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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任那의 調」와 「任那使」 -「任那의 調」관련사료의 재검토-

        나행주 고려대학교 일본연구센터 2009 일본연구 Vol.11 No.-

        本稿は、「任那の調」にする日本界の通的理解にする批判作業の一環として、特に「任那の調」の史的意義を追求するにおいて、いわゆる「任那使」の存在をその前提として理解してきたの通及び新の考え方について、その問題点を連史料である推古紀三十年各の分析を通じて明らかにし、かつその可否を具的にしてみたものである。言うまでもなく、「任那の調」の問題においていわゆる「任那使」との連を何よりも重視する日本界の傾向は、石母田正氏の提起したいわゆる「東夷の小帝小中華」論の多大な影響力と深くわるものである。つまり、日本古代史界では今現在においてもなお、日本古代家の特質及び外係史の性格を論じる際、まず持って、いわゆる「東夷の小帝國小中華」論に基づいた究がその主流を占めているのである。しかし、本稿の討結果からすると、いわゆる「任那使」の存在を前提として、「任那の調」の史的意義を追究してきた、石母田正に基づいたの理解の仕方は、史料的根を全く持たない、いわば砂の上の閣のような、脆弱な土台の上での論議である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と考えられる。したがって、今後における「任那の調」の理解は、從來とは異なる視点点から行わなければならず、少なくとも、いわゆる「任那使」の存在を重視するイデオロギ的儀的側面に一貫する立場からは、一、離れるべきであろう。と同時に、「調」という日本書紀編者らの意識が色濃く投影された、律令用語からの解放も切に望まれるところである。

      • KCI등재

        근대일본에 있어서 신화와 전설의 역사화 -記紀신화와 神功전설의 실체와 변용-

        나행주 한일관계사학회 2019 한일관계사연구 Vol.63 No.-

        It was the Gigi-myth that was created to claim the permanence and legitimacy of the Imperial Family's Rule over the Japanese Islands in ancient Japan. Mainly based on its materials relevant to the two major heroes Amaterasu Omikami the sun goddess, Susanoo-no-Mikoto the god of the sea(or the god of storms), and the legend of Empress consort Jingu's invasion of the Korean Peninsula, which can be referred as the root of Japanese people's twisted and distorted perception on Korea, this article deals with how these myths in the old era of Japan were handed dow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and were transformed through medieval and modern times. On top of that, through the case study on 'the theory that the ancestors of Korea and Japan are the same(日鮮同祖論),' in which these myths and legends were raised as a theory to rationalize Japanese colonial rule over Joseon during the Meiji era, on 'the textbooks(國史)' that were made to train the subjects who were faithful to the Japanese emperor during the Meiji period, on Joseon Shrine that was built 'to japanize the Joseon people(皇民化)' and make them worship at the shrine during the Taiso and Showa period, and on the theory that Korea and Japan are one, this article examines how these myths and legends positioned themselves as a conduit for historization, and also provides a mirror to its problems and historical significance as well. After all, the legend of Empress consort Jingu was completed as a level of historization from mythology to history, not only through ancient and medieval times, but also up to the stage of modern times, and it can be said that it is a source and basis of Japanese perception of history and their attitude towards the foreign relations, still acting as a faith, through the present day. In other words, it tells us that even today, about 1,300 years after the historical recognition of history shown in Nihon Shoki took shape, it still keeps itself alive and deep-rooted in Japanese people's psyche. 일본고대에 천황가의 일본열도 지배의 유구성과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창조된 記紀신화와 그 두 주인공 태양신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 그리고 일본인의 왜곡되고 굴절된 한국관(한국인식)의 뿌리라 할 수 있는 神功皇后의 삼한정벌 전설(설화)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아 고대에 만들어진 이들 신화와 전설이 중세와 근세를 거치면서 어떻게 계승되고 변용되고 있는지를 관련 자료를 통해 검토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신화와 전설(전승)이 근대 메이지기에 들어 식민지 조선지배의 합리화를 위한 이론으로 제기된 日鮮同祖論, 메이지기의 천황에 충실한 臣民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과서(國史), 그리고 다이쇼-쇼와기의 조선인의 황민화를 위해 세워진 朝鮮神宮과 신사참배, 내선일체론 등의 사례에 대한 검토를 통해, 근(현)대에 있어서 신화와 전설이 어떻게 자리매김 되고 역사화 되어 가는지를 살펴보면서 그 문제점과 역사적 의미를 반추해 보았다. 결국 삼한정토설화의 주인공 신공황후는 고대, 중세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근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역사화(신화에서 역사로)가 완성되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역사인식・대외의식의 원천이자 근거이며 신앙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본서기의 대외관이 그 성립으로부터 약 13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여전히 일본인의 의식 속에 살아 생명력을 유지하고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 7세기 고대일본의 견수사 견당사에 관한 기초적 연구 -입당승 입송승 이해를 위한 서장-

