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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 초상화의 제작과 숭모

        강영주(kang young-Ju) 포은학회 2021 포은학연구 Vol.28 No.-

        정몽주 초상화는 서원과 사당, 영당 등에 봉안된 전신 초상화와 문집과 화첩 등에 실린 반신 초상화로 구분된다. 전신 초상화는 배향과 제례를 통해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해 제작되었고 반신 초상화는 조선시대에 화첩으로 장첩되어 선물, 감상, 교화 등을 목적으로 제작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통치의 일환으로 인쇄되어 확산되었다. 이 글에서는 포은영당의 정몽주 초상화가 현대작이 아니라 1677년 한시각이 제작한 초상화를 1769년 한종유가 1차 보완하고 20세기 다시 2차로 수정한 작품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총 3폭의 정몽주 초상화를 제작한 한종유가 1768년에 숭양서원에 봉안할 목적으로 제작한 초상화가 가묘(영당)에 봉안된 1769년 본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1768년 한종유가 제작한 숭양서원 본의 정몽주 초상화는 형형한 눈빛, 강직한 인상, 일부 가감된 의습선 등이 이전 시기의 이모본들과 달라 주목된다. 이는 당시 1677년 한시각 본이 ‘참 모습을 잃어(失眞)’ 다시 제작하게 되면서 한종유가 특별히 포은의 삶과 인품 등이 드러나게 초상화의 ‘전신(傳神)’에 천착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종유가 1768년 숭양서원 본을 제작할 때 포은문집의 간행에 들어갈 ‘초상’을 요청받아 제작했음도 주목할 만하다. 또한 서울대학교 소장 정몽주 반신 초상화 초본은 바탕 재질과 한종유의 초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18세기 후기에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정몽주 초상화는 크게 조선 전반기 대표적으로 ‘핍진(逼眞)’한 이모본이였던 1555년 임고서원 본 초상화 유형과 조선 후반기 1768년 숭양서원 한종유 초상화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한철도 일제강점기 숭양서원에 봉안된 1768년 한종유의 정몽주 초상화를 모사하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현대에도 정몽주 초상화를 거론할 때 이한철이 제작한 1880년 본을 대표작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몽주 초상화의 제작 방식과 유형에 따라 초상화의 성격과 숭모 방식이 달라졌던 것이다. The portrait of Jeong Mong-Joo(鄭夢周) is divided into a full-body portrait(全身 肖像畵) enclosed in Seowon, Sadang, and Yeongdang(影堂:The the household shrine where the portrait) is enshrined, and a half-body portrait(半身 肖像畵) in collections of writings and paintings(畵帖). Full-body portraits of the Joseon Dynasty were produced to commemorate and worship Jeong Mong-ju through orientation and ancestral rites. During the Joseon Dynasty, half-body portraits were produced for the purpose of gifts, appreciation, and edification, but Japanese colonial era was printed and spread as part of colonial rule. In this article, the portrait of Poh-Eun Yeongdang(圃隱影堂) was not a modern work, but a portrait produced by Han Si-Gak(韓時覺) in 1677, which was renovated by Han Jong-Yu(韓宗裕) in 1768 and revised again in the 20th century. In addition, a draft of the portrait owned by Seoul National University(서울大學校) was considered to have been produced in the late 18th century in the style of the background material and work. In other words, the portrait of Jeong Mong-joo can be divided into a portrait type in 1555 and a portrait type of Han Jong-yu in 1768. In Japanese colonial era, portraits of Soongyang Confucian Academy(崧陽書院) became more popular by people traveling between Kaesong(開城), the center of transportation. Lee Han-Cheol(李漢喆) also revealed that he copied Han Jong-yu s portrait. It was found that the adoration method and style of the portrait changed according to the production method and type of portrait of Jeong Mong-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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