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 좁혀본 항목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 작성언어
        • 저자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 KCI등재

        Russian Population in Kazakhstan:An Ethno-Historical Approach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글로벌캠퍼스) 중동연구소 2013 중동연구 Vol.32 No.2

        카자흐스탄은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진 지역이다. 유럽과아시아의 교차로이자 대초원로의 주요 부분이 관통하는 지역인까닭에 고대로부터 다양한 이민의 물결들을 늘 목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카자흐스탄은 고대와 중세 시기 여러 민족들의 고향이되었다.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이동은 이 지역을둘러싼 세계 제국들의 갈등이 구체화되는 근대 시기까지 이후에도계속되었다. 18 세기 이래로 카자흐스탄은 러시아 제국의 팽창 대상 지역이되었으며, 그 과정은 1860 년대 말에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의식민지가 되는 것으로 완료되었다. 20 세기 초의 사회적 격변들로인해 러시아 제국은 붕괴되었지만 그 영토는 보존되었다. 새로운정부는 민족 국가들의 연합으로 제국을 개편하였으니 그것이 곧실질적으로는 단일한 성격을 가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이었다. 카자흐스탄 역시 이 민족 공화국들 중의 하나였으나1991 년 소련의 붕괴로 카자흐스탄 독립 공화국이 출현하게 되었다. 러시아 국가의 주요 민족 그룹으로서 러시아인은 카자흐스탄영토의 식민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군인, 공무원,탐험가, 농민 정착자로 카자흐스탄에 뿌리를 내렸다. 새로운 생활조건들에 러시아인이 적응하면서 그들은 우선적으로 토착주민들과의 사회관계 시스템들을 구축해야만 했다. 각각의 역사시기들마다 있었던 러시아의 사회-정치 상황 변화는 식민지 내러시아어 구사자 사회의 지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변화에대한 재적응을 강요했다. 본 글은 18 세기 이래 독립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출현 시기까지를8 단계의 역사적 시기로 구분하여 카자흐스탄의 러시아인의 삶의다양한 측면에 영향을 미쳤던 변화의 상황들과 그로 인해 초래된러시아인 사회의 특징들을 추적함으로써 카자흐스탄 내 러시아인사회의 역사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 KCI등재

        이루어지지 못한 귀환: 소련의 귀환 정책과 사할린한인

        방일권 동북아역사재단 2014 東北亞歷史論叢 Vol.- No.46

        종전 후 일본인 송환은 1946년 12월 〈소련점령지구 송환에 관한 미소간 협정(미소간협정)〉 체결 이후 소련각료회의에서 실무지침이 마련되었으나 1949년 7월에야 비로소 완료되었다. 그 이유는 적국민 송환을 통한 체제유지와 안보 확립을 위해 조속한 민간인 송환을 주장한 사할린 점령군과 생산시설 유지 및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 송환을 저지하고자 한 사할린 민정국의 갈등, 그리고 양자의 대립 속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한 소련 중앙정부의 태도 때문이었다. 한편 한인 귀환에 대한 검토는 탈출에 성공한 한인에 관한 해외 언론보도, 일본 규슈에 전환배치된 한인들의 진정 결과 연합국총사령부(GHQ/SCAP)가 사할린한인 규모와 귀환희망 여부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며 시작되었다. 1947년부터 이 문제가 공론화되자 골리코프를 중심으로 한 점령군은 1948년 외무장관 몰로토프를 설득해 한인들을 북한으로 모두 보내고자 구체적인 실무계획안을 확정했다. 반면에 1948년 크류코프를 중심으로 한 사할린 민정국에서는 외무차관 말맄을 통해 생산활동의 파국 방지를 명분으로 한인의 송환을 일본인 송환 뒤로 미룰 것을 주장하였다. 점령군의 ‘북한송환론’과 민정국의 ‘송환연기론’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1950년 한국전쟁 발발하자 이 문제는 그대로 모호하게 방치되어 한인의 귀환은 기나긴 정체기를 맞이했다. This paper treats politics among the central government in Moscow, the Soviet occupation army, and the local communist party in Sakhalin from 1945 to 1952. The government meetings in Moscow began to discuss the repatriation of Japanese residents in Sakhalin after the Repatriation Agreement between the Soviet Union and the GHQ was reached in December 1946. Followiing the agreement, Japanese repatriation was conducted at a very slow pace until July 1949. This was due to conflicts between the occupation army and the local communist party in Sakhalin. The former wanted instant repatriation of Japanese civilians for political security, but the latter wanted to detain the Japanese for maintaining production on the island. After the repatriation of the Japanese, detained Koreans became the ongoing issue. Some Koreans tried to escape from Sakhalin, and some among those who did escape revealed the inhuman situation of the detained Koreans. In addition, some coal miners dispatched from Sakhalin to Kyushu, in Japan, appealed to GHQ to be able to meet their families again in Sakhalin. GHQ requested detailed information about the number of detained Koreans and the repatriation policies of the Soviet Union. In early 1947, Golikov, the head of repatriation in the occupation army, commented regarding detained Koreans. He insisted on obligatory repatriation to North Korea. But Krewkov, the head of the local communist party in Sakhalin, insisted that the repatriation of Koreans should be put off until all the Japanese had been sent to Japan in order to maintain production facilities. In April 1950, the government in Moscow listened to the two contrary opinions about the Koreans, and reached a final conclusion. However, the Korean War began a short time later, and the issue of the repatriation of detained Koreans disappeared with no interest.