        나행주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20 사총 Vol.99 No.-

        본 연구는 ‘고대 일본의 입당승 및 입송승 이해’를 위한 기초적 연구로서, 7세기에 고대일본이 중국에 파견한 견수사와 견당사(초기견당사), 그리고 그에 동반해 파견된 학문승·학문생(학생)에 대해 관련 자료를 가능한 한 폭넓게 수집하고 그에 기초해 견수사 및 초기견당사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검토했다. 즉, 사절의 기본적인 성격문제, 통사문제 등을 비롯한 사절구성과 파견회수, 항로문제 등을 살펴보고 아울러 학문승과 학문생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인선된 인물들의 출자문제, 파견규모, 수당에서의 체재기간, 귀국 후의 행적과 귀국 시 장래한 문물 등을 가능한 한 추적해 보았다. 그 결과, 견수사와 초기견당사의 사절로서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정치외교사절, 정치문화사절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 사절의 구성은 대사와 부사 체제를 기본으로 하여 제3차견당사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 대사 위에 압사를 두고 있다는 점, 항로는 기본적으로 한반도의 백제 및 신라의 연안을 항해하는 북로가 취해지고 있다는 점, 학문승 및 학생의 인선 대상이 된 인물들은 그 출자가 대체로 漢(아야)·新漢(이마키노아야)씨로 대표되는 한반도 도래계 씨족의 후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 중국에서의 유학기간은 견수유학승·학생은 약 30년, 견당유학승·학생은 약 25년이라는 장기간의 체재가 확인되어 중장기적인 전망 하에서 학문승·학생 파견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수당에서의 귀국 후의 활동은 실로 다양한데 왕재교육을 담당한 교육자·지도자로서의 南淵請安, 국가정책을 건의한 慧日, 국가정책을 입안하는 국박사로서 국가체제 및 법제의 정비에 활약한 僧旻과 高向玄理, 외교사절로 활동하는 고향현리와 혜일, 정치자문역의 승민, 大僧都나 律師로서 불교계를 지도하는 觀常이나 觀智의 사례 등 실로 다양한 방면에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중국(수당)에 파견한 학문승·학생이 수행한 역할과 의미에 있어서 특히 신라에 파견한 학문승과의 공통성과 차이점을 보다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 견수사·견당사 파견을 전후한 시기에 한반도 제국과 왜국을 왕래한 학문승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우선, 삼국에서 왜국에 파견된 승의 사례를 정리해보고, 이어서 왜국에서 한반도로 파견된 학문승에 대해 검토한 후, 통일신라에 파견된 신라학문승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로서, 왜국이 해외에 파견한 최초의 학문승은 백제에 유학시킨 善信尼등의 비구니라는 점, 학문승 파견에는 상대국의 허가 등 일정한 절차가 필요하다는 점, 최초의 학문승인 선신니 파견 이후 백제에의 학문승 파견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이는 백제에 의한 불교공전 이래혜총과 관륵으로 대표되는 다수의 백제승(비구니도 포함)이 왜국에 장기간 지속적으로 파견되고 있는 