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문창로 진단학회 2007 진단학보 Vol.- No.103
新羅 中古期의 地方統治組織을 해명하려는 노력은 1970년대에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주로 중고기 신라국가의 발전과 영역확대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가 전개되었다. 특히 신라 州郡制의 시행을 중심으로 한 지방제도의 성립배경과 정비과정, 그 운영체계 및 구조, 중앙권력의 지방침투과정 및 수취체계, 그리고 外位制의 성립과 그 기능 문제 뿐 아니라 村落의 편제문제 등에도 주목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운영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신라 중고기의 지방통치체제를 구성하는 행정단위의 성격과 地方官의 조직, 郡의 실체 및 지방관의 파견 유무, 그리고 촌락의 실상 문제 등에서 제기된 견해차는 아직까지도 크게 해소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미진했던 지방통치조직의 기본 편제단위로서 개별 촌락의 실상에 대한 연구가 더 축적되기를 바라며, 이를 바탕으로 지방사회의 운영원리가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신라 중고기의 지방통치조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탐색을 위해서는 삼국 간의 비교를 통하여 그 특징을 부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삼국의 역학관계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세계의 흐름 속에서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전개과정에 대한 고찰도 요구된다. 일찍이 金石文 자료는 관련연구를 크게 촉진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고기 지방통치조직의 실체를 제시하는데 커다란 견해차를 노정시켰다. 새로 더해지는 금석문 자료에 대한 정밀한 판독과 신중한 해석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와 함께 1990년대 중반 이후 낙동강, 남한강, 금강의 상류지역에서 발굴된 주요 고분군의 유물이 축적되면서, 考古學 자료를 활용한 지방통치체제 연구는 앞으로 더욱 진전될 전망이다. 이에 고고학 자료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효율적인 활용방안 등이 모색되기 위해서 역사고고학계와 상호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A Review and Prospect of Studies on Local Administration Structure in the Middle of Ancient Silla
문창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논총 Vol.38 No.-
抱川은 자연 지리적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적당한 조건을 갖추어 오랜 전통의先史文化를 갖고 있다. 또한 포천은 한반도의 동북과 서북, 동남과 서남을 각각연결하는 교차점에 해당하기 때문에, 신석기시대 이래로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한강유역 선사문화의 전초지 역할을 하였다. 초기철기시대의 永松里․自作里 유적 등은 대규모 聚落의 존재를 전하며, 이들은 邑落의 형성과 관계 깊어 포천 일대에서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토착적인 정치집단의 계기적 발전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곧 포천지역은 북방의 철기문화 등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에 자리하여 우리나라 초기국가의 성장과정과 맥을 같이하였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포천은 漢灘江과 永平川 일대의 집단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결집하여 馬韓 小國의 하나로 성장해갔다. 『三國志』 韓傳의 牟水國과 桑外國은 포천과 관계가 있는 소국들로, 마한북부의 백제국과 그 주변 소국들로 상정되는 ‘近郡諸國’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2세기 중반이후 마한북부의 여러 소국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伯濟國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연맹체를 이끌어 갔다. 포천지역의 소국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백제국의 영향권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특히 포천은 百濟 古尒王대 중국군현과의 岐離營 전투에 참여하면서 백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포천은 중국 군현지역에서 수도 漢城으로 통하는 군사적 통로에 위치하여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되었다. 4세기 들어 본격화된 고구려의 남진으로 백제의 북방에 위치한 抱川·漣川지역은 고구려와 대치하는 접전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포천은 철원방면에서 광나루를 거쳐 河南慰禮城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어,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내는 군사적요충지로 부각되었으며, 古毛里山城과 半月山城 등 지역 내에 산재한 山城의 존재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다가 광개토왕의 南征 이후 포천은 6세기 중반 백제와 신라가 공동작전으로 한강유역을 빼앗을 때까지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이지역의 ‘馬忽’이라는 지명은 이 시기에 대두하였다. 