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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학지』 200집 기념 대담 <동방학, 국학, 동아시아론: 동방학을 다시 기록하다> - 백영서, 도현철, 한기형

        김성보,백영서,도현철,한기형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2 동방학지 Vol.200 No.-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이 간행하는 종합 인문 학술지 『동방학지』가 200집 발간을 기념하게 되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4년도에 첫 1집이 나온 이래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한 번도 중단되지 않고 68년을 이어온 결과이다. 일제강점기 조선학의 전통이 없었다면,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동방학연구소를 창립하여 인문학의 밭을 일구어낸 선학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그리고 글 한 편 한 편을 소중히 여기는 편집진과 필자들의 인문 정신이 아니었다 영글 수 없는 수확이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고 한다. 수많은 학술지가 쏟아져 나오고 논문 편 수를 연구자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학문 시장 속에서 과연 『동방학지』는 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며 어디로 항해를 떠나야 할까? 국학연구원은 그 답을 찾기 위해 <동방학, 국학, 동아시아론: 동방학을 다시 기록하다>라는 제목의 대담을 마련하였다. ‘동방학’은 창립 당시의 연구소 이름이자 학술지 이름이다. ‘국학’은 이 연구소가 1977년도에 기구 확장을 하면서 붙인 새 이름이다. 그리고 ‘동아시아’는 국학연구원이 “21세기 실학으로서의 사회인문학”을 탐구하면서 화두로 삼았던 공간 개념이다. 이 세 단어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그 연관성을 살피다 보면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공간 감각과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근대 국민국가의 세계 속에서 계승·전환하는지, 그리고 다시 국가의 경계를 넘어 어떻게 동아시아로 인식과 정체성이 확대되어 왔는지 파악할 수 있겠다. 대담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제 1부에는 한국발 동방학 연구의 연원과 지향점을 살펴본다. 그리고 제 2부에는 활기찼던 동아시아 담론이 남긴 성과와 한계를 진단하면서 그 논의가 어떻게 다시 새롭게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을지 진단한다. 제 1부에서 도현철은 주로 동방학연구소 창립 이래 국학연구원의 역사를 짚어보면서 동방학에 담겨진 의미를 짚어준다. ‘동방’은 중국의 동쪽인 한반도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서방과 대비되는 중층적 개념이라는 지적이 흥미롭다. 백영서는 평소 지론대로 ‘동방’을 고정된 지리적 개념이 아닌 실천적 과제에 따라 계속 재규정되는 개념이라면서 ‘동방’의 의미를 더욱 풍성히 해준다. 한기형은 대동, 동양, 동아시아 등 동방과 유사한 용어들을 비교해주면서 오늘날 동아시아 담론이 오랜 한국의 전통과 현대적 전환 속에 나온 것임을 확인해준다. 대담은 학문 제도 속에서 국학과 동아시아학이 어떤 긴장 관계에 있었는지로 논의가 확대된다. 제 2부에서 백영서는 동아시아 담론이 단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시작되어 일제강점기와 냉전기에 복류하다가 1990년대 탈냉전기에 지상으로 다시 ‘귀환’한 것으로 파악하면서, 이제 다시 글로컬한 차원에서 이 담론이 재구성될 필요성을 제시한다. 한기형은 한국의 동아시아 담론이 국경을 넘는 공감을 얻지 못해왔음을 뼈아프게 지적하면서 그 한계의 극복이 중요함을 지적한다. 동아시아 연구의 향후 진로에 대해서 도현철은 역사 연구가 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적인 관점으로 확장되고 있는 예를 들면서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학문 연구의 문제의식과 연구내용이 계속 변화할 것임을 진단해준다. 이 외에도 다양하고 풍성한 논의가 대담 내내 이어진다. 200집이 나오기까지 『동방학지』에 실린 많은 글에는 하 ...

