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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고대사에서 종족성의 인식

        박순발 한국고대사학회 2006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44

        Some Considerations on the Perception of the Ethnicity in Ancient Korean History '異邦人'이란 辭典的 의미로는 '異國人' 즉, '다른 나라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과 함께, 특정 종교의 신자 이외의 사람들을 일컫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방인'은 주체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므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에 대응되는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방인을 나라 나라의 사람이라 할 경우 그 범주의 경계는 국가라는 정치체가 될 것이지만, 국가가 부단히 성장해 온 점을 감안하면 이방인으로 인식되는 객체는 부단히 주체로 전환되기도 한다.한편, 이방인은 주체와 다른 별도의 종족집단(Ethnic group)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종족성(Ethnicity)의 인식토대에는 原生的(Primodial)인 측면의 요소가 있기도 하지만 필요에 의한 자기 규정적(Instrumental) 측면도 작용하기 때문에 그 시제가 과거인 역사학 혹은 고고학에서 종족성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고고학에서 종족성을 인식하려는 노력은 일찍부터 있었으나 대체로 종족성의 차이는 물질자료의 樣式에 비교적 잘 반영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양식은 특정 문화가 규정하는 규범을 수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관점과, 양식 그 자체를 통해 능동적으로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 있으나 어느 경우이든 해당 양식 표현 집단내부 또는 집단 사이의 사회적·경제적 긴장이 높을수록 양식상의 차이가 뚜렷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민족지연구 결과는 인정될 수 있다. 한국사라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청동기시대 이래의 선사 영역에서는 자비용기, 화덕, 주거지의 구조 등의 고고학자료 상의 차이를 종족성의 차이로 인지될 수 있으며, 문헌사료가 남아 있는 원삼국시대 이후는 묘제, 토기 양식 등의 고고학자료와 문헌사료를 대비 관찰해봄으로써 종족성에 접근할 수 있다.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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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불사 입지 비교 연구

        박순발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19 百濟硏究 Vol.70 No.-

        Baekje adopted buddhism from China in 384 AD. and founded buddhist temple in palace next year. This article focuses on the locational condition of the ancient Korean buddhist temple, especially on Baekje Dynasty. What it taking a look round Chinese buddhist temple’s location at that time comes down to is as followings ; to be summarized 4 stage of changing process. The first stage : Only immigrant merchant believed buddhism, native Chinese should not be granted to be a believer. Accordingly the location of temple is close to their settlement, that is, market place of capital city. The second stage : Ruler as emperor or king adopted buddhism, respectfully invited famous monk into his palace and endeavored to spread buddhism around the time which is called 16 states(十六國) period of China 4th Century A.D. In this time buddhist temple was built within palace or its vicinity. The third stage : People of all ranks or classes believe buddhism, accordingly in the big city like capital city had a location many temples. Meanwhile, some buddhist temple was builted in suburb which is beautiful scenery of mountain. The fourth stage : In Sui(隋) dynasty was necessary the control on the rampantly prevailing of buddhism. To remove buddhist temple building’s negative effect on economic and social aspect government took the measure temple permission system which controled total number of temple in the capital city. The result of these measure was implemented in city planning. On the basis of above mentioned trend it is concluded that the adoption stage of Baekje buddhism coincide with chinese buddhism adoption stage 2, and from 6th century till middle of 7th century that called Sabi(泗沘) period all temple had been built within metropolitan of capital city. 백제는 384년 동진(東晋)으로부터 불교를 수용, 385년 불사(佛寺)를 건립하였다. 본고는 불교가 가장 번성하였던 사비시기(538~660년)를 중심으로 불사의 입지적 특징을 파악하였다. 백제 불사의 입지적 특징과 비교하기 위해 먼저 중국의 불사 입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4단계의 변천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제1단계, 교역에 종사하는 서역 상인들의 거주와 함께 불교가 중국에 알려진 단계로서, 교역의 장이었던 도성 대시(大市) 주변 외래민 거주취락에 인접하여 불사가 분포하였다. 제2단계, 정권의 통치자인 황제나 왕이 불교를 신봉하고 고승대덕을 앞다투어 초빙ㆍ예경(禮敬)하던 시기로, 대체로 16국시대에 해당한다. 승려의 거주 및 수행 공간은 궁성 내에 마련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3단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해당하는 불교 융성시기로서, 사회 각 계층이 모두 불교를 신앙하였으므로 도성을 비롯한 도회에는 다수의 불사가 건립된다. 그리고 이 단계부터 도성 주변 청정(淸靜) 산지 입지 불사가 본격화되기도 한다. 제4단계, 581년 수(隋)의 건국으로 사회 전 부문에 걸쳐 남북조 제도의 융합 및 새로운 신제도 출현 및 시행 단계로서 수ㆍ당대가 그에 해당된다. 남북조시대 북위 낙양성 및 남조 건강성 내 무수한 불사 건립으로 인한 사회ㆍ경제적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서 전체 불사 수량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였다. 도시계획에 중요 불사의 입지가 사전에 반영되면서 공간적 기획성이 더욱 높아진다. 백제가 처음 불교를 받아들이는 무렵은 중국 불사 입지의 제2단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궁성 내부나 궁성과 가까운 곳에 불사가 위치하였다. 불교가 매우 융성하였던 사비기의 불사는 모두 도성 내부와 기내(畿內) 지역에 건립되었다.