신라는 7세기 초반부터 漢山州를 두어 이 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를 도모하였다. 당시 州가 군사거점의 성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한산주에 편제되었던 포천은 철원이나 연천방면에서 남하하는 고구려를 최북단에서 방어하는 군사적 거점이 되었다. 7세기 후반에 신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남하하는 唐軍을 買肖城에서크게 이겨 對唐전쟁의 결정적 승기를 잡았는데, 大田里山城은 그 위치와 입지로보아 매초성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 뒤에 9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신라의 예성강 이북지역에 대한 영토개발에서 포천은 북방의 전초기지로 이용되었으므로,그 전략적 기능은 신라통일 이후에도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문창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9 한국학논총 Vol.31 No.-
古朝鮮 이래 정치사회의 역사적 경험은 夫餘를 비롯한 三韓 등지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또한 漢郡縣의 통치체제를 경험하면서 그 조직이나 官名 등은 부여를 비롯한 東濊 및 高句麗 등 삼국 초기에 원용되기도 하였다. 夫餘 초기의 ‘君王’은 삼한 大國의 國邑 主帥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곧 국읍의 주수는 자신의 세력기반을 떠나서 부여의 王京에 거주한 諸加層으로 성립하였고, 그들 가운데 최고 정점에 위치한 존재가 바로 부여의 ‘군왕’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여의 諸加는 그들이 별도로 관할하던 세력기반인 四出道의 크기에 따라 구분되었으며, 고구려의 大加와 小加처럼 分化되어갔다. 한편 邑落의 豪民은 예비 관료군의 성격을 갖는데, 이들은 고구려에서 大加가 自置했던 使者ㆍ皂依ㆍ先人과 연결되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부여 및 고구려의 통치체제는 점차 연맹왕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지향해 갔으며, 지방에 대한 통치도 諸加를 통한 간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점차 직접적인 방식을 모색하면서 통치조직을 정비해 갔다. 고조선의 官名은 朝鮮侯의 稱王 이후부터 확인되며, 고조선 말에는 다양한 관명이 나타난다. 고조선의 관명은 실제 고조선 고유의 통치체계에 바탕을 둔 것인데, 제후적 존재로 보이는 博士 衛滿의 職任은 뒤이어 확인되는 족장적 연원의 ‘相’ 또는 ‘將軍’과 맥이 닿는다. 위만조선은 족적 유대감이 강한 크고 작은 족장세력을 중앙의 지배 신분층으로 편제하며 연맹왕국 체제를 성립시켰다. 곧 고조선의 지배체제는 부여ㆍ고구려의 ‘大加’에 비견되는 족장적 연원의 ‘相’職과 ‘將軍’職을 中心으로 편제되었다. 당시 ‘相’職을 소지한 인물은 적어도 小國 규모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가진 族長 출신이었으며, 將軍 또한 相과 더불어 재지 기반을 지닌 족장적 속성의 일면을 가졌다. 東濊는 중국 郡縣 및 高句麗 등의 간섭과 견제로 인적ㆍ물적 수탈을 강요당했으며, 동예의 읍락 거수가 소지한 관명을 비롯하여 不耐濊國의 屬吏名도 직ㆍ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侯ㆍ邑君ㆍ三老는 동예 거수들의 현실적인 세력 규모와 우열에 따라 차등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東部都尉가 관할한 領東7縣은 이 지역에 삼한 小國에 비견되는 정치체가 7개 이상 있었음을 알려주며, 그 가운데 治所였던 不耐縣은 유력한 세력이었다. 실제로 不耐濊侯는 功曹ㆍ主簿 등의 속리를 거느리면서 侯國의 면모를 보여 동예사회의 정치적 성장을 알려준다. 漢郡縣 관할 하의 영동7현에 갖추어졌던 屬吏制는 東部都尉가 폐지되면서 대부분 무너졌지만, 불내예국은 정치적 통합의 진전으로 필요했던 독자적인 官制를 과거 屬吏制의 틀을 활용하여 運用했다. 특히 不耐侯는 다시 不耐濊王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불내예국은 동예 지역의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상정되며, 不耐侯와 屬吏의 속성은 각각 부여 및 고구려의 大加와 그들이 거느렸던 사자ㆍ조의ㆍ선인에 그 맥이 닿는다. 부여의 ‘加’官와 ‘使者’官의 성립연원은 각각 族長的 속성과 使役的 속성으로 구분된다. ‘大使’의 경우 기본적으로 ‘使者’官에 속하지만, 연맹왕국의 성장과 함께 夫餘王 직속의 내외 행정실무를 관장하였던 최고관직이며 전통적인 ‘使者’官의 신분적 한계를 넘어서 ‘加’官 계통의 인물이 보임되기도 하였다. 『삼국지』 고 ...
