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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청년회 지방조직의 설립과 운영

        성주현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9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60 No.-

        천도교청년회 지방조직의 설립과 운영 성주현 3ㆍ1운동 이후 천도교단의 세대교체와 신세계의 사조, 그리고 식민통치의 변화 등으로 인한 대내외적 요인에 의해 창립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는 중앙조직을 강화에 이어 지방조직(지부)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삼등지부를 비롯하여 10여 개의 지부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는 창립된 지 불과 8개월만에 천도교청년회로 조직체를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의 지방조직은 천도교청년회 지방조직으로 그대로 전환되었다. 천도교청년회는 1920년대 초 사회주의사상의 급격한 확산과 각지 청년단체의 조직에 따라 적극적으로 지방조직인 지회를 설립하였다. 우선 각 지방의 천도교회를 모태로 하여 청년들을 규합하여 지회를 조직하였는데, 전국적으로 120여 개에 달하였다. 이는 단일조직으로 가장 규모가 큰 조직이었다. 천도교청년회 지회의 조직은 중앙조직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즉 포덕부, 강연부, 편술부, 음악부, 체육부 등 5개 부서로 구성되었다. 이중 포덕부와 강연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들 기본 조직 외에도 지회는 지역 상황에 따라 교리연구회, 여자청년회, 연합친목회 등을 조직하여 천도교의 교세를 확장하는 한편 지회도 확장해 나갔다. 지회설립의 주요인물은 대부분 천도교 신앙을 하는 繼代敎人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교사, 신문기자 등 지역유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단체 또는 사회단체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천도교청년회 지회의 재정 수입은 회원의 의무금과 찬조금으로 충당하였으며, 지출은 중앙조직에 상납, 도서구입비 등 지회 운영에 사용하였다. 또한 중앙조직은 지회를 효율적으로 관리 통제하기 위해 의무금 상납의 원칙을 철저히 지킬 것을 결의하는 등 관계형성을 일원화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도교청년회의 조직체계는 중앙본부-지회라는 중앙집권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천도교청년회의 지방조직은 1920년대 중반 새롭게 조직되는 천도교청년당의 지방조직으로 그대로 이어졌으며, 청년당의 추구하였던 민족운동중심기관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Establishment and Management of the Branches of Cheondo-kyo Young Men’s Association Sung, Ju-hyeon The Cheondo-kyo youth doctrine lecture department was established with Generation shift, change of the New World trend of thought and colonial occupation. The Cheondo-kyo youth doctrine lecture department after reinforcement of center organization was active even in fatty tissue. Including the third branch consequently and about 10 the mind branch was founded. The Cheondo-kyo youth doctrine lecture department is established but after 8 months like that was only converted with Cheondo-kyo young man’s association fatty tissue. The Cheondo-kyo young man’s association 1920’s according to the diffusion which beginning socialistic ideology is sudden and organization of the various places youth organization founded meeting is a fatty tissue actively. Cheondo-kyo each region first of all and meeting in the mother’s womb rallied organized the youths and meeting. About 120 accomplished to with national. This was the organization where the size is biggest with single unit organization. The Cheondo-kyo young man’s association meeting organization accommodated a center organization like that. Namely Poduk(Virtue boat width) department, lecture department, Pyun-sul(editing) department and music department, was composed with physical education department etc. 5 stations. With Poduk department lecture addition most actively among these, was active. Meeting according to area situation the doctrine society for the study and the female young man’s association, organizes union social meeting etc. even on these basic organized outside and meeting to expand meantime expands year-old of Cheondo-kyo. The central figure water of founding was the believer who does a most Cheondo-kyo religious belief. And these people did teacher, is active with reporter etc. area maintenance. The youth organization which with like this relationship is active from the area or the social club came and the close relationship maintained. Meantime the Cheondo-kyo young man’s association meeting financial income supplied at the obligatory gold and donation of the member, the expenses in center organization used in the upper lead and the books purchase expenses etc. meeting operation. Also the center organization in order management to control meeting efficiently under unifying should have boiled the etc. relationship formation which resolves the fact that will keep the principle of the lead at the obligatory gold thoroughly. Not only the organized system of the Cheondo-kyo young man’s association was having the centralization element which is a center headquarters and meeting. Was joined together like that with the Cheondo-kyo youth party decision fatty tissue where the fatty tissue of the Cheondo-kyo young man’s key word : Cheondo-kyo, Cheondo-kyo young man’s associatio, Cheondo-kyo of Association, Jung Do Jun, Lee Don Wha, Bang Jung Whan

