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동양학은 어떤 인간을 말하였나?

        김시천(Kim Si-Cheon) 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9 오늘의 동양사상 Vol.- No.20

        동아시아의 전통적 인간관, 특히 그 가운데 ‘몸’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우리는 그간 이러한 물음에 대해 주로 서구 혹은 근대적 인간 이해와 대조시키는 방식으로 논의해 왔다. 게다가 이러한 전통적 몸 이해를 구성하는 언어는 사실상 서구적 개념을 통해 논의되었다. 그래서 ‘몸’은 이성과 감성의 통일체이고, 정신과 육체가 합일된 나눌 수 없는 존재라고 이해되었다. 이것은 마치 ‘기氣’가 물질도 정신도 아니면서 물질이기도 하고 정신이기도 한 것이라고 말하는 논법과 닮았다. 이 글은 이러한 ‘몸’의 언어관에서 벗어나 전통적 용어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는 시도이다. 정신과 신체, 주관과 객관, 감성과 이성 등의 서구적 용어로부터 벗어나 문헌을 살펴보면, 그곳에는 인간을 표현하는 ‘칠규七竅’나 ‘구규九竅’와 같은 말과 만나고, 그 옆에서 우리는 ‘기’와 ‘정情’과 같은 말을 다시 살피게 된다. 유가나 도가라는 철학적 제약을 벗어나 공유되는 이러한 용어들은 우리의 몸과 우리 몸의 체험, 그리고 우리의 삶과 느낌이 담겨 있는 중요한 것들이다. 우리가 오늘날 전통적 ‘몸’ 이해를 시도한다는 것은 전통적 개념들을 근대적 용어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말들이 담아내고자 했던 그 ‘체험’과 느낌을 회복하는 것이다. 천지와 천하라는 자연적 사회적 공간 속에서 식물처럼 유비되는 인간의 몸은 일곱 개의 구멍, 아홉 개의 구멍을 지닌 존재이다. 이 구멍을 따라 왕래하는 자연의 기운은 곧 우리몸의 기운이 되어 다시 몸 밖의 세계와 감응하는데 그것은 바로 ‘정情’이 된다. 우리가 철학에서 말하는 ‘칠정’이나 한의학에서 말하는 ‘구기九氣’는 우리 몸이 세계와 감응하는 양태를 표현하는 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기’는 우리 몸의 감응의 장에서 일어나는 ‘느낌의 언어’이며, ‘정’은 우리가 살아있음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비록 우리가 잊었으나 우리 몸은 아직 그렇게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우리의 몸의 느낌과 연결시키는 작업, 그것이 곧 전통적 ‘몸’ 이해로 가는 가장 손쉬운 지름길은 아닐까 하고 이 글은 조용히 묻고자 한다.

      • KCI등재
      • KCI등재
      • KCI등재

        ‘老學’에서 ‘易學’으로

        김시천(Kim Si-Cheon) 한국도교문화학회 2003 道敎文化硏究 Vol.19 No.-

        魏晉 초기에 등장한 王弼의 『老子注』?는 현대에 와서 『노자』의 정통 주석서로 간주된다. 또한 왕필은 당시의 현학 사조를 주도한 인물로서, 『노자』의 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한 철학자로 평가된다. 하지만 왕필 『노자주』의 언어와 내용을 분석하면 이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왕필은 『장자』의 논리를 원용하면서 『노자』를 『주역』의 언어로 대체하고 있으며, 따라서 『주역』으로 『노자』를 해석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위진 시대 『노자』의 핵심 사상으로 받아들여진 ‘無’는 ‘元’, ‘太極’, ‘理’ 등으로 대체되고, 『노자』의 ‘無爲’는 『논어』의 ‘무위’로 탈바꿈한다. 왕필은 『노자』, 『주역』, 『논어』 ?모두에서 의리적 접근을 통해 성인의 도를 긍정하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이 논문은 왕필의 『노자주』의 기본 성격을 이와 같은 노학의 역학화 또는 의리적 전환으로 보려는 시도이다. Wang Pi's philosophy focuses on the reestablishment of Confucius's tao, who hold a prominent position than Lao-tzu in the intellectual discourses of that period. While Wang Pi is Taoistic in his argumentation, he is a Confucian in social and political ideal, which based on Confucius's Analects and Book of Changes. The word-expressions of his commentary on Lao-tzu reveal that the key-concepts of Taoism would be substituted by the terms of Confucius's Analects and Book of Changes: ‘nothingness’ by the ‘One’ and the supreme ultimate, benevolence by compassion, the sage by the great man, etc. This understanding of Wang Pi's Commentary on Lao-tzu is in conformity with the Commentary of I Ching: the ethico-logical way of interpreting.

