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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午軍亂에 관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政治評論

        다카시로 코이치(高城 幸一)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4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3 No.1

        1882年 7月23日에 일어난 王午軍亂에서日本使館이 습격 당하고, 公使一行이 日本으로 도망가고, 도망가지 못했던 現役 日本軍 將校가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일본의 朝野에 미치는 충격은 아주 컸다고 말할 수 있다. 明治政府가 구체적인 대응책을 제시하기 전에 후키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大兵을 파견할 것을 주장하는 등 구체적이고 시기 적절한 대응책을 자신이 주재했던『時事新報』에 게재하여, 여론과 정부를 유도하는 등 활발한 평론활동(壬午軍亂發生直後에 게재된 7月31日자 논설부터 濟物浦條約締結直後에 게재된 9月8日자 논설까지 33編의 논설을 게재)을 전개했다. 임오군란 발생직후 후쿠자와는 폭도 진압과 청국의 개입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에 일본군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고, 난 진압 후에는 朝鮮國務監督官을 설치하여 조선의 政務 전반을 감독시킨다는 실질적인 보호국화를 의미하는 제안을 한다. 이런 후쿠자와의 주장은 다른 신문의 論調와 비교해서도, 强硬路線의 확대를 의도하는 明治政府의 對應策에 비해서도 그 强硬路線이 명확하다. 이와 같은 후쿠자와의 强硬路線은『東京日日新聞』의 非難을 받는다. 임오군란 당시 후쿠자와는 청국 정부는 우유부단하기 때문에 일본이 강하게 나오면 직접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청국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의 조선에 대한 정략에서도 청국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淸國은 일본보다 많은 병사를 조선에 파견하고 군란의 주모자인 대원군을 天律으로 연행하는 등 신속한 행동을 보여 주어, 조선개혁의 주도권 싸움에서 일본의 라이벌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후쿠자와는 『兵論』(1882년 11월)에서 文明開化한 淸國은 동양의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淸國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청국에 대한 경계와 일본의 군비 확장, 특히 해군의 확장을 강력히 정부에 요청하게 된다. 이상와 같이 임오군란은 후쿠자와의 조선 정략론에 있어, 對中國 인식의 변화를 초래하였고, 그와 동시에 청국의 조선 정략의 동향에 대한 우려와 조선 정략에 있어 강력한 군사력의 필요성을 후쿠자와의 마음에 깊이 刻印시켰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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