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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포은시 해석의 몇 가지 문제

          변종현(Byun, Jong Hyun) 포은학회 2020 포은학연구 Vol.26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작품의 사상적·문예적 가치에 대한 정확한 감상과 평가는 그 선행적 기초작업으로서 객관적 해석과 번역이 철저하게 수행되어야 된다. 우리가 한시에 대해서 갖는 관심은 일차적으로 학술적 연구 문제에 있기는 하지마는, 동시에 보다 많은 독자의 확보에도 비중을 두어야 한다. 이 독자들은 작품의 감상자들로서 아 감상을 통해서 작품의 전부를 향수하게 된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연구자들을 위한 번역을 넘어서서 일반 독자들을 위한 작품의 해석과 번역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포은학회에서 번역 출간한 『포은선생집』(한국문화사, 2007)은 1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포은시에 대한 많은 연구가 축적되었으니, 연구자들이 포은시에 관한 번역서를 이용하면서 번역의 문제점들을 찾아 검토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2018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포은집』은 기존 번역서의 오역을 바로 잡았지만 한글세대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 번역할 때는 이해하기 쉬운 용어를 잘 선택하여 한글세대들이 번역서를 이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으면 좋갰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기존에 나온 번역서도 문제가 있으면 다시 재번역할 필요가 있다. 가령 서거정의 『동문선(東文選)』의 경우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68년에서 1970년 사이에 번역 출간한 뒤에 아직 새롭게 번역한 책이 나오지 않았다. 보다 쉽고 정확한 해석과 번역이 된 『동문선』이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한문으로 기록된 수많은 고전문헌은 전통의 보물창고이지만, 한글세대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보물이다. 한글세대들이 보물창고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번역서가 잘 나왔으면 좋겠다. The accurate appreciation and evaluation of the ideological and literary values of a work should be carried out thoroughly with objective interpretation and translation as a prior basic work. While our interest in Chinese poetry is primarily in academic research, we should also focus on securing more readers. Given the fact that these readers, as viewers of the work, will be nostalgic for all of their work, it is deemed necessary to interpret and translate the work for ordinary readers beyond translation for researchers. “The Book of Poeun Teachers”(Korean History of Culture, 2007), translated and published by the Poeun Society, has been over 13 years. Since a lot of research on Poeun poetry has been accumulated, I hope that researchers will find and review problems in the translation while using the translation on Poeun poetry. “Poeunjip,” translated by the Korea Institute of Classical Translation in 2018, corrects the mistranslation of existing translations, but uses terms that are difficult for the Korean generation to understand. In the future, I hoped that the Korean-language generation would have no inconvenience in using translations by selecting easy-to-understand terms. If there is a problem with the existing translation from the Korea Institute of Classical Translation, it is necessary to re-translate it. For example, in the case of “Dongmunseon” by Seo Geo-jeong, a newly translated book has yet to be released after being translated and published by the National Cultural Promotion Association between 1968 and 1970. I hope that “Dongmunseon” will be published in the future, which is easier and more accurate in interpretation and translation. Many of the ancient Chinese characters recorded in Chinese characters are traditional treasure troves, but they are hard to reach for the generation of Hangeul. I hope the translation will come out well so that the Korean generation can make good use of the treasure trove.

