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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혁명 이전 천주교와 동학의 상호 인식

        박대길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8 인문과학연구 Vol.0 No.19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mutual understanding among the believers in Donghak and Catholicism before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of 1894. Specially the following aspects of the two religious faith would be highlighted. How did Catholic believers understand the stern realities of those days since they embraced Catholicism voluntarily, and suffered the bitter oppression from the government, thus strengthened their religious faith? Under what background was Donghak advocated? What change had Donghak undergone since then? It was inevitable that Joseon's established system of the yangban class was in conflict with the tenet of Catholicism, which had been accepted as a religion in the end of the 18th century, and with the thought of Donghak, which had been advocated in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Moreover, as the Joseon dynasty was facing a critical crisis in and outside the country in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people sought to obtain a comfort from a religion. At that time Donghak and Catholicism attracted the people because they gave some amusement, although the one is native and the other is foreign. In short, their principle of equality and idea for a new world coincided with the emotions of the people. It has been widely accepted that the believers of Donghak and Catholicism recognized each other in the negative. Donghak followers contained the rejection of Catholicism in the tenet, and also included Catholicism in their movement against the foreign influence. On the other hand, Catholic believers concluded that Donghak was an absurd superstition or paganism, and they even regarded Donghak peasants as a mob or guerrillas. Thus their difference of recognition led to the opinion that they were extremely hostile to each other. But Donghak had something in common with Catholicism to some degree that the people thought Donghak was in the same or bad second category as “western learning”(seohak). And both of them also suffered a strong oppression and a lot of pressure from the government and the privileged class. It came from the plain fact that they shared the principle of equality, the denial of the present, and the eager desire for a new world with each other, and that these threatened the established system based upon the yangban class system. Thus, Catholic believers went through a cruel suppression from the privileged class, for example, the government, the ruling class, and the wealthy landowners, ever since the religion had been first accepted to the Joseon dynasty, while Donghak followers suffered from the same class ever since Choe Je-u had advocated it. It should be remembered that there are essentially something both similar and different among all religions. So we need the mutual respect based upon the understanding about the other religion. But Joseon society was in difficult circumstances in the late 19th century under which such respect could not be permitted. This was a tragedy for the country. 본 논문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전 동학과 천주교의 상호 인식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한 전제로, 천주교는 조선인의 자발적인 수용과 탄압 및 성장 과정 중에 형성된 그들만의 세계관에 대해서, 동학은 창도와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주목하였다. 18세기말에 이르러 종교로써 수용된 천주교와 19세 중엽에 창도된 동학의 사상과 종교적 교리는 신분제를 근간으로 한 기존의 사회질서와 충돌하였다. 더욱이 19세기 말엽의 조선사회는 대내외적으로 위기의식이 고조되던 시기로 민중은 정서적인 안정을 종교에서 찾고자 하였다. 마침 동학과 천주교는 민족종교와 외래종교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중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것은 이들의 평등사상과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이상이 민중의 정서와 부합된 까닭이었다. 한편 양자는 서로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동학은 자체의 교리에 천주교를 배척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반외세운동에 천주교를 포함시켰다. 천주교는 동학을 미신이나 이교로 단정하였을 뿐 아니라 동학농민군에 대해서는 폭도나 비도 등으로 여겼다. 이러한 양자의 인식으로 인해 마치 극단적인 적대적 관계가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동학은 서학의 동류나 아류로 알려질 정도로 천주교와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정부와 기득권세력에게서 탄압과 핍박을 받았다. 그것은 양자가 지니고 있는 평등사상과 현실부정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등이 신분제를 근간으로 하는 기존의 사회질서를 뿌리 채 부정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천주교는 수용 초기부터, 동학은 교조인 최제우 때부터 정부와 지배층 그리고 토호세력을 비롯한 기득권층에게 핍박과 탄압을 받았다. 본질적으로 모든 종교는 유사성과 함께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할 때, 타종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상호존중은 필요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이것이 용납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 KCI등재

        ON A p-ADIC ANALOGUE OF k-PLE RIEMANN ZETA FUNCTION

        박대길,손진우 대한수학회 2012 대한수학회보 Vol.49 No.1

        In this paper, we construct a ρ-adic analogue of multiple Riemann zeta values and express their values at non-positive integers. In particular, we obtain a new congruence of the higher order Frobenius-Euler numbers and the Kummer congruences for the Bernoulli numbers as a corollary.