      • KCI등재

        土器相으로 본 湖南地域 원삼국시대 編年

        박순발 호남고고학회 2005 湖南考古學報 Vol.21 No.-

        고구려, 백제, 신라 등으로 대표되는 삼국의 鼎立期에 대하야 ‘三國時代’로 인식해온 전통 역사관을 존중한다면 그러한 삼국시대의 원초적 단계로서 ‘原三國時代’의 개념은 유용하다. 원삼국시대는 대략 기원전 100년경 남한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樂浪文化의 영향을 받아 백제, 신라 등의 국가 단계 정치체가 성립하기까지의 과도기이다. 호남지역의 원삼국시대는 토기상의 변천을 토대로 5기로 구분할 수 있다. 각 분기별 토기양상 및 曆年代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I 기(기원전 100~기원전 50년) : 삼각구연점토대토기 단순기 II 기(기원전 50~기원후 50년) : 경질무문토기 외반구연 심발 및 평저 시루 III 기(50~200년) : 경질무문토기 외반구연 심발, 원저 시루, 장경호 승문타날 단경호 IV 기(200~250년) : 격자타날 장란형토기, 격자타날 심발형토기, 무문양 평저 시루, 평행타날 단경호, 兩耳附壺, 帶頸壺 등. V 기(250~350년) : 격자타날 尖底 長胴 장란형토기, 대형 시루공 牛角形把手 평저 시 루, 격자타날 대형 시루공 평저 시루, 直口短頸壺 등.

      • KCI등재

        大田 今古洞山城

        박순발,김민선,박은선,신경택,전민경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09 百濟硏究 Vol.49 No.-

        Kemko-dong mountain fortress had been known as Baekje mountatin fortress through a survey in 1990s. But there is nothing investigated about the accurate scale, plane form and the technique of construction of walls. And the West part of Kemko-dong mountain fortress was damaged by building a dump. That's why Kemko-dong mountain fortress couldn't been investigated. Kemko-dong mountain fortress had been investigated about the scale, shape and the technique of construction during this investigation. And we could know that this site had been used for 2 periods from Sabi period Baekje to Unifying Shilla end. The strategic location of Kemkodong mountain fortress was very important because people could see where two rivers meet one another and mountain fortresses which were located East. Even though Daejeon is very important site because Daejeon is located at the boundary of Koguryo, Baekje, Shilla mountain fortress walls haven't been investigated well in Daejeon. So this investigation about Kemkodong mountain fortress was started from this critical mind and we hope this investigation can be a foundation for future investigations. 금고동산성은 1990년대 지표조사를 통해 학계에 백제산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정확한 규모나 평면형태, 그리고 성벽의 축조 기법 등에 대해서는 아직 학술적 조사가 이루어 진 바가 없었다. 또한 주변에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서면서 성의 서쪽부분이 훼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금번 조사를 통해 금고동 산성의 규모와 형태, 축조기법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출토된 유물을 통해 사비기 백제와, 나말여초의 2시점에 걸쳐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금고동 산성은 사비기 백제에 있어서 갑천과 금강이 합류하는 곳과 갑천 동쪽에 위치한 주변 산성들을 잘 관찰할 수 있어 전략적 위치가 매우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를 가진 대전에서는 아직 이들 산성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미흡한 실정이다. 금번 금고동산성에 대한 조사는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향후 본격적인 학술조사를 위한 기초가 되기를 바란다.

