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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세유표』를 통해서 본 복지국가의 전통

          김용흠(Kim, Yong-heum)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7 동방학지 Vol.0 No.180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정약용이 "경세유표"를 통해서 제시한 것은 국가 체제 전반의 개혁론이었고, 새로운 국가 경영 기획이었으며, 그 발전 전망을 담은 미래 국 가의 청사진이었다. 그는 장구한 기간 우리나라 중세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대토지 소유를 해체 하여 생산력을 증진시키고, 일하는 농민만이 토지를 점유하고 식량 생산을 전담하게 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정전제를 시행할 것을 구상하고, 국가가 공전을 마련하여 이러한 원칙을 실천한 뒤, 구일세법을 관철시켜 지주제를 해체하 려고 구상하였다. 19세기 삼정 문란의 주범이었던 환곡 제도에 대해서는 그 폐단을 제거하여 진휼의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장구한 기간 국가가 진휼 정책을 통해서 국민을 보호하려 한 역사 전통을 계승하여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환곡 제도 개혁안에도 불구하고 원곡이 고갈될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로서 상평곡을 설정하였다. 그가 제안한 상평곡 운영은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 따른 미곡의 상품화를 활용하여 미가 조절을 통해서 진휼곡을 확보하려는 전진적인 방안이었다. 정약용은 이러한 제도 개혁을 민의 자발성을 활용하여 추진하려고 구상하였다. 정전제를 시행하기 위해 구일세법을 강조한 것은 소작농들의 자발적인 지대 거부 운동을 유도한 것이었다. 또한 부공제도 관련 산업 종사자들의 공론에 입각하여 운영하려 하였다. 특히 환곡을 리 단위로 분배하자고 제안한 것은 조선후기 사회변동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서민 계층을 활용하여 진휼기능의 실효를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향촌을 비롯한 각종 경제 공동체에서 민의공론과 자치 능력을 신뢰하고, 그에 의지하여 국가 권력을 강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정약용은 사적 토지소유를 부정하였지만 시장 경제는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가 구상한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시장 경제는 인정하였지만 매점매석과 같은 자본의 횡포는 국가가 제어해야 한다고 보았으므로 자유 방임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국가를 구상한 것도 아니었다.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구상한 국가는 그역할과 기능의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복지국가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In his work Gyeongseyupyo (經世遺表), Jeong Yak-yong suggested a reformative management plan and its benefits for the Kingdom of Joseon. As tenant farming had become a severe chronic problem in the 19th century, he tried to collect ownerships from landlords and to distribute the lands to truly active farmers. He applied a moderate version of the well-field system(井田制, an ancient chinese land distribution method) to boost productivity. Per his plan, the government organized public farmlands first, and enforced a strong tax system with the collection of one-ninth of the crop. Jeong Yak-yong also tried to inherit and to restore the national relief policy (賑恤政策) by purifying the most corrupt—hwangok (還穀)—system. He intended to prevent abuses of the system, and designed sangpyeongok (常平穀) to secure the supply of relief rice. Although Jeong Yak-yong objected to the privatization of land property, he did not hold socialist ideals. He accepted the market economy model, albeit with governmental intervention rather than adhering to the principle of laissez-faire. In its role and function, the national organization suggested by Jeong Yak-yong's Gyeongseyupyo can be considered a precursor of today's welfare state.

        • 21세기 다시 읽는 『경세유표』

          김용흠(Kim, Yong-heum)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7 다산과현대 Vol.10 No.-