점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는 점, 혜총은 비조사의 주지이자 고구려승 혜자와 함께 성덕태자의 스승으로서 추고조를 중심으로 하는 아스카시대의 정치문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고, 관륵 또한 역법이나 천문지리, 둔갑방술 등의 특수기능을 직접 전수·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왜국 최초의 승정으로서 불교계를 통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 고구려의 경우는 혜자와 담징으로 대표되는 다수의 고구려승의 도왜와 아울러 왜국에서 고구려에 학문승이 파견되고 있다는점, 신라의 경우는 645년 이전까지는 왜국에 파견된 신라승의 존재나 왜국의 신라학문승 파견 사례는 일체 확인되지 않아 백제 및 고구려와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는 점, 신라의 경우는 개신정권 성립 이후에 최초의 승려 파견과 신라에의 학문승 파견 사례가 각 1회씩만 확인되고 있다는점, 이와 달리 통일신라와 일본의 경우는 백촌강 전투 이후 단절되었던 공적인 교류가 668년에 재개된 이후 700년까지의 약 30년 동안 14명의 신라학문승 파견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 이는 608년부터 703년까지의 약 100년 동안 수·당에 파견된 학문승의 수 18명에 비하면 그 빈도가 상당히 높다는 점(다만, 신라학문승의 체재기간은 약 3년으로 수·당학문승과 는 달리 단기유학임), 나아가 신라학문승 明聰과 觀智가 신라의 師友에게 보내는 賜物의 존재가 말해주는 것처럼 신라학문승을 통한 신라불교계와의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점, 山田史御形의 사례에서 보듯이 귀국후 국사(『일본서기』)의 편찬에 깊이 관여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컨대 백제로 대표되는 삼국에서 왜국으로 파견된 승과 통일신라에 파견된 왜국의 신라학문승의 존재에서 확인되는 승려의 역할과 기능 및 다양한 양태는 왜국(일본)이 중국에 파견한 수·당 학문승·학생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 하고 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후기 견당사에 동반한 입당승이나 입송승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위한 기초적 지식을 마련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양자의 시대적 배경 및 파견 목적, 정치문화와 외교사상의 역할과 기능 등의 차이를 비교 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승의 다양한 양태를 확인함으로써 입당승· 입송승의 역사적 의미를 추구하는데 있어 매우 귀중한 실마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本硏究は、‘古代日本の入唐僧及び入宋僧についての理解’のための基礎的硏究として、7世紀に古代日本が中國に派遣した遣隋使と遣唐使(初期遣唐使)、そしてそれに伴って送った學問僧・學問生(學生)に関して、關聯資料を可能な限り広く集め、それらに基づいて遣隋使及び初期遣唐使に対する基本的な事項を檢討した. すなわち使節の基本的な性格問題や通事問題などを初めとする使節構成と派遣回數、航路の問題などを検討し、さらに學問僧と學問生の事例を具體的に檢討しながら人選された人物たちの出自問題、派遣規模、隋唐での滯在期間、歸國後における行績や歸國時に將來した文物などを具体的に追跡