applying the lens of modern capitalism or the conventional way of understanding the economic system of Choson Dynasty. The studies included in this book focus on finding some unique features of the Choson Dynasty`s economic system and meticulously tracking its historical transformation. They find that this economic system has a dualistic character of centralizing official state finance and decentralizing unofficial state finance and labor services. Each chapter analyzes such a critical feature in terms of each sector of state finance and their respective relations with its market. These studies, however, excessively focus on the centralization of official state finance and moreover, show some markedly negative understanding of the co-existence of the official and the unofficial state finance systems. Even though it tries to show the primary features of the state finance system of Choson Dynasty, it also oversimplifies them as another case of modern capitalistic transition in the end. When analyzing the economic system of Choson Dynasty, the authors should notice that first, the autonomous and flexible management of unofficial finance sectors ironically helps the centralized finance management; and second, the state controlled market as a part of state finance system to maintain such a subtle mech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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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비총제(比摠制) 재정의 비교사적 검토

        손병규(Son, Byung-giu) 한국역사연구회 2011 역사와 현실 Vol.- No.81

        The “Bu'yeok Shilchong” (The Complete Numbers on Compulsory Labor), a book from the end of the 18th century recorded the formal financial resources which were controlled by the central government of the Joseon dynasty. The aim of this book was to establish a centralized financial system by checking the various state agencies' competitive financial security activities and by protecting the financial operations at the level of counties and prefectures. Next to this monetary tax system, many other kinds of taxes such as those paid by rice or cotton were still being levied by various state agencies. In addition, the public expenditure for local governments remained relatively small compared to those of the central government and were never extensive. In contrast, according to the local financial budget report, which was included in the "Bu'yeok Jeonseo" (Complete Book on Compulsory Labor), shows that during the Ming and Qing dynasties taxes for the central government and the expenditure for the frontier military were unified in a land tax collection which was paid in silver. The detailed recording of the local expenses shows that a centralist control of financial operations was promoted with the Ministry of Revenue as its central financial agency. The implementation of a local financial policy based on a fixed-amount tax like the Regressive tax along with the land taxation and other various taxes paid by currency like the mobilization of labor force, can be seen as a more advanced stage of the financial centralization process. However, the characteristics of the autocratic financial system are that it continuously produced irregularities in its individual and dispersive financing. Therefore the Joseon dynasty pursued a tax collection system in which distribution was paid for by the central government, including the management of financial resources and estates, and the whole process of authorization to the local government offices was to minimize costs. This was a rational financial operation plan that shows that, in an underdeveloped market, the state controls the market in accordance with its own financial operational ne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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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9세기 지방재정운영에 있어 자율적 납세조직의 활동

        손병규(Son, Byung-Giu) 고려사학회 2016 한국사학보 Vol.- No.65

        朝鮮王朝의 재정은 일찍이 건국 시기부터 모든 재원이 왕권하에 일원적으로 집중되고 재분배되는 중앙집권적 운영체제를 이념으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후 장기에 걸쳐, 그리고 정규와 비정규의 이원적 재정부분이 병행하는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다. 18세기 중엽을 전후로 중앙정부는 징수 및 분배 재원의 ‘總額’을 설정하여 중앙재정에 대한 집권적 운영체계를 확립했다. 그것은 징수에서 분배에 이르는 재정과정의 많은 부분을 민간의 자율적인 납세조직 결성과 활동에 근거한 지방의 자율적 재정활동에 위임함으로써 가능했다. 19세기에는 지방재정 운영체계를 둘러싼 지방권력 내부의 알력과 중앙재정 운영의 경직성이 문제시되었다. 甲午改革이후 大韓帝國시기에는 재정운영의 완전한 중앙일원화가 시도되었으나 지방에서는 여전히 기왕의 운영방법이 견지되었다. The financial system of the Joseon Dynasty was based on the centralized administrational organization from the beginning of the dynasty. The power which concentrated on the king redistributed all the economic resources. This system had been developed in the manner of coexistence of regular and irregular financial part for a long time. About the 18th century, the central government had built up centralized financial system by setting the total amount of income and expenditure. That was possible because the central government delegated financial authority to private sector and local government. The local residents spontaneously formed organizations for tax payment in village level. And the tax collection of the local government grounded on these autonomous organization. However increasing rigidity of the coexistence system between central and local government made a problem after the 19th century. The financial system was powerfully centralized by the central government, the Korean Empire, after the Kabo Reformation. However the former financial operating system was still maintained in local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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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광무호적(光武戶籍)』의 “사(士)”와『민적(民籍)』의 “양반(兩班)” 기재