          정약용이 『경세유표(經世遺表)』를 통해서 제시한 것은 국가 체제 전반의 개혁론이었고, 새로운 국가 경영 기획이었으며, 그 발전 전망을 담은 미래 국가의 청사진이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왕조 국가의 낡은 제도를 혁신하려는 의도 아래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과 함께 이른바 ‘일표이서(㊀表二書)'를 저술하였는데, 그 기획의 전체적인 밑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경세유표』였다. 『경세유표』에서는 예조(禮曹)와 병조(兵曹) 개혁안은 매우 소략하고, 형조(刑曹)와 공조(工曹)에 대한 내용은 누락된 반면 호조(戶曹) 관련 내용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정전론(井田論)을 통해서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를 해체하고 농민들에게 항구적인 경작권을 보장하려 하였으며, 각종 재해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농업 이외의 새로운 산업 분야를 창출하여 모든 국민이 안정된 직업을 갖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국가를 지향하였다. 그는 이러한 구상을 『주례(周禮)』를 비롯한 유가(儒家) 경전에서 그 근거를 찾고, 중국과 조선의 역사 속에서 제도개혁의 사례를 검토하여 마련함으로써 그 정당성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서 나온 것임을 보이고자 하였다. 정약용은 사적 토지소유를 부정하였지만 시장 경제는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가 구상한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시장경제는 인정하였지만 매점매석과 같은 자본의 횡포는 국가가 제어해야 한다고 보았으므로 자유 방임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국가를 구상한 것도 아니었다.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구상한 국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복지국가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To innovate the obsolete system for Kingdom of Joseon, Jeong Yak-yong wrote 3 books: Mokminsimseo(牧民心書), Heumheumsinseo(欽欽新書) and Gyeongseyupyo(經世遺表). In Gyeongseyupyo(經世遺表), he suggested a reformative management plan and its benefits for the whole country. The plan includes the idea of renovating six ministries of Joseon, mostly on Hojo(戶曹, ministry of taxation). Jeong Yak-yong tried to disband the tenant farming system, and to guarantee the right of cultivation for truly active farmers by introducing the well-field system(井田制). He also wanted the whole common people to have stable occupation and to enjoy an opulent lifestyle, by protecting them from disasters and creating various industry fields besides agruiculture. To legitimize his plan, he based himself on Confucian scriptures including Rites of Zhou(周禮). He also studied the history of China and Joseon to look through the cases of systemic reform. Although Jeong Yak-yong objected to the privatization of land property, he did not hold socialist ideals. He accepted the market economy model, albeit with governmental intervention, rather than adhering to the principle of laissez-faire. In its role and fuction, the national organization suggested by Jeong yak-yong's Gyeongseyupyo can be considered a precursor of today's welfar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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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晩靜堂 徐宗泰의 정치 활동과 탕평론

          김용흠(Kim Yong-heum) 한국고전번역학회 2020 고전번역연구 Vol.11 No.-

          만정당 서종태의 정치 행적은 朝鮮後期 국가의 위기를 蕩平論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官人ㆍ儒者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탕평론은 당파적 의리를 떠나서 정치는 정책을 다루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庚申換局(1680) 이후 집권한 서인은 결국 이에 대한 찬반을 두고 老論과 少論으로 분열되어 갈등하였다. 甲戌換局(1694) 이후 소론 탕평파는 王權論에 입각하여 世子 보호를 자임하였으므로 숙종의 지지를 받고 蕩平策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과 당색을 달리하는 남인도 적극 등용하여 국가의 위기 극복을 위한 제도 개혁에 매진하려 하였다. 서종태는 이러한 소론 탕평파의 정치 노선을 충실하게 구현하였다. 그렇지만 노론의 반발로 인해 제도 개혁은 지지부진하였으며 세자의 지위까지도 위협받고 있었다. 결국 지배층의 다수가 세자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숙종에 의해 丙申處分(1716)이 내려져 정국 주도권을 노론에 내주면서 탕평책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의 탕평 노선은 그 아들 徐命均에게 계승되었다. 그는 경종대에 경종에게 충성하면서도 世弟 보호를 일관되게 주장하여, 영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탕평론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치 노선은 그 손자 徐志修에게도 계승되어 思悼世子와 후일의 정조인 世孫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 삼대가 연이어 정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서종태의 탕평 노선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서종태가 조선후기 국가 위기의 핵심 문제였던 良役의 폐단을 변통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기득권 계층인 양반 지주의 반발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里定法을 통해서 당시 향촌에서 성장하고 있던 신흥 세력의 도움을 받아서 수령권을 강화하여 이에 대처하려 하였다. 이것은 조선후기의 사회변동을 통해서 새롭게 등장한 民들과 함께 국가의 집권력을 강화함으로써 봉건사회의 계급모순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국가 권력을 강화시켜 계급모순을 해소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우리식 근대화의 독특한 경로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서종태가 견지한 소론 탕평론은 병신처분으로 좌절되었다. 당쟁으로 점철된 조선후기에 탕평론ㆍ탕평책은 국가의 유지ㆍ보존을 위해서는 직접 생산자인 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儒學의 대전제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당대의 계급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 말기에 유행했던 당쟁 망국론과 유교 망국론은 서종태와 같은 관인ㆍ유자의 존재를 무시하는 결정적 문제를 안고 있다. The political activities of Manjeongdang(晩靜堂) Seo Jong-tae(徐宗泰) show a type of government official and Confucian who tried to overcome the crisis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the Tangpyeong theory(蕩平論). Tangpyeong theory came from the premise that politics had to deal with national policy apart from factional interests. Western party (西人), who came to power after Kyungshinhwanguk(庚申換局, 1680), eventually split into Noron(老論) and Soron(少論) over the pros and cons, resulting in conflict. After Gapsulhwanguk(甲戌換局, 1694), Tangpyeong followers from Soron party took over the protection of the prince, based on the theory of Royal power(王權論), so they were supported by King Sukjong(肅宗) and were able to promote the Tangpyeong policy. They also actively recruited Southern party(南人) who are different from their own, and tried to reform the system to overcome the national crisis. Seo Jong-tae faithfully embodied the political line of the Tangpyeong followers of Soron. However, due to the opposition from Noron, institutional reform was sluggish and even the status of the crown prince was threatened. Eventually, King Sukjong, who regarded that the majority of the ruling class did not support the crown prince, made a decision of Byeongsincheobun(丙申處分, 1716), and gave the political leadership to Noron, and the Tangpyeong policy was thwarted. However, Seo Myung-gyun(徐命均), son of Seo Jong-tae, inherited his father"s devotion to the Tangpyeong theory. Seo Myung-gyun was loyal to King Gyeongjong, but also consistently insisted on the protection of the king"s brother, who was going to be King Yeongjo(英祖) afterward. So he was able to maintain the Tangpyeong policy even after King Yeongjo was enthroned. This political line was also passed down to Seo Ji-su(徐志修), grandson of Seo Jong-tae. Seo Ji-su tried to protect the Crown Prince Sado(思悼世子), and the son of Prince who was subsequently to be King Jeongjo(正祖). Since these three generations faithfully supported the Tangpeyong theory, they were able to advance to dignitary continuously. Although Seo Jong-Tae tried to innovate the evil customs that were prevalent on the system of people"s military service[良役], which was a key issue of the national crisis in the late Joseon Dynasty, he could not overcome the opposition of the vested yangban landlords. Accordingly, he tried to cope with this difficulty through the Ijeong law(里定法), by strengthening the local government authority with the help of emerging powers that were growing in the local sphere at that time. This was an attempt to overcome the class contradictions of feudal society by strengthening the state"s power with the newly emerged people through social chang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attempt to resolve class contradictions by strengthening the state power is noteworthy in that it was a unique way for Joseon"s modernization. In spite of Seo Jong-tae"s dedication, the Tangpyeong theory of Soron has suffered a setback by the Byeongsincheobun(丙申處分, 1716). In the late Joseon Dynasty, which was plagued by a party conflict, the Tangpyeong theory and the Tangpyeong policy came out of the premise of Confucianism that in order to maintain and preserve the state, the people who were producers, must be protected. Therefore, it cannot be dismissed as meaningless just because it failed to overcome the class contradictions of the time. The theory of national ruin was popular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at blames party strife and Confucian custom, has a decisive problem of ignoring the existence of government officials and confucianists like Seo Jong-t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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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정치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김용흠(Kim, Yong-Heum)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한국민족문화 Vol.58 No.-