        • KCI등재

          한국 한시 속에 담긴 역사의식과 문명의식

          변종현 ( Byun Jong-hyun ) 배달말학회 2018 배달말 Vol.62 No.-

          한국 한시에는 시인 자신의 정감을 표현한 작품이 많지만, 때로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자신의 역사의식이나 문명의식을 시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우리 역사에서 고려 후기와 조선 후기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배계층에 속했던 인물들의 주체적인 결단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고려후기는 원·명교체기로 역사와 문명에 대한 갈등이 치열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이제현은 고문운동(古文運動)을 통하여 사대부문학이 나아갈길을 제시하였고, 영사시(詠史詩)를 통하여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역사의식이 담긴 시를 통해 우리가 본 받아야할 인물들과 반성해야 할 인물들을 잘 제시해 주었다. 이곡은 원의 수도인 대도(大都)에서 유학하며 아들인 이색에게도 대도에서 벼슬해야함을 권면하였다. 이색은원에서 유학을 한 뒤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지만 고려로 귀국한 뒤 친원(親元)과 친명(親明) 사이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원나라로 사행을 가며 쓴 시로 보이는 <즉사(卽事)>에 나타난 의식으로 보아 목은은 명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더 호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목은은 이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김구용·정몽주·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유교문화를 심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고려 후기에 형성된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는 사대부들의 가치관으로 자리잡게 되어서, 이후 사대부계층들은 역사전환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영조와 정조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특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일어났던 전쟁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역사 흐름 속에서 조선 문인들은 한시를 통하여 농민들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기도 하고, 외세의 침탈에 강력하게 저항하기도 하였다. 정조 때 유득공은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43수를 지어 민족의 주체성을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이 시에서 유득공은 우리 역사의 지나간 모습, 즉 민족적 삶의 총체적 양상을 각국의 왕도(王都)를 통하여 제시함으로써 우리 것을 새롭게 인식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전봉준은 <절명시>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외세를 배격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이루지못한 한을 잘 나타내었다. 구한말 황현은 서양세력이 조선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에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1884년에 지은 <이충무공귀선가>에서는 서양세력의 침탈을 호랑이가 양 마을에 드는 형세라 하였고, 음독하기 전에 쓴 <절명시>에서는 국치일에 죽음으로 선비정신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진화와 정몽주의 시에서 문명에 대한 주체의식이 뚜렷함을 보여주었고, 조선 후기에는 역관 신분이었던 이언진의 시와 박수의 사상에서 문명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화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문명의 주체가 고려임을 나타내었고, 정몽주는 한시를 통하여 중화적(中華的) 세계 질서 속에 있는 고려 민족의 자부심을 드러내었다. 즉, 고려 후기에 국제관계가 중국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질서를 인정하고, 그 질서 속에서 문화적 동질성을 확보하고 살아가는 자부심을 시로 표현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역관이었던 이언진의 시에서 자신의 신분과 사상에 대한 깊은 성찰이 나타나있다. 이언진의 시집에는 시인 자신이 겪은 고통과 분노의 언어로 채워져 있으면서, 유교 국가 너머 다양한 사상이 인정되고, 신분과 혈통이 아니라 능력으로 인정받는 세계를 꿈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한말 박수는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진정한 의미를 논하면서 “주 나라가 이룬 제도와 문화를 갖추어 예를 지키고 인륜을 유지하여야 중화”라 하였다. 이러한 선인들의 시와 사상을 통해 볼 수 있는 역사의식과 문명의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자리를 잡아, 앞으로 보다 바람직한 역사를 이룩해 나가고 새로운 문명을 창출해 가는 원동력이 되리라 여겨진다. What is the driving force which induces the cultural power of Korea which all over the world people get interested in. The force of the source can be found out from the cultural heritages which our ancestors have left to us. This paper focuses on humanistic imagination involved in Korean Chinese Poetry, based on historical and civilizational consciousness. In most of Korean Chinese Poetry, poets expressed their own emotions but sometimes they presented their historical or civilizational consciousness. Historically, some poets among writers in the late Koryeo and in the late Chosun Dynasty showed distinctly such a consciousness. This consciousness can be examined in Yi Jehyeon' Youngsasi(詠史詩), which was written in the late Koryeo, in Yu Deukgong's < Yishipildohoegosi(二十一都懷古詩) > and Jeon Bongjun's and Whang Hyeon's < Jeolmyoungsi(絶命詩) >, which were written in the late Chosun Dynasty. In the late Koryeo, Yi Jehyeon reinterpreted and criticized Chinese historical figures by writing Youngsasi. Through the poems of historical figures, he presented what ones should emulate and reflect on. Besides, Yu Deukgong composed 43 poems, < Yishipildohoegosi(二十一都懷古詩) > to establish the national identity even though he had lived in poverty. Reading these poems, we can appreciate how our ancestors revealed their view of world and awareness of reality in their poetry, struggling against arrogance of the world. And in the late Koryeo, Jin Wha's and Jeong Mongju's poems showed obvious opinions for the subject of civilization. In the late Chosun Dynasty, Yi Eonjin, who was an interpreter, and Park Soo displayed clearly new view of civilization in their thoughts. Jin Wha dispatched to Jin as an envoy expressed that the subject of civilization was Koryeo. Jeong Mongju revealed the pride of Koryeo people even in Chinese world order of the time. In his poems, he expressed a pride that he lived ensuring cultural homogeneity in Ming-centric world order even though the world in the late Koryeo accepted such a world order in the international relations. Yi Eonjin, an interpreter in the late Chosun Dynasty, described keen reflection on his status and thought in his poetry. His anthology was filled with the words of agonies and rages which he had experienced. He was dreaming of the world that various thoughts would be accepted and people's abilities should be given priority over their status or blood even though he lived in a confucian country. In the late Chosun Dynasty, Park Soo said, "Jungwha(the form of viewing China as the most advanced civilization in the world) is that courtesy should be observed and humanity should be kept, equipped with system and culture which Zhou Dynasty had established", disputing about what the real Jonwhayangi(Hua-yi distinction) was. It is considered that today the ancestors' consciousness of history and civilization shown in their poems and thoughts will be the motive to build new cultural contents, to make desirable history and to create new civilization in future.

