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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時代 抱川지역의 역사 전개와 위상

        문창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논총 Vol.38 No.-

        抱川은 자연 지리적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적당한 조건을 갖추어 오랜 전통의先史文化를 갖고 있다. 또한 포천은 한반도의 동북과 서북, 동남과 서남을 각각연결하는 교차점에 해당하기 때문에, 신석기시대 이래로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한강유역 선사문화의 전초지 역할을 하였다. 초기철기시대의 永松里․自作里 유적 등은 대규모 聚落의 존재를 전하며, 이들은 邑落의 형성과 관계 깊어 포천 일대에서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토착적인 정치집단의 계기적 발전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곧 포천지역은 북방의 철기문화 등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에 자리하여 우리나라 초기국가의 성장과정과 맥을 같이하였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포천은 漢灘江과 永平川 일대의 집단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결집하여 馬韓 小國의 하나로 성장해갔다. 『三國志』 韓傳의 牟水國과 桑外國은 포천과 관계가 있는 소국들로, 마한북부의 백제국과 그 주변 소국들로 상정되는 ‘近郡諸國’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2세기 중반이후 마한북부의 여러 소국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伯濟國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연맹체를 이끌어 갔다. 포천지역의 소국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백제국의 영향권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특히 포천은 百濟 古尒王대 중국군현과의 岐離營 전투에 참여하면서 백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포천은 중국 군현지역에서 수도 漢城으로 통하는 군사적 통로에 위치하여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되었다. 4세기 들어 본격화된 고구려의 남진으로 백제의 북방에 위치한 抱川·漣川지역은 고구려와 대치하는 접전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포천은 철원방면에서 광나루를 거쳐 河南慰禮城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어,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내는 군사적요충지로 부각되었으며, 古毛里山城과 半月山城 등 지역 내에 산재한 山城의 존재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다가 광개토왕의 南征 이후 포천은 6세기 중반 백제와 신라가 공동작전으로 한강유역을 빼앗을 때까지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이지역의 ‘馬忽’이라는 지명은 이 시기에 대두하였다. 신라는 7세기 초반부터 漢山州를 두어 이 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를 도모하였다. 당시 州가 군사거점의 성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한산주에 편제되었던 포천은 철원이나 연천방면에서 남하하는 고구려를 최북단에서 방어하는 군사적 거점이 되었다. 7세기 후반에 신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남하하는 唐軍을 買肖城에서크게 이겨 對唐전쟁의 결정적 승기를 잡았는데, 大田里山城은 그 위치와 입지로보아 매초성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 뒤에 9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신라의 예성강 이북지역에 대한 영토개발에서 포천은 북방의 전초기지로 이용되었으므로,그 전략적 기능은 신라통일 이후에도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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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國 古代 建國神話’ 연구의 동향과 과제

        문창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 한국학논총 Vol.42 No.-

        神話는 역사적 경험에 대한 집단 기억이라는 점에서 역사성을 내포하지만, 신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지금까지 建國神話의 전승 자료에 관한 역사적 탐색은 그 원형을 복원하고 그것을 통한 초기국가의 형성과 사회상에 접근하려는 노력으로 전개되었다. 실제로 건국신화의 형성과 변천과정을 初期王系의 변화와 결부시키면서 건국의 주체 세력과 그 계통을 해명하려는 작업으로 이어졌으며, 건국신화를 만들어내고 전승시켰던 고대인들의 세계관에까지 관심의 영역이 확대·심화되었다. 그리하여 건국신화는 初期國家의 실상에 대한 접근뿐 아니라 주변과의 문화 전파 및 교류 양상 등 그 계통성을 추정하는 실마리로 기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건국신화와 긴밀하게 연결된 제의는 왕권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게 되므로, 건국신화와 祭儀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한국 고대의 국가 및 지배 권력의 기원과 정치적 목적의식 등을 해명하는데 자주 활용되어 왔다. 건국신화에 대한 연구가 보다 충실하려면 지금까지 이루어진 구체적이고 개별적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상호 비교·분석을 통한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의 특수한 문화양상에서 내재되어 있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면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접근이라 하겠다. 하나의 건국신화는 그것이 독자적으로 형성·전승되기 보다는 한국 고대의 문화와 사회구조 속에서 다른 건국신화와 서로 얽히면서 전승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화와 제의의 상징을 그 문화 속에서 해석하는 노력과 함께 그것을 배태한 사회생활에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하는 접근이 요구된다. 앞으로 종교학 내지 신화학적인 접근에 보다 유의하면서 비슷한 시기의 중국이 나 일본의 건국신화와의 비교·분석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 이후 각국의 建國始祖에 대한 인식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후대의 자료에 그 편린이 어떻게 남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히 무덤의 벽화나 제사 유적 및 청동 제기 등의 유물이나 유적 자료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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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한전의 王號와 그 실상