문창로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속 중등교육연구소 2005 중등교육연구 Vol.53 No.1
본고는 ‘역사 글쓰기’를 통한 史料學習의 접근과 의미, 그리고 실제 학습자들의 글쓰기 사례를 정리하여 효과적인 사료학습의 접근 방향을 모색해본 것이다.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하는 과정은 역사가가 史料의 내용을 읽고 歷史像을 구성하는 작업과 유사하다. 역사가 歷史家에 의해 재구성된 창조적 생산물이라고 할 때, 역사 글쓰기는 역사교육의 측면에서 학습자가 스스로 역사를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는 歷史的 思考力의 향상이라는 교육목표에 부합할 수 있다. 史料講讀을 통한 역사적 인물의 ‘삶 읽기’, 그리고 인물 탐구를 통한 ‘역사 글쓰기’를 연계하여 실제 수업에 접근할 때, 학습자는 일차적으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해와 친근감을 갖게 된다. 또한 자신의 글쓰기에 활용할 수 있는 관련 자료의 探索과 수집 · 정리 및 종합적인 분석을 통하여 역사적 이해력을 향상 시킬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학습자는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내용을 구성하여 글쓰기를 통한 역사적 인물의 삶과 사회상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직관 및 창의력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다. 나아가 학습자는 활동 인물의 시대적 ·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인물에 대한 평가를 통해 사고력, 비판력 등 역사적인 능력을 배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The purposes of this thesis are to get the meaning and proximity in 'historical composition'. Also, this is a writing to grope for an approaching direction of effective historical materials learning by means of arranging composition examples. The process of a composition on a historical figure is similar to the work that a historian reads and constructs the contents of historical documents. If history is enough to acknowledge a creative product reorganized by historians, the historical composition coincides with an educational object which is the improvement of historical contemplative faculty. Which means that a learner is able to judge and interpret history by himself in the aspect of historical education. A learner can take the comprehension and affection about historical figure first when he gets close to the real lesson in translation' through understanding the life of historical man and searching for the man. And he is capable of rising his own historical power to understand throughout the inquiry and complication, arrangement, even synthetic analysis into the related materials to apply them to his own writing. The learner puts in order of his thought and make contents up for composition in person going through the process. With that, he gets to take on opportunity to express his own feelings and intuitions, creative power describing the life and social aspect of historical figure in writing. Furthermore, I look for what he advances his thinking power and critical ability in the estimation based on the background of the historic man's time and society.