        • 圃隱漢詩에 나타난 修養과 省察

          卞鍾鉉(Byun,Jonghyun) 포은학회 2008 포은학연구 Vol.2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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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은은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 사회를 유학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모시키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정몽주전』에 의하면, 포은은 수도인 개성에 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鄕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하여 儒學을 진흥시키려 했고, 成均館의 敎官을 맡으면서 학자들이 모여 서로 토론하면서 성리학적 이치를 더욱 공고하게 다져나갔다. 그리고 성리학적 이치를 연구하던 학자들은 송대 성리학자들의 철학적 세계관을 담은 시를 읽기도 하고, 자신들도 이러한 시를 창작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포은시에서 이러한 모습을 살펴보았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향을 띠고 있다.. 첫째는 觀物을 통해 天道가 自然 현상 속에 구현되어 있음을 읊은 시들있다. 즉, 절대적 전범의 거울인 하늘을 자연만물의 현상들로 확인하고 그것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天道는 당연히 사람이 본받아야야할 사람의 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들은 事物의 存在原理는 理이며, 觀物을 통해 事物에 內在한 理를 살피면 事物의 根源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觀物察理의 경지를 시로 읊은 것으로 ‘窮理’의 단계를 시로 표현한 것이다. 둘째는 經傳에 나오는 性理學的 理致를 시로 표현하거나 자연만물의 현상을 보고 經傳에 나오는 理致를 다시 형상화한 시들이 있다. 이러한 시들은 觀物을 통해 經傳에서 깨달은 理致를 다시 확인하기도 하고, 性理學의 주요 개념들을 시를 통하여 議論하기도 하였다. 셋째는 하늘의 氣運에 同化되어 하늘의 理致를 따라 살아가는 시적 主體의 自足感을 읊은 시들이 있다. 즉, 하늘의 도에 따라 운행되는 계절의 淸明한 기운에 시적 주체도 절로 동화되어 살아가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들로, 觀物察己의 경지를 시로 읊은 것이다. 이러한 시들은 事物을 觀察하면서 心性을 修養하고, 다시 修養된 心性의 境地를 시로 표현해 낸 작품으로 ‘居敬’의 단계를 시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濂洛風詩의 궁극적 목적이 人間性의 天性化에 있다면 셋째의 시는 그러한 境地를 가장 잘 表現한 시라 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들은 인격적 수양이 부족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염락풍시에서는 하늘을 절대적 전범의 거울로 삼고 하늘의 도를 닮아가고자 하며, 天道의 원리대로 운행되는 계절의 기운에 저절로 동화되어 살아가는 시적 주체의 즐거움을 노래하면서 , 심성과 인격을 수양하고 자기를 성찰하면서 살아가고자 하였다. According to 『Jeong Mongju in History of Goryeo』, Poeun(Mongju, Jeong) lived in the era of Goryeo when people adored buddhism but he tried to cultivate Confucianism. In other words, he built Obuhakdang in Gaesung, capital of Goryeo, and Hyang-gyo (Confucian temples) in local areas. He made them in order to inform and develop Confucianism. He, as an instructor of SungKyunKwan(a education institute of Goryeo), encouraged its scholars to debate on Neo Confucianism and to strengthen its principles. The scholars studying the principles of Neo Confucianism read and wrote poems including philosophical world views which Song's Neo Confucianism scholars had. This paper studies Poeun's poems containing the views in the end of Goryeo. The tendencies of his poems are divided into three parts. Firstly, his poems say that he could figure out ways of heaven in natural phenomena while he was watching things. That is, he confirmed absolute and exemplary heaven in the phenomena and embodied them in his poetry. In <Jungchuwal>, <Seojeongjeonda> and <Choon>, he showed that Li (reason, 理) was why things were and that he could figure out what things were if he examined Li existing in the things. That is, he expressed a step of ‘Goong Li (studying principles of things)’, which was a step to observe things and to examine ideas as well. Secondly, his poetry showed the principles of the Neo Confucianism scripture or it embodied them from the natural phenomena. In <Hojungkwaneo(湖中觀魚)>, <Bokjukwanjungcheong(復州館中井)> and <Dongjieum(冬至吟)> he confirmed the principles realized from the scripture and discussed the main concepts of Neo Confucianism. Thirdly, in his poems he showed selfsufficiency of a poetic subject adapting himself to the heaven's principles, identified with its spirit. In other words, the subject was willingly identified with and enjoyed the fair spirit of seasons changing with the ways of heaven. He reflected himself on examining all things. In <Songseungkwikimsaengsa(送僧歸金生寺)>, <Yukwaneumsa(遊觀音寺)> and <Jaeyusisa(再遊是寺)>, he revealed that he had trained his mind examining things and his trained spirit reached to a step of ‘Geogyeong(居敬)’, which was a step of training morality. These poems displayed clearly a characteristic of Yeomnakpoongsi(濂洛風詩) which focused on clarifying human nature.