        손병규 ( Byung Giu Son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3 大東文化硏究 Vol.81 No.-

        "士"는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전형적인 신분체계 가운데 상층계급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국의 호적에는 개인에게 국가적 신분체계로 "職役"이 기재되었는데, 大韓帝國의 『光武戶籍』에 그것에 대신해서 "사"가 처음으로 상층계급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1910년 전후의 『民籍』에는 또다시 그것에 대신해서 "兩班" 등이 기재되었다. "양반"은 고려시대의 중앙관료를 귀족신분으로 규정하는 법제적 용어이며, 호적상에 그에 해당하는 자는 관직명이 기재되었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법제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단지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상층계급을 의미하여 "士族"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왕조 호적에 이들은 관직자와 과거합격자, "幼學" 등을 "직역"으로 기재했다, 그런데 18~19세기의 호적에 "양반"을 지향하는 자들이 이러한 "직역"들을 대대적으로 기재하게 되었다. 이들과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상층계급과의 사이에 괴리가 커져 갔던 것이다. 『광무호적』의 "사"는 이러한 괴리를 줄여서 신분체계를 현실화하고자 한 노력으로 여겨진다. "양반"으로 인식되어온 족속들 가운데에서도 대대로 장남으로 이어져온 자에게 "사"가 기재되는 경향이 있었다, 사회경제적으로 상층계급인 자를 호적상의 신분 기재에 일치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한 경향을 이어서 식민지 초기의 호적에 "양반"이 신분체계의 하나로 기재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기재한 자들이 반드시 사회경제적으로 상층계급은 아니었다. 주목되는 점은 유동적이고 현실성을 잃어가는 조선왕조의 신분체계가 대한제국과 식민지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호적에 지속적으로 파악되었다는 사실이다. 동아시아의 오래된 신분체계가 당시의 집권적 인민파악의 이념과 방법으로 활용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정책은 "양반 지향적" 움직임이 전 인민에게 확대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왕조의 신분체계가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 민간에서 양반문화가 대대적인 붐을 일으켰다. 이것도 양반 지향적 경향의 연장선에 있다고 여겨진다. "Sa(士)" referred to the upper class of typical status system in traditional East Asian society. In korea household register, everyone was given a state status called "Jigyeok(職役)". But in 『Kwangmuhojeok(光武戶籍)』of Taehanjieguk(大韓帝國; 1896~1910), "Sa" first became term referring to upper class. And in 『Minjeok(民籍)』around 1910, it was replaced by "Yangban(兩班)". "Yangban" was a legislative term to define central bureaucrat as aristocrat status in Koryo Dynasty who listed his official title in household register. In Joseon Dynasty, "Yangban" was not defined by law, but only meaned upper class by social perception which was called "Sajok(士族)". In Joseon`s household register, their "Jigyeok" appeared as official, successful examinee, "Yuhak(幼學)", etc. But in 18~19c, person who was aimed to become "Yangban" is listed as these "Jigyeok" on a large scale. The gap with upper class by social perception became bigger. The "Sa" in 『Kwangmuhojeok』can be regarded as an effort to reduce the gap and actualize the status system. The relatives who were regarded as "Yangban", especially the first so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tend to registered as "Sa". It means the person who is upper class socio-eco-nomically is also matched by status record in household register. So in early colonial period`s household register, "Yangban" was recorded as one status. But it does not mean the person recorded as "Yangban" is upper class socio-economically. We should notice that the status system which was mobile and deprived of reality in Joseon Dynasty continuously recorded in household register of Taehanjieguk and colonial period. It is can be understood that the old East Asian status system was applied as an idea and method of centralized way of controlling people. And this policy was also related to the tendency of "Yangban" orientation`s expension to all people. Whe the status system of dynasty disappeared, "Yangban" culture was booming extensively. This is also an extension of "Yangban" orien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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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적(戶籍)과 족보(族譜)의 자료적 특성과 연구방법 ― 17C~20C 초 단성지역(丹城地域) 배양동(培養洞) 합천리씨(陜川李氏)들을 추적하며

        손병규 ( Son Byung-giu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8 大東文化硏究 Vol.102 No.-