      • KCI등재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고부봉기

        박대길 동학학회 2012 동학학보 Vol.0 No.25

        동학농민혁명은 1892-1893년 교조신원운동과 1893년 11월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거쳐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그 당시는 물론 현행 검인정교과서 등에 실려 있으며, 다수의 국민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무장봉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은 고부봉기를 ‘민란’ 또는 실패한 ‘봉기’로 규정할 뿐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이전 단계 등으로 한정짓는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거나 왜곡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특정 사실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편의적인 사료비판과 인용, 역사적 사실의 인과관계에 대한 부정과 단절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고부봉기는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에 맞서 사전에 준비된 사발통문 거사계획 등 구체적인 계획에 따라 고부관아를 점령한 사건으로, 이를 계기로 혁명의 전국화가 시작되었다. 즉 혁명의 주요 지도자들과 군중의 결집을 위한 명분과 상징적 의미를 갖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한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무장봉기와 백산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는 혁명의 전국화에 필요한 단계적 결집과 과정이었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의 초기 과정은 사발통문 거사계획에 기반한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군중을 백산에 결집시키기 위한 과정으로서 무장봉기, 동학농민군의 대오를 갖추고 혁명의 당위성과 성격을 명백히 밝힌 백산대회로 확대 지속되었다. 또한 무장봉기는 고부봉기에서 백산대회로 이어지는 연속선이자 거점이었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초기 과정은 하나의 연속선상으로 파악되며, 반봉건․반침략으로 이해되는 동학농민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KCI등재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 과정에서 백산대회의 위상

        박대길 동학학회 2022 동학학보 Vol.- No.62

        사건이 일어난 1894년은 물론 그 이후 동학농민혁명은 고부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85년 이후 무장기포가 시작으로 알려지면서 고부의 봉기가 동학농민혁명에서 제외되는 등 논란을 지속하고 있다. 이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초기 전개 과정을 정리하고, 백산대회의 성격과 의미, 그리고 위상을 확인하였다. 이를 위해서 연구사 검토와 각 사건의 인과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동학농민혁명의 초기 전개 과정은 사발통문 거사계획, 고부봉기, 무장기포, 백산대회로 이어진다. 그런데, 무장기포를 혁명의 시작으로 설정하면서 고부봉기 이전은 동학농민혁명의 전사(前史) 또는 배경, 백산대회는 실체 불명(不明)으로 경시하였다. 이에 고부봉기부터 무장기포, 그리고 백산대회로 이어지는 전개 과정을 미시사(微視史) 연구 방법으로 연구하였다. 그 결과 각 사건의 성격과 연속성을 확인하였다. 연구의 결과, 동학농민혁명의 초기 전개 과정이 뒤틀린 원인 중의 하나는 초기 전개과정을 개별 사건으로 구분하고 분리한 후 단절시킨 결과였음을 확인하였다. 즉 고부봉기를 민란과 실패로 규정하고 무장기포와 단절시켰으며, 오랫동안 3월 봉기가 백산대회를 가리켜 왔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백산대회를 부정하며 3월 봉기를 무장기포로 해석한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앉으면 죽산, 일어서면 백산’으로 상징하는 백산대회가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 과정의 정점으로 혁명을 시작한 3월 봉기였음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 과정의 뒤틀린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고, 백산대회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In 1894, when the incident occurred, as well as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t was reported that it started from Gobu[古 阜]. However, since 1985, Mujang-Gipo[茂長起包] have been known as the beginning of the uprising, and the uprising of Gobu has been excluded from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Based on historical facts, the early development proces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summarized and the characteristics, meaning, and status of the Baeksan-Convention[白山大會] were confirmed. For this purpose, the researcher reviewed the history of the research and examined the causality of each case. The early development proces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leads to the plan of the Sabal-Tongmun[沙鉢通 文], Gobu uprising[古阜蜂起], Mujang-Gipo, and the Baeksan- Convention. However, as the armed artillery was set as the beginning of the revolution, the transfer of the Kobu-uprising was regarded as background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the Baeksan-Convention as an unknown (substantive). The process of development from the Kobu-uprising to the Mujang- Gipo and the Baeksan-convention was studied by the method of Microstoria. As a result, the continuity was confirmed through the characteristics and leading figures of each event. As a result of the study, it was confirmed that one of the causes of the initial development proces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the result of separating and separating the initial process into individual events. In other words, the Kobu- uprising was defined as a civil war and failure, cut off from Mujang-Gipo, ignored the fact that the March uprising[三月蜂起] had long pointed to the Baeksan tournament, denied the Baeksan tournament, and interpreted the March uprising as armed bubbles. Through this study, it was confirmed that the Baeksan-Convention, which symbolizes ‘Juksan if you sit down, Baeksan when you stand up’, was the March uprising that started the revolution as the peak of the early development proces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is corrected the distorted historical facts of the early development proces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set the stage for the Baeksan- Convention.