      • KCI등재후보

        동학·천도교와 손병희의 이상과 현실

        성주현 경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9 시민인문학 Vol.37 No.-

        This paper examines the ideals and the realities of Sohn Byung-hee's pursuit of dynamics after he entered Donghak. The task of Korea's sluggishness was to overcome feudal order and the invasion of the Western powers of Seosedong. The national task of the Japanese occupation was independence. Sohn Byung-hee tried to realize his ideal as the chief officer of Donghak and Cheondogyo through Donghak. Although Son Byung-hee had no desire that he would come to Korea soon after he came to Donghak, he was fascinated by Donghak's ideology of equality and nationalistic consciousness. Since then, he has been transformed into a thoroughly religious person. And it can be said that he was in the rank of leader of Donghak. As a result, I played a role as a key leader of the Donghak denomination. The first was the participation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Son Byung-hee, through the participation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chieved the desired achievement of the so-called inter-Korean unity, but above all, punishing innocent people, taking property, robbing women and women, And to participate in the project. This was one of the processes to realize the “earthly heaven” that Donghak pursues in reality. The second was the modernization movement in 1904. I tried to realize the modernization that I experienced through the life of Japanese refugees through Joseon Dynasty. However, Son Byung-hee' However, after returning home, it has important significance in that it has established the Chondogyo Central Division and transformed it into a modern religion. The third was the independence of colonial Jose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on Byung-hee, who had experience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the modern modernization movement, prepared the 3·1 movement more carefully. However, after the initial independence petition was converted into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it was actively promoted. Encouraging the participation of not only himself but also all of the Chondogyo members. It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forming Christian and Buddhist allied fronts. In particular, even when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as in danger of being discovered, it was resolved wisely so that the entire nation could participate in the aging movement. In order to realize his ideals, Son Byung-hee participated directly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the anti-Semitic Revolution, modernization of the modernization movement, and the 3.1 Movement, which was the ruler of the whole nation. He aimed at a modern nation-state, but he could not achieve his goal in reality. However, the Chondogyo that he guided might be said to have realized the ideal by establishing it as a democratic system. In this regard, Son Byung-hee has transformed the Donghak of anti-feudalism and anti-imperialism into a Chondogyo by accepting modern civilization. The most important factor that transformed from Donghak to Chondogyo was the modernity of the West, which can be regarded as a typical metamorphosis. 본고는 손병희가 동학에 입도한 이후, 그가 추구하고자 하였던 이상과 현실의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한말 기울어져가는 조선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봉건질서의 극복과 서세동점의 서구열강의 침략이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민족적 과제는 독립이었다. 손병희는 이 과정에서 동학을 통한, 동학·천도교의 최고책임자로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손병희는 동학에 입도할 당시 삼재팔난이 빨리 와서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동학이 가지고 있는 평등사상과 민족주의 의식에 매료되어 동학에 입도하였다. 이후 철저한 종교인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지도자 반열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동학교단의 핵심 지도자로 그 역할을 다 하였다. 첫 번째는 동학농민혁명의 참여였다. 손병희는 동학농민혁명의 참여를 통해이른바 남북접의 연합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무고한백성을 벌하고,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빼앗고 있었으므로 정부를 넘어뜨리고새로운 정부를 세워서 악정을 고칠 목적”으로 참여하였다고 밝혔다. 이는 동학이추구하는 ‘지상천국’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한 과정의 하나였다. 두 번째는 1904 년 갑진 근대화운동이었다. 일본 망명생활을 통해 체험한 근대화를 동학교단을통해 조선에서도 실현해 보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손병희의 최측근이라고 불리는 이용구의 배신으로 이상으로 남았다. 그렇지만 귀국한 후 천도교중앙총부를설치하고 근대적 종교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세 번째는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독립이었다. 동학농민혁명과 갑진 근대화운동을 경험한 손병희는 보다 신중하게 3·1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렇지만 초기의 독립청원성주현_동학·천도교와 손병희의 이상과 현실 137 을 독립선언으로 전환한 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천도교인 전체가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또한 기독교, 불교와 연합전선을 형성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독립선언서가 발각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도지혜롭게 해결하여 전 민족이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손병희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반봉건 반외세의 동학농민혁명, 근대화의 갑진개화운동, 전 민족의 거사였던 3.1운동을 직접 참여하고, 지도자로 역할을 다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근대적 국민국가를 목표로 하였지만 현실적으로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지도하였던 천도교는 민주제로서의 확립을 통해 그 이상을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손병희는 반봉건, 반외세의 동학을 근대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천도교로 탈바꿈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동학에서 천도교로 탈바꿈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서구의 근대성이었으며, 이는 메타모포시스의 전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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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 이종훈의 생애와 민족운동