        戶籍은 정부의 행·재정적 필요에 따라 정기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할 당시의 거주 상황을 기재하고 있다. 族譜는 편찬 당시의 후손들이 특정 선조로부터 이어지는 부계혈연 및 혼인 관계의 신분적 정통성을 확인한 기록이다. 이 두 자료로터 17~20세기 초에 이르는 주민의 계보적 파악을 통해 ‘同姓村落’의 실상을 관찰하고자 한다. 동성촌락은 지역공동체와 혈연공동체의 서로 다른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호적과 족보의 자료적 특성을 대비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연구소재이다.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호적 작성으로 20세기 초의 촌락 위치와 垈地所有者 및 호주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으로부터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기 호적의 호구 등재 상황과 족보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면, 호구의 거주 이동, 부계 혈연 내부의 신분적인 배타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호적과 족보의 선택적 기재는 면리행정구획 내의 촌락과 주민들 가운데 주도적 세력이 어느 마을의 어떠한 성씨 사람들인지 짐작하게 한다. 처음으로 이주해온 선조로부터 여러 세대에 걸쳐 그 후손들이 살아온 世居地에는 동일 성씨의 부계친족들이 높은 비율로 거주하는 ‘동성촌락’이 형성된다. 그러나 17~20세기 초를 통하여 그들 가운데 많은 가계들이 매우 빈번하게 그곳을 떠나거나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거지인 동성촌락으로부터 거주를 이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지역공동체 내부의 부계친족 사이의 신분적 갈등과 혼인이 주된 원인이다. 그와 동시에 선택적인 부계친족 사이의 유대관계를 긴밀히 하려는 노력이 혈연조직이나 족보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Joseon government had surveyed residence of each household and recorded on household registers regularly by governmental needs. Each family had compiled their own genealogies indicating paternal and maternal descent to secure blood legitimacy. This study observe the true nature of the "same family-name villages" from the 17th to the early 20th centuries by reconstituting pedigree of residents in the Tanseong prefecture. Same family name villages were communities which based on regional relation and blood relation, and were excellent subject to prove data features of household registers and genealogies. The Land Survey Project and household registers under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in 1910s make us to identify landowners, households, and location of villages. By tracking family lines and households retrospectively on the household registers and genealogies, I find migration patterns of households and social exclusiveness within patrilineal kin members. Selective recording of households on registers and genealogies let us to suppose which village and family was the dominant group among residents of the Tanseong prefecture. A village which the progenitor moved in and descendants resided by generations, transformed as "same family-name village" relatively easy. However, family members moved in and out of their residence frequently after the 17th century. The main reasons of frequent migration from the "same family-name village" were marriage relationship and disharmony between family me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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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노비호(奴婢戶)의 호적등재 ― 조선왕조 재정의 관점에서

        孫炳圭 ( Son Byung-giu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20 大東文化硏究 Vol.110 No.-

        奴婢가 호를 대표하는 奴婢戶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시기의 호적대장에 가장 많이 등재되었다. 본고는 17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호적등재 원칙의 관점에서 노비호의 형성과정을 추적하며, 17세기 말에 노비호가 대거 등재되는 이유에 대해서 추론한다. 호를 단위로 하는 ‘稅役’의 부담을 책임지는 자로서, 호의 대표자는 ‘職役’을 가진‘良人’으로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17세기 초까지 호적에 사노비들로 구성된 호가 없지 않으나, 모두 ‘노비소유주+노비’의 형태로 등재되었다. 노비소유주가 그 호의 주체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7세기 말의 호적대장에는 호의 대표자로서 사노비가 소유주의 앞에 기재되고 소유주가 기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그러한 호는 전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다. 이러한 호의 사노비 소유주는 한 지역의 호적에 자신의 호와 함께 그의 노비들로 구성되는 복수의 호를 등재하고 있다. 17세기 말의 호적장부에는 가능한 한 많은 호구를 파악하고자 하는 정책에 힘입어 등재되는 호구수가 증가하였다. 지역사회에서는 그곳에 할당된 호구의 총수에 준하여호를 단위로 하는 세역 부담이 분배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세역 부담을 사회경제적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노비호의 등재에 노비소유주가 깊이 관여한 것으로 추측된다. 1720년경의 토지대장에도 필지마다 토지소유자로서 노비소유주와 노비의 이름이 함께 기재되거나 노비명만이 기재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조선왕조 재정의 관점에서 17세기의 노비호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The household registers compiled from the late 17th to early 18th centuries registered a large number of nobi household heads. This study traces the process of composing the household with nobi heads until the late 17th century. Also, this study suggests the reason why the household registers needed to record households of nobi heads. As the person in charge of national taxation and corvée for the household, the household head used to be chosen among free-born in principle, having an occupational record. The households of nobi were registered in the form of 'owner + nobi' in household registers until the early 17th century. This form tells us that the nobi owner was the real head of the household, even it had a nobi head. However, the household registers of the late 17th century used to record the nobi instead of the owner of the nobi, and some households did not report the owner. As a result, we can find not only the household of the owners of nobi but also several households of his nobi in a register.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and population in the registers in the late 17th century increased due to the financial policy of the government which intended to find more households as possible. The total amount of national taxation and corvée, which was imposed on a county, was allocated to sub-counties by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This study supposes that composing and registering households with nobi heads were invented by nobi owners as a means of distributing national taxation in considering the socio-economic capacity of each household in a sub-county. A similar feature was reported from the land register compiled around 1720 which recorded the information of the landowner in the form of 'owner + nobi' or nobi alone to represent the real landowner. From the perspective of national finance, these recording patterns were deeply related to the process and reason for increasing households with nobi heads in the household register in the 17th century.