문창로 한국고대사학회 2005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40
This is a study on a trend and a task of ancient Korean history studies centering around its results of value for the time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to Korea. In 1950's, there were groped for new theme and methodology in the part of ancient history as positive history was established. Granting that it was evaluated simply, the attempts like this became the basis to test subjective recognition of Korean ancient history thereafter. That is to say, its main products in 1960's wiped out distorted history of ancient Korea by colonial history of Japanese imperialism. Which also meant the opportunity to extend the sphere of ancient history studies, to embody the subject for inquiry from then on. In 1970's, research activities of this part could be lively with the discussion about an issue, the formation of early states in ancient Korea. And it made a understanding of development process of ancient Korean society deepen. Since then, it was possible to systematize ancient Korean history with increase of learned men and variety themes, deepening of research contents. For the last 60 years after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there has been lots of efforts constantly in the academic world of Korean ancient history. It was to conquer colonial history of Japanese imperialism, to systematize ancient Korean history. As a result, it was rapidly progressed in both quality and quantity with the accumulation of research activities throughout increase of learned men, excavation and extension of related materials, groping of new methodologies, a diversity approach to the matters etc. This is totally based on exertions of First-generation, that laid the foundations for Korean ancient history studies, and concrete products accumulated by Second, Third-generation, that succeeded to the former. 본고는 지난 60년 동안 이룩한 한국고대사 연구의 주요성과를 살펴서 그 동향과 과제를 정리한 글이다 . 光復과 함께 전개된 좌·우 대립의 정국과 분단의 고착화 과정에서 일제의 植民史學을 청산하고 고대사연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1950년대에 實證的 연구풍토가 정착되는 가운데 새로운 주제와 방법론의 모색은 비록 소박한 수준으로 평가되지만, 이후 한국고대사의 주체적인 인식을 모색하는 토대가 되었다. 곧 1960년대에 이루어진 연구성과는 식민사학에 의해 왜곡된 한국고대의 歷史像을 불식시켰으며, 이후 고대사연구의 범위를 확대하고 연구주제를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 古代國家의 形成問題가 제기되면서 연구활동을 촉진하였고, 고대사회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또한 고대의 사회구조 및 구성단위 문제와 함께, 小國 間의 연맹과 통합과정을 거쳐 성립한 고대국가의 支配體制가 논의되면서 삼국의 지배세력 동향, 중앙 및 지방 통치체제의 정비, 군사조직의 운영, 民에 대한 편제방식 등에 접근하여 고대사회에 대한 구조적인 인식이 가능하였다. 1980년대 이후 연구자의 증가, 다양한 주제와 연구내용의 심화로 고대사의 체계적 구성이 더욱 튼실해졌다. 실제로 民族의 형성문제와 함께 檀君 및 古朝鮮史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고, 신라와 백제사에서 축적된 연구성과가 가야와 고구려사 연구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渤海 역시 귀속문제에서 점차 발해사 자체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으며, 이밖에 樂浪·帶方郡의 재검토, 夫餘史의 전개과정, 三韓의 성장과 대외관계, 영산강유역의 甕棺古墳과 그 축조세력을 둘러싼 논의 등을 통해 고대사의 지평을 넓혀갔다. 1990년대로 접어들어 祭儀 및 建國神話, 고대 女性史와 관련된 문제, 농업생산 및 交易에 관한 접근 등도 다양한 연구주제의 모색에 일조하였다. 