      • KCI등재후보

        歷史的으로 본 韓中關係 - 壬辰倭亂과 東學農民革命을 中心으로 -

        박대길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2017 韓中關係硏究 Vol.3 No.2

        歷史 이래 韓國과 中國은 不可分의 관계를 맺어 왔다. 兩國 사이에는 時代的 環境과 條件에 따라 友好的 또는 敵對的 관계가 交差하였다. 그 결과가 肯定的이었거나 否定 的이었거나를 떠나 양국은 未來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에 처해 있다. 한국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역사의 浮沈을 겪어왔다. 그 원인 중의 하나가 地政學的으 로 大陸과 海洋의 交叉點에 위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悠久한 역사를 간직할 수 있었다. 그것은 自體의 力量을 根幹으로 周邊 環境을 事大交隣의 外交政策 으로 적절하게 활용한데서 비롯된다. 이것은 不可分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중 국과 日本과의 관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壬辰倭亂에 직면한 조선은 事大交隣政策에 입각하여 國難克服을 위한 방법의 하나 로 明에 援軍을 요청하였다. 명은 내부적으로는 ‘脣亡齒寒’의 전략적 판단으로, 외부적 으로 ‘春秋大義’를 명분으로 삼아 參戰하였다. 그 결과 日本軍을 撤收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쟁 당시 明軍의 專橫과 獨斷과 橫暴는 물론 終戰 이후 ‘再造之恩’을 앞 세운 일방적인 요구는 양국 관계에 부정적으로 작용되었다. 한편 壬午軍亂과 甲申政變 당시 조선 旣得權勢力의 요청을 받아 개입한 淸은 전통적 인 한중관계에서 벗어난 ‘宗主國과 屬國’의 관계를 조선에 요구하였다. 이것은 양국관 계에 부정적으로 작용되었고, 이후 日本에 맞선 共同對應마저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東學農民革命과 淸日戰爭은 두 나라에 失敗와 挫折, 심지어 국가의 恥辱이라는 不名 譽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勿忘國恥’의 역사적 敎訓으로 삼아 ‘振興中華’ 로 승화시키고 있다. 한국은 2017년 ‘촛불혁명’을 계기로 ‘積弊淸算’과 ‘國民統合’의 정신으로 삼아 民主社會로 나아가고 있다. 이처럼 韓中兩國은 이들 사건을 역사의 교 훈으로 삼아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 있다. 임진왜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은 한국과 중국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한다. 상대에 대한 尊重과 理解를 바탕으로 相生하는 한중관계를 圖謀하는 것이야말로 이들 사건에서 배우는 역사의 교훈이 될 것이다. Chosun, facing with Hidyoshi’s Invasion of Korea in 1592, asked Ming for reinforcements based on Sadaegyorinjeongchaek[事大交隣政策] as one of the ways to overcome a national crisis. Ming entered the war as a strategic decision of ‘teeth chill without lips[脣亡齒寒]’ internally, and the name of ‘the Confucian thought of righteousness[春秋大義].’ Thus, they could achieve withdrawal of Japanese troops. However, Ming’s abusing their power, arbitrariness, and arrogation during the war as well as unilateral demands imposing their help after the war affected negatively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the Sino-Japanese War gave the two countries failure and frustration, and even brought a disgrace to the nations. But China is turning its ‘Unforgettable national humiliation[勿忘國恥]’ into a historical lesson and sublimating it to ‘a promotion of the country[振興中華].’ Korea is moving towards a democratic society with a spirit of ‘Cleaning up a long existing abuse[積弊淸算]’ and ‘National integration[國民 統合]’, taking ‘Candlelight Revolution’ as a momentum. Like this, Korea and China are moving into a new era by taking historical lessons from these events. Hidyoshi’s invasion of Korea in 1592,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Sino-Japanese war let us know that Korea and China are indissolubly linked. Promoting Korean-Chinese coexisting relations, based on respect and understanding for both counterparts, is the best lesson of history learnt from these events.