        문창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8 한국학논총 Vol.50 No.-

        The appearance of the 'King' is one of the main indicators of the foundation myth and the establishment of Korea’s ancient states. In the 『Samkukji(三國志)』DongiJeon(東夷傳) beings, such as King(王), Ga(加), Jusu(主帥), Geosu(渠帥), Jangsu(長帥), Daein(大人) as the rulers of various political groups. The emergence of the names of Kings is understood to have preceded political integration and social development than the power unit, which was led by Jangsu(長帥), Daein(大人). Power and in accordance with the size of each countries of Samhan, which are conveyed in the 『Samkukji』 Hanjeon(韓傳), were divided into Daeguk(大國) and Soguk(小國), and the rulers were sequenced Sinji(臣智) and Epcha(邑借) and so on. The pulse is to be divided into contact with the fact that Geosu(渠帥)s of DongYae are be divided into Hu(侯), Epgun(邑君), Samro(三老) and so on, Jusu(主帥) of Samhan’s Daeguk, which was on the Sinji level, were comparable with Bulnaeyewho(不耐濊侯), which was raised as a king in DongYae. The names of king in Hanjeon are verified in the cases, such as Jinwang(辰王) of Mahan Mokjiguk(目支國), Jinwang which were the 12 of the countries into Jinhan, and Wang which were in the 12 of the countries of Byeonhan. Jinwang of Mokjiguk is understood to have rise by growth of the Sinji’s level ruler and he was perceived as having representative in negotiations with counties and prefectures of China. Jinwang which was belonged the 12 of the countries of Jinhan have the same name as Jinwang of Mahan, but a different being, the reality was postulated the king of Jinhan that led the Soguk federation of Jinhan. The king of Byeonhan was the Geosu of Epcha level and fell short in stature to Jinwang. The things that the throne was passed after Who(侯)’s referred to as the king and a person with an official title was confirmed in the Gojoseon are understood the establishment of the country as a major political change. Junwang was moved to Mahan area and took to calling the ‘Hanwang(韓王)’ in the 『Samkukji』 Hanjeon, after in fact that back on one’s feet to be ‘Jinwang’ because Junwang’s heirs ware cut off in the 『Huhanso(後漢書)』. These are can be understood as a revision in the future generations. However these thing are also shown the Hanjeon’s recognition that two thing are closely related. The existences of ‘Mahanju(馬韓主)’ and ‘Jinhanwang(辰韓王), which are appears in the 『Jinso(晉書)』, seems to reflect the change of Samhan society at that time. If