나아가 '고대 동아시아와 백제', '古代 韓·中關係史의 새로운 조명', '동아시아에서의 낙랑' 등의 학술회의를 통해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적 국제질서나 문화적 교류에 대한 이해를 더하였다. 이와 함께 고대와 중세의 시대구분 문제, 三國의 遷都 및 都城制, 불교사상사 연구의 심화, 촌락문서 및 통일신라의 토지제도에 대한 재검토, 장보고와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해상활동, 나말여초 豪族의 동향과 후삼국의 성립, 필사본 「花郞世紀」를 둘러싼 진위논쟁 등의 문제도 부각되었다. 한편 考古學的 成果와 새로운 金石文의 發掘은 고대사연구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다. 실제로 百濟本紀의 신빙성 확인, 백제문화사의 이해증진, 삼국의 중앙정치 및 점령지 통치방식, 민의 존재양태, 고구려-신라의 대외관계, 신라의 정치·경제·제도사 정리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광복이후 60년 동안 고대사학계는 식민사학의 폐해를 극복하고 고대사의 체계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 연구주제의 다양한 접근, 관련자료의 발굴 및 확대 등을 통해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연구성과가 크게 진전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어려운 여건을 딛고 고대사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했던 1세대 연구자들, 그리고 이들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2·3세대 연구자들의 노력과 구체적인 성과물의 축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문창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한국학논총 Vol.34 No.-
百濟史 硏究에서 建國神話를 복원하는 노력은 백제국가의 초기모습에 대한 접근뿐 아니라 夫餘․高句麗와의 문화 전파 및 교류 양상 등 그 계통성을 추정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동안 전승 자료의 분석을 통한 역사적 탐색은 백제 건국신화의 원형을 복원하고 그것을 백제초기 사회와 연관하여 분석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또한 건국신화의 형성과 변천과정을 初期王系의 변화와 결부시키면서 백제 건국의 주체 세력과 그 계통을 해명하였으며, 나아가 초기백제의 국가형성과 사회상에 접근하는 등 연구의 범위가 심화․확대되었다. 백제의 始祖傳承은 건국의 경로 및 과정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며, 夫餘系 神話의 재탄생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또한 溫祚가 東明王廟를 세워 숭배한 사실은 동명을 통하여 왕실의 神聖性을 구현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본래 온조전승은 日神의 후예인 온조부족과 地神族 계통의 토착부족이 결합하여 형성된 始祖神話로 이해된다. 온조 시조전승은 고구려와의 친연성을 강조하며, 비류 시조전승은 부여 계통과의 연결을 강조하였다. 中國史書의 仇台전승은 백제의 부여계 시조설이 부인되지 않고 오히려 國內史書보다 강조되었다. 日本 古史上에 전하는 都慕전승은 넓은 의미에서 부여계 시조로서 관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철기문화를 수반한 백제의 온조와 비류집단은 범부여계 출신으로 卒本지역에 정착하였다가 일종의 무사단을 이끌고 남하하였는데, 비류집단은 서해연안을 따라 내려오는 海路를, 온조집단은 陸路를 통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비류 시조전승은 고이왕대에 재음미되거나 독자의 시조전승으로 체계화되었던 반면, 온조 시조전승은 古爾王系와는 다른 혈연집단인 近肖古王系가 등장하면서 문자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본다. 이때 정착되었던 백제 건국신화는 東明-溫祚의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현전하는 朱蒙-溫祚로의 변모는 백제 멸망 후 부여의 동명을 고구려의 鄒牟로 이해하는 인식이 반영되었던 신라 통일 이후로 상정한다. 始祖傳承의 생성과 변화가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때, 백제 건국신화를 구성하는 시조전승을 초기 왕실 내의 지배세력 교체를 비롯한 백제사의 전개과정과 결부시켜, 그 역사적 원인과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백제 왕계를 구성하는 혈연집단의 계통과 형성과정 등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또한 백제의 시조전승이 갖는 특성과 의미를 고구려나 신라의 그것과 비교하여 접근하려는 노력이 더욱 요구된다. 나아가 중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시조전승과 견주어 접근한다면, 백제 뿐 아니라 삼국의 시조전승을 폭 넓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조전승을 바탕으로 祭儀가 행해지므로 백제의 건국신화와 제의가 고대국가의 성장과정에서 어떠한 사회구조 속에서 형성․변화하고 체계화되어 갔는가에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부족한 자료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시조전승 관련 자료의 書誌學的 이해를 높이는 연구와 함께, 고고학 발굴성과의 활용에 대한 노력도 요구된다. 그리고 백제 시조전승이라는 공통된 주제에 대한 관련 학문간 연구 성과의 공유와 적극적인 교류는 상호이해의 증진과 함께 연구 범위의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문창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3 한국학논총 Vol.39 No.-
