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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類解書諸外國語音の전사표기고

        裵錫柱 경주대학교 1998 論文集 Vol.10 No.-

        본 연구는 주로 방언집석의 한ㆍ일 양국어사에 있어서의 자료적 가치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방언집석에 나타나는 제 외국어의 한글에 의한 전사표기에 관한 연구를 중심으로 당시의 언어사실에 관한 검토를 그 목적으로 한다. 특히, 방언집석의 경우 다른 왜학서와 비교할 때 대역일본어의 수준의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때문에 방언집석의 자료적 가치가 의문시되어 온 것이지만, 18세기의 한국어와의 관련 및 왜어 이외의 언어에 관한 비교연구는 그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럼으로 이 시점에서 다른 외국어의 표기를 비롯한 방언집석에 관한 다방면의 체계적인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본 논문의 연구대상은 방언집석에 수록되어 있는 漢語ㆍ蒙古語ㆍ滿洲語ㆍ倭語音의 한글에 의한 전사표기이다. 이 표기들을 방언집석의 역관들이 인용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同文類解ㆍ蒙語類解등에 나타난 각 언어음의 전사표기와 그 간행시기에 異論이 많은 倭語類解와의 비교를 통해서 조선시대 사역원에서 편찬 혹은 간행된 이른바 類解書 의 전사표기법을 밝히고 그 표기상의 특징 등을 분명히 해서 주로 유해서 상호간의 상관관계에 주목해서 각 자료의 성격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 국어 파열음·파찰음의 가나 문자 표기 고

        배석주 경주대학교 창의력개발연구소 2001 創意力開發硏究 Vol.- No.5

        本稿は, 1987年11月7日に告示された編修資料のⅡ-3, 「國語假名文字表記」をもって,韓國語の破裂音及び破擦音を日本語の假名に表記する際に發生する問題點を分析し, いわゆる編集資料の「國語の假名文字表記」の改正の必要性について檢討を行なったのである.また改正の必要が認められる場合に,注目すべき点を指摘し, それを根據に改正試案を提示するとともに,他の「國語の假名文字表記」に關連する諸問題についてのへ たものだある. 現行の「國語の假名文字表記法」によれば,韓國語の破裂音及び破擦音を日本語の假名に表記する際,韓國語の平音と激音·濃音を日本語の假名表記では區別しないことを原則としている.しかし,2000年7月7日に告示された韓國語の「新ロ一マ字表記法」は,韓國語の平音と激音·濃音を英語の有聲·無聲音を利用して區別することに改正したのである.したがって,それに應じる形て 編修資料の「國語の假名文字表記法」も改正の必要性が浮かんできたのである.本稿においては,現行の「國語の假名文字表記法」の維持と前述した「新ロ一マ字表記法」式に改正するという二つの觀点から分析を行い,現代の表記法と改正の場合の表記法がともに,プラスになるケ一スとマイナスになるケ一スがあることを指摘した上, 兩方ともに完璧な表記法にはなり得ないか ,「新ロ一マ字表記法」の改正に伴う「國語の假名文字表記法」の最小限の改正の必要性を主張し,それを根據に新しい韓國語の破裂音及び破擦音の假名文字表記を作り,その表記法を代案として提示してみたのである.

      • 朝鮮資料の性格 : 各資料間の連關性を中心に 각 자료간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裵錫柱 경주대학교 1997 論文集 Vol.9 No.-