          조선후기에 당쟁으로 칭해지는 정치적 갈등이 격렬하게 전개되어 사적(私的) 권력욕과 은원(恩怨) 관계에 따른 모략과 음모가 난무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대내외적으로 국가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방안을 모색하는 관인(官人)·유자(儒者)들 또한 당색을 넘어서 존재하였다. 이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국가 구상을 체계화 한 것이 조선후기 실학이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제출한 정치론이 탕평론이었다. 탕평론을 통해서 유학(儒學)은 양반 지주 계급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비호하던 학문으로부터 대다수 국민 대중의 이익을 뒷받침하는 정치경제학(政治經濟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영조·정조의 탕평책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우리 정치사에서 계급모순의 극복과 관련된 풍부한 자산을 남겼다. 이들이 탕평정치를 통해서 제도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화해와 포용, 타협과 절충을 시도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쟁망국론과 유교망국론은 이들의 존재와 노력을 도외시하는 결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21세기 문명사의 전환기에 유학이 그 대안이 되려면 실학과 탕평론의 전통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political conflicts(黨爭, dangjaeng) were fierce. These plots and conspiracies were originated from personal desire of power and relations of favors and spites. Naturally the nation faced internal and external crisis. Some officials and confucian scholars beyond the party began to plan a new design of nation and political theory to fulfill the innovation, which were called Silhak(實學) and Tangpyeong theory(蕩平論). This new theory had possibility to renovate the confucianism at that time which had exclusively benefited nobleman and landowners, into the political economy that support the majority of ordinary people. Although Tangpyeong policies of king Yeongjo(英祖) and Jeongjo(正祖) were ultimately failed, these theories left abundant assets about overcoming class contractions in the political history. Lately, some researchers regard party strife and Confucinism as cause of national ruin, however, Tangpyeong theories were distinct efforts which tried to reconcile, embrace, compromise and negotiate with the opposition groups. If you want to make Confucianism find a role in the 21st century, you should begin from the tradition of Silhak and Tangpyeong the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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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21세기에 조선후기는 무엇을 말할 수 있나?