        • KCI등재

          포은 한시를 통해 본 포은의 불교 인식

          변종현(Byun, Jong-hyun) 포은학회 2014 포은학연구 Vol.14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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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은 정몽주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포은은 교조적인 유학자들과는 달리 불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며, 불교에 대한 이해 역시 깊다고 보았고, 불교와의 교섭·조화 등의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호불(好佛), 지불(知佛), 친불적(親佛的)인 인물로 거론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에 의문점을 가지고 포은이 남겨 놓은 시 작품 가운데 친불교적이라는 시들과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낸 시들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포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조선 초기 태종대에 이르러 권근의 상소에서 변화가 시작되어, 포은을 송의 문천상에 비유하여 절의(節義)지사로 추증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포은에 대한 인식은 난신과 충신의 인식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완결이 고려사의 제신전(諸臣傳) 입전이라는 것이다. 즉, 특히 반역전도 충신전도 아닌 제신전(諸臣傳)의 입전은 이러한 이중적 구도가 반영된 결과물로 볼 수가 있겠다. 포은은 중국과 일본에 사행을 다니면서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접하면서 중국 중심의 천하를 마음에 두면서 일찍부터 중국의 한족(漢族)이 이룩한 문물을 고려가 받아들여 중국과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포은은 이처럼 친명(親明)외교를 통하여 고려가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감을 이룩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였던 것 같고,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성리학의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도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고려말 포은의 이러한 친명외교 전략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한족이 이룩한 중화(中華)중심의 문화와 제도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조선 후기 우리 선조들은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포은은 우리나라의 성리학의 터전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소중화 의식을 갖게 만든 원천적 정신적 토대를 만든 인물이라 여겨진다. 『고려사』정몽주전에 나타난 포은의 주요한 업적은,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 사회를 유학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모시키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수도인 개성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하여 유학(儒學)하는 분위기를 진흥시키려 했다. 그리고 성균관(成均館)의 교관(敎官)을 맡으면서 학자들이 모여 서로 토론하면서 성리학적 이치를 더욱 공고하게 다져나가게 되었다. 포은이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인식을 관물(觀物)과 궁리(窮理)를 통해 체득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 등의 작품은 춘추․주역․시경․중용 등의 경전을 읽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보기도 하고, 경전의 이치를 시를 통해 다시 음미해 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사찰은 종교적인 공간을 넘어서 학습의 공간이나 수양의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즉, 고려시대에는 관립교육기관인 국자감이 있었지만 개경에 십이도가 설립되어 사학이 발달한 시기였다. 사학의 학습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하천도회(夏天都會)였다. 즉, 십이도(十二徒)들은 제각기 속해 있던 재에서 학문을 연마하다가 여름철이 되면 개성의 귀법사(歸法寺)와 용흥사(龍興寺) 등에 모여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사찰이라는 공간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서 학습과 수양, 그리고 안신(安身)의 공간 등으로 활용되었다. 스님과의 교류도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포은은 스님들에게 준 시에서 불교의 진리를 찾는 방법이나 불교 교리에 대하여 비판적 견해를 드러낸 시들이 있다. 에서는 우왕과 공양왕 때 국사(國師)를 지낸 보각국사 혼수(混修)에게 포은은 불교의 진리체계가 환망(幻妄)으로 귀착된다고 비판하였고, 에서는 현상적인 자연을 버려두고 참선에 들어가는 스님의 구도(求道) 방법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고암권자(古嵒卷子)>는 고암스님의 설법이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였고, 에서도 포은은 원조스님에게 불교에서 말하는 도와 마음을 비유한 말이 적절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처럼 포은은 불교문화가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던 고려 후기에, 성리학적 세계 인식으로 사상을 전환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고, 한족(漢族)이 이룩한 중화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중국과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포은이 당대 고승(高僧)이었고, 국사(國師)였던 혼수 스님에게 써 준 시는 포은의 불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뚜렷이 보여 주었고, 스님에게 준 시나 고암과 원조스님의 두루마리에 써 준 시에서도 스님들의 구도(求道) 방법이나 참선 태도, 불교의 교리 등에 문제가 많다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Poeun, Jeong Mong-ju was a politician and philosopher in the late Goryeo. According to the previous studies of Poeun, he, unlike dogmatic confucian scholars, was in favor of Buddhism and had a profound understanding of Buddhism. In addition, he was referred to as a figure who had been favorable, knowledgable and friendly of Buddhism. This study has a question for the previous studies and examines his Buddhist-friendly poetry and Buddhist-unfriendly poetry among his works. Historically, Poeun started to be reappraised by Kwongeun during the era of King Taejong in the early Chosun Dynasty. In the light of this, Poeun was recognized as both loyal subject and traitor in the early Chosun Dynasty. In result, his works were included in Jesinjeon (stories including every subject) in the history of Goryeo. That is, they were not included in either loyal subject stories or traitor stories. Due to this dual structure, his poems might have been included in Jesinjeon. Privately traveling to China and Japan, Poeun experienced their advanced civilization and he considered China as the center of the world. Therefore, he expressed that Goryeo adopted Han chinese’s advanced civilization at a proper time and it had pride in sharing their civilization. Poeun seemed to appreciate that Goryo could have got cultural and political stability through this Myoung-friendly diplomacy. His thoughts could be based on Hwairon world view of Neo-Confucianism. Having been to Myoung several times, he experienced the change of international situation and its culture and institutions in person. It led him to insist on Myoung-friendly diplomacy. Since then Chosun kept adopting Han chinese’s culture and institutions based on sinocentrism(the belief that China was literally the center of the Earth) and people in the late Chosnn had lived with small sinocentrism. Eventually, Poeun can be evaluated as the scholar who arranged our Neo-confucianism and from whom small sinocentrism was mentally originated. In Jeong Mong-ju story of History of Goryeo, Poeun’s main achievement was in that he made an attempt at changing Goryeo’s buddhist-centric society into confucianist-centric society. That is, to encourage and teach confucianism he built Obuhakdang in Gaesung, capital of Goryeo, and established Hyang-gyo in the provinces. Besides, he, as a trainer of Seonggyungwan, could strengthen Neo-confucianism theories, debating about Neo-confucianism with other scholars. Poeun wanted to learn the neo-confucianism view of world through guanmul(觀物) and gungli(窮理). In , , and of his works, he tried to apply the theories of Chunchu, Juyeok, Sigyoung and Jungyong to his life , and to recite their theories through his poetry. In the era of Goryeo, temples played a role as a study place, a character building place as well as a religious place. In other words, there was a government educational institution called Gukjagam and 12 private schools called Sibido, which were built in Gaesung, were prosperous in the period. Private schools focused on hacheondohoe(夏天都會) in their curriculums. That is, students usually studied at Sibido which belonged to each Jae but they periodically got together to study in the summer. It was called hagua or hacheondohoe(夏天都會). They usually studied at Guibeobsa(歸法寺) and Yongheungsa(龍興寺). In the era of King Gojong, it was recorded that Hagua was carried out at Yeonmijung, Gangwha. Considering this cultural heritage, we can recognize that temples in the era of Goryeo had functions for studying, character building and relaxing, let along religious function. Interacting with buddhist monks wa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the function. The heritage has been succeeded until today. Like the previous temples, today’s temples are used as test-preparation and school trip places for students and as relaxing and comforting places for ordinary people.