        이른바 조선자료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본고에서는 조선자료에 나타나는 한글에 의한 탁음전사표기와 대역일본어표기를 중심으로 자료들을 비교하면서 각 자료간의 연관성에 대해서 검토해 보았다. 그결과 방어집석의 탁음전사표기와 탁음표기의 예외적인 표기라고 할 청음화 된 표기 예로부터 방언집석의 표기가 원간본 첩해신어 표기를 준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四つ假名의 표기와 일본어에 보여지는 방언적요소 등에서도 방언집석의 왜역관들이 개수본 첩해신어 등의 표기법을 무시하고 원간본 첩해신어의 표기법에 따르려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왕조시대 사역권에서 편찬 간행된 조선자료를 그 편찬 또는 간행시기로부터 추측할 때 방언빕석의 왜역관들은 당시 과시용서로 이미 쓰이고 있던 첩해신어 등을 이용해서 책을 편찬했으리라는 것은 왜역관들의 동향을 보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방언집석의 왜역관들이 다른 조선자료의 편찬에도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간행되어 있던 제1차 개수본 첩해신어와 개수중간본 첩해신어와 그 내용이 같다는 제2차 개수본 첩해신어의 표기법 등을 따르지 않고 굳이 원간본 첩해신어의 표기법을 따르려고 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ザ行音표기 등에 있어서 방언집적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표기법을 시도한 면도 없지는 않으나 전체적인 표기로 볼 때 일본어에 한정해서 본다면 그 표기의 열악함과 규범성 등으로 보아 첩해신어 등과는 달리 역관들의 일본어에 관한 지식이 의문시될 정도이다. 어휘에 있어서도 類解類인 원간본 왜어류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설에도 방언집석의 표기는 그와 같응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동 시대에 사역원에서 같이 일하던 역관들의 일본어에 관한 지식이 방언집석의 편찬시에만 유독 열악했다고 볼 수도 없고 특히 개수중간본 첩해신어의 간행은 1781년으로 그 편찬시기는 방언집석의 편찬기인 1778년과 거의 겹친다고 보아야 함으로 방언집석의 왜역관들이 개수본 첩해신어 등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방언집석의 저자 서명웅(1716-1787)은 1783년 그간의 자신이 학문적 관심을 종합 정리하여 일종의 類書인 保晩齋叢書를 저술하였고 그 다음해인 1784년에 총서에서 빠진 것들을 모아 保晩齋剩簡을 완성했는데 그 속에 당시의 통역관들이 漢語, 淸語, 蒙古語, 倭語 등의 방언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도록 편찬한 것이 방언집석(方言類釋)이다. 그는 1755년 謝恩書狀官으로 淸에 다녀왔으며 1765년 도승지 겸 홍문관 提學司譯提調가 되어 1769년 다시 淸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文獻備考 編輯堂上이 되었다는 인물이다. 즉 그는 淸의 전문가라고 해야할 인물로 倭語에 관한 지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명웅의 保晩齋叢書와 保晩齋剩簡의 중심은 先天學으로 農政 土理 등 실용에 필요한 학문을 총 망라한 내용으로 그 내용의 방대함 탓으로 극히 일부분이라 할 類書인 방언집석의 倭語표기에 소홀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청나라 전문가인 그로서는 왜어 표기의 소홀함을 간과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방언집석의 일본어사전표기에 있어서는 원간본 첩해신어의 영향이 가장 컸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조선자료 상호간의 연관성에 관해서 다루어 보았다.

      • 鷄子·전に關する小考 : 日本語學習書の語彙の地域的片寄り 일본어학습서에 나타난 어휘의 지역적 편향에 대하여

        裵錫柱 경주대학교 1994 論文集 Vol.6 No.-

        조선왕조시대 사역원에서 간행한 原刊本『捷解新語』에 보이는 일본어가 일본의 어느 지방의 말인가에 대해서는 京都지방의 속된말이 주류를 이루며 다른지역의 방언의 영향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捷解新語』이외의 일본어학습서인 『方言執役』이나 『倭語類解』등에는 이른바 중앙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 일본어의 예가 있어서 『捷解新語』의 일본어에 다른 지역의 어휘가 있는가를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일본어학습서와 방언과의 관계 혹은 자료의 성격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서 『捷解新語』에 기제된 어휘를 다른 日本語學習書와 비교 검토해본 것이다. 그 결과 『捷解新語』에 나타난 일본어 接寫表記에는 「イタミ」처럼 九州方言的 要素를 인정할 수 있는 예도 있으나 그 간행시기나 작자인 康遇聖의 삶과 간행시기등을 고려할 때 역사 東部지방의 일본어가 주류를 이룬다고 하겠으나 原刊本『捷解新語』보다 뒤에 편찬 간행된 일본어학습서의 역관들이 당시 譯科의 倭學 科試用書로 쓰이고 있었던 『捷解新語』를 참조로 책을 만들었을 터이고 『方言執役』등에도 九州方言적 요소가 많이 보여지는 점 등으로 보아 原刊本『捷解新語』의 日本語에도 그와 같은 요소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물론 「鷄子」의 例처럼 『日葡辭書』에 나타난 내용으로 보아 다른지역의 일본어의 영향보다는 오히려 중앙어의 영향이 큰 例도 있으나 『捷解新語』에 보이는 일본어의 한글에 의한 전사표기상에 나타나는 淸陰化된 표기와 四つ假名의 표기문제등을 고려해 볼때 原刊本『捷解新語』에도 그와 같은 例는 많지 않으나 다른 일본어학습서의 예에서 보듯이 이른바 中央의 문헌에서는볼 수 없는 특히 九州방언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 논한 것이다.