した. その結果、遣隋使と初期遣唐使の使節としての性格は、基本的に政治外交使節、政治文化使節の性格をもつこと、使節の構成は大使と副使という體制を基本として、第3次遣唐使のような特別な場合には、大使のうえに押使をおくこと、航路は基本的に韓半島の百濟・新羅の沿岸を航海するいわゆる北路をとること、學問僧・學生の人選對象とされた人物たちは、その出自が主に漢・新漢氏に代表される、韓半島からの渡來系氏族の後裔たちがその中心をなすこと、中國での留學期間は遣隋留學僧・學生は約30年、遣唐留學僧・學生は約25年という長期間の滯在が確認され、当時の倭国(日本)が中長期的な展望のもとで學問僧・學生の派遣政策がなされたこと、隋唐からの歸國後の活動は実に多樣であり、王才敎育を担った敎育者・指導者としての南淵請安、國家政策を建議した慧日、國家政策を立案する國博士として國家體制及び法制の整備に活躍した僧旻と高向玄理、外交使節として活動する高向玄理と慧日、政治諮問役の僧旻、大僧都や律師として佛敎界を指導した觀常や觀智の事例など、實に多樣な方面で至大な役割を果たしたこと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次に、中國(隋唐)に派遣した學問僧・學生が遂行した役割や意味において、特に新羅に派遣した學問僧との共通性や差異点をより明らかにするために、遣隋使・遣唐使の派遣を前後した時期に、韓半島諸國と倭國との間を往來した學問僧について檢討した. まず、三國から倭國へ派遣された僧の事例を整理し、続いて倭國から韓半島へ派遣した學問僧について検討し、さらに統一新羅に送った新羅學問僧の存在について検討した. その結果として、倭國が海外に派遣した最初の學問僧は、百濟に留學した善信尼などの比丘尼であること、學問僧の派遣には相對國の許可など一定の派遣手続きが必要であること、最初の學問僧である善信尼の派遣以降、 百濟への學問僧の派遣は一切見られないこと、これは百済からの佛敎公傳以来、惠聰と觀勒に代表される多數の百濟僧(比丘尼も含む)が倭國に長期間、持續的に送られていたことと不可分の関連があること、惠聰は飛鳥寺の住持として高句麗僧・惠慈と共に、聖德太子の師として推古朝を中心とする飛鳥時代の政治文化に大きな役割を果たしたこと、觀勒もまた曆法や天文地理、遁甲方術などの特殊技能を保持し、それらを直接、倭国の弟子達に傳受・指導したばかりでなく、倭國最初の僧正として、当時の日本佛敎界を統括する役割を遂行したこと、高句麗僧の場合は、惠慈と曇徵に代表される多數の高句麗僧の渡倭があり、かつ倭國から高句麗への學問僧が派遣されたこと、新羅の場合は、645年以前までは倭國に送られた新羅僧の存在や倭國からの新羅學問僧の派遣事例は一切見られないこと、この点は百済及び高句麗の場合とは好対照をなすこと、新羅に対しては改新政權の成立以後において最初の僧侶派遣と新羅への學問僧の派遣事例とが確認されること、これに対して統一新羅と日本との間では、白村江の戦い以後跡絶えた公的な交流が668年に再開されてから、700年までの約30年のあいだに、14名の新羅學問僧の派遣が確認できること、さらに、新羅學問僧の明聰と觀智が新羅の師友に贈る賜物の存在が語るごとく、新羅學問僧を通じた新羅佛敎界との深い交流があったこと、山田史御形の事例から分かるように、歸國後の國史(日 本書紀)編纂に関わるなど、新羅學問僧たちの多樣な役割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要するに、百濟に代表される三國から倭國へ派遣された僧と、統一新羅へ送られた倭國の新羅學問僧の存在を通して確認される僧侶の役割や機能、及び多樣な樣態は、倭國が中國へ派遣する隋・唐學問僧・學生の歷史的意味を考察する上で、重要な示唆と手がかりを提供している. 以上の檢討を通じて、後期遣唐使に伴った入唐僧や入宋僧に対する綜合的理解のための基礎的な知見を得ることができ、さらにこれに基づき、両者の時代的背景及び派遣目的、政治文化や外交史上の役割、機能などの違いを比較檢討することができる、重要な土台が得られたといえるであろう. 何よりも、僧の多樣な樣態を確認することによって、入唐僧・入宋僧の歷史的意味を追求する貴重な手がかりが得られたという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 KCI등재후보