      • KCI우수등재

        自國史와 地域史의 疏通 : 東아시아人의 歷史敍述의 省察

        白永瑞(Baik Young-seo) 역사학회 2007 역사학보 Vol.0 No.196

        Modem history studies in Korea have been classified into three categories; national history, oriental history, and western history. This kind of systematic classification has been contentious issues for a long time among researchers. Most of all it is contemporarily in a heated controversy in the area of history education. Recent discussions about the history of East Asia as one unit seem to follow two trends: one sees East Asian history as an extension of Korean history, while the other regards it as being beyond the boundary of Korean national history. According to the original connotation suggested by Min Ti-ki, the former can be called "self-expansive East Asian history", and the latter, "self-introspective East Asian history" Min offered a definition of self-expansive history in terms of the contribution of Korean history to the formation of regional history, and of self-introspective history in terms of the individuality of Korea in the context of East Asian history. This paper will examine Min's concepts and given issues from a critical perspective, and will present another possible way of connecting between national and East Asian history in terms of "self-extensive and introspective East Asian history". When Min uses the concept of "self', it carries a connotation of the nation of Korea itself, but I would like to widen the range of the concept farther in order to include the positive aspects of the nation and also even some subjects which argue for the abandonment of the narrow viewpoint of nation-centered discourses. This approach, which I would like to call "a viewpoint of dual periphery", is the key to establishing communication between Korean and East Asian history. It is my hope that the paper can lay down initiative foundation, so to speak, in measuring the possibility of communicative universality between Korean and East Asian history.

      • 中國現代史에서의 민주주의와 國民會議運動 : The Analysis of 'Guominhuiyi-yundong' in the 1920s

        백영서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2 人文科學 Vol.84 No.-

        我個人認爲五四最大的成就, 便在於共和的實質內容之充實, 就民衆力量的覺醒來看, 這是共和制度運作正常化的主體性之確立。 在這個主體性確立的基礎上, 我們可將國民革命視爲民衆力量的革命化, 是一個更爲組織化, 更爲社會政治化的過程。 這種以日常生活中的共同感受爲基礎, 所形成的國民認同性, 開啓了從各省割據至國家統一的發展之路。 然而, 國民革命期的主體形成之歷史意義, 個人認爲在「國民會議運動」中可充分地看出其發展全貌, 故此問題是筆者本文將要討論的重要主題。 「國民會議運動」是五四時期自發性互相結合的各界(職能別)社會集團, 在北京政府之正當性面臨危機的1923年時, 爲了新政治秩序建立所提出的方案之一, 經由國民黨和共産黨的雙力接受, 不但促成國共合作, 竝藉此推動了國民革命且進一步擴大其影響力。 但是, 他們要求的「國民會議」是以職能別社會集團之代表所構成的民意代表機構, 這與西歐代議制民主主義是有所差異的。 因此, 本文藉由對1920年代中國國民會議之形質特點的討論, 希望有助於今日我們民主主義的理解, 提供省思和啓發。 是否因爲國民會議運動在現實中的失敗, 就不存有任何內涵或意義마? 對此, 我們應當主意的是1920年代「國民會議」之提出, 用以代替已毁損的「共和」之, 而成爲「關鍵語」, 這可視爲是當時中國人民對民主主義渴求的具體語言之表象。 這影響於當時各勢力間, 在타所提出的方向上, 吸引各界之力量從而引導出競爭與妥協。 在這一點上, 後來完成北伐的蔣介石政權或抵蔣勢力也是如此。 或許, 在某種分析角度上認爲南京政府在訓政體制內開設國民會議或國民參政會的方式, 雖聲稱制度化的職能代表制和民衆團體的職能代表制主張的具體實踐, 但事實上却只是共有著其國民會議之名稱, 而在其政權之發展形式和職能代表上都存在著實質的差異。 (南京政府之'由上而下'的主張與民衆自發性的'由下而上'的要求是不能相同的) 但是, 問題的核心是爲何他們同有著「國民會議」的共同語言。 在此, 我們應當重新回顧到, 當時「能구集合與論有用的工具」就是國民會議的事實。 所以1930年代圍繞國民會議各種政治勢力間競爭和妥協的複雜脈絡, 確實需要更多實證性討論和硏究。 這種實證性硏究之進行不但合乎於在南京政府時代國家和社會間的關係之瞭解, 而且使我們更能掌握法團主義(Corporatism)或其他各種理論是否適用, 及其理論和實證性硏究間的互補和互動如何可能等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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