access to the political status and be retroactive in fact a religious authority, which can be inferred from Gunwang(君王) of Buyeo(夫餘), it can add and understanding of the social aspect of Samhan society and Jinwang. Even though Jinwang of Samhan and Bulnaeyewho of DongYae took to calling the names of king themselves, they were in lower political status than king of Koguryo and Buyeo at that time. This is central control system, including the rule, see the limits in implementation such as a rite of sacrifice, as well as religious authority. However, the Jinwang’s political growth are expected to have a possibility that can be connected with the Gunwang of Buyeo at any time. ‘王’號의 등장은 건국신화와 함께 한국 고대의 국가 성립을 알려주는 주요 지표 중 하나로 꼽는다. 『三國志』 東夷傳은 여러 정치체의 지배자로서 王, 加, 主帥, 渠帥, 長帥, 大人 등의 존재를 전한다. 왕의 출현은 그것이 대두하기 이전에 渠帥(長帥), 大人 등이 이끌었던 세력 단위보다 정치적 통합과 사회발전이 앞섰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지』 韓傳은 삼한 諸國을 크기에 따라 大國과 小國으로 나누고 그 지배자도 각각 臣智와 邑借 등으로 구분해 불렀다. 이는 동예의 거수들을 侯․邑君․三老 등으로 나눈 것과 맥이 닿는다. 삼한 대국의 신지는 동예에서 왕으로 봉해졌던 不耐濊侯에 비견된다. 한전의 ‘王’號로는 마한 目支國의 ‘辰王’, 辰韓의 12국이 속했던 ‘진왕’, 그리고 弁韓 12국에도 있었던 ‘왕’ 등의 사례가 확인된다. 목지국 진왕은 대국의 신지 중에 성장했으며, 그는 중국 군현과의 교섭에서 대표성을 갖는 상징적 존재로서 마한 지역의 왕으로 인식되었다. 진한 12국이 속했던 진왕은 마한의 진왕과 同名異體이며, 그 실체는 사로국 중심의 진한 연맹체를 이끌었던 진한의 왕으로 상정된다. 변한의 왕은 변한 12국 전체를 아우르는 왕이라기보다는 개별 소국의 수장을 가리키며, 진왕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했던 존재로 추정된다. 고조선에서 ‘侯’가 ‘稱王’한 뒤에 왕계가 전승되고, 官名을 가진 인물이 확인되는 사실은 단순한 호칭 변화를 넘어서 국가 성립이라는 중대한 정치·사회적 변화를 수반한 것이다. 『삼국지』 한전에 고조선의 준왕이 삼한으로 남하하여 스스로 ‘韓王’을 칭했다고 전하는데, 『후한서』 한전에는 그 뒤 준왕의 후손이 끊기자 마한사람이 다시 자립해 ‘辰王’이 되었다는 사실이 추가되었다. 이는 ‘한왕’이 뒤에 ‘진왕’이라고 칭할 수도 있다는 사실, 곧 양자가 모종의 관계를 갖는다는 한전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마한이 진․변한에 대해 우위에 있었다는 서술경향은 마한을 대표하는 지배자로서 진왕의 대두와 연계되어, 진왕이 삼한 전체의 연맹왕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졌을 법하다. 『진서』 동이열전에서 확인되는 ‘馬韓主’와 ‘辰韓王’의 존재는 『삼국지』 한전에 보이는 진왕 소멸과 무관하지 않으며, 당시 삼한사회의 변화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군왕에서 유추되는 성격을 소급하여 辰王에 접근한다면, 삼한 ‘왕호’가 갖는 정치적 위상은 물론 삼한의 사회상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다. 진왕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목지국은 당시 諸韓國 중에서 중심이 되는 대국으로 성장했으며, 동예의 중심 소국이었던 不耐濊國, 倭傳의 여왕이 도읍했던 邪馬壹國에 비견된다. 삼한의 ‘진왕’은 비록 왕호를 칭했지만, 당시 부여나 고구려의 王에 견줄 때 그 위상이 낮았다. 곧 중앙의 官制를 비롯한 통치체계 등은 물론, 제사의례 시행 등의 종교적 권위에서도 상대적으로 한계를 갖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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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의 官制와 그 계통적 접근