        왜 왕권과 백제신라의「質」- 왜국의「質」導入受容의 의미 -

        나행주 일본사학회 2006 일본역사연구 Vol.24 No.-

        The Yamato State`s View of Koguryoin the Late 6th Century This paper intends to study how the Yamato State viewed Koguryo by analyzing Nihonsho-ki that records the relationships between the Yamato State and Koguryo. The diplomatic transac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was possible as a result of the changes in Far Asia that the collapse of Great Gaya in 562 and the unification of China by Su in 589 brought. Meanwhile, the analysis of Nihonsho-ki produced the findings as follows. At first,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 happened between the Yamato State and Koguryo. Second, it is not possible to find in Nihonsho-ki any active effort that Koguryo made to open a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Yamato State. Third, very interestingly, the Yamato State far better treated the Koguryo ambassadors than the counterparts of Shilla or Baekjae. It reflects the Yamato State was desperate in its view of and its diplomatic relation with Koguryo. Based on these characteristics, a series of articles in Nihonsho-ki do not obviously evidence the beginning of the formal relation between Koguryo and the Yamato State. In addition, it seems more valid to say that the Yamato State was active in the diplomatic transaction with Koguryo, not because it was in a desperate need of the strategic affiliation with Koguryo, but because the collapse of Kaya put the Yamato in a trouble with importing the advanced cultures of the continent.

      • KCI등재

        일본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역사관과 고대사 서술 -2011년 검정통과본의 분석을 중심으로-

