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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플랫폼노동 실태와 특징Ⅱ - 웹기반, 지역기반 규모와 실태 -
김종진,신우진,김영욱 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21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슈페이퍼 Vol.2021 No.5
○ 첫째, 국내 플랫폼노동자 규모는 약 7.6%(179만명, 고용노동부; 장지연, 2020)였고, 같은 시기 서울지역은 약 9.3%(46만 1천명, 김종진 외, 2020)였음. 지역기반 오프라인 플랫폼노동은 배달(전국 67.8%, 서울 48.8%)이 많지만, 서울은 전문서비스(21.7%) 비율이 전국(11.8%)에 비해 2배 이상 많은 상황임. 플랫폼노동자의 주업(전국 19.4시간, 서울 19.3시간)과 부업(전국 10.3시간, 서울 10.1시간)간 9시간 남짓 격차가 있고, 플랫폼노동자의 월 평균 소득(145.9만원, 서울 145.3만원) 또한 주업과 부업의 차이가 컸음. ○ 둘째, 설문조사 결과 서울지역 플랫폼노동자의 평균 연령은 43.9세였고, 남성(61.5%)이 여성(38.5%)보다 다소 많았음. 3분의 2는 기혼(64.8%)이었고, 69.6%는 맞벌이였음. 플랫폼노동에서도 성별 직무분리 현상과 37%의 임금격차가 확인됨. 평균 업계 경력은 53.8개월이었고, 플랫폼 이용 개수는 평균 1.6개였음. 현재 일을 선택한 기준은 ‘시간유연성’(28.2%)과 ‘일을 구하기 쉬워서’(23.8%)가 다수였음. 부업 비율은 14%였고, 이유는 ‘소득 보충’(50%)과 ‘불규칙한 소득’(29.2%)이었음. 향후 본인의 일자리 이직 의향은 18.2%로 매우 낮았음. ○ 셋째, 서울지역 플랫폼노동자의 월 평균 소득(보수)은 266만원(온라인 250만원, 오프라인 268만원)이었음. 주된 플랫폼노동 소득(223만원), 기타 플랫폼 소득(188만원), 타 직업 소득(24만원)으로 확인되며, 플랫폼노동과정에서 지출 비용은 총 32만 3천원이었음. 건당 수수료율은 평균 15.2%(건당 액수 1천 5백원)였고, 에이전시(중개업체)를 통해 일을 하는 비율은 27.8%였으며, 플랫폼 수수료 비율은 17%(평균 7천 7백원)로 확인됨. ○ 넷째, 플랫폼노동자의 ‘약관 및 계약’ 미체결 비율은 21.6% 정도였고, 업무 평가(고객리뷰)는 절반(50.1%) 가량 존재했고, 45.5%는 불이익 조항이 있었음. 부당대우 경험은 Δ작업 내용의 부당한 변경 20.1%, Δ부당한 지속적인 작업 요구 17.7%, Δ계약 조항 이외 작업 요구 16.7%, Δ보수 지급 지연 14.7% 순이었으나, 35.8%는 자체 분쟁조정중재 절차가 없었음. ○ 다섯째, 제도개선 의견은 △불공정·부당 거래 문제시 분쟁조정 및 법률지원 시스템(74.8점), △약관 및 표준계약서 등의 가이드라인과 법률 마련(74.7점), △경력인정 시스템 마련(79점), △4대 사회보험 등 사회보험지원(74.7점),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인정(74점), △세무 및 상담 관련 지원(72.7점) 등의 순이었음.
잣나무털녹병 방제(防除)에 관한 연구 : 제4보 이병(罹病)잣나무의 치료
김종진 한국임학회 1979 한국산림과학회지 Vol.43 No.1
잣나무털녹병 罹病木 病患部에 Acti-dione 150ppm (石油로 稀釋) 撤布로 그 治療效果를 檢討한 바. 1. 輕症인 잣나무는 治療가 可能하며, 銹子襄 發現 最外部로부터 約 10㎝半經까지 고루 撤布하는 것이 重要하다. 2. 重症木과 幼齡木은 撤布後 大槪枯死하게 된다. 3. 治療與否의 判定은 藥劑撤布로부터 3年間의 觀察을 要한다.
