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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무선전력전송 송수신코일 거리에 따른 효율 및 임피던스 특성 해석

        박대길,김영현,구경헌 한국항행학회 2022 韓國航行學會論文誌 Vol.26 No.3

        본 논문에서는 드론 무선충전을 위해 지상 고정 무선전력전송 송신기에 착륙하는 드론과 같이, 고정 송신기와 상대적인 거리 및 코일 정렬이 변화하는 수신기에 적용하는 6.78 MHz 자기공진 무선전력전송 기술을 제안하였다. 송신 및 수신 코일간 상대 거리와 코일 면적 부정렬비 등에 따른 전력전달 특성을 연구하였다. 송수신 코일은 직접급전방식으로 60x80mm2 크기로 설계하고 상대거리 최대 50mm에서 수평방향 면적부정렬 상태를 가정하여 코일 중심축이 XY평면에서 각각 0-40mm 어긋날 때 특성을 유도하였다. 송수신 코일간 거리 및 면적부정렬비에 따라 3차원 전자계 시뮬레이션을 통한 전력전송특성을 유도하고 제작한 시스템 특성을 시뮬레이션과 비교하였다. 무선전력전송 송수신 코일간 시뮬레이션 특성과 측정치는 수직거리 최대 30mm, 50% 면적 부정렬 상태에서–3dB 이상의 전달특성을 나타내었다. 본 연구를 통해 송수신기간의 상대거리 및 부정렬 상황에 따라 직접급전 방식에 따른 특성을 예측할 수 있었으며 직접급전 방식은 송수신 코일간 상대적 거리가 짧고 부정렬 면적비가 작아 결합계수가 큰 경우 유리함을 알수 있었다.

      • KCI등재

        歷史的으로 본 韓中關係 - 壬辰倭亂과 東學農民革命을 中心으로 -

        박대길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2017 韓中關係硏究 Vol.3 No.2

        歷史 이래 韓國과 中國은 不可分의 관계를 맺어 왔다. 兩國 사이에는 時代的 環境과 條件에 따라 友好的 또는 敵對的 관계가 交差하였다. 그 결과가 肯定的이었거나 否定 的이었거나를 떠나 양국은 未來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에 처해 있다. 한국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역사의 浮沈을 겪어왔다. 그 원인 중의 하나가 地政學的으 로 大陸과 海洋의 交叉點에 위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悠久한 역사를 간직할 수 있었다. 그것은 自體의 力量을 根幹으로 周邊 環境을 事大交隣의 外交政策 으로 적절하게 활용한데서 비롯된다. 이것은 不可分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중 국과 日本과의 관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壬辰倭亂에 직면한 조선은 事大交隣政策에 입각하여 國難克服을 위한 방법의 하나 로 明에 援軍을 요청하였다. 명은 내부적으로는 ‘脣亡齒寒’의 전략적 판단으로, 외부적 으로 ‘春秋大義’를 명분으로 삼아 參戰하였다. 그 결과 日本軍을 撤收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쟁 당시 明軍의 專橫과 獨斷과 橫暴는 물론 終戰 이후 ‘再造之恩’을 앞 세운 일방적인 요구는 양국 관계에 부정적으로 작용되었다. 한편 壬午軍亂과 甲申政變 당시 조선 旣得權勢力의 요청을 받아 개입한 淸은 전통적 인 한중관계에서 벗어난 ‘宗主國과 屬國’의 관계를 조선에 요구하였다. 이것은 양국관 계에 부정적으로 작용되었고, 이후 日本에 맞선 共同對應마저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東學農民革命과 淸日戰爭은 두 나라에 失敗와 挫折, 심지어 국가의 恥辱이라는 不名 譽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勿忘國恥’의 역사적 敎訓으로 삼아 ‘振興中華’ 로 승화시키고 있다. 한국은 2017년 ‘촛불혁명’을 계기로 ‘積弊淸算’과 ‘國民統合’의 정신으로 삼아 民主社會로 나아가고 있다. 이처럼 韓中兩國은 이들 사건을 역사의 교 훈으로 삼아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 있다. 임진왜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은 한국과 중국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한다. 상대에 대한 尊重과 理解를 바탕으로 相生하는 한중관계를 圖謀하는 것이야말로 이들 사건에서 배우는 역사의 교훈이 될 것이다. Chosun, facing with Hidyoshi’s Invasion of Korea in 1592, asked Ming for reinforcements based on Sadaegyorinjeongchaek[事大交隣政策] as one of the ways to overcome a national crisis. Ming entered the war as a strategic decision of ‘teeth chill without lips[脣亡齒寒]’ internally, and the name of ‘the Confucian thought of righteousness[春秋大義].’ Thus, they could achieve withdrawal of Japanese troops. However, Ming’s abusing their power, arbitrariness, and arrogation during the war as well as unilateral demands imposing their help after the war affected negatively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the Sino-Japanese War gave the two countries failure and frustration, and even brought a disgrace to the nations. But China is turning its ‘Unforgettable national humiliation[勿忘國恥]’ into a historical lesson and sublimating it to ‘a promotion of the country[振興中華].’ Korea is moving towards a democratic society with a spirit of ‘Cleaning up a long existing abuse[積弊淸算]’ and ‘National integration[國民 統合]’, taking ‘Candlelight Revolution’ as a momentum. Like this, Korea and China are moving into a new era by taking historical lessons from these events. Hidyoshi’s invasion of Korea in 1592,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Sino-Japanese war let us know that Korea and China are indissolubly linked. Promoting Korean-Chinese coexisting relations, based on respect and understanding for both counterparts, is the best lesson of history learnt from these events.