        문창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9 한국학논총 Vol.31 No.-

        古朝鮮 이래 정치사회의 역사적 경험은 夫餘를 비롯한 三韓 등지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또한 漢郡縣의 통치체제를 경험하면서 그 조직이나 官名 등은 부여를 비롯한 東濊 및 高句麗 등 삼국 초기에 원용되기도 하였다. 夫餘 초기의 ‘君王’은 삼한 大國의 國邑 主帥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곧 국읍의 주수는 자신의 세력기반을 떠나서 부여의 王京에 거주한 諸加層으로 성립하였고, 그들 가운데 최고 정점에 위치한 존재가 바로 부여의 ‘군왕’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여의 諸加는 그들이 별도로 관할하던 세력기반인 四出道의 크기에 따라 구분되었으며, 고구려의 大加와 小加처럼 分化되어갔다. 한편 邑落의 豪民은 예비 관료군의 성격을 갖는데, 이들은 고구려에서 大加가 自置했던 使者ㆍ皂依ㆍ先人과 연결되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부여 및 고구려의 통치체제는 점차 연맹왕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지향해 갔으며, 지방에 대한 통치도 諸加를 통한 간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점차 직접적인 방식을 모색하면서 통치조직을 정비해 갔다. 고조선의 官名은 朝鮮侯의 稱王 이후부터 확인되며, 고조선 말에는 다양한 관명이 나타난다. 고조선의 관명은 실제 고조선 고유의 통치체계에 바탕을 둔 것인데, 제후적 존재로 보이는 博士 衛滿의 職任은 뒤이어 확인되는 족장적 연원의 ‘相’ 또는 ‘將軍’과 맥이 닿는다. 위만조선은 족적 유대감이 강한 크고 작은 족장세력을 중앙의 지배 신분층으로 편제하며 연맹왕국 체제를 성립시켰다. 곧 고조선의 지배체제는 부여ㆍ고구려의 ‘大加’에 비견되는 족장적 연원의 ‘相’職과 ‘將軍’職을 中心으로 편제되었다. 당시 ‘相’職을 소지한 인물은 적어도 小國 규모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가진 族長 출신이었으며, 將軍 또한 相과 더불어 재지 기반을 지닌 족장적 속성의 일면을 가졌다. 東濊는 중국 郡縣 및 高句麗 등의 간섭과 견제로 인적ㆍ물적 수탈을 강요당했으며, 동예의 읍락 거수가 소지한 관명을 비롯하여 不耐濊國의 屬吏名도 직ㆍ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侯ㆍ邑君ㆍ三老는 동예 거수들의 현실적인 세력 규모와 우열에 따라 차등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東部都尉가 관할한 領東7縣은 이 지역에 삼한 小國에 비견되는 정치체가 7개 이상 있었음을 알려주며, 그 가운데 治所였던 不耐縣은 유력한 세력이었다. 실제로 不耐濊侯는 功曹ㆍ主簿 등의 속리를 거느리면서 侯國의 면모를 보여 동예사회의 정치적 성장을 알려준다. 漢郡縣 관할 하의 영동7현에 갖추어졌던 屬吏制는 東部都尉가 폐지되면서 대부분 무너졌지만, 불내예국은 정치적 통합의 진전으로 필요했던 독자적인 官制를 과거 屬吏制의 틀을 활용하여 運用했다. 특히 不耐侯는 다시 不耐濊王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불내예국은 동예 지역의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상정되며, 不耐侯와 屬吏의 속성은 각각 부여 및 고구려의 大加와 그들이 거느렸던 사자ㆍ조의ㆍ선인에 그 맥이 닿는다. 부여의 ‘加’官와 ‘使者’官의 성립연원은 각각 族長的 속성과 使役的 속성으로 구분된다. ‘大使’의 경우 기본적으로 ‘使者’官에 속하지만, 연맹왕국의 성장과 함께 夫餘王 직속의 내외 행정실무를 관장하였던 최고관직이며 전통적인 ‘使者’官의 신분적 한계를 넘어서 ‘加’官 계통의 인물이 보임되기도 하였다. 『삼국지』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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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글쓰기'를 통한 史料學習의 접근방안

        문창로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속 중등교육연구소 2005 중등교육연구 Vol.53 No.1

        본고는 ‘역사 글쓰기’를 통한 史料學習의 접근과 의미, 그리고 실제 학습자들의 글쓰기 사례를 정리하여 효과적인 사료학습의 접근 방향을 모색해본 것이다.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하는 과정은 역사가가 史料의 내용을 읽고 歷史像을 구성하는 작업과 유사하다. 역사가 歷史家에 의해 재구성된 창조적 생산물이라고 할 때, 역사 글쓰기는 역사교육의 측면에서 학습자가 스스로 역사를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는 歷史的 思考力의 향상이라는 교육목표에 부합할 수 있다. 史料講讀을 통한 역사적 인물의 ‘삶 읽기’, 그리고 인물 탐구를 통한 ‘역사 글쓰기’를 연계하여 실제 수업에 접근할 때, 학습자는 일차적으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해와 친근감을 갖게 된다. 또한 자신의 글쓰기에 활용할 수 있는 관련 자료의 探索과 수집 · 정리 및 종합적인 분석을 통하여 역사적 이해력을 향상 시킬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학습자는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내용을 구성하여 글쓰기를 통한 역사적 인물의 삶과 사회상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직관 및 창의력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다. 나아가 학습자는 활동 인물의 시대적 ·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인물에 대한 평가를 통해 사고력, 비판력 등 역사적인 능력을 배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The purposes of this thesis are to get the meaning and proximity in 'historical composition'. Also, this is a writing to grope for an approaching direction of effective historical materials learning by means of arranging composition examples. The process of a composition on a historical figure is similar to the work that a historian reads and constructs the contents of historical documents. If history is enough to acknowledge a creative product reorganized by historians, the historical composition coincides with an educational object which is the improvement of historical contemplative faculty. Which means that a learner is able to judge and interpret history by himself in the aspect of historical education. A learner can take the comprehension and affection about historical figure first when he gets close to the real lesson in translation' through understanding the life of historical man and searching for the man. And he is capable of rising his own historical power to understand throughout the inquiry and complication, arrangement, even synthetic analysis into the related materials to apply them to his own writing. The learner puts in order of his thought and make contents up for composition in person going through the process. With that, he gets to take on opportunity to express his own feelings and intuitions, creative power describing the life and social aspect of historical figure in writing. Furthermore, I look for what he advances his thinking power and critical ability in the estimation based on the background of the historic man's time and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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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사연구 60년의 동향과 과제