중국 “청말민초 신조연극”의 연극사적 의의와 동아시아 근대연극
김종진 중국문화연구학회 2024 중국문화연구 Vol.- No.63
중국 연극사는 전근대는 단일한 희곡(전통 연극)의 시대, 근대 이후는 화극과 희곡의 이원구도의 시대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이해는 근대 전환기 중국에 서양식 연극이 전해지면서 화극이 탄생하고 희곡이 크게 변화하던 양상을 담아낼 방법이 없었고, 이 근대 전환기의 연극은 오랫동안 중국 연극사 연구의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199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이 시대의 중국 연극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화극-희곡의 이원구도는 이 시대의 다양한 연극 역시 이원적으로 오해하게 했다. 그리고 이는 문명희, 개량희곡, 시장신희 등 복잡하고 다양하여 화극과 희곡으로 양분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 시대 중국 연극 연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위안궈싱(袁國興)은 새 연극사적 개념인 “청말민초 신조연극”을 제기하여 근대 전환기 중국 연극의 다양한 연극적 스펙트럼을 화극-희곡의 이원적 구도가 아닌 통합적 관점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근대 전환기 중국 연극 연구자뿐 아니라 중국 희곡 및 중국 현대문학 연구자의 동의를 거쳐 제기된 “청말민초 신조연극”은 이후 꾸준한 후속 연구가 뒤따르고 있지만 근대 이후 중국 연극을 화극-희곡의 이원구도로 이해하는 학계의 관습과 중국 현대문학이 인정하는 현대성의 협소함으로 인해 이 새 단어가 원래 갖고 있던 기획 의도를 잘 구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단어가 가진 통합적 시야의 가치와 중국 연극사를 넘어 동아시아 연극사로 확장될 가능성을 고려하면 향후 동시대의 우리 연극사 연구에도 적용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The history of theater in China is understood in terms of the unitary structure of Xiqu (戱曲, Chinese traditional theater) in the pre-modern period and the dichotomous structure of spoken plays and Xiqu in the post-modern period. This understanding, however, does not capture how spoken plays were created and Xiqu was greatly transformed with the introduction of Western theater to China during the country’s transition to the modern period. As a result, theater during the modern transitional period has not received much research attention in the field of Chinese theater history for a long time. Although research on Chinese theater in this period began in the 1990s, the dichotomous structure of spoken plays and Xiqu resulted in the misunderstanding that theater during this period was binary. However, it was actually complex and diverse, including civilized dramas(文明戱), reformed Xiqu(改良戱曲), and Xiqu in contemporary dress(時裝新戱) which makes it much more difficult to study Chinese theater during this period as it cannot be categorized binarily into spoken plays or Xiqu. To overcome this problem, Yuan Guoxing(袁國興) proposed a new concept of the new-trend theatre movement in the late Qing Dynasty and the early Republican period(淸末民初 新潮演劇) in theater history to understand the diverse theatrical spectrum of Chinese theater during the modern transitional period from a holistic perspective rather than a binary one. Although there have been follow-up studies on the new-trend theatre movement in the late Qing Dynasty and the early Republican period, which was proposed based on a consensus among both researchers of Chinese theater in the modern transitional period and researchers of Chinese Xiqu and contemporary Chinese literature, the term is not always implemented as originally intended due to conventions in academia, where Chinese theater in the modern period is understood as a dichotomy of spoken plays or Xiqu, and the narrow recognition of modernity in Chinese modern literature. Considering the value of the term’s holistic perspective and its potential to extend beyond Chinese theater history to East Asian theater history, it would be worth applying it to future research on Korean theater history.
전우의 性師心弟說에 대한 한주학파와 간재학파 간의 논쟁 일고
김종진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23 남명학연구 Vol.78 No.-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초에 성립된 艮齋 田愚의 성사심제설에 대해 영남의 한주학파와 호남의 간재학파 간의 논쟁을 종합적 시각으로 평가해 본 것이다. 간재가 寒洲 李震相의 心卽理說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性師心弟說을 제시하였고, 이에 한주학파의 비판을 받자 간재학파가 되받아 비판하면서 영호남 학파 간에 긴 논쟁이 이어졌다. 그동안 심즉리설과 성사심제설을 포함한 理氣心性論에 관한 선행 연구는 광범위하게 다루어졌는데, 대체로 분석적 시각으로 파고들어, 각자의 주장에서 특색과 다른 점을 규명한 것으로서 의미 있는 연구 성과들이었다. 여기서는 그 중 성사심제설에 관련하여 후기 영호남 성리학의 양대 학맥인 한주학파와 간재학파의 논쟁에 초점을 맞추어 당대의 두 지역을 대표하는 학파가 국난의 현실 속에서 벌인 철학적 논쟁의 의미와 상호 입장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간재학파가 노사학파와 함께 경상우도에 뿌리 내린 호남의 학맥으로서 한주학파와의 인적 교류 속에 학문의 공통점이 어느 정도였던 지도 살펴보았다. 즉, 논쟁의 대척점 뒤편에 가려진 이론의 공통분모에서 양 학파의 학문적 소통과 융합의 가능성도 점검해 본 것이다. 