        성주현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9

        정암 이종훈의 생애와 민족운동 성주현 정암 이종훈은 서세동점의 시기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관계로 지출하고자 하였으나 부패하고 혼란한 정치현실을 보고 모순된 구제도를 혁신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동학에 입도하여 보은 척왜양창의운동을 비롯하여 반봉건 반침략의 기치를 내세운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다. 이후 천도교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들어 만세운동을 준비하자 여기에 적극 동참하고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하였다. 그 대가로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석방 후에는 천도교와 형평사, 그리고 만주지역에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 정의부가 연합전선으로 조직한 고려혁명당에 참여하여 민족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일생을 천도교와 민족운동에 매진한 이종훈의 생애와 민족운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종훈은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면서 유교적 교양을 쌓았으나 오히려 상업에 종사할 정도로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동학에 입도한 후 사회변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종훈은 한때 관계로 진출을 시도하였지만 당시 부패한 사회를 체험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변혁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마침 동학교단이 지하신앙운동에서 한 단계 발전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교조신원운동은 동학교단이 사회변혁운동으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셋째, 이종훈은 일제강점에 저항하여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일제강점 이후 천도교에 조직된 비밀결사인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와 천도구국단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민중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민중운동의 결과로 3ㆍ1운동, 고려혁명위원회와 천도교최고비상혁명위원회에 참여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이종훈은 천도교 혁신에 앞장섰다. 그는 천도교인으로써 3ㆍ1운동 이후 전개된 교단의 혁신운동에 참여하였다. 보혁 갈등에서 혁신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이 천도교연합회로 별립하였지만 이종훈은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평생 동지였던 홍병기, 그리고 생사를 같이 하였던 손병희와의 관계가 천도교에 남게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Life and Racial Movement of Jeong-am Jonghoon Lee Sung, Ju-hyeon Jeong-am Jonghoon Lee was born in Gwangju, Gyeonggido during the period of forces in the west move to the east more. He wanted to enter government early, but as he saw corrupted and chaotic political reality, he attempted to innovate conflicting ancient regime. And he participated in movement against the West and Japan in Boeun area as well as Donghak revolution, which put up the banner of anti-feudalism and anti-invasion. Later he became a key member of Cheondogyo. He took part in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and signed as one of 33 people of racial representatives. For doing so, he spent 3 years in Seodaemoon prison. After being released, he joined Goryeo revolutionary party, which was organized by independence group Jeonguibu that was active in Manju area, as united front and he continued to take part in the racial movement. Life and racial movement of Jonghoon Lee, who dedicated his life to Cheondogyo and racial movement, can be summarized as the following. First, Jonghoon Lee was born in Silchon-myeon, Gwangju-gun, Gyeonggi-do and learned Confucianism as he studied Chinese classics. But he was very open-minded so that he worked in commerce. Second, after entering Donghak, he was very active in social change activity. Jonghoon Lee once attempted to enter government, but he became interested in innovative thinking to overcome corrupted society. At that time, Remission Movement of Choi Jewoo, which was upgraded from underground faith movement, was developed by Donghak religious body. This remission movement of Choi Jewoo was a crucial opportunity to transform Donghak religious body to social transformation movement. Third, Jonghoon Lee faught back to Japanese occupation and actively participated in racial movement. As he actively participated in headquarter of movement for national culture preservation, which was a secret society organized by Cheondogyo after Japanese occupation, and organization of the Cheondogyo and he also led popular movements. As a result of popular movements, he also participated in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 Goryeo revolutionary committee and Cheondogyo emergency supreme committee for revolution. Fourth, Jonghoon Lee led innovation of Cheondogyo. As a member of Cheondogyo, he participated in innovative movement of religious body. People who took part in innovative movement in conservative-progressive conflict separated as Cheondogyo alliance, but Jonghoon Lee did not join them. His choice is interpreted as that his relationship with Byunghee Son and Byunggi Hong, who were very close friends, has left in Cheondog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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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원심창의 민족운동과 통일운동