      • KCI등재

        자기공진방식 무선전력전송 등가회로 추출 및 특성 분석

        박대길,김영현,구경헌,Park, Dae Kil,Kim, Young Hyun,Koo, Kyung Heon 한국항행학회 2017 韓國航行學會論文誌 Vol.21 No.4

        본 논문에서는 6.78 MHz 에서 공진하는 대형 코일을 이용한 자기공진방식 무선전력전송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3차원 전자계 시뮬레이션, 자기공진방식 무선전력전송 등가회로를 통한 특성을 비교하였다. 본 논문에서 제시한 자기공진방식의 무선전력전송 등가회로는 기존 등가회로에 추가적으로 코일 간에 발생하는 기생 커패시턴스를 고려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자기공진방식 무선전력전송 코일을 측정하고 시뮬레이션 예측과 비교하였다. 비교 결과 전송 특성 및 공진 주파수 천이 정도를 예측할 수 있었다. 제시한 자기공진방식 무선전력전송 등가회로 특성과 측정치의 오차는 ${\Delta}{\mid}S11{\mid}$이 최대 1.31 dB, ${\Delta}{\mid}S21{\mid}$이 최대 1.36 dB로 유사하게 예측하였다. In this paper, we propose a magnetic resonant WPT(wireless power transfer) scenario using a large coil resonating at 6.78 MHz, and compare the characteristics through a three-dimensional electromagnetic field simulation and a magnetic resonant WPT equivalent circuit. The magnetic resonant WPT equivalent circuit proposed in this paper considers the parasitic capacitance generated between the coils in addition to the conventional equivalent circuit. Based on this analysis, we fabricated the magnetic resonant WPT coil and compared it with simulation prediction. As a result of comparison, the transfer characteristics and the resonance frequency shift can be predicted. Error proposed characteristics of equivalent circuit for the magnetic resonant WPT and the measured values are estimated to be ${\Delta}{\mid}S11{\mid}=1.31dB$ and ${\Delta}{\mid}S21{\mid}=1.21dB$, respectively.

      • KCI등재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전주 녹두관 안치(安置)에 관한 고찰

        박대길 동학학회 2022 동학학보 Vol.- No.61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the unnamed Donghak Peasant Army leader from Jindo, who had been neglected for many years, was enshrined in Jeonju’s Nokdugwan, and what significance the exhibition hall [cemetery] named Nokdugwan was. To this end, first, the process leading to the burial of the remains of the unnamed Donghak Peasant Army leader, who had been neglected for 23 years after the national reunion in 1996, was examined. Second, the background of the creation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Jeonju was divided by period. Third, when and how the space named Nokdu Hall was created, and fourth, the problems and alternatives of placing the Nokdu Hall were examined.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it is the fact that the remains of the unnamed Donghak Peasant Army leader were enshrined in the water tank of the Wansan Water Purification Plant built by the Japanese for the Japanes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was included in the 『Jeonju Donghak Peasant Revolution Basic Plan for History and Culture』 ordered by Jeonju in 2015. Second, those who promoted it not only overlooked this fact, but also violated the “Criminal Act” and the “Business Act,” as well as administrative procedures. Third, installing the sarcophagus on the cement floor and placing the ashes in a wooden box is highly likely to damage the ashes. Fourth, these actions resulted in the revival of colonial remnants and the destruction of national spirit. Fifth, it was confirmed that those who had neglected their ashes in the process of enshrining Nokdugwan were exonerated, and that there was an unprecedented legal dispute.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set a precedent and set a precedent to prevent such cases from reoccurring in the future. 본 연구의 목적은 수년간 방치한 진도 출신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 의 전주 녹두관 안치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녹두관이라 이름 지은 전시관[묘역]이 어떤 의미를 가진 공간이었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1996년 국내 봉환 이후 23년 동안 방치 한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의 안치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두 번째로 전주 동학농민혁명 녹두관 조성 배경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셋째는 녹두관이라 이름 지은 공간이 언제 어떻게 조성되었는 지, 넷째는 녹두관 안치의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을 위해 서 일본인이 조성한 완산정수장의 물탱크에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을 안치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2015년 전주시에서 발주한 『전주 동학농민혁명 역사문화벨트 기본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둘째, 이를 추진한 이들이 이 사실을 간과했을 뿐 아니라 「형법」과 「장사법」은 물 론 행정절차를 이행하지 않고 위반했다. 셋째, 시멘트 바닥에 석관을 설치하고, 나무상자에 유골을 담아 안치함으로써 시나브로 유골이 훼 손될 가능성이 크다. 넷째, 이러한 행위로 인해 식민잔재의 부활과 민족정기의 파괴라는 불명예를 낳았다. 다섯째, 녹두관 안치 과정에서 유골을 그간 방치한 이들이 면죄부를 받았고, 전대미문의 법정 분쟁이 있었다. 따라서 향후 이와 같은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 고 선례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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