      • KCI등재

        카자흐스탄 엘리트의 사회배경과 씨족 정치: 소주즈(Zhuz) 출신 엘리트를 중심으로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2010 국제지역연구 Vol.14 No.1

        As for the matter of guardianship-benefit network which has been at the heart of the discussion of power elites and clan politics in Kazakhstan, it has been often maintained that it is basically formed by the framework of the regional and descent connection net called Zhuz or at least it has been heavily under Zhuz’s influence. But it is pointed out that the controversy of Zhuz suffers from a lot of limitations in explaining the surface of power elites in the recent process of political changes and the rearrangement of power relations. Consequently, this paper tried to take a closer look at the matter focusing on the social backgrounds of elites from Junior zhuz, who have been estimated to be relatively pushed back in terms of the advancement into the central power. As a result, it was found that the backgrounds of clan and tribe origin within Zhuz couldn’t have any foundation to be seen as a decisive element through which they could grow into power elites. The phenomenon of Kazakhstani elites is a legacy of concrete historic situations. The important consideration points for analyzing the emergence of elites which could be applied to a nomadic and traditional society can hardly be an invariable framework for analyzing modern elites since independence. Since 2000, Kazakhstan has experienced economic changes including privatization due to the absolute strengthening of presidential influence which turned into a foundation for a new authoritarian system, the rearrangement of the inner circle of power, and their decisions. These changes in situations have had profound effects on the character of power elites. The phenomenon that clandestine connections have shown their appearances as they have gotten intertwined with various factors, in particular, in the economic field which has been heavily under Junior zhuz makes us convinced that the elite organization in Kazakhstan has always been the product of political and economic changes. In reality, the behaviors of elites were the outcome continuously reflecting environmental situations surrounding them, and those situations lie in a complicated and multiple-layered connection net. Therefore, it is believed that having interests in elites’ social backgrounds and maintaining many pieces of information on them will be able to be a more useful approach to analyzing the elite society in the future in that interests in their social backgrounds become an informant of various network formation nets which reflect real situations. 카자흐스탄 권력 엘리트와 씨족정치 논의의 핵심이 된 후견-수혜적 네트워크의 문제는 흔히 주즈라는 지역 및 혈통적 연결망이라는 틀을 기본으로 구성되거나 적어도 그의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적 변화와 권력관계의 재편 과정에서 주즈 논쟁은 권력 엘리트의 부상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본고는 씨족 정치 논의의 한계를 지적한 후, 핵심 권력으로 진출 면에서 상대적으로 밀려난 것으로 평가된 소주즈 출신의 엘리트에 대한 사회 배경을 중심으로 면밀한 관찰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주즈 내부의 씨족 및 부족적 출신 배경을 권력 엘리트로 성장하는 결정적 요소라고 판단할 근거가 약함을 알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 엘리트 현상은 구체적인 역사 상황의 산물이다. 유목 전통 사회에서 엘리트 부상의 주요 고려점이었던 씨족적 배경은 독립 이후 현대 엘리트를 분석하는 불변의 틀이 되기 어렵다. 더욱이 2000년 이래 카자흐스탄은 신권위주의 체제의 기반이 된 대통령 영향력의 절대적 강화와 권력 내부 집단의 재편, 그리고 이들의 결정에 따라 사유화를 비롯한 경제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가 권력 엘리트의 성격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특히 전통적으로 소주즈의 비중이 컸던 경제 분야에서 씨족적 연대가 다양한 요인들과 얽히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은 카자흐스탄의 엘리트 편제는 항상 카자흐스탄의 정치 경제적 변화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 KCI등재