      • 倭學書ザ行音轉寫表記の淸音化の傾向

        裵錫柱 경주대학교 1999 論文集 Vol.12 No.1

        조선시대 사역원에서 편찬 간행된 왜학서, 즉 『첩해신어』『방언집석』등의 자료에는 일본어를 한글로 전사할 때에 한국어에는 없는 일본어의 유성음을 한글로 전사표기 하기 위해서 왜역관 나름대로의 방법이 사용되어 왔다. 그 중에서 일본어의 ザ行 탁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사용된 전사표기법에는 일부 ザ行음의 청음화된 표기가 나타나고 있다. 본고에서는 특히 ザ行음 전사표기에 사용된 「△」음가의 재고와 ザ行탁음의 청음화된 전사표기 예의 경향, 즉 구체적인 용례의 분석을 통해서 그 특징 등을 분석해서 왜학서 상호간의 관련성에 주목한 것이다. 그 결과 『첩해신어』의 제본에 나타난 청음화된 표기 예로부터는 『첩해신어』의 청음표기 예가 단순히 표기상의 잘못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 자체가 탁음과 청음의 두 형태를 갖고 있거나, 일본어의 연탁 등에 의해서 응용적으로 탁음이 출현하거나, 일본어와 한국어의 큰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결국 『첩해신어』에 나타나는 청음화된 표기 예는 당시 일본어의 음운 현상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그 전사표기 상에 있어서 한국인 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일 것이라는 사실을 추정했다. 또한 『방언집석』의 청음화된 표기 예로부터도 『첩해신어』와 같은 경향이 있다는 결론을 유추해 낼 수 있었으나, 양서의 그와 같은 유사성은 『방언집석』이 원간본 『첩해신어』의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방언집석의 일부 청음화된 예는 『첩해신어』에 그 예가 없음은 물론 그와 유사한 예도 발견할 수 없었으나, 그와 같은 예들은 방언집석에 나타나는 구주방언적 요소로서 취급될 가능성이 높음을 지적했다.

      • 『方言集釋』再考 : 原刊本『倭語類解』 との關係をめぐつて

        裵錫住 경주대학교 1995 論文集 Vol.7 No.-

        「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왕조시대 태종 15년(1451)에 사역원안에 왜학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 후 역대 왕들의 장려로 일본어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왔으나 임진란을 겪으면서 오랫동안 일반 국민의 일어사용이 금지 되었었다. 그러나 사역원에서의 일본어 연구는 전란을 계기로 더욱 활발해져서 일본어역관 양성을 위한 일본어학습서의 편찬, 간행 등 크게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역ㅇ원에서 찬찬된 「方言集釋」은 小倉進平이 언급한 이래로 선학들의 연구가 행하여져 왔으나 본고에서는 본서와 「倭語類解」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다른 일본어학습서와 비교하면서 재검토 해보았다. 「방언집석」의 일본어의 한글을 통한 전사표기는 본서가 문장형식을 취하고 있어 상당한 일본어 실력을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기상에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본서의 편찬에 일본인의 관여는 인정되지 않고 한국어 표기를 준용한 것으로 보아 다른 일본어 학습서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나 어휘만을 한정해서 보면 순수한 일본어 자료로서 연구가치도 많다고 생각된다. 본서가 편찬된 때는 1778년으로 이 시기는 「捷解新語」의 개수중간본과 현존 「왜어류해」의 편찬이 시작되었거나 준비단계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도 본서의 표기에 두책의 영향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본서의 일본어에는 특히 큐우슈우방언적 어휘가 상당수 인정된다. 그 어휘의 분포를 보면 큐우슈우에서도 쯔시마와 북부큐우슈우 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이와 같은 분포는 「왜어류해」와도 일치하므로 두책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본서의 탁음 표기상으로는 현존 「왜어류해」와 차이가 있으나 본서의 표기를 가지고 제2차 개수본「첩해신어」의 개수 년도를 추정하는 자료로서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즉, 같은 사역원에서 편찬된 자료라는 점과 본서의 표기가 원간본「첩해신어」 또는 제1차 개수본「첩해신어」를 인용한 듯하나 1781년의 개수중간본「첩해신어」 와는 차이가 있으므로 개수중간본의 복간본으로 알려진 제2차 개수본「첩해신어」는 본서의 편찬 시에 같이 만들어졌든 지 그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본서가 원간본「왜어류해」와 밀접한 관계에 있고 본서의 큐우슈우방언적 어휘가 「교린수지」에도 나와 있는 점 등을 통해서 적어도 본서의 어휘 면에 있어서는 본서의 일본어에 원간본「왜어류해」를 인용한 근거가 인정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본서의 표기에는 여전히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으로 일본어 이외의 표기를 포함한 종합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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