        나행주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1 동국사학 Vol.51 No.-

        본고는 2011년 일본 문부성 검정통과본을 대상으로 일본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역사관과 고대사 서술의 특징을 살펴본 것이다. 무엇보다도 금년에 검정을 통과한 일본중학교용 교과서는 2006년도에 성립된 개정 교육기본법과 이에 기초해 2008년에 새로 제정된 학습지도요령 및 동 해설서가 실제로 적용되는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특히 교육기본법 제2조 제5항에 명시된 교육목표(「전통과 문화의 중시」, 「애국심과 애향심」, 「타국 존중」, 「공공의 정신」, 「세계평화와 발전」)와 학습지도요령 및 동 해설서의 영토(독도)관련 사항이 실제 교과서 검정과 서술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고 또한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유의하면서, 일본우익의 역사관을 대변하는 소위 새역모계 교과서(자유사와 육붕사)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검토했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2011년 검정 통과본 중학교교과서(역사·공민·지리)의 독도관련 기술의 가장 큰 특징은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의 영토관련 사항의 강조 및 교과서 검정의 결과로서 종래의 기술보다 한층 더 우경화의 경향이 강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새역모계를 포함한 모든 출판사의 교과서가 독도(일본명 다케시마)를 ‘일본고유의 영토이자 이를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점령하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2. 교과서검정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서 고조선 관련 서술의 삭제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자국의 전통과 문화를 지나치게 중시하여 역사의 유구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보다 오랜 시기의 이웃나라의 역사에 대한 개악의 사례라 할 수 있다. 3. 일본중학교 교과서(역사·공민) 서술에 나타난 역사관은 전통문화의 중시, 애국심과 도덕의 강조, 국가와 천황의 중시, 자위대의 긍정, 자국의 위협론에 기초한 침략전쟁의 미화와 식민지배의 합리화 등에 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인식에 입각해 한일관계나 한국관련 서술은 임나일본부(고대), 왜구(중세), 임진왜란과 조선통신사(근세), 일본군위안부, 식민지지배 문제 등(근대)으로 대표되는 사항에 있어서 여전히 문제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고대사서술상의 특징은 일본인·일본사회·일본문화·천황제국가 일본의 전통성·유구성·신성성·우수성·주체성을 강조하고 애국심과 도덕심과 자부심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로서 신화와 전승의 역사화, 성덕태자상의 창출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며, 동시에 이웃나라에 대한 인식은 중국에 대해서는 대등의식을, 한반도에 대해서는 우월의식을 심어주는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러한 내용은 교육기본법이 제시한 또 다른 교육목표인 [이웃나라에 대한 존중]이나 [세계평화와 발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역사서술이며 역사교육이라 할 수 있다. 5. 결국, 일본우익세력의 역사관을 대변하는 새역모계 교과서의 고대사 서술에 나타난 역사관은 여전히 종래의 일본고대사학계의 통설적 입장인 일본서기 사관(조공·헌상·하사·할양), 자국중심사관(대등론과 우위론), 천황중심사관(귀화인·번국관), 견당사중심사관(중국중시·한반도무시)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 새역모계 교과서 채택률의 급격한 증가와 교과서채택문제를 둘러싸고 야기된 오키나와에서의 지역간 대립과 갈등 사례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현재 일본의 역사인식은 국가주의와 세계주의의 대 ... This article was tying to figure out a view of history and ancient history on Japanese historical textbook through an authorized textbooks in 2011. Most of all, middle school textbooks authorized in this year were worth notice as the first case that government guidelines and manuals for teaching actually were applied to the textbook. Consequently, in this article, considering how authorizing textbook and narration in ti not only effectively reflected but also concretely were influenced by educational purpose clarified in the fifth clause of Article 2 of the Fundamentals of Education Act (「importance of tradition and culture」, 「national and local patriotism」, 「respect to other countries」, 「public-spiritedness」, 「peace and development of the world」) and territory part (especially about Dogdo(獨島)) in government guidelines and manuals for teaching, the analysis on contents of textbooks from self-appointed Tsukuru-kai, representing the historical view of Japanese rightist, was intensively investigated. The result is summarized like that;1. The most important character of narration about Dogdo in middle school textbooks authorized in 2011 was that it has much more powerful tendency to turing to the right than previous one. on the other words, textbooks from all publishing company including Tsukuru-kai directly described Dogdo (Takeshima竹島 in Japanese) was illegally occupied by Korea, although it was Japanese territory. 2. The elimination of narration about Gojoseon (古朝鮮) was representative issue in authorizing textbook. It could be interperted as the case that history of a neighboring country (Korean history) was changed for the worse, to emphasize national history from time immemorial with valuing tradition and culture unreasonably. 3. The historical view in narration of middle school textbooks (History/ Civic education) had characters such as glamorization for aggressive war and rationalization about colonial rule based on significance of traditional culture, emphasis of patriotism and morality, importance of nation and Tenno (天皇), positive attitude for Japan Self-Defense Forces (JSDF, 自衛隊), controversy over treat on nation. Thus, resting on this historical view, the narrations about Korea and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still had considerable problems represented in Imnailbonbu (任那日本府, in antiquity), Japanese pirates (倭寇, in middle ages),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壬辰倭亂), and Joseon press agency (in modern ages). 4. The characteristic figure of narration for ancient times was it tried to make mythology and legend of history and to create great valuation of Shoutokutaishi (聖德太子). Also it was consistent in equality for China and superiority for Korea as historical awareness about neighboring countries. It was a way Japanese/ Japanese society/ Japanese culture/ Empire of Tenno emphasized tradition/ long history/ celestialness/ excellence/ independence of Japan and enticed patriotism, morality and self-respect. Finally, it seemed the narration and education of history were not match with 「respect to other countries」, 「peace and development of the world」, another educational purpose from the Fundamentals of Education Act. 5. A view of history from narration of ancient time in Tsukuru-kai textbooks, speaking for the Japanese rightist still preserved the historical views, focusing on Nihonshoki (日本書紀), nation, Tenno, Kentoshi (遣唐使). 6. Like confrontation with each region in Okinawa (沖繩) among a boost in adoption of Tsukuru-kai textbook and problem of adopting textbook, current historical view of Japan is disoriented between pursuing tradition, culture, local and nation patriotism and pleading respect to other countries and peace and development of the world, in conflict between nationalism and cosmopolitanism, with matter about making patriot or citizen of the world.