      • KCI등재

        조선후기 거주이동과 혈연적 연대의 관계 -단성지역 합천이씨 가계들의 호적과 족보 분석을 통해-

        손병규(Son, Byung-giu) 고려사학회 2020 한국사학보 Vol.- No.79

        3년마다 작성되는 호적대장의 ‘행정리’는 가족이 실제로 거주하는 복수의 ‘마을’로 편성된다. 호구 등록이 가족의 형성과 거주이동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행정리를 넘어서는 호구 이동을 연속된 장기적 관찰로 추적하여 현실적인 거주와 이동을 추정할 수는 있다. 조선후기 단성지역의 합천이씨 가족들은 여러 행정리에 할거하고 있었다. 행정리마다 등재된 호구는 대체로 신분이나 가계를 달리하며, 행정리에 지속적으로 거주하거나 행정리를 넘어서서 이동하는 경향에도 차이가 있었다. 18~19세기를 통해 동일 행정리에 지속적으로 등재되는 경우는 점차 감소하는 반면, 호의 대표자가 장남과 계자인 호의 비율은 높아진다. 거주이동이 심화되고 계자율이 높아지는 경향을 반영한다. 계자와 장남이 출신지 행정리에 지속적으로 등재되는 비율은 양반과 향리의 특정가계에서만 두드러진다. 단성현의 합천이씨 가족들은 18세기를 통해 세거지의 형성을 강하게 열망해왔지만, 타지역으로의 이동도 빈번했다. 19세기에는 양반들도 몇몇 직계가족을 제외하고 한 지역에서 세대를 이어 장기적으로 거주하기는 어려웠다. The administrative village in the household registers published every three years in Joseon Korea consisted of several actual villages. It is hard to conclude that the household register shows the formation and migration of the family as it was. However, it is possible to presume the actual movement of the family by observing the living and moving on the registers in the long term. In the seventeenth to the nineteenth century, the Hapcheon Lee clan members of Tanseong prefecture were dwelling in several administrative villages. The trend of moving patterns across the border of the administrative villages of the Lee clan members those who are in various social status differed by lineages and their status. While the proportion of the households those who kept staying in the same administrative village was decreased, the proportion of as the household head who was the first son or adopted son in the family increased for the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y. It means that they migrated frequently and adopted more in that period. However, the eldest sons or adopted sons of some elite lineages tended to not move across the administrative village border. Even though the Lee clan was known about had been tried to build their “same family name villages” in the prefecture in the eighteenth century, the registers also show they used to move across the villages. The nineteenth century onwards, staying at a village in generations was difficult to even the elite lineages except for a few dominant famil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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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정문란'과 '지방 재정 위기'에 대한 재인식

        손병규(Son, Byung-giu) 역사비평사 2012 역사비평 Vol.- No.101

        In order to actualize centralistic financial ideology, Joseon Dynasty has experienced a centralization process. In 18th century, It tried to limit the individual and dispersive finances securing activities of state agency by setting up total tax in each region by tax items. In the other side, it also guaranteed local government"s independent fiscal management. The perception of three policies"s disorder, which are related to land, military and relief work from late 18th century to 19th century, just shows a concern about arbitrary behavior of local government in fiscal management. But the finance in 19th century is not only regarded as crisis as centralistic financial part and local autonomous financial part operated together and both of them are in a complementary relationship. In one side, The Gabo Reform of 1894 wanted to implement a financial unification ideology in reality under the absolute authority of the king. At the same time, the dualistic financial system in Joseon Dynasty made itself face the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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