『三國志』 東夷傳에서 蘇塗를 세운 것이 浮屠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중국의 불교 전래 상황과 연관된다. 곧 西域의 佛敎로 이해했던 중국의 蘇塗 인식은 『晉書』 東夷列傳이 편찬되었던 7세기에도 지속되었다. 崔致遠의 소도 인식은 당시 중국에 유포된 ‘金人佛像說’ 및 三韓 認識과 무관하지 않다. 신라의 佛敎史를 정리했던 「智證大師碑」에서 蘇塗의 儀式은 불교의 제사에 견주어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며, ‘百濟蘇塗之儀’에서의 ‘백제’는 馬韓과의 역사적 연계사실보다는 당시 통일신라에 편입된 옛 백제지역 정도로 인식했을 법하다. 최치원의 소도 인식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는데, 蘇塗를 東方 佛敎의 기원으로 삼고 이미 西晉시대에 불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물론 삼한의 소도는 鬼神에 제사하던 중국 주변 종족의 고유 신앙의식 가운데 하나로 보았거나, 소도에서 大木을 세워 제사하는 의식이 滿洲의 立杆祭祀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이는 최치원 이래 전승되던 전통적인 소도인식에서 일견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근대 이후 民俗學 방면에서 소도는 立木 또는 祭壇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東夷傳에 전하는 소도는 別邑과 결부되어 天君이 제사를 주관하는 신성공간으로 이해되었으며, 점차 神竿을 세운 聖域에서의 신앙의례 내지 종교의식으로 그 개념이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삼한 蘇塗信仰의 성격과 그 의의를 삼국의 祭儀 및 종교문화 속에서 접근하여, 소도 이후 그것을 계승한 흔적을 찾았다. 삼한시대의 신성지역으로서 소도는 불교 전래이후 寺刹이 대신하였으며, 소도의 불교적 변용은 불교와 기존 토착신앙과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종래 소도와 천군을 연결시켜 別邑의 신앙의례를 天君이 주관했던 것으로 보았다. 점차 천군과 별읍을 구별하여 천군은 國邑에서 상위의 天神제사를 주관하였고, 別邑에서는 巫적인 존재가 하위의 鬼神에 제사했던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蘇塗信仰은 본래 삼한 邑落 단위의 部落祭에서 발전하여, 小國의 성장으로 대두한 大國 단계에서 기존 읍락 별로 행해지던 信仰儀禮를 天神을 중심으로 하나로 묶은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소도인식의 계승작업은 소도의 역사적 의미를 그것이 포함되는 정치체계 속에서 이해하거나 사회발전 단계에 따른 제의의 변화과정 속에서 추구되어, 소도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文昌魯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논총 Vol.37 No.-
光復(1945年)以後に加耶史の研究は零細な文献資料の限界と'任那日本府説'で象徴になる日帝の植民史学の弊害で因して不振を兔できなかった。1970年代から本格的に展開になった加耶の遺蹟に対する発掘調査と資料の蓄積, 加耶史の研究に要求になる文献資料の整理, 文献資料に基礎した考古学の研究成果の受容, 『日本書紀』の批判 的活用の試図等の努力に負って加耶史の研究が活発になりながら加耶史の展開過程の全体的な脈絡が復元された。 1980年代以後に加耶の諸国の成立と発展, 交易の体系, 加耶社会の構造と政治的性 格の問題, 領域の設定及び支配の方式, そして思想と文化と関連になった問題などで研究の主題が具体化されて研究範囲も拡がりながら, このため接近方法も多様に追求された。もう加耶史の研究は従来の百済史と新羅史の附隨的存在から脱して, 加耶諸国の自律的発展論の視覚で加耶の歴史の展開過程を把握するようになった。 今まで'加耶連盟'説に対する論議は加耶諸国の社会発展の段階と連繋して接近する傾向が強した。加耶を構成する諸国の間にはその発展程度が違ったので, 将次中心小国と周辺小国との服属の関係を抱含して加耶の支配体制を解明する方向で接近が 必要する。また加耶と接した百済及び新羅との比較を通じて試図する必要がある。 加耶の建国神話とその所で行した祭儀がどんな社会の構造の中で形成になって施 行になったのかを追求する努力が未盡するので, 加耶の建国神話と祭儀の研究を社会 思想史の側面で定立して, それの客観的である普遍性を導き出す作業が必要する。これと共に建国神話と祭儀に対して深い関心を持って来た国文学·民俗学·宗教学等の隣近の学問の分野で蓄積した研究方法論と成果にも関心が要求になる。 考古学の遺物の分布圏が政治的な勢力範囲と必ず一致しないから, 特定の考古学の資料を基準で加耶の勢力圏を設定するよりは, 文献資料を基盤で勢力範囲の輪廓を 設定して, その後に古墳と土器の分布等を考慮して勢力範囲を想定する必要がある。 加耶史の関連史料の不足を補完するために今まで 『日本書紀』の関連内容を批判的 に活用したが, これから 『日本書紀』の編纂と出典問題そして紀年を含めた史料的性格に対する本格的である研究が要求になる。また任那日本府の歴史的現場で推定になる咸安を含めた加耶の地域での考古学的資料と対比をする史料批判の努力も併行さ れなければならな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