        성주현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65 No.-

        해방 후 원심창의 민족운동과 통일운동 성주현 해방 후 원심창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민족주의 세력을 집결하여 건동과 민단의 결성 참여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운동이라 할 수 있다. 원심창은 해방 직후에는 녹아도형무소에서 옥중 생활하던 중 10월 10일 석방되었다. 이후 고국으로 귀환한 원심창은 국내에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하였고, 1946년 2월 초 일본으로 다시 건너와 식민지기 일본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박열, 육삼정의거의 동지였던 이강훈과 함께 신조선건설동맹 결성을 주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재일한인의 생활안정과 권익옹호를 위해 거류민단 창설에도 적극 참여하여 초대 사무총장을 비롯하여 민단 부단장 및 단장, 고문 등으로 활동하였다. 원심창이 신조선건설동맹과 거류민단의 주요인물로 활동한 것은 아나키스트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과 민족주의 세력의 집결이라는 당위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편 원심창은 한국전쟁의 참화와 휴전으로 인한 조국의 분단, 그리고 국내외 정세의 전환으로 통일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통일운동 기관으로 남북통일촉진협의회를 결성하였으며 중앙대표위원과 사무국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통협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한국정부와 민단의 견제, 그리고 조련의 방해로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만 했다. 통협 결성 초기에 함께 활동하였던 인사들이 사회민주동맹을 결성, 그의 곁을 떠났지만 원심창은 끝까지 통협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남북통일촉진협의회협의 통일운동은 원심창의 통일운동의 기본정신과 사상적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원심창의 통일운동의 이론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기본정신인 주체성의 확립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상적 원칙이었다. 주체성 확립은 민족자결의 통일에 대한 자각과 각오였으며, 사상적 원칙은 민족자결, 평화, 민주주의, 국제협조로 집약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과 원칙에 따라 원심창은 제3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재일한인사회에서 남북통일촉진협의회을 결성, 마지막 삶을 통일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심창은 남북통일촉진협의회을 해외에서 최초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결성된 통일운동단체라고 평가할 수 있다. Shim-chang Won of National movement and The Unification movement after the independence Sung, Ju-hyeon The activities of Shim-chang Won after the independence can be summarized into two parts. First, he assembled the democratic forces and participated in the organization Gun-dong and civil association and another is the unification movement through the left-right coalition. Shim-chang Won was released from Nokahdo Prison immediately after the independence on October 10th. Upon returning to his mother country, he joined the anti-trusteeship movement in Korea and in early February of 1946, he returned to Japan and led the Alliance for the Construction of New Joseon along with Kang-hoon Lee who was the comrade of Yuksam Eu Guh Jeong, Yeol Park with whom he has worked with in colonial Japan. He was also actively involv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federation of Korean residents for the settlements and advocacy for the rights of Koreans residing in Japan, presiding as the early secretary general as well as the civil association assistant director, director and the advisor. Shim-chang Won’s activities as the main person for the Alliance for the Construction of New Joseon and resident Koreans’ federation can be attributed to his resentment towards communism and the cause for the assembling of nationalistic forces as an anarchist. Furthermore, Shim-chang Won led the unification movements for turnabouts of the division of his motherland due to the horrors and the armistice of Korean War and the affairs domestic and overseas. He has organized South and North Korean Unification Promotion Council as an agency for the unification movement, holding the posts as the central representative and executive director and essentially leading the federation. However, due to the interference from the harassment and the restraints from Korean government and civil association, South and North Korean Unification Promotion Council was forced to put a stop to its activities within a year. Early members from the founding years of the federation have founded the social democratic alliance and left his side but Shim-chang insisted on keeping the federation till the end. The unification movements under South and North Korean Unification Promotion Council were possible because of the fundamentals of Shim-chang Won’s unification movements and ideological doctrines. The theoretical basis for his unification movements can be classified into two parts. First, it was establishing the national identity as the fundamentals and another is establishing ideological doctrines. Establishing the national identity was about the awakening and a sense of determination for the unification of self-determination of people and ideological doctrines can be summarized as the self-determination of people, peace, democracy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 Based on such spirit and doctrines, he has founded South and North Korean Unification Promotion Council in the community of Korean residents living in Japan which was regarded as the third region, investing his later years into the unification movement. In this sense, Shim-Chang Won’s South and North Korean Unification Promotion Council could be seen as the organization for unification movements, which was first to be organized overseas and assembled voluntar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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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이후 한글신문의 구조적 변화와 기자들의 동향 -『동아일보』와『조선일보』를 중심으로 -