        • 최치원 한시의 미학적 특징과 화개동(花開洞)시 연구

          변종현 ( Byun Jong-hyun ) 경남대학교 가라문화연구소 2019 加羅文化 Vol.29 No.-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은 신라 문성왕 19년에 경주 사량부에서 최견일의 아들로 태어나,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였고, 20세 때에는 율수현에 임명되고 공직 생활 중 많은 글을 지어 『중산복궤집』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 고운은 청소년기에 당나라에 들어가 문인으로 이름을 드높이고 신라로 돌아와서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소신을 펴려고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은거를 택하게 되었다. 고운의 시에 대한 선인들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의 엇갈린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고운의 시는 아름다운 수사에 치중하였다는 평가가 많은데, 고운시의 이러한 특색이 고운시가 만당풍(晩唐風)을 띠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것 같다. 당시(唐詩)의 특징은 주정적(主情的)이며 여러 가지 제재를 동원하여 정감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한다. 고운은 재당시기의 향수와 귀국후의 실의로 말미암아 자기 정서를 읊은 시가 대부분 자기 비애, 자기 고독, 자기 한탄 등에 따른 정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감정들을 애절하게 호소하는 시들이 많다. 그런 가운데 <추야우중>은 최치원의 작품 중에서 작자의 상황 의식과 고독한 정서를 긴밀한 시상 구조로 읊어 내어 그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수작(秀作)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여유당성증선왕악관>도 고운의 정감이 선왕의 악사에게까지 확산시켜 자기 자신만의 독백형으로 변용되어 애소조로 읊고 있다. 고운시의 ‘기려’한 풍격은 만당(晩唐)의 시풍을 본받아서 그러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신분의 한계상황을 뛰어넘지 못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고운의 이러한 시풍은 고려초에도 영향을 끼쳐, 정지상에 이르러 만개(滿開)하게 되었다. 고운이 화개동에서 쓴 여덟 수의 시는 나름대로 일정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1은 전체 수의 서장에 해당되며, 2는 봄, 3은 여름, 4는 봄과 가을을, 5와 6은 계절적 배경이 나타나 있지 않고 초저녁 달밤과 저녁 달밤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7은 단풍이 물든 가을, 8은 눈이 내란 겨울의 풍광을 노래하였다. 따라서 이 여덟 수의 한시는 화개동이 선경임을 묘사하면서 사계절의 아름다운 광경을 담아내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화개동시는 우리 문학사에서 사시가(四時歌) 계통의 시 가운데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후대 창작된 <전가사시>나 <강호사시가>에 구현된 전가나 강호는, 전가나 강호에 대한 긍정적 인식에 바탕을 두고 살아가는 시적 주체의 삶을 그려내고 있는 것에 비해, 고운의 화개동시는 선계(仙界)와 같은 공간에서 시적 주체가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잘 그려내었다. 그리고 화개동에서 쓴 여덟 수의 한시의 풍격은 대체로 ‘고고(高古)’한 풍격을 형성하고 있다. 즉, 화개동에서 쓴 시들은 화개동이 선경(仙境)임을 묘사하면서 시적 화자가 세속을 초월하여 고상하고 고풍스럽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특히 사계절의 대표적인 아름답고 맑은 계절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도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Choi Chi-won (857~?) was born in Gyeongju, in 19th year of the reign of King Munseong of Silla, studied in the Tang Dynasty at age 12 and passed on to the Tang Dynasty's Bingonggoa(賓貢科) at age 18. At the age of 20, he was appointed to Yulsu County and wrote many writings during his official life. Goun entered the Tang Dynasty as a teenager and made his name known as a writer. When he returned to Silla, he tried to express his political beliefs, but he chose to live in seclusion because he could not fulfill his purpose. The previous people’s assessment of Goun’s poetry shows a mixed view of both positive and negative. Many critics say that Goun's poem focused on beautiful investigations, and it seems that Goun's poems character is full-blown. It is said th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period were mainly subjective and that various sanctions were used to express sentiment well. Goun's poems that recite his emotions due to nostalgia during the time of his return to Korea and his sorrows after his return to Korea have a passion based on self-pity, and there are many poems that mournfully appeal to such feelings. In the meantime, Chuyawujung(秋夜雨中) is considered a masterpiece of Choi’s works because he recites the author’s sense of situation and loneliness in a close-knit manner. And a poem given to a former king’musician (先王樂官), Goun’s affection spread to the king’s musician, translated into his own monologue and recited in a plaintive way. Goun’s "exciting" style is partly modeled after the style of Man-dang, but it can also be attributed to its failure to overcome the limits of personal status. This Goun’s Characteristics influenced the early Goryeo period, and in Jeongjisang,’s poem, The flowers bloomed at the top of the stop. The eight poems written by Goun in Hwagae-dong(花開洞) have their own structure. 1 is the total number of captains, 2 sang spring, 3 sang summer, 4 spring and fall, 5 and 6 sang early evening moon nights and evening moon nights with no seasonal background shown. And seven sang the autumn tinted with maple, and eight sang the snowy winter scenery. Thus, the eight poems was intended to capture the beautiful scenery of the four seasons, describing Hwagaedong(花開洞) as Seongyeong(仙境). Therefore, Hwagae-dong poetry is the first of its kind in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The Jeonga(田家) and Gangho(江湖), embodied in later generations of "Jeongasasi(田家四時)” and "Kangho-sasi(江湖四時)," depicts the life of a poetic subject living on the basis of positive perceptions of jeonga and Gangho, while the Hwagae-dong poem of Goun portrays the life of a poetic subject assimilating with nature in a space such as Seongye(仙界). And the eight Chinese poems written in Hwagae-dong generally form a "high" landscape. In other words, poems written in Hwagae-dong depict Hwagae-dong as Seongyeong(仙境), and the poetic narrator trying to live a noble and antique life beyond the world. Especially, in the beautiful and clear seasonal atmosphere of the four seasons, he is assimilating with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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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도산십이곡>에 구현된 의미와 세계관

          변종현 ( Jong Hyun Byun ) 경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0 人文論叢 Vol.26 No.-