      • BRS Analysis of Chirally Gauged Wess-Zumino-Witten Model

        박대길 慶南大學校 附設 基礎科學硏究所 1992 硏究論文集 Vol.4 No.-

        카이랄하게 게이지화된 베스-쥬미노-위튼 action 이 게이지변환에 대하여 대칭성을 갖게 만드는 베스-쥬미노항을 effective action 의 one cocycle조건으로부터 구하였다. 이 베스-쥬미노항을 이용하여 BRS 방법으로서 물리적 Hilbert 공간에 대한 조건을 구하였다.

      • KCI등재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태조 어진의 위봉산성 보존

        박대길 전북사학회 2019 전북사학 Vol.0 No.56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성이 함락되면서 경기전과 조경묘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 어진과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위패가 위봉산성으로 이안되어 지켜졌다. 이 과정에 대해서 크게 2가지설이 전해져 왔다. 하나는 전주 판관 민영승이 경기전 참봉 장교원이 수습하여 이안하려던 어진을 빼앗아 위봉산성에 봉안한 후 그 공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영승의 처남 이연일이 주도하여 지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어진의 이안은 조정의 승인을 받은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에 있던 태조 어진을 지켜낸 사실에서 확인된다. 어진은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민간인이 임의로 옮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관원이 주도하여 이안하고 수직하는 게 사실에 부합된다. 이를 전제로 하여, 동학농민혁명 당시 어진과 위패는 전라 감영의 관원이 주도하여 지켜낸 것으로 정리되는데, 누가 어떤 방법으로 수행했느냐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본고에서는 그 당시 전라 감사의 부재로 인해 전주 판관 민영승이 가도사 되어 책임자로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에 따라 태조 어진의 이안과 조경묘 위패는 당연히 민영승의 총책임하에 경기전 참봉 장교원과 조경묘령 박동래가 주도하여 수행한 것으로 정리하였다. 위봉산성에 이안된 어진과 위패는 바로 행궁에 봉안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행궁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먼저 위봉산성 안에 있는 위봉사 본전에 이안되었고, 진장청을 거쳐 행궁으로 이안되었다. 이렇게 지켜진 어진과 위패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한 뒤, 다시 경기전과 조경묘에 환안되었다. The portrait of King Taejo was moved to wibongsanseong(威鳳山城) to be preserved at the time of DonghagNongminHyeogmyeong. However, there were different stories about the relocation process. Gyeong-gijeon(慶基殿) chambong(參奉) Jang-gyowon(張敎遠) and jogyeongmolyeong(肇慶廟令) Parkdonglae(朴東來) were in charge of protecting the portrait and ancestral tablets in geong-gijeon at the crisis of jeonjuseong(全州城) falling. jeonjupangwan(全州判官) Min-yeongseung(閔泳承), who had been in charge of Jeolla provincial office as a gadosa(假都事), was the final director due to the absence of the governor(jeonlagamsa·全羅監司). Therefore, It is no wonder that they should protect the portrait and tablets, and they actually did. This can be found in several records including the report of jeonlagamsa. The portrait was enshrined in the main hall of wibongsa(威鳳寺) which was located in wibongsanseong, rather than being placed immediately in the palace. That was because the palace had been remained vacant for a long time after its construction. The portrait and tablets were then moved to the palace through jinjangcheong(鎭將廳) in wibongsanseong, and they were finally enshrined in the original place after Donghak peasant army had withdrawn from jeonjuseong