        문창로 한국고대사학회 2005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40

        This is a study on a trend and a task of ancient Korean history studies centering around its results of value for the time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to Korea. In 1950's, there were groped for new theme and methodology in the part of ancient history as positive history was established. Granting that it was evaluated simply, the attempts like this became the basis to test subjective recognition of Korean ancient history thereafter. That is to say, its main products in 1960's wiped out distorted history of ancient Korea by colonial history of Japanese imperialism. Which also meant the opportunity to extend the sphere of ancient history studies, to embody the subject for inquiry from then on. In 1970's, research activities of this part could be lively with the discussion about an issue, the formation of early states in ancient Korea. And it made a understanding of development process of ancient Korean society deepen. Since then, it was possible to systematize ancient Korean history with increase of learned men and variety themes, deepening of research contents. For the last 60 years after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there has been lots of efforts constantly in the academic world of Korean ancient history. It was to conquer colonial history of Japanese imperialism, to systematize ancient Korean history. As a result, it was rapidly progressed in both quality and quantity with the accumulation of research activities throughout increase of learned men, excavation and extension of related materials, groping of new methodologies, a diversity approach to the matters etc. This is totally based on exertions of First-generation, that laid the foundations for Korean ancient history studies, and concrete products accumulated by Second, Third-generation, that succeeded to the former. 본고는 지난 60년 동안 이룩한 한국고대사 연구의 주요성과를 살펴서 그 동향과 과제를 정리한 글이다 . 光復과 함께 전개된 좌·우 대립의 정국과 분단의 고착화 과정에서 일제의 植民史學을 청산하고 고대사연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1950년대에 實證的 연구풍토가 정착되는 가운데 새로운 주제와 방법론의 모색은 비록 소박한 수준으로 평가되지만, 이후 한국고대사의 주체적인 인식을 모색하는 토대가 되었다. 곧 1960년대에 이루어진 연구성과는 식민사학에 의해 왜곡된 한국고대의 歷史像을 불식시켰으며, 이후 고대사연구의 범위를 확대하고 연구주제를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 古代國家의 形成問題가 제기되면서 연구활동을 촉진하였고, 고대사회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또한 고대의 사회구조 및 구성단위 문제와 함께, 小國 間의 연맹과 통합과정을 거쳐 성립한 고대국가의 支配體制가 논의되면서 삼국의 지배세력 동향, 중앙 및 지방 통치체제의 정비, 군사조직의 운영, 民에 대한 편제방식 등에 접근하여 고대사회에 대한 구조적인 인식이 가능하였다. 1980년대 이후 연구자의 증가, 다양한 주제와 연구내용의 심화로 고대사의 체계적 구성이 더욱 튼실해졌다. 실제로 民族의 형성문제와 함께 檀君 및 古朝鮮史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고, 신라와 백제사에서 축적된 연구성과가 가야와 고구려사 연구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渤海 역시 귀속문제에서 점차 발해사 자체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으며, 이밖에 樂浪·帶方郡의 재검토, 夫餘史의 전개과정, 三韓의 성장과 대외관계, 영산강유역의 甕棺古墳과 그 축조세력을 둘러싼 논의 등을 통해 고대사의 지평을 넓혀갔다. 1990년대로 접어들어 祭儀 및 建國神話, 고대 女性史와 관련된 문제, 농업생산 및 交易에 관한 접근 등도 다양한 연구주제의 모색에 일조하였다. 나아가 '고대 동아시아와 백제', '古代 韓·中關係史의 새로운 조명', '동아시아에서의 낙랑' 등의 학술회의를 통해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적 국제질서나 문화적 교류에 대한 이해를 더하였다. 이와 함께 고대와 중세의 시대구분 문제, 三國의 遷都 및 都城制, 불교사상사 연구의 심화, 촌락문서 및 통일신라의 토지제도에 대한 재검토, 장보고와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해상활동, 나말여초 豪族의 동향과 후삼국의 성립, 필사본 「花郞世紀」를 둘러싼 진위논쟁 등의 문제도 부각되었다. 한편 考古學的 成果와 새로운 金石文의 發掘은 고대사연구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다. 실제로 百濟本紀의 신빙성 확인, 백제문화사의 이해증진, 삼국의 중앙정치 및 점령지 통치방식, 민의 존재양태, 고구려-신라의 대외관계, 신라의 정치·경제·제도사 정리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광복이후 60년 동안 고대사학계는 식민사학의 폐해를 극복하고 고대사의 체계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 연구주제의 다양한 접근, 관련자료의 발굴 및 확대 등을 통해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연구성과가 크게 진전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어려운 여건을 딛고 고대사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했던 1세대 연구자들, 그리고 이들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2·3세대 연구자들의 노력과 구체적인 성과물의 축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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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始祖傳承 연구의 성과와 과제