      • KCI등재
      • KCI등재후보
      • KCI등재

        해석(解釋)인가, 전유(專有)인가? - 20세기 한국의 『노자』 이해와 ‘동양철학’(東洋哲學) -

        김시천 ( Kim Si-cheon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9 儒學硏究 Vol.47 No.-

        오늘날 한국에서 『노자』는 유(儒)·불(佛)·도(道)라는 ‘삼교’(三敎)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20세기 초에 공자와 더불어 노자는, 철학사의 원류인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가장 중요한 두 기점으로 정립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연원하는 갖가지 텍스트와 실천들은 동아시아의 철학적, 사상적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전통’의 핵심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19세기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노자』는 명백한 ‘이단’(異端)으로서, 배척의 대상이었다는 점은 종종 잊혀지곤 한다. 이 논문은 ‘이단’으로 배척되던 『노자』가 어떻게 중요한 하나의 ‘전통’으로 변화, 긍정될 수 있었는지 살피고 있다. 유가 텍스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모호한 시적 문체로 구성된 『노자』는, ‘해석’(annotation)보다 ‘전유’(appropriation)를 통해 역사 속에서 전수되어 왔다. 특히 송대(宋代) 이래 문자의 세계를 주도했던 유가 문인(文人) 사대부(士大夫)는 ‘이유해로’(以儒解老)라는 전유의 방식으로 『노자』를 통섭 또는 포용하고자 했다. 몇몇 조선 유학자들이 남긴 『노자』 주석서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또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를 거치는 근대로의 전환 과정에서, 서구의 ‘철학’(philosophy)이 유입되고, 대학 제도가 도입되면서 과거의 물적 기반을 상실한 전통적 학문 체계는 ‘문명화’와 ‘자기 정체성 유지’라는 커다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통 담론은 ‘동양철학’이라는 범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했다. 한편 ‘서구’라는 거대 타자의 등장은 정통과 이단으로 구분하던 내적 차이를 ‘동양’ 이라는 집단 정체성으로 포용하면서, 마침내 『노자』는 ‘이단’에서 ‘전통’으로 변화, 긍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전유의 과정은 『노자』나 『장자』와 같은 소수 전통이 과거의 사회와 역사에서 씨름하고자 했던 현실과 그 문제의식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노자』를 비롯한 ‘전통’은 현실의 문제를 씨름하기보다 ‘전통’을 구성하면서 과거의 가치와 의미를 긍정하는 소극적인 역할에 머물게 되는 한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 『노자』에 대한 해석과 토론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는, 이러한 20세기 과거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The thoughts of 『Laotzu』 (老子) have been considered very significant in Korea because they are one of the core elements to consist of the ‘Three Teachings’―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Particularly, Laotzu and Confucius established two important starting points of the mainstream, all philosophers and scholars, throughout the entire philosophy history at the beginning of twentieth century. Also, the following many related texts and actions have been regarded traditional key factors because these contributed to the process of East Asian philosophical history. However, his thoughts were clarified as heresy, and Confucian scholars in Chosun were unaware of them. This research shows how importantly the thoughts of 『Laotzu』 change into positive outstanding traditions. His thoughts have been compared with Confucianism texts because of ambiguous poetical styles, and historically conveyed through not annotation but appropriation. From Song Dynasty, influential Confucian philosophers and nobility in particular integrated or embraced his thoughts in the manner of ‘an annotation of Laotzu by Confucian ideas’’(以儒解老). Some Confucian scholars’s annotation of 『Laotzu』 in Chosun is a case in point. Also, from the late nineteenth to the twentieth century, the Western philosophy appeared in the University education and this made controversial issues about civilization and self identity, which caused East Asian philosophy to spontaneously change. In fact, the influential Western philosophy embraced Eastern philosophy as the collective identity without reference to the authenticity and heresy and therefore, the latter changed into the former and has remained positive. Nonetheless, unlike the thoughts of Laotzu and Chuangtzu on the reality and its awareness, this appropriation process makes these thoughts overlooked. His thoughts and the East Asian traditional philosophy have limitations not to try to solve the reality but to passively act and affirm the values and meanings on the past in accordance with the tradition. In this way, this research emphasizes the necessity of the twenty-first century 『Laotzu』 and his thoughts and reviews the twenty century ones.