        성주현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9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58 No.-

        1930년대 이후 ‘한글신문’의 구조적 변화와 기자들의 동향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성주현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언론을 식민통치를 위한 선전수단으로 삼기 위해 총독부 기관지로 매일신보만 남겨두고 모든 언론을 폐간시켰다. 그러나 3ㆍ1운동 이후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제한된 표현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민족감정을 파악하는데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그 결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고, 이후 1940년 8월 동시에 폐간될 때까지 나름대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3ㆍ1운동 이후 일제의 언론정책의 흐름은 대체적으로 대륙침략정책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3ㆍ1운동 이후 신문발행을 허가한 이후 1936년 이전까지는 치안유지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언론통제를 강화하면서 국가총동원법과 군기보호법 등을 통해 동원체제에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지배체제 협력의 테두리에 편입되었고, 결국 친일의 대열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제는 1931년 6월 18일 만주를 침략하면서 언론정책도 1920년대보다 강화되고 전시언론 통제체제로 구축되었다. 이에 따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신문을 포함한 언론은 비상시국 즉 전시체제에 필요한 홍보 내지 선전도구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민족지를 대변해왔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식민정책을 비판하기보다는 이를 홍보 선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논조에서 차이가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조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언론통제안’을 계획하고 이를 실제 적용함에 따라 양 신문은 폐간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양 신문의 폐간에 대해 ‘자진’ 또는 ‘강제’이라는 이분법으로 이를 적용하고자 하였으나 분명한 것은 양신문의 폐간은 일제의 언론통제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폐간 이후 임원을 포함한 주요 언론인의 경우 지배체제에 적지 않게 협력하였다. 그밖에 양 신문의 폐간 이후 적지 않은 기자들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전직하였다. 다만 이들의 전직이 나름대로 생활고라는 사정이 없지 않겠지만 아쉬운 부분이 남기고 있다. A Structural Change of ‘Korean Language Newspaper’ and a Movement of Journalists After 1930s -Focused on DongA Ilbo and Chosun Ilbo- Sung, Ju-hyeon Japan ceased to publish all newspapers except only Maeil Shinbo as a journal of the Japanese government to use the newspaper as the method of making a pitch for a colonial rule after colonizing Korea. However, after 3.1 independence movement, Japan partially allowed freedom of speech limited as part of appeasement policy. There was no intention to use it for identifying feelings of the nation. As the result, DongA Ilbo and Chosun Ilbo were launched and they executed its role as mass media until they were discontinued in August 1940. After 3ㆍ1 independence movement, the press policy of Japan was generally similar to the expansive continental policy. After 3ㆍ1 independence movement, Japan permitted the publication of newspaper and then controlled the press under the Maintenance of the Public Order Act until 1936. Also, after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Japan strengthened the press control and put it into the mobilization system through the national mobilization law and the military discipline protection law. In this process, DongA Ilbo and Chosun Ilbo were moved into the cooperation of control system, and could not help getting involved in Japanophilism. When Japan invaded Manchuria on June 18, 1931, the press policy was strengthened more than 1920s and it was implemented as the press control system of wartime. Accordingly, when Sino-Japanese War occurred, the press including the newspaper was used as the method of giving publicity required for the system of wartime. In such situations, DongA Ilbo and Chosun Ilbo which spoke for the nation did not criticize the Japanese colonial policy, but promoted and propagated it. Also, the contents of DongA Ilbo and Chosun Ilbo were equal to the tone of Maeil Shinbo. In spite of such the tone of DongA Ilbo and Chosun Ilbo, Japan planned ‘the press control policy’ and actually applied it. So, both newspapers ceased publication. All the while, experts tried to apply a dichotomy between ‘volunteering’ and ‘forced’ for the discontinuance of both newspaper, but the clear thing is that the discontinuance of both newspaper were closely related to the press control policy of Japan. After ceasing the publication of DongA Ilbo and Chosun Ilbo, major journalists including executives of newspaper largely cooperated in the control system. In addition, many journalists were transferred to Maeil Shinbo as a journal of the Japanese government. Their change of employment deemed to be related to the rigor of life, but it was shameful.