      • KCI등재

        일본고대사와 동이의 소제국론 ― 「질」과 「임나의 조」의 관점에서 본 이시모다 학설 ―

        나행주 일본사학회 2017 일본역사연구 Vol.45 No.-

        Ishimoda Sho(石母田正)’s Small Empire of the Dongi(東夷) theory i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theories that have shaped the Japanese historical understanding of ancient Korea-Japan relations and the character of the ancient Japanese state. This paper examines these two ancient diplomatic practices to critically assess Ishimoda Sho( 石母田正)’s theory. Part of the most important supports for the theory are drawn from Jil(質) and Mimana’s Jo(任那之調). This paper also has pointed out the problems with his interpretation of Jil(質) and Mimana’s Jo. Therefore, Ishimoda’s Small Empire of the Dongi theory no longer dominates the Japanese historical field as an infallible truth and its validity and reliability have been challenged. In this light, the Japanese historiography of ancient Korea-Japan relations based on the theoretical framework provided by Ishimoda should be re-defined from the basis. It is time to rectify the misinterpretations and pursue a more accurate historiography of ancient Korea and Japan. The different interpretations on the terms such as Jil(質) and Jo(調) are also a cause to breach the historical understandings of the two nations. The interpretation Jil is a typical example. Japanese historians tend to interpret Baekje(百濟)’s Jil sent to Wa(倭) as a symbol of subordination and desire for stronger diplomatic ties with Wa. However, the reality of Jil needs to be examined without the taint of contemporary sense of the word. Jo, including Mimana’s Jo, has been defined as tribute offered to show subordination, an abstract interpretation constrained by the sense of the Ritsuryou(律令) term. It also needs to be examined by studying actual practices and reality at that time rather than defined by the modern sense of the word.

      • KCI등재

        신라와 ‘임나의 조’

        나행주(羅幸柱) 한일관계사학회 2008 한일관계사연구 Vol.29 No.-

        고대한일관계사의 실체, 나아가 일본고대국가 형성과정 및 그 특징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근거의 하나가 바로 ‘임나의 조’와 ‘질’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종래의 대외관계사나 국가형성사에 관한 일본학계의 통설적 이해는 末松保和의 임나일본부론, 石母田正의 東夷의 小帝國론, 西嶋定生의 冊封體制론의 기초 위에 성립되었는데, 이들 3학설에 있어서 ‘질’은 국가 간의 충성복속의 상징, ‘임나의 조’는 조공의례의 공납물로 간주되어 각 설의 입론 전개에 중요한 근거로 자리매김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나의 조’와 ‘질’의 이해를 둘러싸고 한일양국의 이해는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크게 대립되어 이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고는 ‘임나의 조’ 이해의 기초작업의 일환으로서 새로운 이해를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통설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임나일본부를 전제로 한 말송설, 말송설에 입각한 석모전설, 그리고 양자의 이해를 기초로 한 鈴木英夫설로 대표되는 신설의 ‘임나의 조’ 이해를 재검토해 그 문제점을 분명히 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가) 일본고대의 대외관계 및 고대국가의 특질을 규정한 石母田의 동이의 소제국론은 복속의 상징으로서의 질, 복속의례의 조공물로서의 임나의 조를 전제로 한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 나) 왜 왕권의 임나의 조 수령을 신라 백제의 임나영유에 대한 승인조치로 이해한 위에서 642년 백제의 가야지역 탈환을 계기로 왜국이 임나의 조 납입?제공 대상을 신라에서 백제로 전환시켰다는 말송설에 기초한 통설적 이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 무엇보다도 신설과 관련해 다) ‘임나의 조’가 신라의 대외전략에 기초한 對백제견제책으로서의 대왜정책으로 입안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다. 특히 최근 일반화되고 있는 신설의 이해는 ‘임나의 조’의 출현시기, 신라 측의 기본적인 자세, ‘임나의 조’가 실제 보내진 횟수, 그리고 鈴木설의 존립기반인 ‘식읍’의 존속기간과 성격 문제 등을 통해 신라 측이 제공한 ‘임나의 조’가 결코 전략물자로서의 유효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따라서 금후의 임나의 조의 이해는 ‘임나의 조’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던가, 종래의 일본학계의 이해와는 전혀 다른 관점(예를 들면, 6세기 후반 이후의 왜 왕권의 극히 현실적인 대신라외교정책으로 보는 이해 등)에서의 접근이 요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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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나의 조」의 실체와 의미