          <도산십이곡>은 ``言志 六曲``과 ``言學 六曲``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논문을 통하여 두 六曲이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퇴계의 세계관이 어떻게 작품 속에서 형상화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도산잡영>과 <도산십이곡>은 한결같이 태극염계의 묘리를 터득하기 위해 고심했던 퇴계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로, 서로 관련이 깊은 작품들이다. 이 문을 통하여 ``言志``와 ``言學``은 유기적으로 잘 짜여진 하나의 구조물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言志``와 ``言學``의 통일성은 마지막 연이 공통적으로 <中庸> 費隱章의 君子之에 연결되어 있어서, 이들은 ``군자의 도``를 노래한다는 면에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言志`` 육곡에서는 主理論的 세계관을 살펴보았는데, 言志 六曲에서는 군자의 도가 천지에 환히 드러난 이치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특히 언지 6에서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흥취를 그려내면서, 君子의 道가 천지에 환히 드러난 ``魚躍鳶飛``, ``雲影天光``의 반복 순환하는 이치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言學`` 六曲에서는 수양론적 세계관을 살펴보았다. 퇴계는 언학에서 ``敬``에 바탕을 고 학문연마와 심성공부에 주력해야 함을 노래하였다. 언학 6은 『중용』의 費隱章의 내용을 읊었는데, 이 내용은 언지 6에서 표현한 내용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중용』의 隱章에서는 군자의 도를 실천하는 데는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할 수 있고, 성인도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못다 하게 되는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면이 바로 <陶山六曲의 ``言志``와 ``言學`` 두 육곡을 하나로 아우르게 하고 있고, 두 육곡이 하나의 주제인 ``군자의 도``를 꿈꾸고 있는 노래라 할 수 있다. Dosan Sibigok consists of ``Eonji Yukok(言志 六曲)`` and ``Eonhak Yukok````(言學 六曲). This thesis focuses on how the structures of two Yukoks(六曲) are intimately connected to one another and how Toegye`s Yigicheolhak(a kind of philosophy) is reflected in his works. First of all, let`s exa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Dosanjapyeoung`` and ``Dosan Sibigok``. Two works show a world view of Toegye, an ethicist who had tried to understand an abstruse principle of Taegeukyeomgye. They are connected deeply to each other. At first, Toegye created a chinese poem, ``Dosanjabyeoung`` to express his joy in Dosan and then he wrote ``Dosan Sibigok``, which was written in Korean, to depict his emotion which he couldn`t express with chinese letters. In the epilogue of ``Dosan Sibigok``, he wrote that he had composed two ``Dosan Yukoks`` by imitating Yukga of farewell. One was ``Eonji Yukok`` and another was ``Eonhak Yukok``. He also wrote that his work called ``Dosan Yukok`` was a style of Yukga. In this respect, ``Eonji(言志)`` and ``Eonhak(言學)``. are well organized each other. Especially, they have something in common in their last stanza. Both of them are related to Gunjajido(君子之道, a way of man of virtue) of Bieunjang(費隱章) in the doctrine of the mean <中庸>. They sing ``a way of nature`` and ``a way of human being`` in common. ``Eonji Yukok`` shows the world view of Juriron(主理論) (a theory of Neo-confucianism). Toegye inherited Juryeomgye``s point of view in literature, which had a moral value. His poems were based on virtue and his ideal poem was Doyeonmyoung`s Chungdamhana(충澹閑雅). In ``Eonji Yukok``, he desired people to realize and pursue a way of man of virtue. That is, ``Eonji 1`` shows a poetic self to try to be in harmony with nature and ``Eonji 2`` reveals that he wanted to live in an age of peace. ``Eonji 3`` presents his enthusiastic will to train a lot of talented people. ``Eonji 4`` reveals that he would long for the king and he would be loyal to him, not forgetting pimiirin (彼美一人, a king) even though he was living in a beautiful scenery of Dosan. ``Eonji 5`` shows his thought of being in government service(出處觀) so that he tried not to forget the world even though he lived in nature. In ``Eonji 6``, the poet desired people to realize a reason why Eoyakyeonbi (魚躍鳶飛, a very active state) and Unyoungcheongwang(雲影天光, a harmonious state) were repeated and rotated, depicting the beauty of four seasons. Toegye wrote about an attitude, a mind and a way for study in the later Yukgok, calling ``Eonhak``. In ``Eonhak``, he insisted on keeping studying and cultivating mind, based on ``gyoung``(敬, respect). In ``Eonhak 1``, he recommended people to read a lot of books for study (萬卷生涯), and to rid themselves of greed and to appreciate the arts (往來風流) for self-discipline. In ``Eonhak 2``, he recommended that to be wise men they should practice a way in which ancient people had done. In ``Eonhak 3``, he resolved that he would devote himself to his studies and self-discipline as ancient saints had done. In ``Eonhak 4``, he wrote that people should not stop a way in which they had performed and they should keep practicing it without being distracted. In ``Eonhak 5``, Toegye decided that people should keep studying and maintain self-discipline like everlasting nature. ``Eonhak 6`` also emphasizes on ceaseless study and self- discipline. Bieunjang(費隱章) in the doctrine of the mean <中庸> is recited in ``Eonhak 6``, which is related closely to the contents expressed ``Eonji 6``. As mentioned above, ``Eonji`` and ``Eonhak`` harmonizes with each other and has unity in various asp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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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잡영>과 <도산십이곡>의 관련 양상 연구