      • KCI등재

        양양지역 신간회 조직과 활동

        성주현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2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73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창립되어 1931년 5월 해소될 때까지 대략 4년 동안 활동하였지만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으로서의 위상은 적지 않다. 1920년대 들어 수용되기 시작한 사회주의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민족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20년대는 자연스럽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경쟁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두 민족운동 세력은 연합전선을 형성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 두 민족운동 세력의 연합전선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신간회였다. 이에 양양지역에서도 양양지역 역시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이 민족연합전선 정신에 따라 1927년 11월 20일 신간회 양양지회를 조직하였다. 양양지역은 3ㆍ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해 저항하였다. 또한 관북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관계로 사회주의를 일찍 수용하였다. 이에 양양지역 청년운동은 사회주의계열이 주도하였고, 나아가 신간회 양양지회를 설립하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간회 양양지회의 임원진의 구조는 상층부는 지역명망가, 실무진은 사회주의계열이 담당하였다. 한편 신간회 양양지회는 조직 확대를 위해 분회를 설치하였다. 일반적으로 분회는 면단위로 조직되었다. 신간회 양양지회는 6개의 면이 있었으나 도천면과 양양면 2개면에서만 분회가 설치되었다. 이는 다른 지역보다 도천면과 양양면의 회원 수도 많았고 그만큼 활동도 활발하였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신간회 양양지회는 기본적으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신간회 양양지회가 지역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슈화되었던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The Singanhoe was established in 15 February, 1927 and dissolved in May, 1931 continued to exist for 4 years, and played the crucial role as the national movement in the period of Japanese imperialism. The socialism adopted in the beginning of 1920’s recognized as alterative of national movement and became one of the mainstays of national movement. In this progress, naturally in the 1920’s the parties of nationalism and socialism resisted against the colonial policy of Japanese imperialism competing with each other. And Both of these parties sometimes need to make the united front. In Yangyang, there were resistance against the colonial policy of Japanese imperialism, actively participating the 3ㆍ1 Movement. And because of nearest distance to the northeastern part of Korea, in Yangyang socialism was adopted early. Thus the youth movement in Yangyang was took lead by the party of socialism, and further socialism played the leading role to establish the branch of Shinganhoe in Yangyang. In the structure of the board members of Shinganhoe, the topsider were in charge of the political local exile, and working group was the party of socialism. The branch of Shinganhoe in Yangyang installed the affiliated societies to expend the organization. The affiliated societies were instsalled generally with a myeon as a unit. The branch of Shinganhoe in Yangyang included 6 myeons, but in only 2 myeons, Docheonmyeon and Yangyangmyeon, established the affiliated societies. This means that in Yangyangmyeon, there were more many members who worked on positive lines than other myeons. Moreover, the branch of Shinganhoe in Yanyang not only tried to maintain the organization essentially, but it actively participated in outside activities. This means that the branch of Shinganhoe in Yangyang concerned with the issues on a nationwide scale as well as local problems.

      • 1920년대 아산지역 민족운동과 천도교

        성주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2019 한국기독교문화연구 Vol.11 No.-