        문창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한국학논총 Vol.34 No.-

        百濟史 硏究에서 建國神話를 복원하는 노력은 백제국가의 초기모습에 대한 접근뿐 아니라 夫餘․高句麗와의 문화 전파 및 교류 양상 등 그 계통성을 추정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동안 전승 자료의 분석을 통한 역사적 탐색은 백제 건국신화의 원형을 복원하고 그것을 백제초기 사회와 연관하여 분석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또한 건국신화의 형성과 변천과정을 初期王系의 변화와 결부시키면서 백제 건국의 주체 세력과 그 계통을 해명하였으며, 나아가 초기백제의 국가형성과 사회상에 접근하는 등 연구의 범위가 심화․확대되었다. 백제의 始祖傳承은 건국의 경로 및 과정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며, 夫餘系 神話의 재탄생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또한 溫祚가 東明王廟를 세워 숭배한 사실은 동명을 통하여 왕실의 神聖性을 구현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본래 온조전승은 日神의 후예인 온조부족과 地神族 계통의 토착부족이 결합하여 형성된 始祖神話로 이해된다. 온조 시조전승은 고구려와의 친연성을 강조하며, 비류 시조전승은 부여 계통과의 연결을 강조하였다. 中國史書의 仇台전승은 백제의 부여계 시조설이 부인되지 않고 오히려 國內史書보다 강조되었다. 日本 古史上에 전하는 都慕전승은 넓은 의미에서 부여계 시조로서 관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철기문화를 수반한 백제의 온조와 비류집단은 범부여계 출신으로 卒本지역에 정착하였다가 일종의 무사단을 이끌고 남하하였는데, 비류집단은 서해연안을 따라 내려오는 海路를, 온조집단은 陸路를 통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비류 시조전승은 고이왕대에 재음미되거나 독자의 시조전승으로 체계화되었던 반면, 온조 시조전승은 古爾王系와는 다른 혈연집단인 近肖古王系가 등장하면서 문자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본다. 이때 정착되었던 백제 건국신화는 東明-溫祚의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현전하는 朱蒙-溫祚로의 변모는 백제 멸망 후 부여의 동명을 고구려의 鄒牟로 이해하는 인식이 반영되었던 신라 통일 이후로 상정한다. 始祖傳承의 생성과 변화가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때, 백제 건국신화를 구성하는 시조전승을 초기 왕실 내의 지배세력 교체를 비롯한 백제사의 전개과정과 결부시켜, 그 역사적 원인과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백제 왕계를 구성하는 혈연집단의 계통과 형성과정 등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또한 백제의 시조전승이 갖는 특성과 의미를 고구려나 신라의 그것과 비교하여 접근하려는 노력이 더욱 요구된다. 나아가 중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시조전승과 견주어 접근한다면, 백제 뿐 아니라 삼국의 시조전승을 폭 넓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조전승을 바탕으로 祭儀가 행해지므로 백제의 건국신화와 제의가 고대국가의 성장과정에서 어떠한 사회구조 속에서 형성․변화하고 체계화되어 갔는가에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부족한 자료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시조전승 관련 자료의 書誌學的 이해를 높이는 연구와 함께, 고고학 발굴성과의 활용에 대한 노력도 요구된다. 그리고 백제 시조전승이라는 공통된 주제에 대한 관련 학문간 연구 성과의 공유와 적극적인 교류는 상호이해의 증진과 함께 연구 범위의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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