      • KCI등재

        논문 : 이이(李珥)의 『순언』(醇言)과 이단의 문제-조선조 유가 지식인의 내면 풍경에 대한 한 가지 고찰-

        김시천 ( Si Cheon Kim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2 시대와 철학 Vol.23 No.1

        이 논문은 최근 발견된, 조선의 유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지었다고 하는 노자 주석서 『순언』(醇言)을 소재로 하고 있다. 조선조는 주자 성리학을 정통으로 하고, 이를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삼아 통치하던 나라였다. 따라서 정통의 숭상과 이단의 금기는 단순히 사상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강고한 의식을 낳았다. 그러나 『순언』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추적하다보면, 조선조 유교 지식인과 관료들의 사고가 그렇게 폐쇄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논문은 강고한 정통과 이단의 도식으로서 보다는 유교적 지식인의 내면과 외면을 드러내는 하나의 분출구로서, 노자와 같은 이단의 책이 갖는 의의를 추정적으로 더듬고 있다.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배격된 이념으로서의 도교(소격서)와 달리 『노자』는 일정 정도 진리를 담고 있는 책으로서 수용되었으며, 특히 정통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노자』와 같은 책들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은, 이러한 이단의 책이 오히려 정치적 교조로서 강고해진 주자학만을 고수해야 하는 조선 조 유학자들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는, ``자유``를 향한 또 다른 욕망이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조선조 사회의 정통과 이단은 단지 배척과 금기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조선조 유학자의 이면을 들려다 볼 수 있는 통로로서, 새롭게 조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about the Confucian`s attitudes to Taoist tradition in Chosun Dynasty, particularly in relation to the text Lao-tzu of Yi Yul-gok. The Neo-Confucianism as an official ideology in Chosun had a dominantpower in most fields of state and culture. As a result, writing on the heterodoxical texts, such as Lao-tzu and Chuang-tzu, was the thing that would be attended with danger to the writer. Nevertheless Yi Yul-gok had edited and annotated on the Lao-tzu. His commentary to the Lao-tzu was the first of the five works on the Taote-ching, which is extant to the present. We have assumed that Chosun Confucianism had excluded the Taoist texts as heterodoxy, and applied social and political restraints to the writing and reading on the texts. On the contray, once we scrutinize the historical records and its backgrounds in respect to the texts, we shall made a sense of the ambivalence of Neo-Confucian scholars to heterodoxy in Chosun dynasty. Literary and religious intereststo the Taoist texts revealed the will to power or enthusiasm for liberation of the literati class. If they used the Confucian classics as a tool for government and self-cultivation in officialdom, also they hoped to liberate from rigorous morality or to escape from the heavy burden in official life.

      • KCI등재
      • KCI등재

        고대 중국에서 의(醫), 방기(方技) 그리고 한의학의 탄생

        김시천(Si-Cheon Kim) 한국의철학회 2007 의철학연구 Vol.3 No.-

        우리는 상식적으로 동아시아 의학 전통을 이야기한다. 즉 건강과 질병, 그리고 그에 대한 치료가 상존해왔을 것이라는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른바 치료체계로서의 의학의 보편성을 가정하게 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의학만큼 문화의존적인 성격을 갖는 학문도 드물다. 이 논문은 아주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우선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의학’이 고대 중국의 ‘의’(醫)와 동일한 개념이라고 가정할 수 있는가? 물론 그 해답은 회의적이다. 마치 오늘날 근대 서구 생의학의 치료 체계와 그에 대한 철학적 기반이 다른 것처럼, 고대중국에서 ‘의’가 갖는 사회적, 문화적 함축은 전혀 상이하다. 고대 한의학 문헌 분류의 토대가 되는 한서예문지 에서 ‘의’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방기’라는 독특한 문헌 범주에 속하고, 또 ‘방기’는 의경(醫經), 경방(經方), 방중(房中), 신선(神仙)이라는 하위 범주로 구성된다. 그 가운데 ‘의’는 주로 ‘의경’과 ‘경방’에 포섭되며, 방중과 신선에는 부분적으로 관련된다. 또한 「편작창공열전」에 의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의사’의 정체성은 상당히 회의적이다. 어쩌면 고대 중국에서 한의학의 형성 과정은 처음부터 의학적 정체성으로 출현했다기보다 의학적 재능을 소유한 유사(遊士)로부터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지형은 한의학의 형성과정에서 상당히 다른 사회적 요인과의 접합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즉 의학 외적인 요인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고대‘의’의 전통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This paper is intended to examine to the question: whether Traditional East-Asian Medicine was the ‘medicine’ or not. My answer is ‘No’! I believe, nevertheless, that Traditional East-Asian medicine was another ‘medicine’. It is the dilemma that Traditional East-Asian Medicine has confronted with in 20th century. The clue to the dilemma lies in the concept of medicine, which had formed its denotation out of modern western society. Turning to the formative stage of Traditional East-Asian Medicine, we realize that the identity of our tradition was different from the western medical one, in particular from the modern bio-medicine. The texts in relation to medicine was classified as an item in the bibliographies, which had compiles by the Imperial court in early China. Medical texts belonged to a sub-item of the Technique and Recipe[方 技], which had made up of four sub-items and had constituted a part of the higher six categories. And also, the social identity of medical men in early China was different from that of today’s physicians. The medical men, that indeed had made the various Techniques and Recipes into medicine as an independent sphere, was the status of lower gentry in Chinese society. Accordingly, we must scrutinize the socio-cultural backgrounds of the shaping process of Traditional East-Asian Medicine.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