        본고는 1920년대 아산지역에서의 민족운동과 천도교, 그리고 연 계성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920년대 아산 지역 민족운동은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그나마 청년단체의 조직과 이를 통한 청년운동, 그리고 형평운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정책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되 었고, 불완전하지만 집회와 결사가 가능해졌다. 이를 계기로 각 지 역에서는 우후죽순처럼 청년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아산지역에서도 3・1운동 직후 청년회나 수양단 등 청년단체가 결성되었지만, 실제는 유명무실하였다. 이후 1923년에 이르러서 아주구락부, 아산청년 회, 실업청년회 등 청년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들 단체를 조직하 는데 참여한 인물은 지역의 언론인 내지 경제인 등 유지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들 청년단체의 대중운동은 그렇게 활발하지는 못하였 다. 다만 민립대학설립운동에는 군이나 면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 들도 대거 참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아산지역 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민족운동은 형평운동이었다. 형평운동 은 당시 차별받던 백정들의 인권옹호운동이었지만 식민지배체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아산지역에는 4개의 형평사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조직 유지와 생존권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대 아산지역 천도교는 충남의 여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 당진과 서산, 홍성 등지에서는 1910년대 천도교 조직 인 교구가 설립되었지만, 아산지역은 이보다 한참 후인 1926년에 이르러서야 교구가 설립되었다. 또한 천도교는 1920년대 중앙과 지방에서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문화운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민족운 동에 참여한 바 있다. 그렇지만 아산지역은 천도교 청년단체를 조 직하지 못하였다. 이는 그만큼 천도교가 뿌리내리지 못하였음을 알 려준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산지역에서 천도교가 사회적 기반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27년 구파 천도교의 전위단체인 천도교청년동맹은 당시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회 조직에도 참여하 기도 결정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산지역은 사회운동 세 력과 천도교 세력의 미약으로 신간회를 조직하지 못하였다. 이로 볼 때 1920년대 아산지역 민족운동과 천도교는 상관관계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아산지역 천도교 내지 천도교인은 1920년대 아산지역 민족운동에서는 충남의 여타 지역처럼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아산지역 천 도교 조직이 이를 수행할 만큼 역량을 가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national movements, Cheondogyo, and links in the Asan region in the 1920s. In the 1920s, the national movement in the Asan region was not active. However, the organization of youth organizations, youth movements, and equity movements are representative.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Japanese colonial policy was shifted from unauthorized to cultural rule, and incomplete, but meetings and associations became possible. As a result, youth groups were organized in each region, just like the bamboo shoot. In the Asan region, youth groups such as youth meetings and retreats were formed shortly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but in reality they were not well known. Later, in 1923, youth groups such as Ajou Club, Asan Youth Association, and Unemployment Youth Association were organized. Participants in organizing these groups were local journalists and businesswomen. However, the mass movements of these youth groups were not so active. However, a large number of employees who work in the military or military are participating in the private university establishment movement. Nevertheless, the most active national movement in the Asan region in the 1920s was the equity movement. The Equity Movement was a human rights advocacy movement for the discriminated butchers at that time, but actively responded to the colonial rule. Four equilibrium organizations were formed in the Asan area, and efforts were made to maintain the organization and secure survival rights. In the 1920s, Cheondogyo in Asan was relatively weaker than in other parts of Chungnam. In Dangjin, Seosan, and Hongseong, the Diocese of Cheondogyo was established in the 1910s, but the Diocese was not established until 1926, much later. In addition, Cheondogyo organized youth groups in the central and rural areas in the 1920s and participated in various national movements, including cultural movements. However, the Asan region did not organize Cheondogyo Youth Organization. This shows that the cult is not rooted. This may be due to a number of reasons, but Cheondogyo did not have a social foundation in the Asan region. In 1927, the Chondogyo Youth League, an avant-garde group of the Gupa Chondogyo, not only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formation of the New Society, the largest national movement organization at that time, but also decided to participate in the branch organization. Nevertheless, the Asan region did not organize a new society because of the weaknesses of social movement and Cheondogyo. Thus, there is no correlation between the national movement in Asan and Cheondogyo in the 1920s. In conclusion, it can be concluded that the Cheondo and Cheondo members of the Asan region did not fulfill their role in the Asan region's national movement in the 1920s as in other parts of Chungnam. This was because the Cheondogyo organization in Asan region did not have the capacity to do this.

      • 도심지 토사재해 점검을 위한 정기점검 및 긴급점검 항목 개발

        성주현,정민형 한국구조물진단유지관리공학회 2017 한국구조물진단유지관리공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Vol.2017 No.04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evelope items for regular and emergent inspections in order to prevent a debris flow in urban areas. Preliminary evaluation items which are matched with urban characteristic were derived by Literature review and first survey of the Delphi technique. It is expected that final items for regular and emergent inspections are developed by additional surveys of the Delphi techn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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