      • KCI등재

        고부봉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 - 정읍지역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

        박대길 역사와교육학회 2019 역사와 교육 Vol.29 No.-

        In 1894, whe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ook place, and for many people, Kobu uprising was a symbolic event explaining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other words, the uprising that started in highland was the beginning and the beginning of the revolution. However, Jang Bong-sun, who was from Jeongeup in 1936, distinguished the Kobu Uprising from the Donghak Farmers' Revolution in the Jeon Bong-Jun-Shil Gi which was published in Jeongeup-Gunji. Since then, Choi Hyeon-sik and Cho Kwang-hwan of Chung-eup have organized the Donghak Farmers' Revolution according to this logic. As a result, the Kobu Uprising was excluded from the Donghak Farmers Revolution as defined in the Special Act on the Donghak Farmers Revolution, which was promulgated in 2004. Furthermore, many Certified Korean History Textbook summarize Kobu Uprising as the background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t is not easy to clarify whether the case of Kobu Uprising or Mujang Forces is the beginning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Moreover, the revision of the Special Law on the Donghak Farmers' Revolution and the revision of the approved Certified Korean History Textbook, which are beyond the academia, are a difficult problem. In particular, there is no excuse for the fact that the research results organized or published in the region where the Kobu Uprising took place, namely Jeongeup, distinguished Kobu Uprising from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refore, the assertion that the Kobu Uprising should be included in the Donghak Farmers 'Revolution is the beginning of the Donghak Farmers' Revolution. Joint research or forums are needed for this.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 당시는 물론 그 이후 다수 국민에게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을 설명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즉 고부에서 시작된 봉기가 혁명의 출발이며 시작이었다. 그런데, 1936년 정읍 출신 장봉선은 정읍군지 에 실은 「전봉준실기」에서 고부봉기와 동학농민혁명을 구분하였다. 그 이후 학계는 물론 정읍의 최현식과 조광환 역시 이 논리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을 정리하였다. 그 결과 2004년에 공포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에 정의된 동학농민혁명에 고부봉기가 제외되었다. 더 나아가 현행 검인정한국사교과서 다수는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으로 정리하고 있다. 고부봉기와 무장기포 중 어느 사건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냐에 대한 정리는 쉽지 않다. 더욱이 학계의 범주를 넘어선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개정과 검인정한국사교과서 수정은 난해한 문제이다. 특히 고부봉기가 벌어졌던 지역, 즉 정읍에서 그간 정리하거나 발표한 연구 성과가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과 따로 구분하였다는 사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므로 동학농민혁명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정읍지역이 풀어야 숙제이다. 이를 위한 공동연구나 공개토론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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