      • KCI등재

        무령왕릉 묘지(墓誌) 형태 비교 연구

        박순발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20 百濟硏究 Vol.72 No.-

        The hole on King Muryeong’s epitaph once was assumed originated from gravestone’s characteristic hole called ‘Cheon(穿)’. But until now there is no consensus on this problem. This article focuses on the origin of the epitaph hole of King Muryeong of Backje. The practice of epitaph interment had begun since Jin(晉), at the time which government prohibited the erection of memorial tombstone on the ground . In fact epitaph interment could be considered as underground miniature of memorial tombstone, and the appearance of both was almost same at that time. Chinese traditional memorial tombstone took a form during Han(漢) dynasty, originally from tomb construction wooden pillars, which were erected near the corner of grave pit and used as support post of downing pulley block. For that reason has a appearance the hole on the head of post fixing block and belt frictional vestige on the surface. The former is so called ‘Cheon(穿)’, the latter is a characteristic decorative motif of memorial tombstone. After East Jin(東晉) the form of epitaph gradually change from a original memorial tombstone style to rectangle type, and the material of epitaph also made of brick or tone. But the basic idea of epitaph as underground tombstone still remained, and at that reason some case of epitaph was set the location in the center of burial chamber entrance that is symbolically same position of tombstone on the ground. The epitaph of King Muryeong has some similar characteristics with latter East Jin or Early Song(宋) period’s. Time lag between real time of King Muryeong’s tomb and the style of epitaph practice is supposed to be more than one century. Considering these contextual trend of epitaph practicing the hole of king Muryeong epitaph has a deep affinity with ‘Cheon(穿)’ of memorial tombstone. 무령왕릉 묘지에 뚫려 있는 천공에 대해 발굴보고서 작성 당시부터 비천(碑穿)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었다. 그 후 식반(式盤) 모방설, 백제 고유 상장문화 기원설 등이 제기되었으나 묘지가 기원한 당시 중국의 상장문화에 대한 맥락적 접근이 부족하였다. 묘지는 묘비와 함께 후장(厚葬)이 보편화되었던 동한(東韓) 무렵에 등장하여 서진(西晉) 이후 정형화된다. 위진(魏晉) 시기의 박장령(薄葬令) 및 금비령(禁碑令)으로 인해 위축된 묘비가 묘실 내부로 축소 이전된 데에 원인이 있다. 선진(先秦)시기의 비(碑)는 땅위에 세운 석재 기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한에 이르러 무덤 조영 시 하관(下棺)용 석재 혹은 목재 기둥에 망자의 이력이나 공덕 등을 새긴 묘비의 출현과 더불어 각자비(刻字碑)가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하관시 도르래를 설치한 구멍에서 기원한 비천(碑穿)과 함께 줄에 의한 마찰흔에서 유래한 훈문(暈紋) 등은 그러한 묘비의 유래를 말해준다. 서진대 묘지는 묘비 형태를 모방한 비형묘지가 주종이다. 동진 시기 북방 사족들의 남천 과 함께 강남지역에도 묘지문화가 확산되었다. 동진 초기에는 중원 수복 및 귀장(歸葬)의 염원이 강하여 묘지는 이후 천장을 위한 간단한 표지(標識)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벽돌 재질에 묘주의 신원, 사망 일시, 안장 일시 등만을 기록한 것이었다. 동진 후기에는 고토 회복 및 회향 의식의 소멸과 더불어 묘지문화도 달라진다. 벽돌 재질이 석재로 전환되고 서진대 이래의 비형묘지는 묘지 고유의 장방형 혹은 방형 석판 묘지로 바뀐다. 그와 함께 묘지 내용도 서(序)와 명(銘)으로 구성된 정형화된 묘지 문체가 확립되었다. 무령왕릉 묘지는 방형에 가까운 형태의 석제 묘지이고, 그 내용도 간략하다. 이러한 면모는 동진 후기·남조 초기의 묘지문화에 흡사하여, 무령왕릉 조성 시점보다 약 1세기 정도의 시간적 정체성(停滯性)이 확인된다. 묘지와 함께 매지권을 구비한 점이나 묘지의 위치가 연도 중앙이라는 점 등은 그러한 양상과 부합된다. 이러한 상장문화의 전개를 염두에 두면 무령왕릉 묘지는 아직 묘비의 개념이 잔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묘지의 천공은 비천(碑穿)을 제외하고 그 유래를 상정하기 어렵다. 2매로 구성된 묘지 정면과 반면을 모두 각자한 점 역시 묘비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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