        나행주 일본사학회 2008 일본역사연구 Vol.27 No.-

        I have revised this research on Mimana-no-cho(任那의 調). The results are as follows. Mimana-no-cho is basically a foreign policy of Wa(倭王權), so it has to be understood as Shilla(新羅) Foreign Policy. I checked the several reasons to assert these findings. The origin of Minaman-no-cho Policy was made as Shilla Foreign Policy by the Wa's regime of Bitatu(敏達朝). Its historical background originated the fact that Kaya(加耶)'s territory, especially Keumgwan(金官國) and Alla(安羅國) located in Southern part of Kaya played a significant role, was the biggest source of import and supply of meterial resource, including iron for Wa's regime. Therefore, Mimana(任那) of Mimana-no-cho doesn't mean the only one country of Keumgwan(金官國). The essence of Mimana-no-cho was the practical and active foreign policy to import an abandunce of material resource for the domestic demand in Wa through Shilla. The minama-no-cho was originated as a result of Wa having filled up on its domestic demand of material resources -- including gold, silver, and bronze -- through the exchange with Kaya before Kaya went out of existence. Wa coped with the domestic demand of material resource through the exchange until sometime during the 560th. I assert the essence of Wa's regime's Mimana-no-cho's policy was to meet the need of material resource through the exchange of material resources with Shilla instead of Wa after Wa lost Kaya which was the biggest source of supply of material resource, during the 570's. In addition, Mimana-no-cho was Shilla Foreign Policy to deal with the domestic need of material resource, at the same time it was probably the first National Policy to get material resource for Wa's regime Bitatu(敏達朝) during the 570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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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제국과 왜국의 사신외교-백제・신라의 대왜외교의 형태와 그 특징-

        나행주 한일관계사학회 2017 한일관계사연구 Vol.56 No.-

        외교는 국가 상호간의 이해절충의 교섭과정이며, 그 외교의 성패를 가르는 중차대한 임무를 띠고 외국에 파견되어 상대국과 교섭하는 실무 담당자가 바로 사신(사자)이다. 고대 동아시아제국의 국제관계 특히 고대 한일관계사에 있어서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국가・왕권 간의 정치적 교류・교통(즉 외교교섭)에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즉 가장 일반적인 외교형식으로서의 사신파견을 통한 사행외교가 있고, 특수한 형태로서 ‘질’이나 왕족의 장기간에 걸친 파견을 통한 특별외교(소위 특사외교), 그리고 혼인을 매개로 한 화친외교 등이 존재한다. 본고에서는 외교에 있어 사자・사신이란 어떤 존재이며, 그 자격・조건은 어떠한지, 그리고 사신외교의 결과는 사신의 능력에 따라 어떻게 귀결되는지, 그 성패를 가르는 요인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주로 왜국을 대상으로 한 백제와 신라의 외교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결론적으로 말하면, 백제의 대왜외교는 성공의 결과를, 신라의 대왜외교는 실패의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왜국을 대상으로 한 백제와 신라의 대왜외교의 성패는 결국 ‘질’ 체제=왕족외교의 성립・지속 유무라 할 수 있고, 백제의 대왜 사신외교의 성공 배경은 바로 장기간에 걸쳐 지속된 ‘질’ 체제=‘왕족’외교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백제와 왜 양국 간에 사소한 트러블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백제멸망 시까지 기본적으로 (對신라)우호친선・동맹의 관계가 지속된 사례는 세계외교사에 있어서도 매우 희귀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국제관계・외교에 있어서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말해진다. 고대의 외교에 있어서는 바로 신라와 왜국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고대 백제와 왜국의 관계에서는 결코 해당되지 않는 死語에 불과하다. 대립과 갈등이 온존하고 있는 작금의 한일관계・외교에 있어 필요한 외교상의 전범(典範)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고대 한일관계 속에 나타난 백제와 왜국(일본)의 외교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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