        러시아 교회교육과 사제계급 : 18, 19세기 전반기 사제교육을 중심으로

        방일권 韓國外國語大學校史學硏究所 1993 역사문화연구 Vol.5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 러시아 혁명과 아키비스트, 1917-1920

        방일권 한국기록관리학회 2004 한국기록관리학회지 Vol.4 No.1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 KCI등재후보

        제정러시아 한인 사회와 정교학교 교육

        방일권 재외한인학회 2015 在外韓人硏究 Vol.36 No.-

        사실상 1863년 이후 공식적인 이주민의 삶을 개척한 극동의 한인 사회는 러시아 혁명까지 50여년을 제정러시아의 영토에서 자신의 역사를 기록했다. 러시아 신민으로 정착하기 위해 이주민들은 정착지의 언어와 신앙, 새로운 교육 체제에 적응하여 삶의 기반을마련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초기 한인 사회가 접한 러시아 정교는 단지 새로운 땅의 주류 민족이 신봉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형태만이 아니었다. 한인에게 정교회는 새로운 ‘진리’로서보다는 ‘생명’ 을 위해 해결해야만 할 정착의 난제들을 푸는 현실적 ‘길’로서 의미를 가졌다는 점이 더중요했다. 게다가 정교는 새로운 정착지에서 문맹자나 다름없던 한인들에게 러시아어 교육이라는 ‘빛’을 들고 나왔다. 사실상 정교와 교육이라는 ‘진리와 빛’은 서로 분리되지 않았으며, 엄밀히 말해 러시아 사회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에게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도 아니었다. 본 글은 극동 한인 이주 사회와 정교회가 주관하던 초등교육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있다. 교육의 문제는 한인의 러시아화 정책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는바, 러시아 전제정의국내 정치적 의미라는 맥락에서 접근이 가능한 사안이다. 제정기 러시아 한인 사회의 교육 문제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민족교육을 강조하는 학교들에 치중되어 있고 교회학교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였다. 학교 설립의 주역이 누구였고, 학교의 수적 변화와 한인 사회의 반응을 살펴보는 일은 극동 한인 사회를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교회학교는 극동 한인들의 러시아화를 살피기에 적합한 주제이다. 이를 통한 한인의 러시아화 정책을 재고해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Since 1863 and up to the October Revolution for more than 50 years Korean immigrants recorded their history in tsarist Russia. In order to fix as russian subject and to strengthen their position Koreans should solve the urgent problem to prepare the foundation of life as like learning russian language, adapting the new system in faith and education of territory in which they live. Russian Orthodox Church for the first Korean immigrants was not just a form of christian faith that preached to the citizens, for them, of the new country. Orthodoxy was for Korean immigrants more the way to solve the problem of ‘living’ in the new territory than the way to ‘the truth’. Furthermore, to the Koreans the church was “a ray of light” in the darkness of illiteracy: it gave them the opportunity to learn the Russian language. In fact, to Koreans ‘the truth and the light’ of Orthodoxy were not separated from each other. Strictly speaking, Christianity was the only way to secure the migrants on Russian soil. For korean immigrants being a member of orthodox church had a practical significance in the process of adaptation in the Russian territory: through it they could learn the Russian language, be included in the system of Russian ecclesiastical education, and, in addition, show themselves as loyal subjects of the state and the church. In this article we have focused on the Korean community of immigrants and the elementary school under the control of Russian Orthodox Church. The topics on education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russification’ policy of korean migrants, so they can be accessed in the context of domestic policy. In the korean studies on educational issues in korean immigrant communities in Far East, the topic of parish schools had received little attention comparing with the korean ethnic schools. Our goal is to consider the process of acculturation of korean communities in tsarist Russia through questions on church parish schools - who founded them, how to change their number, what was the reaction from the Korean and Russian leaders and so on.

      맨 위로 스크롤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