우선 학파 간에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철학적 사유가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 본성을 회복하고 天命을 실현하려는 성리학의 근본 목적을 똑같이 추구한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것은 각자가 제시하는 이론이 동일한 목표 달성을 위한 방법상의 다른 차이임을 서로 인정할 수 있어야 건전한 논쟁이 되고,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성리학은 理氣·心性을 두고 벌인 논쟁에서 그 자체는 훌륭한 철학과 교육이 되고, 사회를 바로 세우는 지남이 되었지만, 그 논쟁이 융합적이지 못하고, 분열적이며 파당적으로 흐른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여기의 두 학파 간 논쟁도 큰 그림에서는 그 연장선에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한주학파는 간재의 성사심제설이 자신들의 간판 학설인 심즉리설의 논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하여 비판의 날을 세운 것 같고, 간재학파도 한주 심즉리설의 대두에 위기감을 느낀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학파가 전개한 심성론에서 가장 돋보이는 성사심제설 논쟁은 미증유의 국난과 역사적 전환기에 민족의 의식을 응집하는 역할에는 부족했지만, 수 백 년간 전승되어 온 조선 성리학의 대미를 장식한 학술 논쟁이었다. 또한, 두 학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질의 思惟를 가진 교집합 부분이 많았고, 그로써 두 학파 간에 대립보다는 일정부분 사상적 융합도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이었음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순수 학술적 논쟁의 너머에 학파 간의 세력상 대립과 정치적 감정적 요소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학술적 가치가 높은 두 학파 간 논쟁이 논쟁으로 끝나고, 아무런 융합의 결말이 없었던 이유의 하나로 작용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논쟁 과정은 어디까지나 학구적 탐색이 주된 방향이었고, 그런 와중에도 학파 간에 도를 넘는 비방은 없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김종진 동양고전학회 2016 東洋古典硏究 Vol.0 No.62
이 논문은 松桂懶湜(1684~1765)의 松桂大禪師文集에 나타난 문학 세계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특히 선행 논문에서 미진하게 다루어진 사상적 면모와 그 시대성, 불가 내의 문학 교유 양상 및 문학지리학적 측면에 주안점을 두고 고찰하였다. 송계대사는 숙종~영조 연간에 안동 봉화사에 주석했던 인물로서 喚醒志安(1664~1729)과 落巖義訥(1666~1737)에게 참학하였다. 대사의 휘하에 많은 제자들이 있거나 저술을 남긴 것은 아니나, 조선후기 교학의 수준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강원의 이력과정을 충실히 이수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고, 화엄학을 연찬하여 「華嚴經七處九會品目」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정토신앙에 귀의한 것도 확인된다. 이를 통해 대사의 삶과 저술, 사상적 경향이 선․화엄․정토의 三門兼修라는 18세기 한국 불교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사는 시문을 꾸준히 연마하여 자신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 나갔고 그 결과가 문집에 반영되어 있다. 송계대사는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후기 영남의 안동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문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해 나간 인물로 그려볼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d Songgye Na‐sik’s(松桂懶湜, 1684~1765) literary world based on Priest Songgye’s Anthology(松桂大禪師文集). In consideration of the insufficiencies of the only previous study on Songgye’s literature, this study was focused on his ideological character and its historicity, the trend of literary exchange in the Buddhist circle, and the literary geographical aspect of his literature. Priest Songgye was the head of the Bonghwa‐sa Temple in Andong during the years under the rule of Kings Sukjong and Yeongjo, and learned from Hwanseong Ji‐ahn(喚醒志安, 1664~1729) and Nakam Eui‐nul(落巖義訥, 1666~1737). The priest did not have many students under him nor leave numerous writings. In the process of the development of the Buddhist doctrin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however, he completed the scripture learning courses faithfully and laid the ground of his philosophy. In addition, the afterword of Hwaeomgyeongchilcheogupumhoipummok (華嚴經七處九會品目跋) shows that he compiled the book under his teacher’s instruction. What is more, he is known to have devoted himself to belief in the Pure Land in his late years. Given these backgrounds, the priest’s life, writings, and ideological tendencies pursued all of Zen, Hwaeom, and the Pure Land together, and at the same time, reflected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Buddhism in the 18th century. The priest steadily cultivated himself in poetry and established his own literary world, and all the outcomes were fully reflected in his anthology. Priest Songgye walked the road of a learner throughout his lifetime but, on the other hand, he established his identity as a literary man in the specific time and space of Andong, Yeongnam in the late Joseon Dynas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