          김용흠(Kim, Yong-heum) 역사학회 2013 역사학보 Vol.0 No.219

          During 2011~2012, this article organized theoretical problems of study on history of Late Joseon and achievement of study on political history. First of all, there were plenty of theoretical consideration for macroscopic viewpoint during this period, which had been uncommon due to the influence of postmodernism. Researchers had opinion in common with the necessity of new definition for modernity and the critical mind to overcome westerncentrism and national historical recognition, although there were various opinion gaps between them, In the study on political history, there were some researches that give Tangpyeong(蕩平) politics on 18th century a deeper significance from a perspective of reinforcement of public interest. There also appeared a new viewpoint on Sedo(勢道) politics on 19th century through adding a meaning to Samjeong-Ijeongchack of the king Cheuljong peroid. Among the premodern era, there are the most historical materials accumulated in the Late Joseon period. Theorization work to newly understand these various, abundant political fact should be kept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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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노론 당론서와 당론의 특징 - 『형감(衡鑑)』을 중심으로-

          김용흠 ( Kim Yong Heum ) 한국사상사학회 2016 韓國思想史學 Vol.0 No.53

          조선후기에는 당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왜 싸웠는지를 해명하는 수많은 당론서가 남아있다. 당시 사회를 주도한 것은 노론이었으므로, 당론서 가운데 노론측 당론서가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형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노론측 당론서의 전형을 보여준다. 『형감(衡鑑)』 가운데 「잡록(雜錄)」은 송시열이 직접 윤선거·윤증 부자와 소론을 비롯하여 윤휴와 남인을 공격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효종·현종대 송시열이 윤휴와 윤선거를 공격한 주된 이유는 북벌추진을 위한 제도 개혁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북벌을 실질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양반과 지주의 이익을 양보 내지 제거하는 대동법·균역법과 같은 제도 개혁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송시열이 이러한 주장을 저지하기 위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간 것은 주자학을 내세워서 정책(政策) 논쟁을 의리(義理) 논쟁으로 치환한 것이었다. 결국 송시열은 양반과 지주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주자학 의리론을 내세우고, 정책 논쟁을 의리 논쟁으로 치환하여 당파적 갈등을 격화시켰던 것이다. 「잡록」에서 송시열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주자와 주자학의 권위를 동원하여 자신의 당파적 편견을 합리화하였다. 『형감』은 이러한 송시열의 주장에 입각하여 그 논리를 부연하고 확대시켜서 노론의 정당성을 천명한 노론 당론서였다. 노론 당인들은 이러한 논리에 근거하여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을 무력화시키고, 19세기 세도정치를 주도하여 국가의 존망을 위기에 빠트렸다. 19세기 말 뜻있는 지식인들이 당쟁망국론과 유교망국론을 제창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Party strife was fierce in the late Joseon period, and many texts were written that explain those conflicts. In those days, Noron faction led the political situation, so it is natural that much more records are produced from Noron side. Among these books, Hyeonggam(衡鑑) shows the opinion of Noron very well in many ways. Hyeonggam represents and justifies the party platform of Noron, by amplifying and Song-Siyeol`s idea. In Jamnok(雜錄) part of Hyeonggam, He denounced Soron side and Southerners faction, especially Yun-Seongeo, Yun-Jeung(Soron) and Yun-Hyu(Southerner), during the reign of King Hyojong(孝宗) and King Hyunjong(顯宗). For the benefits of nobleman and landowners, he criticized these opposite factions to prevent the reformation of tax system such as Daedongbup(大同法) and Gyunyukbup(均役法), which is indispensable for northern expedition. He drove a policy argument into the theoretical dispute by slandering Yun-Hyu as samunnanjuk(斯文亂賊, infidels against the Confucian and the Zhuxi doctrines). In Jamnok, Song-Siyeol distorted historical fact and justified his party prejudice by the authority of doctrines of Zhuxi. Members of Noron expanded this logic, incapacitated Tangpyeong(蕩平) policy by King Youngjo(英祖) and King Jeongjo(正祖), lead power politics in 18th century, and finally ruined the Joseon dynasty. Some chivalrous intellectuals in the late 19th century concerned a national peril, and considered party strife and Confucianism as the main culp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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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전기 훈구,사림의 갈등과 그 정치사상적 함의

          김용흠(Kim Yong Heum)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4 동방학지 Vol.0 No.124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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