          변종현 ( Byun Jong-hyun ) 배달말학회 2017 배달말 Vol.60 No.-

          이 논문은 <도산잡영>과 <도산십이곡>의 관련양상에 대하여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두 작품에는 도산서원을 배경으로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며 학문과 수양에 힘쓰고자 하는 퇴계의 정신세계가 잘 구현되어 있다. 특히 <도산십이곡>의 `언지 6`과 `언학 6`은 『중용(中庸)』 비은(費隱)장에 토대를 두고 있어서, <언지>와 <언학>의 내용이 다같이 군자의 도를 노래하는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두 작품의 관련 양상을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먼저 자연과 도학의 세계를 탐구한 측면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록(西麓)>에서 퇴계는 서쪽 산기슭에 띠집을 짓고 살면서 구름과 노을을 벗하면서 살고자하는 뜻을 표현하였는데, <언지(言志) 1>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뜻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어촌>에서 퇴계는 순박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내었는데, <언지 3>에서는 순박한 풍속이 죽었다고 하나 거짓말이고, 사람의 성품이 어질다 하니 옳은 말이라 하였다. <구저(鷗渚)>에서 퇴계는 모래톱의 갈매기를 바라보며 욕심없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뜻을 투영하였는데, <언지 5>에서는 산과 물을 배경으로 갈매기떼는 날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백구맹(白鷗盟)을 하면서 자연과 친화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흰 망아지는 멀리 마음을 두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구저>에 나오는 갈매기의 모습이나 <언지 5>에 나오는 떼 많은 갈매기는 모두 퇴계가 백구맹(白鷗盟)의 의지를 보여주는 내용들이다. <천연대(天淵臺)>에서 퇴계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이치를 음미하면서 하늘 이치의 유행과 활발발함을 확인하고 있다. <정초(庭草)>에서는 주돈이(周敦?)의 시구와 주희(朱熹)의 시구에 나타난 천기(天機)를 다시금 마음 속으로 체득해 보고 있다. <언지 6>에서 퇴계는 질서정연하게 반복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를 관찰하면서 느끼는 감동을 노래하였다. 퇴계는 <언지 6>에서 사계절의 아름다운 흥취를 그려내면서,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의 반복 순환하는 이치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다음으로 학문과 수양의 세계를 탐구한 측면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완락재(玩樂齋)>에서 퇴계는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의 세계를 다 드러내고 있다. 주경(主敬)은 의(義)를 모으는 공부이니, 비망비조(非忘非助)하며 점차적으로 통달해야 한다고 하였다. <언학 1>에서 퇴계가 권유하는 학문과 수양의 방법은 만권생애를 통해 성인의 학문을 익히는 것과 왕래풍류를 통해 마음을 비우고 억지로 조장하지 않는 방법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암서헌(巖栖軒)>에서 퇴계는 증자나 안연처럼 박문약례에 힘을 기울이면서 매사에 조심하여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한 듯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듯이 신중하게 처신하며 살아가야함을 다짐하고 있다. <언학 3>에서 퇴계는 옛 성인들이 행했던 학문 수양의 방법을 따라서 자신도 학문과 수양에 몰두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반타석(盤陀石)>은 퇴계가 이상으로 여겼던 군자(君子)의 모습이며, 선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물결이 혼탁하고 거세어도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반타석처럼 군자나 선비들은 학문과 수양에 힘을 써서 변함없는 마음가짐이나 처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반타석>에서 군자나 선비들은 변함없는 마음가짐으로 학문과 수양에 힘써야함을 노래하였는데, <언학 4>에서는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과 수양에 몰두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시습재(時習齋)>, <관란헌(觀瀾軒)>>과 <언학 5>는 끊임없는 학문 수양 자세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련성을 가진다 할 수 있다. <몽천(蒙泉)>에서는 몽괘의 “군자는 과단성 있는 행동으로 덕을 기른다”는 말을 기억하며 바름과 덕을 기르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언학(言學) 6>에서 퇴계는 학문은 어리석은 사람도 알면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고, 성인도 못 다 하시는 것이니, 우부나성인 할 것 없이 끝없이 반복 실천하다 보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학문에 심취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특히 <언학 6>에는 군자의 도를 끝없이 추구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퇴계의 정신세계가 잘 구현되어 있다. 이처럼 <도산잡영>과 <도산십이곡>은 창작동기나 시 내면세계가 동일한 사상이나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established meaning and view on < Dosanjapyoung(陶山雜詠) > and < Dosanshibigog(陶山十二曲) > and studied an similar view on two pieces. < Dosanjapyoung > and < Dosanshibigog > are createed around the time when rationalism theory of Toegye(退溪) had been completed. Therefore, we can say that his rationlism theory is connentrated in these pieces. Therefore, his pieces are song of joy by nobleman about beauty of nature, and song of ethical understanding and the rule inside. First of all, let`s exa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Dosanjapyeoung` and `Dosan Sibigok`. Two works show a world view of Toegye, an ethicist who had tried to understand an abstruse principle of Taegeukyeomgye(太極濂溪). They are connected deeply to each other. At first, Toegye created a chinese poem, `Dosanjabyeoung` to express his joy in Dosan and then he wrote `Dosan Sibigok`, which was written in Korean Sijo(時調), to depict his emotion which he couldn`t express with chinese letters. In the epilogue of `Dosan Sibigok`, he wrote that he had composed two `Dosan Yukoks` by imitating Yukga of farewell. One was `Eonji Yukok` and another was `Eonhak Yukok`. He also wrote that his work called `Dosan Yukok` was a style of Yukga. In this respect, `Eonji(言志)` and `Eonhak(言學)`. are well organized each other. Especially, they have something in common in their last stanza. Both of them are related to Gunjajido(君子之道), a way of man of virtue) of Bieunjang(費隱章) in the doctrine of the mean <中庸>. They sing `a way of nature` and `a way of human being` in common. In `Eonji Yukok`, he desired people to realize and pursue a way of man of virtue. In `Eonji 6`, the poet desired people to realize a reason why Eoyakyeonbi (魚躍鳶飛, a very active state) and Unyoungcheongwang(雲影天光, a harmonious state) were repeated and rotated, depicting the beauty of four seasons. Toegye wrote about an attitude, a mind and a way for study in the later Yukgok, calling `Eonhak`. In `Eonhak`, he insisted on keeping studying and cultivating mind, based on `gyoung`(敬, respect). In `Eonhak 5`, Toegye decided that people should keep studying and maintain self-discipline like everlasting nature. `Eonhak 6` also emphasizes on ceaseless study and self-discipline. Bieunjang(費隱章) in the doctrine of the mean <中庸> is recited in `Eonhak 6`, which is related closely to the contents expressed `Eonji 6`. As mentioned above, `Eonji` and `Eonhak` harmonizes with each other and has unity in various aspects. Two pieces have differences in poetic format but they are same for revealing the rationalism theory and development theory that are similar view through the pieces. Therefore, < Dosanjapyoung(陶山雜詠) > and < Dosanshibigog(陶山十二曲) > are based on same and shared view as they both sing the rule of nature and research of study and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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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주제 논문 : 서동설화의 기록화 양상 연구

          변종현 ( Jong Hyun Byun ) 배달말학회 2010 배달말 Vol.47 No.-

          서동설화는 근본적으로 역사와 설화가 통합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러한 텍스트로 바라보아야 설화의 의미가 잘 드러난다. 서동설화를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사실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에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서도 입증이 되고, 미륵사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미륵사터가 습지였다는 것도 확인이 되었다. 그리고 서동이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이 흙더미처럼 쌓여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기록이라 여겨진다. 즉, 익산과 인접한 김제시 금구면 오봉리는 채금하던 곳이 수십 곳이 남아있고, 지금도 금구면에서는 겨울철에 沙金을 채취하고 있다. 師子寺에 거주했다는 知命法師는 서동설화에서 주요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현재 미륵산(용화산) 정상 밑에 있는 獅子菴을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명법사가 거주했다는 師子寺와 같은 절임이 확인되었다. 서동설화에서 설화적 사실은 무왕의 탄생담과 무왕과 선화공주의 혼인, 지명법사의 신력 등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武王은 法王의 아들로 되어 있지만 외아들이거나 후궁 출신 비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후궁의 소생이라면 ‘어머니가 홀로 되어 못에 있는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무왕이 용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는 것은 신화적 영웅들이 그러한 것처럼 신이한 출생담을 가지게 되었다. 무왕은 역사적 인물에서 민중들의 소망을 실현시켜줄 영웅적 인물로 새롭게 그려진 것이다. 서동설화는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이기 때문에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무왕은 아버지인 법왕의 불심에 감화를 받아 익산 지역에 왕흥사(미륵사)를 세우게 된다. 왕흥사는 창건한지 34년만인 634년에 완성되었고, 당시 백제인들이 작성한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인 佐平 沙탁積德의 따님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화공주는 설화적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혼인은 입증하기 어려우며,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 당시 신라에서 적대국가인 백제에 선화공주를 시집보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미륵사터인 연못을 知命법사가 하루밤 사이에 神力으로 메꾸었다는 사실도 역사적 사실과 불교적 영험이 결합되어 형성되었다. 즉 미륵사지는 발굴 과정에서 습지였다는 것이 밝혀져서, 결국 미륵사터는 연못을 메꾸어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고, 知命법사는 불교의 영험과 이적을 보여준 고승으로 그려져 있다. 서동요는 사뇌가 형식의 노래와는 다른 민요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노래이다. 초기 연구자들은 대체로 무왕이 창작한 노래로 보았으나, 후대 연구자들은 서동이라는 인물이 구비전승되던 동요에 서동과 선화공주를 넣어 개작하였다고 보았다. 이 노래를 서동설화 속에서 읽지 않고 노래 자체만을 가지고 부를 때에도 이 노래의 동요적 성격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이 노래는 현재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인 ‘얼레꼴레리’라는 노래와 비슷한 내용과 구조로 되어 있다. 서동요는 오랫동안 익산과 부여지방에서 구비전승되다가 일연스님에 의해 기록화되었는데, 노래말의 내용 가운데 ‘원乙’은 <삼국유사>의 같은 글자의 용례로 볼 때에 ‘알을’로 해독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서동요는 사랑의 주가나 사회 변혁을 예언하는 참요, 하층민들의 신분상승욕구가 반영된 노래로 바라보기도 하고, 이 노래를 불교적 성격을 가진 노래로 파악하여 선화를 미륵선화로, 서동을 미륵으로 이해하여 미륵하생 신앙을 표현한 노래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Seodong Seolwha is basically a mixture of history and folk tale, and its text reveals what a folk tale is. Seodong Seolwha can be considered from two viewpoints; a history and a folk tale. Samguk Yusa ( a collection of legends, folk tales, and historical accounts relating to Goguryeo, Baekje and Silla) recorded that King Mu(the thirtieth king of Baekje Dynasty) established Mireuksa(a Buddhist temple), whose site used to be a marsh. It was found out while the site was excavated. A historical story has been told that a great mass of gold had been piled up at the place where Seodong had digged out yams. Jimyoung, a buddhist monk, who had stayed at Sajasa (a temple), was a main character in Seodong Seolwha. While Sajaam around the top of Mt. Mireuk (Mt. Yongwha) was excavated, it was confirmed that the temple was the same place as Sajasa where he had stayed. Seodong Seolwha have some elements of folk tales;the birth story of King Mu, the marriage of King Mu and Princess Seonwha, and the divine power of Jimyoung monk. Even though Samkuk Sagi recorded that King Mu had been a son of King Beob, he might have been an only son or a son of royal concubine. If he had been a son of royal concubine, the story of Samkuk Sagi could be true. It says, `My mother was widowed and then she gave birth to me with a dragon living in a pond`. Like other mythical heroes, he also had supernatural birth story that he was born with the spirit of dragon. Seodong Seolwha in Samkuk Sagi contains a tale about the establishment of Mireuksa. According to the record, King Mu was impressed by his father, King Beob`s devotion to Buddhism so that he built Wangheungsa(Mireuksa, a temple) in Iksan. In 634 Wangheungsa had been finished 34 years later since it started to be built. According to records which Baekje people had written for keeping sarira relics at that time, Mireuksa was established by King Mu`s wife who was a daughter of Sataekjeokdeok(沙탁積德), a high-ranking official. Therefore, Seonwha princess could be a character in a folk tale. Therefore, Seonwha princess could be a character in a folk tale. It is difficult to prove the marriage of King Mu and Seonwha princess and to understand the marriage between King Mu and Seonwha princess who had lived in hostile countries, Baekje and Silla. It has historically been told that Jimyoung monk filled up the pond, a site of Mireuksa for a night. The story was the mixture of a historical fact and a buddhist miracle. It was revealed during excavation that the Mireuksa site used to be a marsh, which was filled up to build the temple. According to the record, Jimyoung was described as a monk who had a buddhist`s miracles and wonders. Seodongyo is a folk song style, not a sanoega style. Samkukyusa recorded that it had been composed by King Mu. It is controversial whether it had been created by an individual or had been handed down orally. Early researchers thought that Seodongyo was created by King Mu but later researchers presented that a Seodong adapted a traditional children`s song for Seodongyo by adding Seodong and Seonwha princess. Apart from Seodongyo in Seodong Seolwha, this song is a children`s song style in itself. In other words, this song has the similar words and structure to `eoleri koleri`, a children`s song which today`s children sing. Seodongyo had been handed down in the region of Iksan and Buyeo for a long time until it was recorded by Ilyeon monk. ‘원乙’ among words of the song can be interpreted as ‘aleul’ according to its use of Samkukyusa. Seodong can be variously analyzed as a song for love, a song which predicts the change of society, and a song to reflect a desire that common people want to move up in their position. When this song is classified as having a buddhist feature, Seonwha is regarded as Mireuk Seonwha from the view point of the structure and meaning of <Dosan Sibigok> and Seodong as Mireuk. As a result, this song could be considered as a song to express a religious belief that Mireuk appeared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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